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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민의 아들이 죽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아닌 밤중에 홍두께격으로 믿기질 않았다.
사고사가 아니라고 한다. 그렇다면 왜? 무엇때문에?
영민의 아들이 카이스트에 입학한 것을 알고있는 나로선 강한 의문이 먼저 들었다. 왜 이 전도유망한 청년이 죽었을까?
영민의 아들이 카이스트에 입학했을 때 영민은 주위의 친지들과 친구들로 부터 부러움을 샀다.
내가 기억하는 영민의 아들 어릴 때의 모습은 하는 하는 짓이 딱 부러졌고 모든 것에 문제의식을 가지고 따져 물을 때면 답변하기 어려웠다. 영민은 아들을 끔찍이 사랑했다. 그는 독실한 크리스찬으로 그의 부인은 이름난 대형교회의 권사라고 하였다. 그의 아내는 아들이 공부를 잘하고 남편역시 IMF의 대규모 정리해고때도 살아남아 하느님의 축복이라 믿고 교회일에 열중하였다. 좋은일이 있으면 주님의 은혜라고 생각해 특별헌금을 마다하지 않았으며, 나쁜일이 생기면 주님이 좋은것을 주기위한 시련이라 생각하였기 때문에 특별히 상심하지도 않았다.그러나 하나뿐인 아들이, 희망이다 싶이한 아들이 죽고 나서는 복받치게 통곡하였으며, 주여, 주여를 부르짖다가 나중에는 실신해 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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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례식장에는 조화가 많이 진열되었으나 이는 평소 은행원인 영민의 원만한 성격을 대변해 줄 뿐 아들과는 무관하였으며, 문상객중에 간간히 끼여있는 젊은 사람들도 은행직원인 영민의 직장사람들이었다. 조화는 분명 살아있는 국화였으나 아무런 느낌도 없는 조화처럼 보였다. 20대 젊은이의 죽음앞에 흰 국화는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 꽃이었다.
영정사진만 해도 그렇다. 누구를 향한 웃음인지 웃고 있는 젊은 얼굴은 혼이 떴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사유에 의해서 실존을 잃어버린 그림에 불과했다. 살아있는 그림이 아니라 죽은 그림이었다. 그 그림은 아무 느낌도 들지 않는 이미지였다.
이마가 넓고 눈이 큰 것이 특징인 영민은 평소의 과묵한 성격데로 슬픔릉 안으로 삭일뿐 밖으로 드러내지 않고 문상객을 맞았다.
" 어떻게 이런 일이... "
나는 크리스찬의 예법대로 영정앞에 국화꽃 한 송이를 받치고 나서 상주와의 대면에 어떤 말을 해야할지 언뜻 떠오르지 않았다.
"힘 내라!"
영민도 고개를 끄덕였다.
문상의 예를 치르고 씨글벅적한 가운데 좌중을 둘러보니 중학교 동창생들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반가운 얼굴들이었다. 나는 그 사이로 끼어 들었다. 얼굴은 아는데 이름이 기억나지 않고 가물가물한 동창생녀석이 건네주는 소주 한잔을 꼴깍하고 단숨에 비웠다. 영민과 국화꽃 송이에 파묻힌 젊은이의 영정을 보는 순간 떠 오른 생각.
사람이 산다는게 뭔가.
우주속에서 먼지하나로 태어나 제 가끔의 시간여행을 하다가 어느 날 죽어야 하고 , 그가 죽은후에도 세상은 햋빛으로 충만하고, 사람들은 제 가끔의 슬픔과 기쁨을 간직한 체 일상에 충실하다. 유한한 생명체속에서 잘사는 것은 무어며 못사는 것은 또 무엇인가. 죽음앞에 이르면 이제까지 삶의 모든것이 공평해 진다.
나와 영민 , 병태는 대명동에 있는 명덕초등학교 6학년 1반 동창생이었다.
이웃동네에 일제시대에 만든 수도산(水道山)이란 배수지가 있었고, 도심에 있는 산으로 적지 않은 산인 수도산에는 당시 철조망이 쳐져 일반인의 출입을 금했으나 같은 동네에 사는 우리는 봄에는 개구멍으로 침입해 덤불밑에 숨어있는 산딸기를 따먹었으며, 여름방학에는 매미를 잡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산지기 형님뻘 대는 큰애들한테 잡혀 대나무 목검으로 뚜드려 맞고 쫒겨 나기도 했다. 우리는 짖궂은 장난도 많이 했는데 물총 싸움을 하면 생활오수가 흐르는 수채물을 고무총으로 주입해 얼굴에 쏘면 얼굴이 시꺼멓케 변하는데도 마냥 즐거워했다. 그런가 하면 손가위 찰랑거리는 엿장수 가위 소리가 골목어귀에서 들리면 우리들은 하나같이 자기 집안으로 달려 들어가 공병 , 고무신, 헌책등을 들고나와 엿장수가 손가위로 뜯어주는 엿 가락과 바꾸어 먹으며 서로 마주보고 히히히 웃고는 즐거워 했다.
사는 형편은 고만고만하게 못사는 집안사정으로 당시 신설된 사립 중학교의 특별장학생으로 S중학교에 나란히 입교했고, 한 동네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같이 다녔으니 인연치고는 무시못할 인연으로 그들은 자칭 타칭으로 삼총사라 했다.
중학교 동창생 몇몇이 모여있는 자리에
' 병태가 나타났다.'
문상을 마치고 나온 병태는 우리가 모여있는 좌중에 들어와
"우째 이런일이 일어 났을꼬?" 하면서 소주병을 들고 자작한다. 성미급하게 남이 따라 주기도 전에 소줏병에 손이 먼저 간 것이다. 병태는 초등학교 6학년 때 영민과 나와 같은반에서 1등을 했으며 S중학교에서도 3년간 1등을 놓친적이 없는 수재였다. 고등학교로 진학하면서는 명문k고등학교에 들어갔다. 영민이 D상고에 진학하고, 나는 Y고등학교에 들어갔다. 결과적으로 중학교때의 성적순인 레벨의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죽마고우인 우리들은 초등학교와 중학교에서 같이 뛰어놀았지만 고교진학하면서 서로의 운명이 갈리게 되었다.
병태는 지역명문대인 k대 법학과에 들아가 사법고시를 준비했으며, 영민은 고교졸업과 동시 S은행에 입사하였고 ,나는 y대 졸업후 시청공무원이 되었다. 사회진출이 가장 빨랐던 영민은 은행원의 안정적인 수입과 그의 절약정신으로 가장 먼저 결혼했으며 또 가장 먼저 집을 장만했었다. 그가 처음 산 24평 아파트 집들이 할 때 병태와 나는 부러운 눈으로 쳐다 보았으며, 괜찮은 미모의 아내와 똘똘한 4살 박이의 사내아이를 두고 있었다. 그 때 우리가 사들고 간 선물은 세제와 두루말이 휴지 한 박스였었다. 우리는 즐거운 마음으로 영민의 입택을 축하했으며 차린 음식을 앞에두고 기분좋게 취했었다.
그런 영민의 아들이 죽었다.
가족이 모두 집을 비운 사이에 화장실에서 목을 매었다. 영민의 아들은 카이스트에 입학했었고, 주위에선 아들농사를 잘 지었다고 부러움워 했다. 교회 교우들은 한결같이 주님의 은혜를 입었다고 찬사를 늘어 놓았다. 영민은 아들이 박사과정을 거쳐 대학교수가 되길 바랐다.그러나 총명하던 아들이 카이스트에 입학하고난 1년후 쯤 말이 줄었다. 원래 내성적인 성격이 아니었으므로 영민은 아들의 변화가 신경쓰였으나 청춘의 고민 쯤으로 여기고 무게를 두지 않았다.
진로모색에 대한 고민은 그 나이 때면 누구나 할 수있는 고민거리이기도 하다. 2학년을 마치자 아들이 갑자기
K대 법대로 편입학 하겠다는 말을 했다. 뜻 밖의 말에 영민이 이유를 물었으나 아들은 사시를 보고 싶다고 했고 평소 아들의 의견을 존중해 오던 영민도 내키진 않았으나 허락하고 말았다. 법대로 편입학 한지 2년 후에 졸업했고, 재학중에는물론 졸업후에도 고시반에 남아 사시준비를 해왔다. 금년 10월에 5번째 마지막 사시를 봤으나 1,000명이 넘는 사시 합격자의 명단에 아들의 이름은 없었다.
항상 우등생이었던 영민의 아들이 카이스트에 들어가자 성적이 나오지 않았다. 열심히 하는데 성적은 늘 중하위에서 맴돌았다. 자존심이 상했다. 항상 우등생이었던 아들은 성적이 나오지 않자 내심의 갈등으로 이어졌다.
" 내가 부족한 인간인가?"
수재들이 모인 집단에서 성적의 하향은 보통사람의 의식구조론 당연한 것이나, 늘 우등생으로 살아온 아들의 사고엔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아버지가 원하는 박사과정 수료후 대학교수가 되는 일에도 중하위의 실력으로는 영 자신이 없어졌다. 매사에 자신감을 잃어 버렸다. 1등만을 하던 학생의 성적이 매번 중하위로 떨어지자 공부에 흥미를 잃은것도 같았다.무언가 변화가 필요했다. 대안으로 떠 오른 것이 사시였다. 적성을 바꾸어 사시에 한 번 도전해 보고 싶었다.
K대 법학과에 편입해 공부를 시작해 보니 그 사시도 그리 녹록지 않았다. 법학의 방대함에 놀랐고 재미도 없는 육법전서를 이해하고 외우자니 그 또한 정신력과 담대한 체력을 요구했다. 매일같이 되풀이 되는 일상이란 잠에서 깨어나 일어나면 밥먹는 시간을 빼놓으면 휴식과 공부의 연속이었다. 그러다 보니 하루 24시간 중에서 공부하는 시간이 16시간을 넘어갔다.
법학도 법이론을 배울때에는 나름대로 재미있고 다수설,소수설, 절충설등에서 자신의 입장은 맞춰보기도 하고 정의의 구현과 공익의 우선이라는 법의 정신에 매료되기도 했으나, 상법과 절차법인 민사소송법과 형사소송법에 이르면 이론으로서의 재미는 없고 그냥 죽어라고 외우는 수 밖에 없어 지치기도 하였다.한 두번의 실패는 통과의례로 치며 출제경향과 답안작성요령, 시간안배등으로 연습용이라 치지만 3번 떨어지고 나자 회의가 찾아왔다. 1차에서도 안된 것이 충격이었다. 최선을 다 했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도 낙방의 고배를 마셨다. 사시합격이 아득하게만 여겨졌다. 영 자신이 없어졌다. 우울한 날이 계속되었다. 아들을 더욱 초조하게 한 것은 로.스쿨로 간다는 교과부의 발표가 나온 것이다. 앞으로의 사시는 로. 스쿨 졸업자에 한해서만 사시가 가능토록 법개정이 되었고, 로ㅡ스쿨의 허가발표가 나왔으며 이에 제외된 대학들이 반발했다. 이렇게 되면 사시는 로. 스쿨 졸업자에게만 시험기회가 주어질뿐이므로 자신과 같은 사람은 응시자격에 제한을 받게된다. 아들은 자신의 미래가 점점 더 미궁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으로 느꼈다.
아버지가 원하던 박사과정후 대학교수의 꿈도 사시합격으로 판 검사가 되겠다는 아들의 꿈도 모두 어긋나게 된다는데 심각한 고민이 왔다. 초조해지기 시작했고 무엔가 쫒기는 신세가 되었다. 꿈을 꾸면 누구에겐가 쫒겨 절벽쪽으로 달아나 뛰어내리지 않을수 없어 몸을 날리면 한없이 추락하는 것이었다. 꿈이 깨면 삐질삐질 식은 땀이 흘렸다. 자존심이 강했던 아들은 한 번 위축되기 시작하자 걷잡을 수없이 자폐되었고 내면의 갈등을 존재감의 상실로 이어졌다.
명예롭게 살 것인가, 산화할 것인가. 자신의 속내를 털어 놓는다는 것도 아들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아 혼자하는 번민은 나락이었다. 결국, 내면의 갈등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하고
가족이 집을 비운 사이 화장실에서 목을 멘 것이다. 부부는 교회에서 하는 기도원에서의 단식에 참여하였고 여동생은 학교 동아리에서 간 MT에 갔다가 돌아와 보니 이미 상황은 끝난 상태였다.
시신의 최초 발견자는 영민의 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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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에 우째 이런 일이 있노, 어이? 호로놈의 자슥! 애비보다 먼저 간 놈은 불효막심한 호로놈인거라!"
소주잔을 단숨에 꼴깍 마신 병태는 마주앉은 나에게 잔을 들이밀었다
병태는 2호실에 앉아 있는 문상객이 다 들릴 정도로 목소리를 높혔다. 좌중의 시선이 이 쪽으로 쏠렸다.
나는 병태에게 목소리를 낮추라고 주문했다. 그러나 병태의 목소리는 더 높이 울려 퍼졌다.
" 그러고, 식구들은 뭐했단 말이고, 사람이 그정도로 죽을 것 같으면 사전에 무슨 신호가 있었을 텐데 부모형제가 그걸 눈치못채었단 말이가! 아이구야, 그 깐놈의 예수에 미쳐 갔고는 지 아들 죽는줄도 모르고 기도는 무슨기도, 내 말이 틀렸나? "
나는 놀라 내 오른손 검지를 입에 갔다되면서 "쉬" 조용히 해, 하면서 속삭였다. 병태의 목소리는 커 문상객이 다 들릴 정도였다. 교회 손님이 많은 문상객중에서 여기저기서 시선이 따갑게 느껴졌다.
좌중에서 " 저 사람 뭐야?"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병태대신으로 고개를 까닥숙이고 미안하다는 표시를 했다.
나는 병태에게 타일렀다.
"병태야, 너 말조심해라, 여기서 그런 말하면 안되는기라, "
병태는 히죽히 웃으며
"와, 내말이 지나쳤나" 한다.
난 병태가 따라 준 소줏잔을 비우고 다시 건네주며 그렇게 말하는건 문상객의 예의가 아니라고 말해 주었다. 병태는 가끔식 어른이면서 아이같은 인지부조화의상태가 나타난다. 난 병태의 살아온 내력을 아니까 병태를 이해한다.
병태의 살아온 내력은 순탄하지 않았다. 초등학교, 중학교를 거치면서 일등을 놓치지않은 우등생이었고, 남들이 다 가고 싶어하는 명문 K고등학교에 들어간 수재였었다. 그 당시 K고교는 서울대입학생 기준으로 전국에서 3~4위를 하는 지방명문고등학교였다. 고교때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대학진학은 지역 명문인 국립K대 법학과에 입학했다. 어느 누구도 병태의 전도는 유망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문제는 사시였었다. 사시에 계속 떨어지고 나서는 병태의 모습도 웬지 모르게 변해갔다.
병태의 아버지는 지금은 공인중개사지만 그 당시엔 자격증도 없이 문만 열면 되는 복덕방을 했었다.
제1회 공인 중개사시험이 임박했을 때 만난 병태는 그 시험을 준비한다고 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의아해 했다. 사법시험을 준비하는 놈이 공인중개사시험은 무엇이고, 왜 그걸 념두에 두었는지가 궁금했다.
그러나 병태는 자기 아버지가 그것으로 밥먹고 살았으니까 자격증은 확보해 놓아야 한다고 하였다..
그렇지만 난 수재인 병태의 위치가 추락할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고 영 시덥지가 않았다.
몇년이 흘렀는지 모른다.
나와 우리 동기생들이 거의 다 결혼하고 아이들을 한 둘 낳을 때가지 병태는 독신이었다. 각자가 살 길이 바빠 서로간의 소식이 뜸한 상태에서 세월은 흘러 우리 나이가 45살을 넘었을 때에도 병태는 독신이었고, 들리는 소문은 좋지않는 것 뿐이었다. 일년에 한 두번 모이는 동창회에 나가면 병태는 늘 문제를 일으켰다. 술을 좋아하는 것을 나쁘다고 말하진 못하겠으나 , 취기가 돌면 병태는 주위사람과 시비가 붙는다. 내가 이런 말하기도 민망할 정도이지만 그 나이에 혼자사는 몸으로 정치는 무엇이건데 대선후보를 놓고 갑논을박을 하는 것이다.
평화통일을 위해서는 우리가 형님으로서 북한에 양보할 것은 과감하게 양보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주변의 친구들은 마뜩지 않게 생각하고 되도록 병태를 기피했지만 병태는 아랑곳 하지않고 자기주장을 펴고 상대방의 의향을 물으며 일치하지 않으면 시비가 붙는 것이다. 병태의 나락을 지켜 봐온 나 같은 사람은 이해하고 측은지심을 갖지만 그렇지 못한 친구들은 이제 사회적으로 제 가끔의 분야에서 제 나름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데 옛날생각으로 자기를 내세우는 병태에게 친구들은 호의적일 수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모이면 말다툼이 잦았고 우리 동창들은 병태를 이해하는 쪽과 받아들이지 못하는 쪽으로 갈렸다. 그런 와중에서도 뭐하느냐고 물으면 공부한다고 했다.
공부라! 옛날 사람들이 말하기를 공부도 때가 있다고 했다. 정부에서는 평생교육이란 말도 하지만 그것도 먹고 살 일이 해결되었을 때 자기계발을 위한 평생교육개념이지 병태처럼 사회에 첫발도 들여놓지 못한 사람에게 적용하는 말이 아니다. 사람의 두뇌는 20대까지 가장 왕성한 에너지를 분출시키면서 30를 넘고 40대에 가면 샤프함과 기억력도 떨어지는게 일반적이다. 40대의 머리는 20대의 머리와는 경쟁력에서 떨어진다. 똑 같은 시간을 공부한다해도 효율에서는 두배 이상의 차이가 날 것이다. 그것도 술먹고 담배피우는 머리라면 맑아야 할 뇌에 무쇠 녹슬듯 녹이슬어 경쟁력에서 뒤질수 밖에 없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공부에 미련을 못버린 병태가 이해하기 어려웠다.
난 병태의 아버지 초상을 치루던 날 병태와 함께 있었다. 씩씩하던 병태도 그 날은 풀이 죽어 있었다. 사회진출을 못한 탓인지 문상객도 별로없이 허전하게 자리를 지켰다. 시집간 여동생의 남편, 그러니까 매부의 손님이 좀 있었을 뿐이고 우리 동창생도 몇명 있었을 뿐 바로 옆방 문상객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썰렁했다.병태는 검은 양복에 삼베두건을 쓰고 있었다. 문상객이 더 이상 나타나지 않을 자정을 넘어 난 병태와 마주보고 앉아 대화를 나누었다.
" 병태야, 너 어디든 취직하는게 어떻노? 사람이 실패도 인정해야 되는기라, 사시는 그만 하는게 어떻노? 너의 모습은 너무 초라해, 사람이 제 구실을 할려면 잡이 있어야 되는기라. 직업에 귀천이 어디 있노? 개처럼 벌어서 정승같이 쓰라는 옛말도 있잖아! 직업을 가져 !"
난 병태가 안스러워 충고랍시고 평소 하고싶은 말을 하였다.
" 그래, 니 말도 맞다. 그래야제...후,"
하면서 병태는 긴 한 숨을 쉬면서 먼 허공을 쳐다 보았다.
그후 들리는 소식에 의하면 병태는 점점 더 망가져만 갔다. 아버지가 물려준 재산이래야 기껏 크지않은 양옥 한 채 였으나 세입자의 전세금을 빼고 나면 그거도 얼마되지 않은 재산이었다. 그런데 병태는 작년 주가지수 2,000포인트가 넘었을 때 뒤늦게 뛰어든 주식시장에서 그가 산 주식이 감자가 되더니 퇴출이 되어 큰 손실을 입어 물려받은 집을 팔수 밖에 없었고 그 집을 팔고 나와 5평 단간방에 세들어 산다고 하였다.
갈데 까지 가고 만 것이다. 그런 병태가 어떻게 전해 들렀는지 영민의 아들 장례식에 찾아왔다.
어찌되었던 난 옛날 삼총사의 한 사람이었던 병태를 보니 반가웠다.문상객이 끊어진 자정무렵에 병태와 나는 인근 꼬치구이집에서 회포를 풀고는 가까운 모텔로 찾아 들었다. 내가 사준 술에 취한 병태는 손발만 간단히 씻고 이내 잠에 빠져 들었다. 병태의 얼굴은 예전같지 않고 많이 수척해 보였다. 중학교 시절 쉬는 시간에 교실 복도에서 병태와 나는 3분동안 손바닥 복싱을 한 적이 있었다.
그 때 내가 느낀것은 병태의 단단한 몸과 그의 손아귀 힘이 통뼈맨치로 우악스럽다는 것이었다. 3분 동안의 손바닥 복싱이 그렇게 힘이 들었고 끝날때는 힘이 빠져 식식거렸다. 그랬던 병태가 잠이들어 훌쭉한 그의 뺨을 쳐다보니 세월의 무상함과 삶의 허무함이 찾아왔다. 과거를 회상해 보니 난 그래도 안정된 삶이었고, 누릴만치 누리고 살았다. 나하고는 비교할 수 없을만치 우등생인 병태는 누구나 다 하는 결혼도 못하고 혼자사는 그의 처지가 안스럽기 그지 없었다. 학교 장학생인 그의 위치가 사회생활에서 열등생으로 바뀌어 있는 이 사실이 무엇때문인지 나는 안다.
그것은 그의 자존이었고 그는 그것을 지킬려고 수 없이 박치기하였으나 번번히 어긋낫다.
고시폐인! 학교 우등생이 사회열등생으로 밖에 기능하지 못했고 드디어는 폐인!
친구들은 그가 폐인이 되었다고도 했다. 산다는게 참 아득하다고 느껴졌다.
발인하는 날 병태와 나는 아침일찍 장례식장으로 갔다.
운구하는 젊은이들 뒤에서 우리는 무표정하게 절차를 지켜 보았다. 영구차가 들어오고 차 뒤꽁무니로 관이 운구되었으며 그 둘레로 검은 색의 옷을 입은 사람들이 반원을 그리며 안타까운 마음으로 지켜 보았다.
그들 무리의 중심에 상주인 영민이 차가운 얼굴로 굳게 입을 다물고 있었으며 그의 아내는 손수건으로 입을 틀어막고 있었다. 영민의 딸인 죽은이의 여동생은 키는 작으나 까만 눈동자를 반짝이며 움직였다. 그녀의 얼굴에 슬픔은 각인되지 않았다. 슬픔도 부모사이와 형제사이는 그만큼의 깊이로 차이나는 걸까. 수직으로 나눈피와 수평으로 나눈 피의 농도는 서로 다른 것 같았다. 교회에서온 사람들이 별도의 버스에 타고 창 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시내를 빠져나온 영구차는 성남 장례공원으로 향했다. 산업도로에는 각종의 화물차와 건설차량이 마주보며 달려오고 있었다. 그들은 이승을 떠나는 사람의 조용함과는 반대로 삶의 활기찬 부산함으로 비쳐졌다. 매일 같은 일상이라도 살아있음은 늘 움직임으로 가득차 있다.
운구차는 간선도로에서 분리되어 남한산의 계곡 안쪽으로 파고 들었다. 현대식으로 지어진 하얀 건물은 그것이 장례공원임을 숨기기라도 할 것처럼 깨끗하고 정결했다. 장례공원의 북서 쪽으로 한강물이 조금 비쳐졌다.주변에는 늦가을의 정취가 물씬 풍겨왔다. 단풍이 소리없이 지고 있는 중으로 사방은 노오랗다. 한 여름을 기운차게 살다간 이파리들이 바람에 날려 땅으로 떨어져 쌓이고 있었다. 무릇 생명은 이렇듯 유한한 것인가 보다.
이 세상에 온 모든 생명은 제 가끔의 이치로 , 부여받은 운명으로 정해진 시간을 살다가 사라진다.
' 없음'에서 시작하여 '있슴'으로 꽃피다가 '없슴' 으로 되돌아 가는 것이다. 젊어 죽은자와 천수를 누린 자와의 차이도 우주시간으로 얼마큼의 차이가 있을 것일까.
삶이란 무언가 의미있는 것을 찾기위한 도정이라고 들 한다. 궁극엔 그것에 도달할 것이라고도.
그런데 의미있다는 건 또 무어지? 수학공식이나 영어단어를 하나 더 아는 것은 의미있을 까? 수족이 마비되어 남의 도움없이는 전혀 움직이지 못하며 살아 숨쉬는 것은 의미있는 걸까? 무엇이 유의미하고 무엇이 무의미한 것인가?
소각로는 장례공원 본관건물의 2층에 있었다. 2층으로 올라가니 교실복도처럼 짜인 복도가 나왔고 건물 안쪽으로 모텔의 방처럼 번호가 붙은 룸이 연이어져 있었다. 그 룸에는 불과 2사람이 앉을만한 공간 밖에 없었고, 그 공간에서 건물 안쪽으로 제사때 쓰는 지방모양의 직사각형 유리창이 붙어 있었다 그 창을 통해서 상주가 사자의 관이 소각로로 들어가는 마지막 순간을 볼수있게 해놓았다. 길게 이어진 복도를 꺾어 좌측으로 돌아가니 화장이 끝난 유골을 찾는 창구가 나왔다. 창구는 유리로 안과 밖이 구분되어 있었으나 안에 있는 사람들의 동작이 다 보였다.소각로에 들어간지 정확히 2시간후, 에레베이터 문이 열리듯이 문이 열리자 관이 얻혀졌던 와대가 그대로 나왔다.
아! 사자의 시신이 누었던 자리에 있는것은 점점이 흩어진 뼈,
마른 삭정이 같이 불규칙하게 흩어져 있는 너무도 작은 뼈. 누르면 금방이라도 부서져 내릴 것 같은 푸석푸석한 뼈 몇 점 만이 이 세계에 살았던 사람의 마지막 모습으로 나타났다. 삶의 무게는 얼마큼 되는가? 무거운 육신은 가벼운 몇점의 뼈조각으로 바뀌었다. 사람의 몸 70%의 수분이 1000도의 고온에서 기화해 버리고 나머지 30%의 고체가 산화되어 남은 마지막 흔적으로 눈앞에 현시되었다. 작업인부는 무표정하게 빗자루로 관이 올라있던 와대에 남아있는 뼈를 쓸어 담았다. 그러고는 그 옆에 있는 분쇄기에 넣고 돌렸다. "드르륵" 채 10초도 안 걸려 뼈는 하얀 가루가 되어 밑에 받친 그릇으로 떨어졌다. 작업인부가 한약방에서 쓰는 약봉지처럼 하얀종이위에 뼛가루를 쏳아 놓았다.
그것은 정확히 두 줌밖에 안되었다.
이게 사자의 유골이다. 그것을 더 작게 원소기호로 분석하면 인과 철, 칼슘의 분말이다.
오호! 불쌍한 존재! 어느 먼 우주에서 한 점 먼지로 왔다가 사라지는 존재,
흙속에서 단백질과 핵산이 만들어낸 유기체속에서 생명이 태동한지 40억년이 지난 지금, 그 생명의 연약한 실뿌리중 하나가 생명이 왔던 먼 우주속으로 사라지고 있다. 나는 내가 몇십년 전에 태어난 한 인간이 아니라 광대한 시간여행을 해온 유기체라는 것을 홀연히 생각하고 있다.
유골을 받아든 영민은 본관 건물밖으로 나와 산골장(散骨場)으로 향했다. 산골장은 건물 뒤쪽으로 작지않는 높이의 계단을 올라가야 했다 산골장이라고 표시해 둔 지역은 솔 밭사이로 관목과 잡초가 우거진 초지였었다. 영민은 작은 함에 담겨진 유골을 손에 부어 잡초위에 흩뿌렸다. 잡초의 푸른 잎사귀에 하얀가루가 씌어졌다. 이제 비가 오기만 하면 , 이 미세한 흔적도 빗물에 씻겨 완벽하게 이 세상에서 사라질 것이다.
" 잘 가거라! "
나즈막하게 말하는 영민의 눈꼬리에 눈물이 고였다. 병태와 나는 장례절차의 이 모든 과정을 지켜 보았다. 어린 시절 삼총사로 놀던 인연이 50의 나이에도 삼총사로 남아 아들 장례식의 목격자 아니 증인이 된 것이다.
그로 부터 6개월 후인 금년 4월, 나는 병태로 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편지를 받아보는 것이 몇 십년 만이나 되었을까. 떨리는 손으로 편지봉투를 뜯고 편지지를 헤쳤다.
창수야! 보아라.
어느 누구나 생각하듯이 사람이 산다는 것이 힘이 드는구나.
박박깍은 머리로 학교 다닐 때가 그리웁구나. 그 땐 꿈도 컸었지. 난 내가 못할 게 없다는 자신감으로 충만했었다. 그런데 살다보니 의외로 실패가 많았고 그럴 때면 난 오기로 버티었다.
언젠가는 나에게 때가 오고 기회가 오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난 어느 누구도 믿지 않고 오로지 나 자신만을 믿고 행동했으며 , 내가 살고있는 주변과 타협하지 않았다.
첫 발을 잘못 디딘건지, 첫 단추를 잘못 께인건지 세상은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는 가지 않았다.
사시가 나에게 영광스러움을 가져다 줄 것으로 믿고 난 그 끈을 놓치지 않었다. 일차 시험에 세 번 된것 말고는 끝내 나에게 기회가 오지 않더구나. 지금 생각하면 그것이 뭔지. 망상에 사로잡혀 인생이 뭔지,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른 삶인지, 인생의 낙은 어디 있는지조차 생각 못해보고 살았다.
이제와서 늙고 병든 몸으로 아무도 없는 세상에 살아 남아야 하는것이 너무 싫어,
폐암 3기라는 구나. 난 나의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난 봄에, 꽃피고 새가 우는 따뜻한 들녁에서 논두룩에 잔듸 태우려고 농부들이 불을 놓을 때, 하얀 연기가 하늘로 곱게 올라갈 때 그같이 하늘로 사라지고 싶구나.
내가 죽으면 이승에 남는것은 내가 입던 옷이며 내가 끓어먹던 자잘한 가재도구와 전세보증금 7백만원이 남는다. 이 돈으로 내 장례를 치르고 남은것이 있으면 양로원에 기증해 주기 바란다. 난 네가 어릴때 삼총사의 추억으로 나의 마지막 부탁은 성의껏 들어 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빈 손으로 이 세상에 온 나의 흔적이 하나도 남지않게 나의 시신을 태워 산골해 주기 바라며 내가 입던 옷 또한 마찬가지 이다.
수야! 이 편지가 네게 도착할 그 날에 맞추어 난 건너다 보이는 아파트 15층에서 몸을 던질 것이며, 나에게 찾아오는 죽음에 앞서 내가 먼저 나의 죽음을 선택할 것이다.
나는 패배했으나 후회하지 않으며 이건 나에게 주어진 운명이라고 생각하니 너무 슬퍼 하지 말어라.
부디 잘 살아라! 창수야!
나는 황급히 휴대폰의 전화번호부에서 병태를 찾아 통화버튼을 눌렀다. 1분 넘어 초조한 시간이 흘렀으나 수신자가 받지 않는다는 메시지가 나왔다. 순간머리에 소름이 끼쳤다. 이 녀석이!
나의 예감은 병태가 행동으로 옮기는 장면이 되어 튀어 나왔다.
나는 KTX에 몸을 실었다.
내가 강남구청 사회복지과장이라는 직함이 묘한 기분으로 떠 올랐다. 병태도 그걸 감안했을까? 창 밖으로는 겨울에서 깨어난 들판이 황량하나 산은 연두빛으로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추위는 다 지나갔다.
나는 내딸이 나와 같은 공무원이라는 사실이 안도감으로 닦아왔다. 내 아들도 졸업후 마땅한데를 못찾아 빈둥대다가 어느 작은 유통회사에 취직하여 제 나름대로 열심히 근무하고 있는것도 위안이었다. 친구의 불행한 삶을 나와 비교하여 안도하는 내가 너무 이기적이고 비 인간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주변에서 사시에 실패한 두 사람이 목숨을 끊었다. 사시가 무언가? 일제시대부터 시작해 해방후 30년이 지난 1980년대 까지 사시는 입신출세의 보증수표이기도 했고 선망의 대상이기도 했다. 문명이 발전하고 경제가 발달해 수많은 직업군이 생긴 이 즈음엔 예전같진 않다. 경제위기로 수 많은 청년 실업자가 쏟아져 나오고 있다.
사람은 살아있는 한 움직여야 하고 그 움직임이 직업이라는 형태로 나타나지만 그 귀천은 없는 것인데, 사람들이 따져 묻는다. 나는 없다고 부정하면서도 상대방을 평가하는 기준이 된 직업으로해서 그 사람의 운명이 결정되기도 하고 삶과 죽음의 형태까지 바뀌게 한다는 것이 슬픈 교향곡처럼 아득하다.
나는 병태의 추락한 시신을 확인했다.
병원 영안실에서 확인한 병태의 눈감은 얼굴은 편안해 보였다.
이승에서의 고단함이 끝난 상태에서 병태는 적막한 공간으로 갔다.
나는 집행관이 되어 병태의 편지에 나타 난 유언대로 집행했다.
--- 끝 ---
첫댓글 이 세상에 대한 딜레마가 아주 잘 느껴지는 글이였습니다. 건필하세요^^
너무 찡하네요.. 님이 쓴글들 다 읽어봤어요.. 깊이가 느껴져요 다음글도 기대해볼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