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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제 23회 <열린시학>신인작품상 당선작 ㅡ 신성철, 박영인, 김영란
ㅡ 심사위원 : 나종영, 정일근, 이지엽
아버지와 쌀 (외 3편)
신성철
쌀값이 내렸다
이십 킬로 한포에 사만 원
울 아버진 논바닥을 저울 위에 올려놓지 않으셨다
팥죽 같은 땀방울을 흘리면서도
십 킬로 이십 킬로 무게를 재지도 않으셨다
황소가 걸어가던 황톳길 위로
아버지도 소가 되어 걸어 가셨다
무게가 빠져 버린 추곡수매 값으로
앙상한 뼈마디 울음 사셨다
아버진 눈금 위에 올라 앉아
이마에 커다란 상표를 달고
하필이면 내 집에 오셨다
안락사 아시지요 아버지
잠간만 기다리세요 제가 해드릴 게요
주사바늘이 없어요
압력꼭지를 돌리면 숨이 막히시겠지요
칙칙 칙칙 호흡이 가빠오네요
큰 숨 한번 내 쉬고는
유언 대신 남기신 쌀밥 한 솥
영정도 없는 영안실에서 나는
꾸역꾸역
밥 한 그릇을 비웠다
자궁 속을 엿보다
세상으로 오는 길에 하루를 묵었다.
원룸이다.
그때부터 그가 주인이다.
태초의 존재를 알았기에
작은 말씀이 되어 수면 위를 운행하다가
전화의 속도계를 고속으로 조정 한다.
틈틈이 그림을 그린다.
생을 두고 신고 갈 한 켤레의 신발을 그리다가
방긋 웃으며 바퀴를 굴리다가
날개도 달아보았다.
창 너머 무엇을 엿보았는지
흠칫 진저리 치다가 발을 버둥거린다.
그는 다시 천천히 속도계를 만진다.
자궁 속에도 계절은 있다.
가을이다.
낡은 벽지는 낙엽처럼 무너지고
실핏줄 물줄기도 수량이 눈에 뜨이게 줄었다.
계약기간이 끝났다.
가져갈 짐은 없다.
주먹 속에 꼭 쥔 지도 한 장 밖에
바람이 부는 순간
현관 앞 안전선 하나가 벌떡 일어나고
불씨 하나가 타박타박 걸어 나온다.
전신주처럼
우리 동네에서 제일 키가 큰 사람
골목 어귀에 마음씨 좋은 이웃집 아저씨 되어 섰다가
밀린 방세 걱정에 물 먹은 종이짝처럼 섰는 김씨 등받이 되어 주고
망할 놈의 세상 될 대로 되라지
가래침 탁 뱉으며 쏟아내는 뜨끈한 윤씨 오줌발도 받아 주다가
거꾸로 돌아가는 세상 바로 서기 연습만 하는 사람
겨울엔 손이 시려워 윙윙 울기도 하고
여름엔 태풍에 손가락이 뚝뚝 짤리는 아픔을 겪으면서도
천둥 벼락에도 겁 없이 우뚝 서
긴 팔 쭉쭉 뻗어 어둠을 지워 가다가
쪽방 귀퉁이 앉은뱅이책상 위에 놓인 책속으로 들어가
손가락 대면 솨르르 쏟아질 것 같은 글자들에게 생기를 넣어주면
꼬물고물 벌레처럼 기어가 왕관을 쓰고 싶어하는 소년의 머릿속으로 모인다
큰 강물 소용돌이 속에서 전기를 끌어 올려
지하철이나 KTX를 달리게 하는 것도 재미있지만
두꺼비집을 지나며
손가락 마디마디에 빨갛게 꽃을 피우고
백열등 형광등의 탐스런 열매로 열리다가
모터 속에 들어가 아이들처럼 하얗게 웃으며
뺑뺑이를 돌아보는 것도 괜찮겠지
아직 비어 있는 가슴 한쪽 자투리땅을
느그 외삼촌이여 하며
고향에서 쫓겨난 까치들에게 선뜻 집터로 내어주는 사람
골목 어귀 마음씨 좋은 그 사람에게 부탁하면
앞 못 보는 우리 아기 두 눈에도 환하게 불이 켜질까?
주왕산 여자
그동안 잘 있었드나
별일 없었니더
니 밥 먹었드나
안주 안먹었니더
니 나 안보고싶었드나
그런건 머할러 묻니껴
그녀의 말투 속에는
주왕산 골짜기 돌멩이가 툭툭 채인다
도라지, 고사리, 곰치, 산두릅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나물이지만
그녀가 차린 밥상 위에는
주왕상 봉우리가 우뚝우뚝 서 있다
쟁반에 받혀온 찻잔 속에는
쪼로로 떨어지는 달기 약수가 고인다
서울로 시집온 지 십 수 년이 지났건만
마주 앉아 웃고 있는 눈동자 속엔
아직도 보리암 하늘이 한 조각 담겼다
그녀를 안고 있으면
연화봉이 가득 내 가슴에 들어온다
언제나 엉성한 내 일상 속에 그녀는
와 그까니껴? 하며
굴 하나 파 놓고 그 속에 들어가 왕처럼 나를 다스린다.
ㅡ 《열린시학》2010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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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철 : 서울출생.대구맹아학교(광명학교)졸업. 영남신학 중퇴. 독학사(법학과) 공부중. 《열린시학》2010년 봄호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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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복사기 (외 3편)
박영인
빛을 받고
오늘이 한 장 빠져 나와요
반지하
만취해 널브러진 사내의 숨소리를 들춰보면
거친 욕설이 저장되고, 복사돼요
종이처럼 말라버린 여자가
복사기 앞에 서서
쏟아지는 그것들을 다 받아내요
용지 걸림에 불이 들어와요
순백의 복사 용지에 끓어 넘친 찌개국물이 묻어요
날 선 종이가 여자의 발바닥을 찔러요
비명 소리는 좁은 창을 넘어가요
여자가 A4용지를 구겨 던져요
구겨진 종이는 구석에 박혀 흐느껴요
종이 걸림이 너무 잦아요
더는 안되겠어요
콘센트에서 코드를 뽑아요
이미 사내에게 길들여진 여자가
사내를 흔들어 깨워 봐요
남자의 몸이 캄캄해요
다시 코드를 넣어보지만
빨간 불, 삑삑거리고
퉁퉁 불어 어디 갖다 버릴 것도
없는 슬픔, 여자는 두려워요
토너를 갈아보지만 윤곽선이
자꾸 지워져요
멍
퇴근길 값이 싸다는 이유로
산지 직송의 사과를 샀다
때깔이 좋은 것들과 흠집이 난 것들이 반반이었다
식구들 한 자리에 둘러앉아 충주를 베어먹는데
내게는 이상하게도 갈색 멍이 든 것에 자꾸만 손이 갔다
췌장암을 앓다 돌아가신 어머니
좀체 뒤를 보여주려 하지 않았다
가쁜 쑴 내쉴 때 비로소 내게 들켰던 어머니의 멍든 몸
겉과는 다르게 안으로 썩어드는
바람의 무게를 아마도 몰랐을 것이다
햇살에 데었거나 혹은
빗물이 고인 자리, 더러 生은
모난 한 부분에서 빛나기 마련인 법
햇살 끌어안고도 이끼 낀 시골집 뒤란처럼
生의 뒤에 몰려있을 통점이
두려운 저녁이다
숟가락
다섯 살 아들녀석 밥 먹지 않겠다며
숟가락을 집어 던진다
여느 때보다 심하게 아이를 혼냈다
나는 객숟가락이었던 적 있다
열네 살, 사고로 부모님을 여의고 큰아버지댁 군식구가 되었다
큰아버진 숟가락 하나만 더 놓으면 된다 하셨고
큰어머닌 숟가락 하나를 더 놓아야 된다 하셨다
양푼 가득 밥을 비비면 밥과 나물이 잘도 섞였다
네 명의 사촌이 부딪는 숟가락은 리듬을 타며 정겨웠는데
내 숟가락만은 엇박으로 치달아 박자를 놓치곤 했다
그렇게 어눌한 숟가락질이 부산해도, 너무 느려도
눈치가 보였다
숟가락 위에 밥이 많이 올려져도, 너무 작게 올려져도
눈치가 보였다
살면서 가장 힘들었던 건 숟가락질이었다
대기발령을 받은 남편
며칠째 말이 없다
숟가락은 쉬 부러지지 않는다
나는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숟가락을 주워 들었다
어수선한 평화
현관에 신발들 어지럽게 놓여있다
쌍둥이 녀석들 신발코 문 쪽을 향해있다
남편의 신발코는 거실을 향해 바짝 붙어 섰다
신발의 반이 덕지덕지 흙을 입고 있다
어머님 신발 한 쪽은 식구들 신발에 밀려
벽 쪽에 뒤집어 진 채 누워있다
물끄러미 신발들을 바라보다가
괜스레 코끝이 찡해왔다
어수선한 신발들을 정리하려다
그만두기로 했다
이 조그만 난장이 내게는 까닭 없이
정에 겨워 보였던 것이다
ㅡ 《열린시학》2010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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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인 : 1968년 서울출생. 아주대학교 부설 평생교육원 문예창작교실 수료.한신대학교 부설 평생교육원 문예창작교실 재학 중. 《열린시학》2010년 봄호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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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참나무를 두드리는 시간 (외 3편)
강영란
굴참나무를 두드리는 시간은
이제 막 도토리를 깨우는 시간
깨어난 도토리가 무릎걸음으로 다가오는 시간
봄을 지나 여름을 건넌
따글따글한 꿈들이
종지 안에서 다르륵 몰려다니며
굴참나무를 두드리는 소리
다르륵 미세한 진동음이 종지를 두드릴 때
보인다는 다른 도토리에게 보내는 수화음의 긴 파장
귀대지 않아도 같은 영혼을 지닌 것들은
살 살 핏줄의 귀퉁이를 나눠 먹으며 서로를 부르고 있다
몇 개의 잎에서 떨어져 나온 발자국들
저녁이 오면 작은 접시 그 오목한 골짜기 안에서
캄캄 눈 어두워지고 귀만 밝아져
고막마다 가벼운 깃털들이
지난 여름의 푸른 상처 귀지를 쓸어내어
별이 마실 나가는 소리를 쟁여 놓으며
달팽이관이 평형을 회복하는 밤
드르륵 청동어 소리
도토리 속 굴참나무를 두드린다고
종지를 흔들어 대는 손에 고요한 공기를 불러들이며
별은 낮게 떠서 하늘 귀를 밟고 있다
낙타
사막 위를 걸어가는 낙타들의 행진을
텔레비전으로 본다
출렁출렁
일렁일렁 걸어간다
무리 지어서 걸어가기도 하고
커다란 너울처럼 혼자서 걸어가기도 한다
온 힘을 다해
바다 사막을 떠나는 범선
연신 노 젓는 낙타의 목
선장이 잡아 쥔 고삐가
한 번씩 당겨질 때마다
둥근 혹이 파도로 솟아난다
한때 그렇게 파도였다가 굳어진 혹들
바싹 마른 구군들이 파도의 남은 기억으로
포말을 일으키며 흰 꽃을 피운다
모래 폭풍 속에서 아슬히 보이는 등짐 꽃들
모든 등짐들은 꽃을 피우기 위해
그렇게 매달려 있다
꽃 한 송이 피우는 생의 이면에는
사막의 젖은 속눈썹이 있다
볼펜 한 자루
볼펜 한 자루 속 잉크가 다 닿도록 글을 썼지만
정작 당신에게 사랑한다 한 구절 써 보내지 못했습니다
그 볼펜 속 잉크로 일직선을 그리면 지구 한 바퀴 길이는 되지 않을까?
뜬금없이 생각해 보다가 지구 한 바퀴 다 돌도록
사랑한다 그 말 한마디 못하고 보냈음에
희미해지는 잉크의 발자국 속으로 탁본 같은 눈물이 고입니다
칼보다 더 날선 펜으로 사랑을 파고 있습니다
흰 조각도가 파내는 글자들
볼펜이 사각거리며 지나갈 때마다 당신이 건너오는 소리
무슨 간절한 전할 말이 있다는 듯
사각 거리는 소리 속으로 엷은 떨림의 진동이 입니다
잉크가 다 떨어진 펜촉이 종이에 긁히는 소리
숯 눈 밟는 소리
대나무밭 걷는 소리
그 많은 소리의 잎사귀들이 다 쓴 볼펜심
플라스틱 안에 모여 투명한 공명을 이룹니다
볼펜 한 자루
아무데나 휙 버리면
바람 한 줄기 볼펜심 안으로 들이치며 휘파람도 휘휘 불어줄 것 같은
무엇이건 파낼 수 있는
흰 조각도 하나
슬리퍼 한 짝
옆으로 뉘여 진 슬리퍼 한 짝 나갈 때 놓여있던 모습 그대로다
단단하게 굳어진 화석 같다
평생을 단 한번도 움직여 보지 않았던 것처럼
타닥타닥 그대 찾아 다녀 보지 않은 것처럼
캄캄했던 그 길을 건다가 돌부리에 채인 발에
같이 피 흘려 울어보지 않은 것처럼
완강한 모습으로 뉘여 져 있다
모든 돌아누운 어깨들은 저리 완강해서 온 몸으로 발톱을 세운다
슬리퍼 한 짝 손에 들고 보니
무슨 생각의 길로 힘을 집중 시켰는지 중심이 골똘하게 파여 있다
그 옆으로 실핏줄 같은 길들이 지도를 새기며 중심을 향해 있다
내 마음의 중심도 저렇게 파여 있었구나
옆으로 뉘여 져 쓰러지고 있었구나
슬리퍼 바닥으로 스며드는 물소리
지꺽지꺽 녹스는 소리
한 짝을 들어 다른 한 짝 옆에 놓고 보니
몸의 결을 이룬 물결무늬 신발바닥
둥글게 솟아난 눈물방울들이 패총으로 단단하다
ㅡ 《열린시학》2010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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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란 : 1998년 한라일보 신춘문예 당선. 현재 제주고등학교 근무. 서귀포문인협회 회원. 《열린시학》2010년 봄호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