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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On the bridge
-죄송하지만 번지 수가 몇 번 되십니까?
“번지요?”
-네. 번지 수요.
그 번지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순간 높은 하늘과 파란 강을 생각했다면 그건, 잘못된 것일까? 나는 기억을 헤집었다. 하지만 떠오르는 건 숫자 따위가 아닌 가평, 제천, 포항, 진주 등등의 지명이었다. 중증이군.
-여보세요?
그래. 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다. 아주 많이 있었다. 나는 테이블 위에 수두룩하게 쌓여 있는 고지서 중 하나를 익숙하게 집어 들었다. 그리고 역시나 하나도 당황하지 않은 익숙한 목소리로.
“169-89 번지요.”
-아. 그럼 아까 지나간 집이네요. 잠시만요. 조금만 기다리세요.
의도적으로 없는 번지를 써 놓은 내 간악한 수작에 오늘도 근처 동네를 몇 바퀴 돌아야 했을 택배 배달원에게 순간 좀 미안해졌다. 날도 더웠다. 한 여름.
정말 이 근처였는지 곧 벨이 울렸다. 나는 서둘러 택배를 받아도 모자랄 판에 식탁 위에 놓여 있던 쓰디 쓴 커피를 느릿하게 한 모금 들이 마시고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아니, 왜 번지를 잘못 쓰신 거에요?”
문을 열자 다짜고짜 그렇게 물어오는 배달원의 얼굴이 땀에 절어있다. 좀 억울한 낯빛이기도 하다. 그럴 만 하다.
“아뇨. 제가 그런 게 아닌데. 과정에서 뭔가 실수가 있었나 봐요. 고생하셨네요.”
“아닙니다. 여기 싸인 해 주세요.”
말없이 싸인 하고, 나는 가벼운 상자를 받아 들었다. 크기도 그리 큰 것이 아니었지만 무게에 비하면 포장된 크기는 턱 없이 컸다.
“물이라도 한 잔 하실래요?”
“아니요. 빨리 가 봐야 합니다. 안녕히 계세요.”
번지. 내게 끝없는 두근거림과 떨림을 안겨주는 그 단어. 지루한 일상에 긴장감을 불어 넣어주는 단어라서 그런 걸까. 그래서 내가 종종 이런 못된 수작을 부려 번지라는 단어가 내 귀에 머물도록 발악하는 걸까.
상자를 열었다. 바람이 들어간 비닐에 몇 겹이고 둘러 쌓여 있는 물건이 보인다. 나는 그 비닐을 돌돌 돌려 벗겨내고 마침내 매끈한 나이프의 손잡이를 잡았다. 산악용 나이프.
사실 이 산악용 나이프를 인터넷으로 주문한 지는 꽤 되었다. 잊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에인가 이렇듯 내 손으로 굴러 들어와 있었다. 유통 과정이 열악한 건지 어쩐 건지 다른 택배보다 훨씬 늦게 도착했다. 하지만 그 덕에 미리 준비를 하지 않았고, 기대를 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래서 지금 난 예상치 못한 이 선물에 생각보다 큰 두근거림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아까보다 좀 더 식은 커피를 재차 들이 마셨다. 식어서 인가. 더욱 썼다.
번지. 세상 어느 단어보다 더 매력적이고 에너지 넘치는 단어다. 생각만 해도 아찔하지 않던가? 그래. 비록 하찮은 숫자 따위의 의미를 지니고는 있지만 그와 동시에 줄 하나에 몸을 의지하고 높은 곳에서 추락하는 이 고귀한 단어 ‘번지’ 말이다.
번지와 투신 사이의 거리는 얼마일까. 번지는 줄이 있고 투신은 줄이 없다. 그래서 어쩌면 그 둘의 차이는 고작 줄의 길이만큼 일지도. 그리고 그 줄은 인생의 길이로 치자면 더 없이 짧은 길이다. 번지는 고작 몇 초면 끝이 나니까 말이다. 내가 산악용 나이프를 주문한 것은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비록 잠시 잊어버렸지만, 얼마 전 내 삶에 대한 계획을 마무리 지었던 것이다. 나는 조심스레 기억을 더듬었다. 지나치게 평온했다. 우리 집에서 한강에, 어떻게 가더라.
나는 다리 위에 있었다. 그리고 내 손에는 카메라가 들려 있었다. 그냥 카메라가 아닌, 수중 촬영이 가능한 카메라였다.
아무도 나를 의심하지 않았다. 너무도 착착 생각대로 되어 가는 계획에, 나는 점점 흥미가 떨어졌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 끝이 날 것만 같다는 실망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나는 변수가 좋은데 말이다.
오른손으로는 꽤나 무거운 카메라를 들고 왼손으로는 산악용 나이프를 다잡았다. 발 아래로 강물이 조금씩 흔들렸다. 한 여름의 햇빛이 반사되어 눈이 부셨다.
객관적으로 보자면 까마득한 높이였지만 주관적으로는 그다지 높다고 쳐 줄만한 높이가 되질 못했다. 종종 이보다도 더 높은 곳에서 번지를 했던 내게는 당연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솔직히 좀 실망스러웠던 게 사실이다. 아무런 안전 장비 없이라면 조금쯤 떨려도 된다고 생각했고,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전혀 떨림 없이 저 앞에 있는 또 다른 다리를 흔들림 없이 잡아 내고 있는 내 카메라를 보자니 맥이 빠졌다. 발바닥 중 반을 허공으로 내밀었는데도 심장은 감감 무소식이었다.
뭘 기대했던 걸까?
이제 와서라도 떨리는 심장으로 삶에 대한 순수한 집착을 느끼고 싶었던 걸까? 그래도 나 아직 조금은 살 의지가 있다고 확인하고 싶었던 걸까? 참으로 빌어먹을 일들이 많이 일어나는 세상이지만 아직 나는 이 세상에, 이 지구에 조금의 기대가 남아 있다고 믿고 싶었던 걸까? 그렇다면 나는 실패였다. 모든 게 실패였다. 이 참담한 결과에 나는 슬쩍 웃음을 흘렸다. 과연, 계획대로였다. 동시에 사람은 때로 너무 완벽하고 철저해도 실망스럽다는 것을 깨달았다. 인생의 막바지에 발의 반 틈은 세상에, 나머지 반 틈은 허공에 맡기고서야 얻게 된 그런 깨달음이었다.
카메라의 앵글을 바꾸었다. 이번에는 다리 대신, 넘실거리는 강물이 앵글에 가득 들어 찼다.
말 없이 카메라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강물을 관찰했다. 아주 파랬다. 하지만 조금 있으면……
‘Five.’
머리 속에서 건조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스카이다이빙을 즐기는 사람이었다. 하늘 같은 사람이었다. 그가 하늘에서 내려올 때면 꼭 나를, 나만을 위한 선물을 신이 보내주시는 것 같아 꽤나 행복했었다.
‘Four.’
고소 공포증이 있는 내게 함께 극복하자며 손을 내밀던 사람이었다. 수영장의 다이빙부터 시작해서 나를 용케도 번지까지 이끌어 낸 독한 사람이었다. 늘 내게 용기를 주던 사람이었다. 어디에 있던 날 지켜줄 거라고 내가 자신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Three.’
내가 번지에 처음으로 성공한 날, 이제는 스카이다이빙에 도전하자며 짓궂은 농담으로 날 놀리던 사람이었다. 죽어도 싫다던, 이제 그만 하자던 내게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나랑 결혼도 싫다고?’라는 말로 은근슬쩍 프러포즈를 해 왔던 사람이었다.
‘Two.’
스카이다이빙은 너무 위험하다고, 앞으로 안 하면 안되냐고 보채는 내 말에 그럼 마지막으로 한 번만 하겠다던 사람이었다. 내게 약속을 하면서도 아쉬워하던 사람이었다. 마지막 비행을 끝내고 내려오며 내게 꽃다발을 건네 주겠다고 약속한 사람이었다. 나는 그 꽃다발과 함께 사랑한다는 말을 기대했었다.
‘One.’
실력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단지 하늘이 날 시기했었나 보다. 하늘 같은 그 사람을 나 혼자 가지려 빼앗고자 하니 하늘이 노했나 보다. 그가 하늘을 사랑한 만큼, 하늘도 그를 사랑했었나 보다. 그렇지 않았다면 절대, 그 따위로 갈 사람 아니었다.
‘잠깐만.’
이번에는 건조한 목소리와는 달리 꽤나 행복한 듯한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내 목소리다.
억울하고 분했다. 눈물 대신 코웃음만 나왔고 즐거운 웃음 대신 허탈한 웃음만 입을 비집었다. 낙하산을 아예 펴지 않았다고 했다. 오작동이 아니었다. 그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나 하나로는 부족했던 모양이다. 나 하나로는 땅의 매력이 부족 했나 보다. 하늘이 그렇게 좋았나 보다.
‘왜?’
‘줄 제대로 연결된 거 맞아?’
‘그래. 이것 봐.’
‘가끔 당신이 스카이다이빙과 번지를 헷갈릴까 겁이 나. 명심해. 번지는 줄이 있는 거고 스카이다이빙은 줄이 없는 거야. 그리고 우린 지금 번지를 하려는 거라고.’
‘그래. 하지만 난 번지보다는 스카이다이빙이 좋아.’
‘대체 당신은 왜 땅보다 하늘을 더 좋아하는 거야? 왜 땅을 싫어하는 거냐고?’
‘……땅에서는 너무 많은 것을 잃었거든.’
‘……’
‘자. 벌써 100번 째 시도도 더 되겠다.’
‘쳇.’
‘이번에 성공하면 근사한 말을 들려 줄게.’
‘뭔데?’
‘성공하면. 정말로 근사한 말. 기대해도 좋아.’
그렇게 달콤한 말에 나는 넘어갔었지. 기억나? 이제 보니 아이에게나 써 먹는 사탕 발림이 분명했는데도. 아니, 어쩌면 그 때도 알고 있었을 텐데도.
Rewind and replay.
Faster than before.
‘Five, Four, Three, Two, One, Zero.’
몸이 기울어졌다. 다만 카메라의 앵글은 여전히 강물을 담았다. 카메라 안에 나타나는 강물의 범위가 줄어들고 있었지만 대신 카메라는 더 가까이서 강물을 담았다. 나는 눈을 감지 않았다. 두렵지 않았다. 글쎄. 이런 걸까? 하늘에서 뛰어 내리는, 당신이 그토록 좋아하는 스릴은, 이런 걸까? 하지만 나 전혀 떨리지 않는 걸. 나 전혀 긴장되지 않는 걸.
매우 찰나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내게는 무척이나 긴 시간이었다.
‘하하하. 이봐. 할 수 있잖아. 너 성공했다고.’
‘뭐야. 생각보다 안 무서운데?’
‘다음에는 스카이다이빙에 도전하자고. 하하.’
‘뭐? 설마 근사한 말이 그거야?’
‘하하하하.’
‘됐어! 당신을 믿은 내가 바보지. 다시는 번지도 안 하고, 스카이다이빙은 더더욱 안 해! 싫다고!’
‘하하. 화내지 마.’
‘이제는 제발 그만하자. 응? 무섭지는 않아도 싫단 말이야.’
‘나랑 결혼도 싫어?’
‘뭐……응?’
‘나랑 결혼도 싫다고?’
코로 물이 가득 들어차는 순간 나는 내가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을 느꼈다. 투신을 하면 심장마비로 죽을 수도 있다던데 나는 그 경우는 되질 못하는 모양이다. 계획과 같았다.
내 시나리오대로 흘러가는 나의 현재 상황에 이제는 비웃음을 날려 줄 힘도 없었다. 머리 속을 가득 채운 그의 목소리가 나를 괴롭혀 대고 있었다. 지긋지긋했다. 그가 죽은 이후로 늘 그랬다. 이젠 지겹다. 안타깝다며 동정하는 주위의 시선도, 집 안에만 틀어 박혀 보내는 하루도 다 지겹다. 가끔 기분 전환에는 스릴이 좋다던 그의 말마따나 번지도 여러 번 뛰었다. 그러나 너무 많이 뛴 탓일까? 아니면 내 뒤에서 나를 꽉 안아주는 당신이 없는 탓일까. 심장이 뛰질 않았다. 심장이 죽었다. 살 가치를 잃었다.
나는 오른손에 있던 카메라를 놓았다. 이제 카메라가 무엇을 담던 나와는 상관없었다. 나는 이미 놓은 카메라 대신 내가 꼭 붙잡고 있던 왼손의 산악용 나이프로 시선을 옮겼다. 날이 날카로웠다. 번지를 할 때 줄에 매우 연연하며 삶에 대한 강한 애착을 보이던 나는 어디로 간 걸까? 아니, 아니다. 그것은 애착이 아니라 집착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나이프는 서늘하게 내 배를 파고 들었다. 푸른 강물이 피로 물들기 시작했다. 꼭 그가 추락한 지점의 땅이 새빨갛게 물든 것과 비슷해서 나는 웃음이 나왔다.
당신, 보고 있어? 그렇게 좋다던 하늘에서 지금 여기 보고 있는 거야? 잘 봐. 나는 여기에 있을 거야. 혹시 내가 보고 싶거든 당신이 그렇게 싫어하던 땅 말고 바다를 봐. 나는 바다에 있을 테니까.
그런데 당신 혹시 지금 내 주위를 둘러싼 이 귀여운 붉은 색 보여? 예쁘지 않아? 예쁘지? 그렇지? ……다행이다. 당신 마음에 들어서 다행이야. 근데 좀 불쌍하기도 하다. 이름도 없는, 우리 예쁜 베이비 말이야.
#. On the clouds
“넌 왜 그렇게 하늘에 집착을 하는 건데?”
“집착은 무슨.”
“그럼 그게 정상이냐?”
친구 놈은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장비 점검을 도와주었다. 스카이다이빙이나 번지 같은 위험한 취미만 빼면 시체인 나였지만 그래도 이 놈은 용케 내 옆에 붙어 있었다. 말 주변이라던가 배려심이 전혀 없는 나는 사람 관계라는 게 아무래도 빈약할 수밖에 없었다.
“작작 좀 하라고.”
“마음 같아서는 하루 종일 뛰고 싶은데 말야.”
“뭐? 너 이 미친…….”
그 욕에 걱정이 섞여있다는 걸 알기에 그냥 보기 좋게 웃어 보이며 발 걸음을 옮겼다. 정말 그럴 수 있다면 좋겠지. 하루 종일…… 하늘에서만.
“뭐야. 늦었잖아.”
여자는 입을 삐죽 내밀며 투덜거린다. 짧지만 충분히 매력 있는 단발이 그녀의 목덜미를 간질인다. 일요일 오후. 평화.
“옷도 안 갈아입고. 사람들이 다 쳐다본다고!”
“뭐, 어때.”
“그 고글만이라도 좀 벗지 그래?”
“멋있지 않아?”
“당장 벗어.”
“하하. 알았어. 알았다고. 노려보지마.”
내가 그녀를 만난 건 수영장에서였다. 하나뿐인 친구 놈이 너에게 스카이다이빙보다 더 재미있고 안전한 걸 알려주겠다며 데려간 곳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취미로 수영을 해 왔다던 놈은 수준급의 실력으로 금새 수영장 안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우연히 그곳에 와있던 것처럼 보이던 여자 무리들과도 어느새 스스럼 없이 어울릴 때, 나는 그냥 혼자서 멀거니 수영장 바닥에 주저 앉아 있었다. 나는 수영이 익숙지 않았고, 물 속에서는 호흡하기도 힘들었다. 그러다가 무슨 생각에서인지, 나는 위 쪽의 점프대를 발견하고 기분이 좋아졌다. 한 번도 해 본적이 없었지만 뭔가 뛰어내리는 거라면 자신이 있었기에 망설이지 않았다. 그리고 올라간 곳에는 그녀가 있었지.
“뭐 먹을래?”
“응. 그냥 아무거나.”
“제발 그런 태도는 좀 버릴 수 없어?”
“응?”
“이건 데이트잖아. 좀 관심을 가져 봐.”
“알았어. 그럼 이거.”
“이건 런치 메뉴야.”
뭐가 이리 복잡하담. 나는 대충 사진을 보고 음식을 골랐고 그녀는 ‘좋아.’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합격점인가.
‘할 수 있다니까. 할 수 있어. 뭐가 무서운데. 아래는 물이니까 절대로 죽지 않……않아.’
마법에라도 홀린 듯 계속 그렇게 중얼거리며 여자는 점프대 주변을 왔다 갔다 서성였었다. 내가 올라온 것은 전혀 모르는 모양이었다. 사실 나는 그 때까지만 해도 겁을 가진 사람을 이해하지 못했었다. 그게 뭐가 무섭다고 그러지. 알고 보면 별 것 아닌데 괜히 호들갑 떠는 사람들도 싫었고, 그렇게 무섭다면 안 하면 될 걸 계속 할 듯 말 듯 시간을 끄는 사람들은 더더욱 싫었다. 그래서 내게 있어 그녀는 그다지 호감형은 아니었던 게 분명한데…….
“무슨 생각해? 응?”
“왜 뛰어 내렸어?”
“응?”
“수영장에서 왜 갑자기.”
“아. 그거. 누누이 말하지만 세 시간을 망설이던 끝이었다고. 그러니까 지겨움이 무서움을 버린 경우라고나 할까? 그 망설임,
얼마나 짜증나는지 너는 모르지? 하고 싶은데 할 수 없어서 짜증나는 거.”
“응. 몰라.”
“야. 그런다고 단 칼에 모른다고 하냐?”
“누구보고 ‘야’래?”
“그럼 네가 ‘야’가 아니면 뭔데?”
“자기.”
“뭐? 우엑.”
“누누이 말하지만 난 너보다 네 살이나 많다니까.”
“늙은 게 참도 자랑이라고…….”
비켜달라고 말을 하려던 순간 그녀는 갑자기 점프대 위로 과감히 올라 섰었고 그에 당황한 쪽은 내가 되어 버렸다. 절대로 올라가지 못할 것 같더니 기어이 올라가 버린 것이다.
‘저기…….’
말리려고 했다. 말려야 한다는 생각이 일단 먼저 들었다. 하지만 살짝 뻗은 손은 거기서 멈추었고 그녀는 성큼성큼 점프대 위를 걷기 시작했다. 하지만 분명히 떨고 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었다. 점프대가 너무도 크게 동요하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 순간. 그녀는 미끄러졌다. 아악. 날카로운 비명이 수영장 실내를 찢어 놓았고 그녀는 점프대 위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그 때 내 눈이 그녀와 마주쳤는데, 나는 아마 그 눈빛 때문에 그녀에게 빠진 게 아닌가 싶다. 마주친 것도 잠시 그녀의 눈은 스르르 감겼고 몸은 수영장으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기절해 버린 것이다.
“아. 그러고 보니 어렴풋이 기억나는 것 같기도 하다.”
“뭐가?”
“나 기절하기 직전에 말야. 너랑 눈 마주쳤던 거.”
“…….”
“그거 너 맞지?”
“응.”
“그 때 뭐랄까, 느낌이 좀 묘했었는데.”
“…….”
“그 때 빠진 걸까?”
“나한테?”
“아니. 물에.”
즐겁다는 듯 웃는 그녀를 보며 내 입 꼬리도 덩달아 올라가 버린다.
나는 그 때, 그녀의 뒤를 따라 무작정 물로 뛰어 들었다. 뛰어 내리는 것은 완벽했지만 호흡은 완전 꽝이었던 탓에 나는 코로 물을 삼키고 고통스러워하는 와중에서 그녀를 구해내야 했다. 수영장 바닥으로 그녀를 끌어올리고 나는 익숙하게 심폐소생술을 시작했다. 스포츠-극히 일부분이지만-를 좋아하는 내게 그런 건 문제가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그 때 나 구해준 거 너 맞아?”
“맞아.”
“눈 뜨니까 아줌마들 밖에 없었는데.”
나는 토하러 화장실에 갔었다. 물을 너무 많이 먹어서 배가 울렁거렸고, 그걸 빼내려고 화장실에 간 사이에 그녀가 깨어난 것이다.
“아무튼 너 그 때 작정하고 나 구한거지?”
“응?”
“솔직히 말해 봐. 너 그 때 한 심폐소생술에 아무런 사심이 없었다고 자부해?”
“당연하지.”
“뭐?”
“점프 따위 무섭다고 기절하는 여자에게 무슨 매력이 있겠어?”
“뭐? 점프 따위? 너 내가 말 그 따위로 하지 말랬지? 그게 죽기보다 힘든 사람도 있는 거야.”
사심, 있었으니까. 사실대로 말하기가 죽기보다 힘든 거 너는 알아?
그건 추락이 아니야. 비행일 뿐.
아버지는 파일럿이었다. 어머니는 스튜어디스였다. 신기한 것 같지만 어려운 일은 아니다.
한 팀이 되어 한 비행기 안에서 조종을 하고 손님을 접대하다 보면 종종 생기는 일이다. 그 사이에서 어렵게 생겨난 나였기에 난 넘칠 정도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평생 받을 사랑을 미리 다 받아버린 걸까. 아버지가 조종을 하고, 어머니가 타 있던 비행기였다. 레이더의 이상으로 높은 산을 발견하지 못해, 그대로 부딪혀 추락했다고 했다. 기내 화재가 뒤따랐고 생존자는 0명.
하늘일까, 땅일까. 그 애매한 경계선.
도대체 무엇이 내게서 부모를 앗아갔는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하늘과 땅 사이를 벗어날 수는 없었다. 나는 살아야 했다. 하늘에서 땅으로, 그 둘을 우롱하는 재미에 맛들려 스카이다이빙에 중독된 채로.
“예?”
“엡스타인입니다. 모르고 계셨습니까?
아니. 나는 알고 있다. 다만 내 건강이 걱정된다던 그녀의 요구로 함께 병원에 왔었고 검사를 받았을 뿐이다. 그리고 그 결과를 숨기기 위해 나는 그녀에게 있지도 않은 약속 핑계를 대며 나 혼자 가기를 자청했다. 알고 있었는데 막상 직접 들으니 그것도 그렇다.
“저기…….”
“네.”
“저……는, 군대도 다녀왔는데…….”
뭔가 부정하고 싶은 마음에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내 뱉고 본다. 왠지 두려웠으니까. 다시는 뛰지 말라는 말이 나올 것이 두려웠으니까. 의사는 당장에 스카이다이빙 따위는 관두라 하리라.
“그건 상관이 없습니다. 가끔씩 심장이 불규칙적으로 뛰는 것을 느끼시죠?”
“네. 하지만 그건 다 때가 있습니다.”
“네?”
“그러니까…….”
“취미인 스카이다이빙을 하실 때 말씀이십니까?”
아니요. 그녀를 볼 때요.
“그건 흥분, 떨림과는 명백히 다릅니다. 주의하셨어야 했는데 스카이다이빙 같은 운동을 즐기시다뇨? 정말 전혀 모르고 계셨단 말입니까? 이해가 가질 않는군요.”
“……어렸을 때 심장 수술을 받았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셔서 자세한 이야기는 듣지 못했습니다.”
나는 그렇게 의사를 납득시킨다.
“……하지만 전 제 자신이 건강하다고 생각합니다.”
“엡스타인은 말하자면 판막의 선천적 위치 기형입니다. 판막의 조직을 약화시키죠. 그리고 그것이 삼천판막이상으로 나타납니다. 즉, 피가 역류하게 된다는 겁니다.”
“…….”
“위험 상태입니다. 지금까지 그런 취미를 이어오실 수 있었던 것만도 기적이군요. 왜 더 일찍 오지 않으셨죠? 가끔씩 참기 힘든 통증도 있으셨을 텐데요. 체계적인 진료 시스템을 통해 심장의 건강을 회복시키고 무리하지 않는 편이 좋겠습니다.”
“그럼…… 제 취미는…….”
“취미는, 바꾸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뭐라는 거지. 눈 앞의 이 남자. 지나치게 사무적이고 지나치게 차갑고 지나치게 냉정하다. 같은 남자지만 이런 남자는 정말 소름이 끼친 달까. 아무렇지도 않게 스카이다이빙을 관두라 한다. 몇 년 동안 하루도 빼놓지 않다시피 해 왔던 그 취미를 관두라 한다.
“치료는…… 다른 병원에서 받고 싶습니다.”
“……그렇게 하십시오. 쾌유를 빌어요.”
나는 그대로 병원을 나왔다. 다시는 병원에 발을 들이지 않으리라 결심하면서.
“그래서. 검사는 어떻게 됐어?”
그녀의 눈에는 늘 수 만 가지의 감정이 존재한다. 지금은 긴장, 걱정, 불안이 섞여있다. 너무나 솔직해서 도저히 모른 척은 할 수 없는 눈이다.
“가끔 심장 박동이 불규칙할 수도 있는데, 별 거 아니래. 치료는 필요 없다는데.”
“그래? 역시…….”
“역시?”
“넌 무슨 병 따위가 아니라 나를 보면 심장이 두근거리는 거라니까.”
나는 말없이 미소 짓는다. 여덟 살의 소년에게서 전부를 앗아간 땅은, 지금 그 소년마저 앗아가려 한다. 소년은 계속 비행할 것이다. 결국 멈추지 못하겠고 어쩌면 땅에게 자신을 줘 버릴지도 모르겠다. 소년의 그녀는 어쩌지. 그녀는, 어떻게 되는 걸까. 그녀는 나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을까. 가끔 궁금해진다.
“그럴 리가. 나 지금 아무렇지도 않은데.”
“거짓말.”
그녀는 내 가슴팍으로 손을 뻗어 온다. 아. 뛴다. 뛴다.
“이것 봐. 잠잠하긴 뭐가 잠잠해.”
“그럼 어디 너도…….”
“꺄악! 변태!”
변태라니. 정말 궁금한 것뿐이라고. 네가 얼마나 날 사랑하는지 알고 싶을 뿐이야. 정말이야. 정말이라니까. 하하.
그녀는 절대 봐주지 않는다. 인정사정 없이 내려오는 그녀의 팔을 나는 부드럽게 감아 쥔다.
“너 가끔 잊는데. 나는 남자라고.”
그녀는 멍하니 눈을 끔뻑거리며 내게 눈을 맞춰온다. 아주 마른 손목이다. 가끔 이렇게 진지한 분위기를 만들면 그녀는 모른 척 동참해준다. 나는 그게 좋다.
“우리 결혼 할 거지?”
“그럼.”
지금 이 순간 가장 후회되는 건 어제 한 프러포즈. 할 수만 있다면 취소하고 싶어. 미안해. 미안해.
조심스레 그녀를 감싸 안는다. 따뜻한 심장이다. 그녀의 빠른 심장 박동이 느껴진다. 나의 빠른 심장 박동도 느껴진다. 하지만 둘은 서로 다르다. 내 것은 더러운 진동이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끔찍한 폭탄.
미안해. 미안해.
이야. 오늘 날씨 죽이게 좋은데. 이렇게까지 좋은 날에 말리는 건 역시 무리겠지?
알면 관두고 장비나 좀 봐 줘.
여느 날과 똑같아. 친구 놈과 시시껄렁한 농담을 주고 받다가 나는 헬리콥터에 올랐고, 땅을 떠났어. 꽃다발을 안았고, 낙하산을 메었지. 그런데 아무런 말도 생각나지 않아. 미안하다는 말 밖에는.
‘Five.’
나 말이다. 아무런 목표도, 흥미도 없이 삶을 살아왔었잖아. 내가 이 세상에서 애착을 가지고 있었던 건 비행뿐이었으니까.
‘Four.’
그런데 갑작스레 끼어든 너라는 큰 빛에 나는 방향을 잃었어. 내가 사랑하는 네가, 내가 사랑하는 비행을 그만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Three.’
너와 나를 택하려면 나는 비행을 포기해야만 하지. 그리고 비행을 포기하지 않으면 난 자연스레 너와 나를 잃게 돼.
‘Two.’
왜 나는…… 늘 잃어야 하지?
‘One.’
네가 나를 이해할 수 있을까.
……아마 못하겠지. 아무도, 날 이해할 수 없겠지.
‘Zero.’
지끈. 헬리콥터를 박차고 떠난 순간 나는 비행하고 있었을까, 추락하고 있었을까. 그것은 내 남은 1분 여의 마지막 순간에 내 머리를 온통 채우고 있던 질문이었다. 심장의 통증은 이제 너무나 고통스러워 버티지 못할 정도였다. 나는 결국 중력이라는 힘에 굴복했고 그토록 싫어하는 땅으로 끌려가고 있었다. 꽉 깨문 입 안이 터져 피가 흘러나왔다. 가까워져 오는 땅이 보이고, 심장은 더욱 날 고통스럽게 쥐어짰다.
사랑하는 나의 그녀를 지켜주겠니.
이렇게 자신 없고 나약한 나 대신, 그녀를 지켜줄래.
힘 없이 흩날려 떨어지는 장미꽃잎과 나의 혈흔이 섞였다. 어느덧 내 손에는 아름다웠던 꽃다발 대신, 가시만 앙상히 남은 날카로운 줄기다발만이 들려있었다.
안녕. 장미꽃 같은 그대. 안녕.
#. On the ground
그래. 똑똑히 기억하지. 내가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아무리 늙은 기억이라지만 말이다. 역시 중요한 건, 늙은이일수록 잊지 않는 법이야. 예의 그 늙은이의 흉측한 손가락 뼈마디로 꽉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법이거든.
축복받지 못한 결혼은 슬프지. 우리 아가씨는 울고 화내고 별 협박도 다 해 보았지만 어디 우리 어르신들이 거기에 넘어갈 정도로 아둔하셨던가. 아니지. 절대로 아니지. 특히 우리 나리께서는 칠순이 넘은 나이에도 몸에 지병 하나 없이 멀쩡하셨으니까 말이다. 이제 와서 죽기 직전에 생각하는 거지만 그것 참 지독하고 징그럽군. 내가 그 나이가 되어 보니까 더 그래. 난 지금 움직이는 것조차 힘들거든. 숨 쉬는 것조차. 하루하루 무기력하게 죽음을 기다리는 게 이보다 더 비참할 순 없지.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지. 나리께서는 아가씨가 스튜어디스 일을 하는 것조차 못마땅해 하셨어. 그 일이 워낙 힘들다나 뭐라나. 당신의 막내 따님을 아끼는 마음을 나야 알았지만 그것이 꿈이었던 아가씨는 나리가 미웠을지도 몰라. 그런 나리께 아가씨가 결혼할 정인이랍시고 데려온 남자는 파일럿이었으니 당연히 나리는 노여워하셨어. 게다가 그 남자네 집안이 별 볼 일이 없는 집안이었거든. 빚까지 있었지. 나리는 당장에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셨어. 그래도 꽤나 침착하신 분이라 큰 소리 내는 일은 별로 안 계셨는데 말이다. 일이 이렇게 되니 당연히 아가씨의 정인 되는 그 사람의 집에서도 반대가 심했지. 하지만 나는 알았어. 나만이 알았지. 아가씨의 고집을 알았고 나리의 앞에서 전혀 주눅들지 않는 아가씨 옆의 사내를 보면서 당연히 알 수밖에 없었어. 그 둘은 허락을 받지 못해도 결혼할 것이라는 걸.
참. 나는 그 집 하녀야. 뭐, 좋게 말하면 가정부라고도 할 수 있겠지. 뭐, 어쨌든 오늘 내일 죽을 사람에게 그런 건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니니까. 하지만 웬만하면 가정부라고 해 두고 싶네. 아가씨가 어렸을 때부터 아가씨를 돌봐온 탓에 아가씨는 알게 모르게 나에게 많이 의지하셨어. 그건 결혼을 한 이후에도 그랬지. 나리 몰래 나는 아가씨와 계속 연락을 주고 받았고 아이가 잘 생기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었어. 비행을 많이 하면 건강에 좋지 않다더니 그 말이 정말이었던 모양이야.
하지만 몇 년 후였어. 어느 날 걸려온 전화를 받아 드니 아가씨께서는 기뻐하셨지. 아이가 생겼다면서 말이야. 나도 기뻤어. 난 쾌활하고 나리에게 도전하는 그 배짱 두둑한 아가씨가 마음에 들었거든. 일종의 이상형이랄까? 나도 그렇게 살고 싶은 마음이 아예 없었다고는 말 못하니까. 아가씨는 나에게 부탁을 했어. 아이가 태어나면 좀 돌보아 줄 수는 없겠냐고. 물론 나는 그 때까지도 나리의 집에서 시중을 들고 있는 처지였지. 하지만 난 내가 나가겠다고 하면 아무도 날 말리지 않을 거란 걸 알고 있었지. 아직 젊었던 그 때의 내게 나리의 집은 어둠이었어. 그 큰 집에 나리와 나리마님만 남아서 아주 어두컴컴하고 생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지. 젊었던 나는 그게 싫었어. 돈 많은 나리야 이렇게 시골에 처박혀 있고 싶으셨겠지만 난 아니었어. 지겨웠지. 나는 곧장 상경했고 아가씨께서 얻어주신 조그마한 집에서 자취를 했어. 아가씨의 태교를 돕고 말 벗이 되어드리면서 말이야. 참 단란한 가정이었지. 나는 결혼을 하지 못한 처녀였기에 그런 것까지도 모두 아가씨가 부러웠어.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도련님께서 태어나셨지. 척 봐도 아가씨를 많이 닮으셨어. 물론 아가씨의 그 분도 많이 닮으셨지. 어쨌거나 나는 두 분이 일을 나가실 때 자진해서 도련님을 보살폈어. 그건 내 삶의 유일한 기쁨이었거든. 아가씨를 돕는 것.
이제 와서 생각해 보는 건데 나리는 어쩌면 정말로 아가씨를 환멸하고 증오하셨을지도 몰라. 아예 부녀간의 연을 끊고 연락 한 번 하시지 않으셨으니까. 아가씨가 먼저 연락을 해도 나리께서는 늘 무시하셨지. 그건 도련님이 태어난 이후에도 마찬가지였어. 참 독하셨지. 그렇게나 나이 드신 양반이 뭐에 쓰려고 독을 그렇게 많이도 드셨던지. 정말 말 그대로였어. 아가씨가 처음 아가씨의 정인을 데려간 그 날 나리께서 하셨던 말 그대로였지. 나가 죽으라고. 정말로 아가씨는 나가 죽었지. 그 분과 함께 탄 비행기에서.
그 때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내 기분이 어땠는지 누구든 알 수 있을까? 품 안에 갓 태어난 따뜻한 아이를 받쳐 든 건 하필이면, 할 줄 아는 거라고는 청소와 아기보기와 음식밖에 없는 멍청한 여자였지. 그리고 그 멍청한 여자가 보는 TV에서는 끊임없이 사고 소식이 흘러나오고 있었어. 두 동강난 비행기를 보건대 그 뉴스는 차마 거짓이라고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사실적이라 나는 인정해야만 했어. 아가씨께서는 그렇게 돌아가셨지. 그리고 난 얼마 지나지 않아 나리께서도 돌아가셨다는 말을 들었어.
태어날 당시부터 도련님은 심장이 좋지 않았어. 그게 아가씨의 가장 큰 걱정거리였지. 자신들의 직업 때문에 아이의 심장이 좋지 못한 거라고 자책했어. 의사는 도련님을 무리시켜서는 안 된다고 여러 번 주의를 주었지. 하지만 아가씨는 보통 사람처럼 도련님을 키우겠다고 마음먹으셨어. 방어는 사람을 약해지게 할 뿐이라면서. 아가씨가 옳았다고 생각해. 나는 아가씨의 생각대로 도련님을 키웠고, 도련님은 아주 훌륭하게 자라났으니까 말이다.
성인이 된 도련님이 이제 따로 살겠다는 말을 했을 때 나는 도련님을 보냈지. 어쩔 수 없었어. 같이 산 사람의 정은 있었지만 그게 혈육의 정은 되지 못했으니까. 그 날 이후로 도련님 생각을 안 한 날이 단 하루도 없어. 심장이 약하시니까 조심하셔야 될 텐데. 도련님이 남겨두고 가신 비행기나 제트기 따위의 피규어나 프라모델을 보면 가끔 불안해져. 난 도련님은 땅에 꼭 붙어 계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겁 많은 늙은이니까 말이야. 하늘은 매우 싫어하셨으면 하는 바램이야. 거긴 너무 위험하니까.
도련님은 잘 있을까? 이 늙은이는 매일 걱정 밖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서 속이 썩을 대로 다 썩었어. 별 소식이 없는 걸 보니까 별 일은 없는 모양이야. 무슨 일이 생기면 연락하겠다고 약속하셨으니까 정말 별 일이 없어서 연락이 없는 걸 거야. 뭐, 그래도 다행이지. 그래도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도련님이 안전했으니까 말이야. 도련님이 험한 세상에서 살아 남을 수 있도록 건강하게 내가 보살펴 드렸으니까 말이야. 적어도 아가씨가 날 원망한다거나 하는 일은 없기를 바래.
“쯧쯧.”
지금 내가 보는 TV안에서 기자가 말하길, 여자가 죽었다네. 한강 다리에서 뛰어내렸대. 아기를 밴 몸이었다니. 자살이 확실한데다가 배까지 칼로 그은 걸 보면 여간 독한 여자가 아니야. 세상이 변해도 참 많이 변했어. 그나저나 아기는 무슨 죄람. 일평생 내가 가져보지도 못한 아이를 일부러 버리는 골 빈 여자도 요즘 세상에는 있네. 말세야. 내 아이가 아니어도 일평생을 바쳐 길러내던 몇 십 년 전과는 달라도 정말로 다르지. 빨리 죽는 게 나을지도 몰라, 이런 세상에서 살아야 한다면.
그러고 보니 생각난다. 한 달 전이던가? 아니, 아직 한 달은 안 됐나? 늙으니까 시간 감각도 점점 없어져. 어떤 총각이 스카이다이빙인가 뭔가를 하다가 자살했다고 했었지. 낙하산을 펴지 않아서 그대로 추락했다나, 뭐라나? 요새는 자살이 유행인가? 하여간 젊은 것들은 이해할 수가 없어.
아구. 졸리다. 요새는 잠이 늘었어. 한 번 잠들면 도통 깨기가 어려운 게 이제 나도 거의 막바지인 모양이야. 그래도 이게 어디야. 미치지 않고 죽을 수 있는 게 그나마 다행이지. 아무런 복도 없는 하녀 인생에 이런 복은 있네. 차라리 편하게 잠 들었을 때 죽었으면 좋겠어. 혼자인 세상은 재미가 없어서 빨리 떠나고 싶은 마음이 커. 아가씨를 빨리 만나서 수다를 떨고 싶거든. 아가씨가 있다면, 나는 혼자가 아니니까. 그 때는 같이 도련님을 지켜볼 수도 있겠지.
하지만 TV의 여자나 몇 달 전 총각처럼 자살은 안 해. 나는 겁 많은 늙은이니까.
“……한편 여자가 자살한 이유는 약혼자의 자살로 알려져 있는데요, 그 약혼자는 다름아닌 3주 전 스카이다이빙 자살사건으로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던 서른 두 살의 강 모 씨인 것으로 밝혀져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당시 강 모 씨는 취미인 스카이다이빙을 즐기던 도중 낙하산을 일부러 펴지 않고 그대로 땅으로 추락해 돌연 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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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써본 단편이네요ㅎㅎ
첫댓글 아............소설너무잘쓰세요!!!!!너무잘읽었어요.여자와남자의사랑이너무아름답고,또안타깝네요.건필하세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