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이 땅에 인간으로 오셨습니다.
삶의 무게, 죽음도 경험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아시는 분입니다.
굳이 인간이 되셔야 할 필요가 없는 분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당신을 낮추셨습니다.
질 필요가 없는 짐을 자청하여 지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자청하심이 제겐 큰 위로가 됩니다.
아프고 힘들고 괴로울 때 ‘주님... 아시지요?’하면 마음이 눈 녹듯 평안해집니다.
바울은 사도입니다.
사도는 스스로 생활비를 벌지 않아도 됩니다.
하지만 바울은 사도로 활동하면서 동시에 스스로 생활비를 조달합니다.
텐트메이커. 장막을 만들며 자비량합니다.
각주) 사도행전 18장 2절 후반 ~ 3절
바울이 그들에게 가매 업이 같으므로 함께 거하여 일을 하니 그 업은 장막을 만드는 것이더라
사도로서 일하지 않을 권리가 있지만, 이 권리를 행사하지 않습니다.
권리를 스스로 제한함은 복음을 전하는 데 장애가 되지 않게 하려 함입니다.
각주) 고린도전서 9장 6절 어찌 나와 바나바만 일하지 아니할 권이 없겠느냐
12절 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을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을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라.
저는 사회사업가입니다.
제가 돕는 분들은 시장 경쟁에서 밀리거나 뒤처지는 분들이 대다수입니다.
전쟁 같은 치열한 생존 경쟁에서 힘들게 생활하시는 분들입니다.
저는 이런 분들을 돕는 사회사업가입니다.
사회사업가도 노동자이니 당연히 사회사업만으로 월급 받아야 마땅합니다.
그것이 사회사업가의 권리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생각하면 제 권리를 다 누리기 힘듭니다.
예수님께서 스스로 제한하신 권리 덕에 새 생명을 얻었습니다.
지금도 큰 위로를 얻습니다.
그런 제가 정작 제 권리를 다 누리려 한다면.......
도저히 예수님을 뵐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부끄러워 얼굴을 들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이것이 사회사업가의 권리를 제한하여 자비량 사회사업가를 선택한 중요한 이유입니다.
예수님처럼 사도 바울처럼 살고 싶습니다.
물론 제가 생업을 따로 갖고 있다 하더라도,
사회사업가로서 이런 저런 수입이 있으니 어찌 온전한 자비량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어찌 제가 돕는 분들과 같이 되었다, 마음을 안다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 없겠지요.
다만 이렇게라도 해서 예수님께 진 빚을 조금이나마 갚고 싶습니다.
이것이 기쁘게 자비량 사회사업가를 선택하고 지금도 기쁘게 자비량하는 이유입니다.
가능하다면 계속 자비량하기를 소망합니다.
각주) 제 만족을 위한 것이니 크리스찬 사회사업가라면 반드시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각자 마음에 끌리는 바에 따라 택하면 족합니다.
첫댓글 네...선생님이 기쁘게 자비량하시고 소망하시는 것처럼, 저도 이것을 소망합니다. 마음의 소원만으로 섣불리 시작하였던 지난 날과 달리, 저만의 것으로 브랜드화하여 시작하고자 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자비량선교를 준비하였던 지난 10대의 열정이, 복지를 통하여 더욱 즐거이 소망할 수 있어서 기쁩니다.
한미경 선생님께서도 같은 소망을 가지고 계시는군요. 어제 버스 안에서 선생님을 생각했습니다. 같은 소망을 가지고 있는 분이 계신다는 것만으로도 마음 든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