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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상[李麟祥] 출처 : 한국 역대 서화가 사전
시대 조선 후기
출생-사망 1710 ~ 1760
직업 문신, 서화가
조선후기의 문신이자 서화가이다. 자는 원령(元靈), 호는 능호관(凌壺觀) · 보산자(寶山子) · 보산인(寶山人) · 종강칩부(鍾岡蟄夫) · 뇌상관(雷象觀) · 운담인(雲潭人)이며, 본관은 완산(完山)이다.
1710년 경기도 양주군 천보산 부근에서 이정지(李挺之)의 2남 중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이인상은 효종 시기에 영의정을 지낸 이경여(李敬輿)의 현손이었지만 증조부인 이민계(李敏啓)가 이경여의 서자였던 관계로 서얼신분을 벗어날 수 없었다. 1736년에 진사시에 합격한 후 북부참봉 · 전옥서 봉사 · 내자시 주부와 같은 하급직으로 근무하였으며 1747년 사근역 찰방을 지냈다. 1752년 음죽현감을 마지막으로 이인상은 1754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자신의 마지막 임지였던 음죽현 근처의 설성(雪城)에서 은거자로 여생을 보냈다. 이인상의 삶에 있어서 서얼이라는 신분적 제약은 운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이인상은 각고의 자기 수련을 통해 높은 학식을 바탕으로 격조 높은 문인화의 세계를 개척하였다. 이인상의 생애와 예술은 초년 및 서울에서의 관직 생활 기간인 1710~1747년, 사근역 찰방과 음죽현감 등 지방으로 전출되어 생활한 시기인 1747~1752년, 설성에 종강모루(鍾岡茅樓)를 짓고 은거자로 생활한 말년 시절 1754~1760년 등 크게 3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이인상은 9살에 부친을 여의고 숙부인 이최지(李最之) 밑에서 기초적인 학문을 수련하였다. 서예 및 전각에 뛰어났으며 예학에도 밝아 사류(士類)로부터 존경을 받았던 이최지가 이인상의 학문과 예술에 끼친 영향은 매우 컸다. 이인상이 초년에 어떻게 그림 공부를 했는지는 명확하지는 않으나 남종화 학습서로 조선 후기에 널리 보급된 『개자원화전』(1671 초간) 등 중국의 화보를 바탕으로 다양한 방작을 시도했으며 오파(吳派) 및 안휘파(安徽派) 계통의 중국 회화작품을 학습한 것으로 보인다. 이인상이 화보를 통해 문인화의 기초적인 지식과 기법을 습득했다는 사실은 간송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은선대>(1737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1737년에 금강산을 유람한 후 간결한 필치로 그려낸 <은선대>는 이인상이 중국 화보를 통해 익힌 남종문인화의 기초적인 기법들을 실험적으로 적용한 작품이지만 준법을 배제한 윤곽선 위주의 산수 표현, 맑은 담채를 사용한 청신한 색채 감각, 경물의 특징을 간결하게 표현한 참신한 구도의 사용은 이인상 특유의 평담(平淡)하고 졸박(拙朴)한 화풍이 이 시기에 이미 형성되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이인상 초기 화풍의 특징은 이듬해인 1738년에 제작된 <수석도>(국립중앙박물관 소장)에서도 확인된다. <은선대>와 마찬가지로 <수석도>는 바위와 나무들만을 소재로 선택하여 차갑고 황량한 겨울 풍경을 간결하게 표현하였다.
세 그루의 나무와 바위들만으로 이루어진 <수석도>는 간결한 구도 속에 경물의 핵심적인 모습만을 요점적으로 표현하려고 했던 이인상 산수화의 특징인 간일(簡逸)한 화풍을 명확하게 보여주었다. 한편 1739년경에 그린 <수하한담도>(개인 소장)는 친구인 임매(任邁)를 위하여 제작한 그림으로, 커다란 바위 사이로 우뚝 솟은 나무 아래에 앉아 한가롭게 담소를 즐기고 있는 두 인물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과장된 바위와 나무 표현, 구불구불한 선은 이인상의 초기 화풍과 차이를 드러내는데 구불구불한 선은 아마도 화보에서 익힌 왕몽(王蒙)의 우모준(牛毛皴) 기법을 응용한 것으로 생각된다.
아울러 청초의 명(明) 유민화가(遺民畵家)인 석도(石濤)의 《위우노도형작산수도책(爲禹老道兄作山水圖冊)》 중 제 3엽(뉴욕 개인 소장)에 보이는 바위 표현에 사용된 뒤엉켜 돌아가는 구불구불한 필선들은 이인상의 <수하한담도>에 보이는 필법과 유사하여 주목된다.
이인상(李麟祥), 남간추일(南澗秋日)
종이에 담채, 24.6×63cm, 국립중앙박물관
1741년에 이인상은 신소(申韶)와 송문흠이 3천냥을 들여 사준 남산 아래의 집으로 이사를 하였다. 이인상은 당호를 능호관(凌壺觀)이라고 지었는데 능호관은 신선이 사는 곳인 방호(方壺)를 능가하는 곳이라는 의미로 수려한 남산의 경치 속에 마치 은거자와 같이 세속을 초월한 삶을 살고자 했던 이인상의 의지를 보여준다. 1747년 7월에 이인상은 서울에서의 관직 생활을 마치고 경상남도 함양(咸陽) 지역의 사근역찰방직을 제수받고 부임하였다. 이 시기의 작품으로 먼저 주목되는 것은 <유천점봉로도(柳川店逢壚圖)>이다. '유천점에서 주막을 만나다'라는 제목에서 보듯 이인상이 여행을 하던 중 유천점에 있는 주막 마을을 사생한 작품이다.
부감법으로 마을의 전체 모습을 조망한 이 그림에는 술 마시는 사람, 말을 타고 지나가는 여행객들, 마구간, 초옥(草屋), 나무들이 빠른 필치로 묘사되어 있다. 마른 붓을 이용하여 속필로 경쾌하게 그려낸 <유천점봉로도>는 채색을 일체 배제하고 필선만으로 한 마을의 정경을 사생해 낸 것으로 풍속화적 요소에도 불구하고 평담(平淡)하면서도 격조높은 문인화의 진수를 보여준다. 1749년 겨울에 그린 <모정추강도(茅亭秋江圖)>는 이전의 그림과 달리 원대(元代) 예찬(倪瓚)의 화풍을 바탕으로 적막하고 쓸쓸한 강변의 풍경을 표현한 작품이다.
이인상은 이 시기 이후 <모정추강도>와 같이 강변에 소슬하게 서있는 모정(茅亭)을 소재로 다수의 모루도(茅樓圖)를 제작하였는데, 이윤영의 누정(樓亭)을 화폭에 옮긴 <강상초루도(江上草樓圖)>(개인 소장)는 대표적인 예이다. 이인상이 서울에서의 관직 시절에 제작한 그림들과 달리 1749년 이후의 작품들은 고독한 은일자의 내면 풍경과 같이 쓸쓸하고 처연한 '텅 빈 산수'가 주류를 차지하게 된다.
사근역 찰방의 임기를 마치고 상경한 지 8개월 후인 1750년 4월에 이인상은 현재 경기도 이천군 장호원읍인 음죽(陰竹)에 현감으로 부임하였다. 1751년에 이인상은 이윤영과 함께 단양을 여행하였다. 이인상은 단양 옥순봉 아래에 다백운루(多白雲樓)라는 정자를 세우고 은거할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서울에 있는 노모(老母)와 경제적 곤궁함으로 이인상은 은거 계획을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계속 음죽현감 직을 수행하게 되었다. 그러나 강직하고 타협할 줄 모르는 성품으로 인하여 이인상은 결국 1752년에 관찰사와 크게 싸운 뒤 현감 직을 그만두고 서울로 상경하였다.
상경 직후 임안세(任安世)를 위해 그려준 <구룡연>은 이인상 회화의 중심적인 주제가 되었던 쓸쓸하고 텅 빈 산수의 전형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윤곽선만을 사용하여 표현한 중첩된 바위와 폭포는 거의 추상에 가까울 정도로 일체의 괴량감이 배제되어 있다. 채색, 선염, 준법이 완전히 배제된 채 오직 필선만 이용하여 구룡연의 장관을 요점적으로 표현한 이 작품은 간결하면서도 참신한 이인상 화풍의 정수를 보여준다. <구룡연>은 금강산의 명승 중 하나인 구룡폭포의 아름다움을 묘사한 진경산수화이지만 실경감보다는 강건하고 날카로운 필선의 힘을 보여준다.
이인상이 사용한 필선은 전서와 예서에 뛰어났던 화가 자신의 서예적 필법을 그림에 응용한 결과로 생각된다. 화면 전체에 감도는 적막함과 쓸쓸함은 메마른 필선의 골격미(骨格美)와 어울려 세속을 초월한 절대적인 침묵의 비장한 세계를 보여준다. 비슷한 시기에 그렸을 것으로 추정되는 <장백산도>는 전경에 보이는 텅 빈 정자와 강물 너머로 이어진 원경의 산들, 적막하고 쓸쓸한 분위기 등 예찬 화풍의 영향을 보여주고 있다. <장백산도>는 비록 친구인 김상숙에게 그려준 그림이지만 고적하고 스산한 이인상의 마음 속 풍경, 즉 화가의 고독한 내면풍경을 암시해주고 있다.
음죽현감 직을 그만두고 상경한 지 2년 후인 1754년에 이인상은 음죽현에서 서쪽으로 5리 정도 떨어져 있는 설성에 은거처를 마련하고 칩거를 시작하였다. 1760년에 사망할 때까지 이인상은 설성에 종강모루(鍾岡茅樓)라는 조그만 정자를 짓고 스스로 종강칩부(鍾岡蟄夫)로 자처하며 은거자로서 여생을 보냈다. 설성에서의 은거시기에 제작한 그림들 속에는 혼자 앉아있는 은거자가 자주 등장하고 있어 주목된다. 그런데 이러한 은거자는 다름 아닌 외롭고 쓸쓸한 삶을 살던 이인상 자신의 모습일 가능성이 높다. 이인상이 설성에서 은거생활을 시작하던 1754년에 그린 <송하독좌도>(평양 조선미술박물관 소장)는 거대한 소나무 아래에 앉아 망연하게 먼 곳을 바라보고 있는 은거자를 묘사한 작품이다.
물끄러미 먼 곳을 응시하고 있는 고독한 노인의 모습은 이인상 자신의 초상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송하관폭도>는 거대한 폭포 아래에 있는 커다란 바위 위에 홀로 앉아 자연을 감상하고 있는 은일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윤곽선만으로 표현된 각진 바위의 모습과 청신한 담채 효과는 이인상의 화풍의 전형적인 특징을 보여준다. 화면 전체를 흐르는 적막하고 쓸쓸한 분위기는 고독한 은거자로서 여생을 보내던 이인상의 처연한 심회를 드러내준다. 설성에 은거한 후 제작한 이인상의 작품들을 관통하는 또 다른 흐름은 서얼로서 자신의 삶에 대한 성찰이다.
이인상의 서얼의식과 관련하여 가장 주목되는 작품은 <검선도>(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이다. 거대한 두 그루의 소나무가 교차하고 있는 곳을 배경으로 칼을 옆에 두고 단정하게 앉아 있는 백발노인을 그린 이 작품은 취설옹(醉雪翁)이라는 인물에게 봉증(奉贈)한 그림인데 취설옹은 여러 기록을 통해 볼 때 이인상이 존경했던 유후(柳逅)일 가능성이 크다. 유후는 서얼신분으로 궁핍한 생활과 사회적 멸시에도 불구하고 강한 자존의식과 도덕적 고결함으로 당시 모든 서얼들의 우상과 같은 존재였다. <검선도>는 세상의 불의와 유혹에 흔들리지 않고 강직한 성품과 맑은 정신으로 평생을 깨끗하게 살았던 유후의 고귀한 풍모를 검선의 모습으로 상징한 작품이다.
이인상의 서얼의식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또 다른 작품은 <설송도>(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이다. 위로 굳건히 뻗어 올라간 소나무의 몸통과 옆으로 굽어서 휘어진 늙은 소나무가 교차하는 모티프는 <검선도>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어 이 두 작품의 주제적 친연성을 보여준다. <설송도>는 매섭고 차가운 바람이 부는 곳에 자리잡은 두 그루 늙은 소나무가 추운 겨울을 이겨내는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뿌리를 앙상하게 드러낸 채 엄동설한의 혹독한 추위를 견디며 강인하게 생명을 보전하고자 애쓰는 두 그루 소나무의 모습은 군자의 도덕적인 고결함과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는 불굴의 의지를 상징한다.
이러한 소나무의 모습은 고통과 좌절의 시간을 이겨내려는 서얼로서 이인상의 강인한 삶의 의지를 보여준다. 즉 <설송도>는 서얼이라는 신분적 한계로 사회적 멸시와 냉대를 참아내며 살아야했던 이인상 자신의 비장한 삶의 자세와 견고한 정신세계를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인상은 당대에 화가로서보다 서가(書家)로서 명성이 더 높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규상(李奎象)의 『병세재언록(幷世才彦錄)』과 같은 인물지에도 이인상을 서가의 열전에 포함시켜 놓았다. 서예가로서의 배경에서 숙부인 이최지(李最之)의 전각 솜씨를 빼놓을 수는 없다. 이최지는 당대 예서에 능통했던 선비로 명성이 높았지만 전각에도 뛰어난 솜씨를 지녔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려서 부친을 여읜 이인상에게 예학자로서의 면모가 전수되었던 것과 동시에 전각과 여기에 필수적인 전서에 관한 조예가 전해졌음을 쉽게 유추할 수 있다. 그 결과 서예가로서 이인상은 전서의 명가로 남게 되었다. 그리고 어린 시절부터 이인상이 따랐던 스승 김진상(金鎭商) 역시 숙종조 예서의 명가로 이름을 떨쳤으므로, 그로부터 받은 영향도 감안하지 않을 수 없다.
이인상(李麟祥), 전서(篆書)《원령필(元靈筆)》 수록, 18세기 중반, 종이에 먹, 42×35.4cm, 국립중앙박물관
비록 전서의 명가로 명성을 남기기는 했으나 초년기 서예 학습은 초당(初唐) 해서부터 시작하였다. 19세이던 1728년에 쓴 「구성궁예천명발(九成宮醴泉銘跋)」은 초년기에 구양순(歐陽詢)과 같은 초당 해서 학습에 노력을 기울였음을 잘 보여준다. 이 시기 이인상의 서예작품으로 알려진 것이 없기 때문에 서풍을 직접 확인할 수는 없으나, 초년기 서예 학습은 보편적인 경로를 밟았던 것으로 보인다.
반면 1738년 기년작인 <수석도>에 쓴 제사는 구양순의 해서에서 벗어난 서풍을 보여준다. 뼈대가 강하고 날카로우면서 위아래가 시원하게 뽑힌 서풍을 구사했던 구양순의 그것과 달리 <수석도>의 서풍은 행기가 가미되기는 했지만 획에 살집이 많고 옆으로 벌어진 글자의 형태 등으로 볼 때 구양순에게서는 멀어진 모습을 보여준다. 이는 장년기에 들어선 이인상이 이미 자신의 서풍을 어느 정도 형성하였음을 보여주는 예로 들 수 있다. 그러나 현전하는 서화작품에서 볼 수 있는 글씨는 1738년 이후에도 다양한 면을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비록 구양순을 곧바로 감지하기는 어려우나, 뼈대를 잘 살려내어 날카로우면서 단단한 획을 구사하거나, 살집을 가미하고 자체의 기울임 없이 수평을 유지한 채 좌우의 향배를 배려하여 안진경(顔眞卿)의 서풍을 떠올리게도 한다. 또한 편지 등에 사용한 생활서체에서는 의측1)이 강하고 획을 생략시키기도 하여 언뜻 보기에 법도에서 벗어난 듯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는데, 이는 그가 메이지 않는 풍류적 기질이 풍부했음을 보여주는 면이기도 하다. 다만 그러한 풍류적 기질은 전통과 정통에 대한 충분한 이해와 학습에 따른 결과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서예에 있어 이인상의 전통과 정통에 대한 이해와 학습은 실제적인 노력과 결과물로 나타났으며, 이인상의 전서(篆書)가 그러한 면을 잘 보여준다. 전서의 각체를 잘 썼으며, 특히 청동기 등의 관지에 쓰였던 고전(古篆), 혹은 주서(籕書)나 대전(大篆)으로 불리는 서체에 매우 밝았다. 조선시대 전서는 18세기 이전까지도 자체에 대한 이해가 높지 않은 경우가 많아 특정 소수의 서예가들만 구사할 수 있었으며, 대전은 특히 쓸 수 있는 서예가가 드물었다. 그런 가운데 전서의 명가를 배출한 몇몇 가문들은 집안의 전통처럼 전서가 전수되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인상은 그러한 면에서 이최지의 전각과 예학(禮學)에 힘입었을 가능성이 높다.
가령 예학의 경우 예기(禮器)로서 청동기에 대한 이해를 위한 여러 가지 문헌을 접하게 되는데, 중국에서 간행된 고기(古器)에 대한 연구서들에는 그 기물에 새겨졌거나 양각된 관지의 탁본 등을 함께 싣는 것이 상례였다. 대표적인 것으로 송(宋) 설상공(薛尙功)이 편찬한 《역대종정이기관지법첩(歷代鐘鼎彝器款識法帖)》은 대전 자체를 학습하기 위한 좋은 참고서로, 이인상과 같은 서예가가 참고하기에 매우 적합한 문헌이었다. 이인상의 대전은 이러한 법첩류의 학습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이인상이 남긴 대전 작품들은 앞서 든 법첩을 매우 성실하게 공부한 듯 자체의 오류가 거의 없이 완벽한 서체학습의 흔적을 보인다.
현재 기년작으로 전하는 작품으로는 1748년 39세에 쓴 <난정서>를 들 수 있는데, 이 작품은 윤득화(尹得和) 본(本) 《천고최성(千古最盛)》 서화첩에 포함되어 있어 이미 30대 후반의 이인상은 동시대에 명서가로서 인정을 받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이와 함께 절친했던 김상숙(金相肅)에게 준 <고백행(古柏行)>도 그의 대전 솜씨가 당대로서는 발군의 실력이었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예라고 하겠다.
이인상의 소전(小篆)은 대전에 비해 개성이 많이 가미된 것으로 보이는 서체다. 대전이 소전에 비해 엄정하며, 소전은 정통 소전의 결구와 획법을 준수한 것과 함께 이완된 형태도 많다. 그러나 그 이완은 당(唐) 이양빙(李陽氷)의 전서에 근간을 두고 있음은 분명하며 의도적으로 이완된 자체를 구사한 것이지 오류를 낸 것은 아니다. 국립중앙박물관의 《원령필첩(元靈筆帖)》 3책에는 이인상의 예서와 전서 작품들이 다양하게 실려 있는데, 그 가운데 중책(中冊)에 소전이 집중되어 있으며 그 서풍은 단정한 이양빙 소전의 전형을 잘 따른 예이다. 그리고 같은 서첩의 나머지 대부분은 소전을 활달하게 쓴 작품들로 채워져 있는데, 이들은 대개 비백(飛白)을 사용한 것이 눈에 띈다.
원래 비백은 예서에서 주로 나타난 기법으로, 전서에서는 보이지 않았는데, 이인상은 국립중앙박물관의 필첩과 국립중앙도서관의 《묵수(墨藪)》, 미국 버클리Berkely 대학 등에 소장된 《보산첩(寶山帖)》과 같은 서첩들에서 자신의 신운(神韻)을 드러내는 듯 다양한 자형을 구사하였다. 이 외에도 단양 사인암의 바위벽면에 이인상의 전서가 몇 점 남아 있다. 이들 각석들은 대개 1751년을 전후로 한 글씨들로 후년기 전서 서풍의 일단을 보여준다.
비록 전서로 명성이 있었지만 이인상은 예서에도 뛰어난 면모를 보였다. 동시대 활약했던 송문흠(宋文欽) · 이윤영(李胤永) 등의 예서에서 볼 수 있듯이 이인상의 예서도 후한(後漢) <조전비(曹全碑)>에 근간을 둔 서풍을 띠고 있다. 그러나 <조전비>에 근간을 두고 있다고 하더라도 모방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필법을 예서에서도 보이고 있다. 또한 묘표(墓標) 등에 보이는 예서 서풍은 앞선 세대인 김수증의 서풍과도 닮은 점이 나타나기도 한다. 이인상의 서예가 보여주는 이런 개성은 글씨에 대한 인식을 드러낸 짦은 글 등에서 그 근원이 보이는데, 김상숙의 서첩에 붙인 발문에서 다음과 같은 생각을 피력했다.
"고인들의 묘처(妙處)는 졸박(拙樸)한 곳에 있지 공교(工巧)한 곳에 있지 않았고, 담박(淡泊)한 곳에 있지 짙은 곳에 있지 않다. 근육과 뼈대의 기세와 풍치에 있지 외모와 향기, 맛에 있지 않다. 마땅히 그 신(神)이 닿는 곳은 고인이라도 스스로 알지 못한다."
古人玅處 在拙處 不在巧處 在澹處 不在濃處 在筋骨氣韻 不在聲色臭味 當其神到 雖古人亦不自知
《관계윤서십구폭(觀季潤書十九幅)》, 1756년
겉으로 드러나는 외형보다는 내면에 가치를 둔 이인상의 서예관에서 엿볼 수 있듯이, 실제로 자신의 글씨에서 졸박(拙樸)과 담박(淡泊)을 재현해 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점을 강조한 이인상의 글씨에 대해
"능호(凌壺)의 묘처는 진한 데 있지 않고 옅은 데 있으며 숙(熟)한 데 있지 않고 생(生)에 있다. 오로지 아는 사람만 알 것이다."
凌壺妙處 不在濃而在乎澹 不在熟而在乎生. 唯知者知之
「능호필첩발(凌壺筆帖跋)」
라는 평에서도 이인상의 글씨가 드러내고자 한 가치가 무엇인지 잘 드러난다. 그것은 정제되고 세련된 미와는 거리가 있으며, 한 군데 정도는 부족한 듯하면서도 생기가 있는 글씨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기와 졸박함이 단순한 가벼움이 결코 아님은 이인상의 글씨에 대한 또 다른 자료들에서 확인된다.
"옥저전(玉筯篆)에 뛰어났는데, 굳세고 바르며 소략하고 평이하며, 단순질박하고 단정하다."
精於玉筯 勁直簡易 純質平正
황경원(黃景源), 『강한집(江漢集)』 권17, 「祭李元靈文」
"그[이인상]가 고심하는 곳은 '옛 우물의 맑고 투명함[古井湛湛]'과 '가을달이 바야흐로 중천에 떠 있는 모습[秋月方中]'이라 했다."
其苦心所在處 古井湛湛 秋月方中
이윤영 ,『단릉유고(丹陵遺稿)』 권13, 「元靈古篆贊」
이러한 인용문들의 내용을 보면, 모두 이인상의 작품은 일생과 맥을 함께 했음을 볼 수 있다. '글씨는 곧 그 사람'이라는 명제를 뒷받침하기에 이인상은 가장 적절한 인물이며, 서화는 그러한 인품을 담아낸 가장 적절한 매개 가운데 하나였다고 할 수 있다.
집필자
장진성(일반회화), 유승민(서예)
주요 작품
隱仙臺(1737), 樹石圖(1738), 樹下閑談圖(1739), 柳川店逢壚圖 · 茅亭秋江圖(1749), 江上草樓圖, 九龍淵, 長白山圖, 松下獨坐圖(1754), 松下觀瀑圖, 劒僊圖, 雪松圖, 篆書 · 蘭亭序(1748), 古柏行, 元靈筆帖, 墨藪, 寶山帖
[네이버 지식백과] 이인상 [李麟祥] (한국 역대 서화가 사전, 2011. 11.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