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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위지 동이전
“위략(魏略)에 이르기를 주나라가 약해진 틈을 타 연나라가 왕을 칭하고 동쪽 땅을 다스리려고 하자(欲東略地), 옛날 기자(箕子)의 후손인 조선후(朝鮮侯)도 역시 스스로 왕이라 칭하고(亦自爲王) 병사를 이끌고 연나라를 공격하여 ‘주(周)’의 왕실을 지키려 했다.” -
연나라가 제·조·위·중산국 등 다른 네 나라와 함께 왕(王)을 칭한 것은 BC 323
조선후(朝鮮侯) 준(準)이 감히 왕(王)을 칭하였다.
“연나라는 동쪽으로 조선과 요동에 접해 있고, 북쪽으로는 임호와 누번이 있습니다.(燕東有朝鮮遼東~)”
(소진 같은 유세가가 연나라를 중심으로 말을 꺼낸다면 있는 순서대로, 즉 조선→요동 순으로 차례차례 말했다고 보는 게 상식이 아닐까. 그러니까 조선은 요동(랴오둥)의 서쪽, 즉 랴오시(遼西)에 있었다는 말이 아닐까. 또 하나 소진의 말에서 또다른 해석을 할 수 있다면 이 시기, 즉 BC 334년에는 최소한 조선과 랴오둥은 연나라의 영역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사기’ 흉노열전
“연나라 명장 진개(秦開)가 흉노에 인질로 가 있으면서 그들의 신뢰를 받은 후 돌아와 군대를 이끌고 동호(東胡)를 습격, 패주시켰다. 동호는 1000여리나 후퇴했다. 진개는 훗날 자객인 형가(荊軻)를 수행해서, 진왕(秦王·훗날 진시황)을 암살하려 했던 진무양(秦舞陽)의 할아버지이다. 연나라는 조양, 양평에 이르는 장성을 쌓고~.”
소왕(昭王·재위 BC 312~BC 279년)이 즉위했고, 마침내 BC 280년을 전후로 진개를 파견
진개가 조선을 치고 2000리를 넓혔다는 기사는 삼국지 위지 동이전 한조에서만 나오며. 나머지 역사서는 모두 동호
1000리만을 기록>
-물론 앞서의 동북방에서 남하하여 하나라를 멸망시키고 600여년간 대륙을 제패한 동이족 상나라가 무너지면서 이후 상나라의 유민들이 돌아와 발해만 요서 대릉하의- 기원전 2천년경에 고구려 치의 거대 석성 13개을 이미 구축한 강력한 정치 집단의 유적이 있다- 토착세력과 함께 여러 상의 영향을 받은 특징적 문화와 함께 남산근 문화를 꽃피우면서 독창적 비파형 동검 시대를 열게 된다.-
위에서 기록들은 편한 설명을 위해 진개의 고조선 침략 이전의 일련의 서쪽 왕조 사서에 기록된 사건 내용들입니
다.
물론 이들 기록이 상당히 자기 중심적이고 타국을 보수적 시각에서 기록한 내용들임을 인지하고 조선에 대한 인
식을 봐야 할것입니다.
여기서 연나라와 조선 사이에 동호가 있거나 동호가 조선일 가능성을 배제할수 없으며 공간적 인식도-고조선 중기
에서 말기에도 요서 지역도- 함께 고려해서 봐야할 부분입니다.
<분명한 것은 기원전 4,3세기경 당시 왕이란 곧 천자적 동급의 패자적 지위로 연나라왕 위세에서 조선 역시 왕을
칭하고 이후 주나라를 빌미로 연나라를 공격하려 한 점등은 보수적 시각의 조선에 대한 기술에서도 당시 조선의 국
력이나 위세가 결코 연나라와 비교해서 약하지 않았다는 것을 반증합니다.>
서쪽 대륙에서는 기본적으로 기원전 5세기 부터 철기의 사용이 본격화 되고 연나라는 전국 7웅중 철기의 발달이 상
당한 나라입니다. 이후 BC 280 전후로 진개의 고조선 성공 정벌 사이 고조선의 국력이나 이를 뒷바침하는 문명이
단순히 청동기적 수준에 머무러는 상황에서 그런 위세를 말하기는 어려운 부분입니다. 또한 연나라가 소공 이전의
제와 주나라가 조선으로 인식한 기자의 후예인 동이 계열 중산국에 의해 패망 직전의 혼란 상황등의 일부 유민이동
이나 기타 교류에 의해 진개의 침략 이전에도 연나라와의 발달한 철기 문명들이 고조선과 함께 교류 상호 영향을
받고 발전해왔을 가능성등으로 조선 역시 왕을 자칭하고 연나라와 대등한 공세를 취할 문명적 국력적 상황일
가능성은 높다고 봅니다.- 열도 섬나라처럼 지형적 한계인 대협을 두고 이동이나 문명적 교류의 어려움이 훨씬 들
한 자유로운 시대상황-
그런 상황에서 기본 일천리에서 혹은 이천리를 말하는 진개의 조선 정벌 성공스토리 이후 요동지역의 변화나 전후
의 시대 변화상은 어떠한가?
중국의 고고학자 천핑(陳平)은 ‘연문화(燕文化)’라는 책에서 조심스럽지만 이렇게 해석한다.
“이우뤼산(醫無閭山·랴오시 푸신:阜新)을 기점으로 동쪽으로는 전국시대 연나라 문화의 전형적인 유적·유물이 보이지 않는다. 연나라 희왕(喜王) 33년(BC 222년) 랴오둥으로 피신하기 이전에는 연나라가 진정으로 랴오허(遼河)를 건너 랴오둥 지역에 진입하지 못했다.“
즉 요동 지역에서는 유물이나 유적이 하나의 셋트로 일련의 연나라 문화로 말할수 있는 부분은 아니라는 뜻입니
다.
기원전 4세기 말에서 3세기 경 사이를 전후해서 요동과 평양일대의 대동강 위를 흐르는 청천강 이북으로 완전한 지상 주거와. 구들(온돌) 그리고 철제 농기구등 완연한 철기 문화를 꽃피우는 연화보 세죽리 철기 문명과 청천강 이남으로 세형 동검 문화가 나타나고 있는데 일 반적으로 과거 부터 현재에도 이 요동과 한반도 북부의 철기는 전국계의 영향을 받은 그것을 넘어 연나라의 지배 지역으로 까지 해석되어오고 자칭 고조선 전문가 송뭐 교수는 그런 주장 을 아직도 하고 있지요. 이것은 동북아에서 가장 앞선 우리의 청동기시대를 보이는 발해만 일 대의 언급은 뒤로하고 철기 시대 역시 진개의 고조선 침략과 맞물려 우리 자체의 철기 문화의 형성없이 외부의 침략과 지배에 의한 수동적 영향하에 철기 문명이 꽃을 피웠다는 일제 사관 의 기본 모멘텀입니다. 물론 이런 사관은 이병도의 뻘짓으로 한반도 안까지 만리장성을 그리 고 현재 중공은 고구려 박작산성위에 만리장성을 압록강 까지 신축해 놓는 황당함을 연출했습 니다.. 그리고 단순히 요동 철기 문명을 고조선 관련 세력의 토착적 문화와 함께 정치적 불안 정으로 들어오는 이민계열을 지배 계층마냥 보는 이런 사관은 이후 세형 동검권 지역을 후기 고조선 중심 수도로 하여 한사군 평양설이라는 일제사관의 결정판을 만들어 놓습니다. 그리고 이런 종속적 사관은 이후 수백년간의 한반도 북부를 한나라가 다스림으로서 정치체의 발달을 느리게 하고 이후 삼국시대도 미개하다는 해괴한 원삼국으로 그래서 더욱 정치적 발전 수준이 낮은 남부는 이후 섬나라 고분시대에 임라 일본부설의 기본 베이스를 이룹니다. 이것 은 우리가 청동기에서 철기시대를 지나고 있을때에도 신석기 조몬시대에 살고 있던 섬나라인 들이 이후 우리의 세력들이 일구어 낸 야요이 시대의 뒤늦은 섬나라 발전 속도와 기본 동률적 시작으로 짜 맞추기 위해 만들어진 일련의 식민 사관의 기본 전술적 해석들입니다..그리고 여 기에 소위 과학적이라는? 실증사학으로 일련의 극히 일부적 유물 유적을 현재의 동북 공정처 럼 자위적 정치적 색채하에 통설로서 그리고 최근까지도 마치 바른 정설로서까지도 배우고 가르쳐 왔던 것입니다.그리고 다른 발굴이 없는 관계로 입증하기 힘들다라는 가히 그럴싸한 실증사학이라는 실증사학과 전혀 거리가 먼 해괴한 명분론을 내세우며 통설화로 다져가며 얼마전 까지도 고고학적 유물에 대해 절대 연대 측정이 아닌 일제 이후의 기본 고정화된 스펙 트럼에서 상대적 연대 측정으로 끼워 맞추면서 경우에 따라 무질서적 해석을 만들어 놓았던 점들도 지적되는 사항입니다... 그러나 현재 남부의 기원 전후로의 풍납토성이나 기타 도시유적이 발견되면서 이런 원삼국설 이라는 해괴한 학설은 헛소리고 사라졌지만 현재 남아 있는 것이 한사군 평양설과 평양이동 설입니다.이것의 기본 핵심은 바로 우리 스스로의 발전적 철기 문화가 과연 있어 우리 영역을 방어할 기본 세력화가 있었는가. 아니면 연나라 진개의 의한 지배지적 타율적 영향하의 요동 연화보 세죽리 문명도 연나라의 문화이며 지배지인가의 문제로 귀결됩니다.그리고 현재의 평 양의 낙랑 유물은 현재 학계에서의 조사에서도 일제 시대의 급조되고 매우 한정된 극히 일부 의 유물 유적 발굴이며 일제 식민 사관의 정치적 색채가 매우 강한 해석적 시각이 이후 마치 평양 일대의 수천기의 낙랑 고분이 다 한나라의 절대적 근거마냥 이후 정설마냥 재생산 각인 되어 오는 어처구니 없는 인식을 조장하고 지금도 그런 일제 보수 성향의 사람이 있습니다.. 일부적 유물과 유적발굴의 정치적 색채의 불완전하고 매우 위험한 시각을 마치 보편적이고 전 체적인 연구성과와 체계성 마냥 포장하고 해방 이후에도 제대로된 연구성과없이 -최근에야 조금식 본격적인 연구가 진행되나 정설??처럼 각인된 고정관념의 기본 전제를 벗어나기 힘든 영향력이 있다- 재생산 강화하며 일반인들을 호도하는 것을 가르침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 니다! 그리고 이런 불안전한 극히 일부적이고 정치적 색채 해석의 낙랑의 시대를 소급하여 이 곳이 위만조선 말기의 고조선 중심도시로서 한사군의 지배지역이라는 마치 절대적 신앙마냥 말하고 있는 보수층의 극단적 학자들도 있는 상황입니다.!! 북한과의 낙랑 관련 유물과 연구 교류를 더욱 활발히 열린 마음으로 제대로 직시하고 연구해여 일부적 해석에 머무르는 차원에 서의 우가 아닌 다양하고 전체적인 체계성과 깊이의 연구들이 진행되어야 할 사항입니다. <최근 발견된 정치적 문명적 발전이 느린 남부지역에서의 이미 기원전 7세기경의 초기 철기 사용이나 주거지형태등은 요동과 한반도 북부의 초기 철기시대가 더욱 앞선 상황을 추측할수 있으며 나아가 바라바시등의 앞선 철기 유적등은 세죽리 연화보 문명이 기원전4, 3세기경에 는 완연한 철기 문화와 실생활의 파급적 발전된 문명 수준을 누릴수 있는 전기적 배경이 되었 을 가능성등과 함께 구들(온돌) 등의 주거지나 실생활적 철제 농경기구들은 단순한 명도전등 이나 기타 진개의 침략만으로 수동적 철기 수용의 근거로 해석하는 부분은 지양될 필요가 있 습니다.즉 전국계의 영향 이젼에 이미 요동과 한반도 북부은 상당한 철기적 발전 상황과-얀콥 스키 극동 철기 문화권이 도리어 서쪽 왕조에게 직,간접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도 배제할수 없 다.-이후 그런 완숙한 고조선 관련 철기 문화를 만들어 내었다는 점으로 인식될수 있을 것입 니다.>
BC 7세기 철기유물 강원 홍천서 출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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