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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3일 [대림 제1주간 화요일]
루카 10,21-24
듣는 마음을 어떻게 끝까지 유지할 수 있을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시는 ‘이것’은 무엇일까요? 또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셔서 펼치시려는 ‘아버지의 선하신 뜻’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
아버지의 선하신 뜻은 명확합니다.
바로 하느님의 말씀을 보고 들을 수 있는 철부지들을 가려내셔서 행복과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철부지들을 선택하셔서 당신을 드러내십니다.
성모님의 유럽 발현지 중 가장 큰 두 군데는 루르드와 파티마입니다.
어른에게 나타나셨을까요? 어린이들입니다.
루르드에서 베르나데트에게 나타나셨을 때 그녀의 나이는 14살이었습니다.
성모님은 당신에게 무조건 순종할 수 있는 아이를 택하셨습니다.
더러운 물을 마시고 손으로 구덩이를 파서 샘물이 나오게 할 아이입니다.
어른들은 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나도 어른이에요!”라고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른은 자신의 뜻이 있습니다.
파티마는 어떻습니까? 루치아 10살, 프란치스코 9살, 히야친타 7살이었습니다.
그들은 믿지 못하는 어른들의 박해를 이겨내야 했습니다.
그렇게 많은 이들에게 알려져 수만 명이 하늘의 기적을 목격하게 하셨습니다.
어른들은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세상에서 잃을 게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오랜 전쟁을 바꾼 잔 다르크도 있습니다.
그녀가 성 미카엘에게 사명을 받은 것은 13세,
전쟁에 나간 것은 16세였습니다.
어린이들은 순종합니다.
잃을 게 없기 때문입니다.
부모만 있으면 되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종교 심리학자 스펜서(Spencer) 박사가 1,000명을 대상으로 몇 살에 하느님을 깊이
체험했는지를 조사했습니다.
548명이 20세 이전에 신비체험을 하였습니다.
337명이 20세에서 30세 사이에, 96명이 30대에, 그리고 40대에 종교체험을 한 이는 불과 15명, 50대에 신비체험을 한 사람은 4명에 불과하였습니다.
왜 어릴수록 주님을 만나기가 쉬울까요? 주님을 만나는 데 장애가 되는 것들이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장애가 되는 것은 분명 철부지로 있지 못하게 만드는 것일 것입니다. 그것들은 무엇일까요?
바로 재산과 쾌락, 권력일 수밖에 없습니다. 어린이들은 추구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그것들을 추구하면 뭐가 안 좋을까요? 본인이 ‘어른’이라고 믿게 됩니다.
어른은 자신이 판단하고 행동하기 때문에 조언이 필요 없습니다.
하느님의 조언에 귀를 막게 되는 것입니다.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갖은 좋지 못한 감정들입니다.
후회하고 걱정하고 우울하고 공허합니다.
한 마디로 어린이 때의 기쁨이 빼앗기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가지는 것과 먹는 것과 강해지는 것을 포기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가난을 주장하다가 가족을 다 굶겨 죽일 수도 있습니다.
다만 그 모든 것이 주님께로부터 받는 것임을 고백하면 됩니다.
이 균형을 지켜야 합니다.
이카루스 신화는 특히 순수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시작할 때 교만과 오만의 위험성을 보여주는
강력한 이야기입니다.
이카루스는 크레타섬에 미궁을 만든 뛰어난 장인이자 발명가인 다이달로스의 아들입니다. 미노스 왕의 총애를 잃은 다이달로스와 그의 아들 이카루스는 미궁에 갇히게 됩니다.
탈출에 대한 절박함 속에서 다이달로스는 자신의 기술을 사용하여 깃털과 밀랍으로 만든 두 세트의 날개를 만들었습니다.
다이달로스는 이카루스에게 너무 높지도 너무 낮지도 않게 날라는 명확한 지시를 내렸습니다. 너무 낮게 날면 바다의 습기로 인해 날개가 손상되고, 너무 높이 날면 태양열에 밀랍이 녹을 수 있습니다.
처음에 이카루스는 아버지의 말을 주의 깊게 들었습니다.
바다 위로 날아오르는 여행을 시작하면서 이카루스는 비행의 자유와 짜릿함을 느꼈습니다. 한때 순수하고 순종적이었던 그의 마음은 교만으로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중력을 거스르는 기쁨과 탁 트인 하늘의 아름다움은 그를 천하무적처럼 느끼게 했고, 마치 인간의 한계를 초월할 수 있는 것처럼 느끼게 했습니다.
오만이 커진 그는 아버지의 경고를 무시하고 하늘에 닿아 자신의 힘을 증명하고 싶었습니다.
그가 태양에 더 가까이 다가가자 열이 그의 날개를 묶고 있는 밀랍을 부드럽게 하기 시작했습니다.
깃털은 하나씩 떨어져 나갔고, 이카루스는 자신의 자존심이 가져온 결과를 너무 늦게 깨달았습니다.
그의 날개는 부서졌고 그는 바다로 뛰어들어 지금은 그의 이름을 딴 이카리아 해에 익사했습니다.
여기에서 날개는 바로 우리를 어른으로 만들어주는 돈과 쾌락과 명예입니다.
없어도 죽고 통제하지 못해도 죽습니다. 이것을 준 분께 순종할 수 있을 정도만 가지고 이용하여
중용을 지켜야 합니다.
버리지도 말고 과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이것이 철부지의 모습을 유지하는 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이것을 잘 통제할 방법을 알려주셨습니다.
바로 ‘십일조’였습니다.
십분의 일을 바치며 모든 것을 하느님으로부터 받았음을 스스로 되새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머지 십분의 구를 가지면서도 하느님께 순종할 수 있습니다.
선악과를 바치라고 하신 사랑의 규율을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2월3일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사제 기념일]
복음: 루카 10,21-24:
주님, 당신께서 원하시는 곳이면 어디에나 저를 보내 주십시오!
성탄 전까지는 보통 저희 피정 센터가 살짝 비수기여서 조금 쉬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림 시기가 시작되다 보니, 특강 성수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여기저기 뛰어다니고 있습니다.
태안에서 남도 이쪽으로, 서울로, 서울에서 반대쪽 남도 쪽으로...
폐차장으로 갈 때가 얼마 남지 않은 저를 아직도 불러주시니 크게 감사하며 다니고 있지만, 몸이 옛날같지 않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많이도 다녔으니 이제 하산이나 은거할 때가 된 것이 아닌가 갈등이 만만치 않습니다.
그런데 이방인들의 복음 선포자로 몸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달리고 또 달리셨던 바오로 사도, 주치의로부터 몸 상태가 더 이상 기워입을 수 없는 낡은 코트 같다는 진단을 받고 나서도
죽기살기로 뛰어다니셨던 돈보스코를 생각하면, 가만 있을 수가 없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도 큰 격려와 자극이 됩니다.
“후손들에게 신앙을 전수하고 복음을 선포하는 일에 은퇴는 없습니다.”
그리고 오늘 축일을 맞이하시는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사도도 결코 빼놓을 수 없습니다.
그는 당신이 만나고 체험한 그 좋으신 하느님을 전하기 위해 교통편이라고는 목선밖에 없던
그 옛날 인도는 물론이고 말레이시아, 파푸아 뉴기니아 근처 몰루카 제도, 필리핀 근처 모로타이, 그리고 일본까지 건너오셨습니다.
그의 전도 여행길은 바오로 사도의 전도여행길 못지않았습니다.
당시로서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먼 거리를 여행하셨습니다.
수많은 위험과 역경을 넘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기 위해 고군분투했습니다.
그가 개종시킨 사람들의 숫자는 1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합니다.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와 동행한 페르난데스 수사의 기록을 통해 우리는 일본 선교여정이
얼마나 험난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혹독한 추위, 눈보라, 예측할 수 없는 일본인들의 태도가 아무리 극심해도 하비에르 신부님의 굳은 결심을 바꿀 수 없었습니다.
배를 타고 이동할 때면 해적들이 우글거렸습니다.
산길을 걷다가 거친 눈보라와 살을 에는 칼바람 때문에 죽을 고생을 했습니다.
발은 퉁퉁 부어올랐고, 더 이상 걷지 못해 쓰러지곤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을 모르고 만나지 못한 채 멸망의 길로 가는 것이 그리도 안타까웠습니다.
그래서 일분일초도 아끼지 않고 복음 선포에 매진했습니다.
인도에서 일본에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만나게 하는 은총을 선물로 주고 난 그는 그것도 모자라 또 다른 미지의 땅인 중국으로 건너가길 원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는 중국 코앞 산첸섬에서 46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사망의 원인은 과도한 복음 선포로 인한 열병이요 과로사였습니다.
“만일 제가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저에게 화가 미칠 것입니다.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당신은 제가 무엇을 하기를 바라십니까?
원하시는 곳이면 어디에나 저를 보내 주십시오. 인도까지라도.”
“여러분들의 게으름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천국의 영광에 들어가지 못하고 지옥으로 떨어지고 있는지 모릅니다.
만일 이 광대한 하느님의 포도밭에서 저와 함께 복음을 전할 뜻이 있는 분이 있다면, 결단코 저는 그분들의 노예가 되어 섬길 것을 약속합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대림 제1주간 화요일 강론>
(2024. 12. 3. 화)(루카 10,21-24)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사제 기념일)
<우리는 모두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특별한’ 존재입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 말씀하셨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버지께서 누구이신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에게 따로 이르셨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루카 10,21-24)”
1)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은 기득권층에 속한 사람들이고, ‘철부지들’은 소외계층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인간 세상에서 소외계층에 속해 있는 사람들이 하느님의 구원 사업에서는 소외되지 않고 구원받는 것에 대한 감사기도입니다.
<한 사람도 소외시키지 않고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고, 예수님의 기도는 바로 그 하느님의 선하신 뜻에 대한 감사기도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기득권층 사람들이 구원받지 못하게 된 것을 감사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기득권층 사람들도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스스로 기득권을 내려놓고 자기를 낮추면...
‘철부지들’을 넓은 뜻으로 ‘영적으로’ 소외된 사람들, 즉 죄인들도 포함하는 말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기도는 곧 ‘나의(우리의)’ 감사기도입니다.
“보잘것없는 죄인일 뿐인 저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이렇게 구원의 길로 불러주시니 감사드립니다.”
<대림 시기는 보잘것없고 하찮은 죄인일 뿐인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주님께서 오시는 것에 감사드리는 시기이고, ‘나를’ 구원하려고 부르시는 주님의 부르심에 더 잘 응답하려고 노력하는 시기입니다.>
2)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지혜로운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어리석은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강한 것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약한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있는 것을 무력하게 만드시려고, 이 세상의 비천한 것과 천대받는 것 곧 없는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어떠한 인간도 하느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하느님에게서 오는
지혜가 되시고, 의로움과 거룩함과 속량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에도 ‘자랑하려는 자는 주님 안에서 자랑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1코린 1,27-31).”
인간들이 자랑하는 학식, 학위, 명예, 재산, 지위 같은 것들은 하느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것’들입니다.
그런 것들을 내세우면서 잘난체하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마태 18,3-4).”
<자신을 낮춘다는 말은, 높은 사람인데도 낮은 사람처럼 행동한다는 뜻이 아니라, 실제로 자기 자신은 하느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것을 겸손하게 인정하고 고백한다는 뜻입니다.
진심으로, 진실하게 그렇게 하는 사람은 하늘나라에 들어갈 것이고, 그곳에서 주님과 사랑으로 일치를 이룰 것이고, 주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는 ‘특별한 존재’가 될 것입니다.>
3)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라는 말씀은, 인간들을 심판하거나 구원하는 일에 관한 권한을 하느님께서 예수님께 넘겨주셨다는 뜻입니다(요한 5,22).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라는 말씀은, 요한복음에 있는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은 누구나 나에게 온다(요한 6,45).”에 연결됩니다.
하느님을 제대로 믿고 하느님 뜻에 합당하게 사는 사람은 누구나 예수님을 주님이시며 메시아이신 분으로 믿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버지께서 누구이신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라는 말씀은, 요한복음에 있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에 연결됩니다.
예수님만이 구원의 길이고, 예수님의 가르침만이 구원의 진리이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만이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사는 사람”을 뜻하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특정 인물들만 따로 선택하셔서
그들만 구원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아버지를 알다.’는 ‘아버지와 일치를 이룬다.’,
즉 구원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23절-24절의 말씀은, 메시아를 기다리기만 했다가 고성소에서 구원받은 구약시대 사람들과는 다르게, 메시아를 직접 만나고, 메시아께서 주시는 구원을 직접 받게 된 신약시대 사람들은 복된 사람들이라는 뜻인데, 당신이 바로 그 메시아라는 것을 암시하신 말씀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