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알 하나가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 미사>
(2023. 5. 29. 월)(요한 12,24-26)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요한 12,24-26).”
여기서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라는 말씀은,
“안 믿는 사람들의 눈에는 나의 죽음이 죽음으로만 보이겠지만,
나의 죽음은 죽음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해서 씨를 심는 일이다.” 라는 뜻입니다.
<밀알 하나를 땅에 심는 일은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을
가리키고, ‘많은 열매’는 사람들의 구원을 뜻합니다.>
우리는 씨를 땅에 심는 일이,
그 씨를 죽이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씨를 땅에 심는 것은, 그 씨 속에 들어 있는 생명력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것을 알고 있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도 죽는 것으로 끝난 일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해서 잠시 거쳐 간
과정일 뿐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고, 믿고 있습니다.
여기서 ‘죽지 않으면’이라는 말은, 죽어야만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이 아니라, 인간들의 죄를 대신 속죄하기 위한 속죄 제물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이고, 그렇게 하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라는 말씀은,
구원과 영원한 생명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이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것들에 대해서만 집착하는 사람은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고 노력하면서,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것들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사람은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영원한 것을 얻고 싶다면 허무한 것들에 대한 욕심과
집착을 버리고, 영원한 것만 희망하고 추구해야 합니다.
혹시 사람들 가운데에는 “지상에서는 부귀영화를 누리고,
하느님 나라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누리면 좋지 않은가?” 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렇게 둘 다 가질 수는
없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에 나오는 부자가 좋은 예입니다.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루카 16,19).”
“부자도 죽어 묻혔다. 부자가 저승에서 고통을 받으며 눈을
드니,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곁에 있는 라자로가 보였다.
그래서 그가 소리를 질러 말하였다. ‘아브라함 할아버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라자로를 보내시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제 혀를 식히게 해 주십시오.
제가 이 불길 속에서 고초를 겪고 있습니다.’(루카 16,22ㄴ-24)”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는 라자로처럼 살아야 한다는 가르침이
아니라, 그 부자처럼 살면 안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지상에서 사는 동안에 누리고 싶은 것들을 다 누리고 살았지만,
저쪽 세상에 가서는 한 방울의 물이라도 달라고 애원하는 처지가
된 부자는, “자기 목숨을 사랑하다가 목숨을 잃은 사람”입니다.
그는 나중에 어떻게 될지는 생각하지 않았고, 또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일에는 관심 갖지 않았고, 그래서 그것을 희망하거나
청하지도 않았고, 이웃의 고통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었고,
그저 자기 한 몸이 부귀영화를 누리고 즐기는 것만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살았기 때문에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모든 것을 잃은 것과 같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바란다면 누구든지 나를 따라야 한다.”
인데, 공관복음에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 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내가 있는 곳”은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는 곳,
즉 하느님 나라이고,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점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라는 점입니다.
<우리가 따르는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처럼 우리도 부활하기를 원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따르는 것인데, 그 방법은, 또는 그 길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을 따르는 일의 목적이 아니라 방법입니다.
그렇지만 모든 사람들에게 일률적으로 똑같은 십자가가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마다 십자가의 크기도 다르고, 내용도 다릅니다.
또 십자가라는 말이 항상 순교나 죽음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신앙인들이 전부 다 순교를 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마태 10,23).>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 비유에 나오는 사제와 레위인은, 강도를 당해서
죽어가는 사람을 보았으면서도, 사랑을 실천하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을 외면하고, 자기 한 몸의 편안함만을 찾으면서
그냥 가버렸는데(루카 10,31-32), 착한 사마리아인은
죽어가는 사람을 가엾게 여기고, 자기의 시간과 돈을 들여서
사랑을 실천했습니다(루카 10,33-35).
바로 그 사마리아인의 사랑 실천이 곧 “자신을 버리고 자기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기꺼이 받아들여서 지고 주님을 따른 일”입니다.
- 송영진 신부님 -
첫댓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라는 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