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는 차게 배는 고프게 다리는 따스하게.”
일타스님
머리와 배에 해당하는 지도자들과 중산층들이
덜 가진 듯 참고 살며 대신 발에 해당하는
서민들을 따스하게 해 준다면
이 나라는 부강해지며 평안해집니다.
요순임금이 그랬듯이 역사적으로도
역대 왕들이 백성을 먼저 생각하는 정치를 폈을 때
태평성대가 구가됐습니다.
반대로 권력암투와 이권시비에 휘말리면
국가와 국민은 큰 위기에 봉착하게 됩니다.
우리가 초파일 연등을 달며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부처님의 팔만사천 법문을 한 마디로 요약해 표현할 수 있는
자등명 법등명(自燈明 法燈明)’이 그것입니다.
자등명 법등명이란 자기 자신에 의지하고 법에 의지해
세상을 밝게 구원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가 관등재일을 하며 나의 모든 업장을 녹여
다른 사람을 시기하고 미워하고 해치는 마음을 없애고
다함께 기쁘고 즐거운 세상을 만든다면
이것이 사월 초파일 부처님 오신날을 보내는
불자들의 참된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여기엔 궁극적인 실천행이 뒤따라야 합니다.
경전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일즉다(一卽多) 다즉일(多卽日)’
또 ‘일체시방 미진중(一切十方微塵中)
항하사겁 설난진(恒河沙怯 設難盡)’이라 했습니다.
마음의 세계를 표현한 이 말들을
디스켓 한 장이 팔만사천 법문을
다 담아내는 요즘과 같은 초정보화시대에
이해하기 어려운 구석이 있을지 모르나
다음과 같은 예화를 통해 설명할까 합니다.
옛날에 이만권의 책을 독파했다고 해서
이만권이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어느 날 불경을 보다가
‘겨자씨 속에 수미산이 들어갔다’는 글을 접하곤
의심이 들어 당대의 대선사를 찾아가 이 뜻을 물었습니다.
이에 선사가 대답하길
“내 몸은 다섯치밖에 안되는데 수천수만의 크게 깨우쳤습니다.
책을 아무리 읽어도
깨달음은 행위가 뒤따르지 않으면 얻기 어려운 법입니다.
나도 언젠가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봉은사 앞 무역전시관에서 박람회를 한다고 하기에
뭔가 새로운 것을 배울 수 있겠지 하고 갔다가
괜한 헛걸음을 했다 싶은 것이
거기엔 단 한 종류도 알 수 없는 수천 수백 가지의
컴퓨터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습니다.
이것들은 또한 거저 주어도
나에겐 아무 소용이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깨달음의 세계나 정토의 세계는 이처럼
책 속이나 정신 속에서만 추구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지난한 노력과 실천행이 뒤따를 때라야 활짝 열립니다.
자등명 법등명하면 심신이 청정해지고
이웃이 깨끗행지며 나라가 행복해집니다.
내가 이웃이며〔一卽多〕이웃이 나라는 〔多卽一〕사실을 알 때
비로소 공업중생(共業衆生)의 공동체 정신을 깨칠 수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방일(放逸)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부처님께서도 게으른 게 가장 경계할 적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매사 모든 일을 대충대충하려는
좋지 않은 습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정치, 경제, 교육에서도 현실을 정견(正見)하지 않고
주마간산(走馬看山)격으로 정책을 입안하고
생색내기식으로 ‘할 일 했다’는 태도는 눈에 거슬립니다.
이는 현대사회에서 나타나는 게으름의 대표적인 형태입니다.
입을 보면은 일을 하고 있는 것 같지만
실은 알맹이가 없는 게 태반입니다.
건단진언의 독송처럼 입보다는 신심을 내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고 신심을 배가하기 위해선
정진하는 게 으뜸입니다.
사회를 바르고 건강하게 만들기 위해
불자들은 일보일배(一步一拜)하는 마음가짐으로
신행생활을 만들어 나갑시다.
일심이 청정하면 일신이 청정하고,
일신이 청정하면 다신이 청정하며,
다신이 청정하면 시방중생이
두루 청정해집니다..
모셔온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