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자영의 후손은 없습니다
자연인(自然人) 민자영은
아버지 민치록과 어머니 한산이씨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하는일 없던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면서
여주에서 친척들 집에 얹혀사는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때문에 형제 자매가 없습니다.
그의 할아버지 민기현은 예조참판을 지냈으며,
증조부 민백분, 고조부 민익수, 5대조부 민진후, 6대조부 민유증입니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 민치록은 관직에 나아가지 못하고 백수였습니다.
안동김씨의 세도정치에 환멸을 느낀 흥선대원군이
왕위에 오른 자기 아들(고종)의 혼처는
권문세가보다도 한미한 집을 고르리라 마음 먹었습니다.
명문가문 규수 집안에서 혼담이 들어와도 손절했습니다.
이 때, 부인 민씨가
"여주에 사는 먼 친척되는 아이가 있는데
부모형제 없는 고아나 다음없는 아이가 있다"고
추천하여 들여온 것이 민비가 되고,
훗날 시아버지와 권력 다툼을 벌인 명성황후 민자영입니다.
민자영이 간택되어
친정이 아닌 시집(운현궁)에서 신부수업 할 때
몰락한 친정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민자영이 운현궁에서 혼례를 치르고 홀홀단신 입궁했습니다.
피붙이 하나 없는 외로움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안동김씨와 풍양조씨 잔존세력들 사이에서 숨막힐 것 같았습니다.
이 때, 부모없이 떠돌던 민자영이 찾아올까봐
손사래를 치던 민가들이 하나 둘 고개를 디밀기 시작했습니다.
민자영 역시 자기를 지켜줄 세력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빠임네, 조카임네 하고 나타난 민씨들이 호위무사를 자처했습니다.
피붙이에 굶주린 민자영은
이들에게 감투를 씌워주었습니다.
양오빠 민승호는 병조판서를 꿰차고 거들먹거렸으며
양조카 민영익은 예조판서와 한성판윤을 지내면서 나라를 분탕질했습니다.
특히, 오늘날 남대문시장 자리에 있던 선혜청 제조 민겸호는
군인들에게 봉급으로 주어야할 쌀에 모래를 섞어 주다
임오군란을 유발한 악덕 탐관오리입니다.
그의 집은 성난 군인들에 불태워졌고
금은보화가 그득했던 곳간도 불태워졌습니다.
이 때 특이한 점은 금은보화를 약탈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군인들에 쫓기다 성난 군중에 칼맞아 죽고
시신은 청계천에 버려졌습니다.
그의 가족들은 시신을 수습할 엄두를 못내고
변복 하여 시골에 숨어들어 숨죽이고 살았습니다.
전주이씨 집안으로 시집 와 왕비가 된 민자영은
고종과 4남1녀를 낳았으나 둘째 아들만 살아남고
나머지는 일찍 세상을 떠났습니다.
유전자가 뭔지 모르던 그 시절,
민씨 엄마에서 태어난 고종이 민씨 부인을 맞이하여 자식을 낳았으니
첫아들은 항문이 없는 기형아 였고 줄줄이 갓난아기 때 죽었습니다.
살아남은 둘째 아들 순종마저
첫부인 민씨, 둘째부인 윤씨와 혼인했으나 자손이 없습니다.
따라서 고종과 민자영 후손은 하나도 없다고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고종과 귀비 엄씨 사이에서 태어난 영친왕과
귀인 장씨가 낳은 의친왕,
귀인 양씨가 낳은 덕혜옹주는
민자영 혈맥과는 연결이 되지 않습니다.
민자영의
친가(親家)는 여흥민씨,
외가(外家)는 한산이씨,
시가(媤家)는 전주이씨입니다.
따라서 나라가 망하는데 일조한
친가(親家) 여흥민씨 후손들은 있어도 민자영의 후손은 없습니다.
첫댓글 그렇군요
역사공부 잘 하고 갑니다
늘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우~~~박식한 님들이 요소요소마다 매복? ㅋ
확실히 알지않고 역사 운운글 올렸다간~~
덕분에 민비의 영특함(당시 흥선대원 시아버지와 대적)만 머릿속에 있었는데
후손이 없음을 확실히 배우고 갑니다
내일도
좋은
하루 되세요^^
역사 공부 다시 하니 좋으네요
내일도
맑은
미소 가득하세요.
역사 공부 잘하고 갑니다.
옆에 있는것 만으로도 듬직했던
옆지기님의 손을 잡고 덕수궁을 거닐던 모습이
뜨락에 내리던 햇살보다 찬연했고
위세에 순응하는 순애보처럼 아름다웠습니다.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