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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형편없는 결말.>
난잡하게 어질러진 풍경. 분주하게 움직이는 손. 그리고 초췌한 두 사람의 몰골. 아키와 신지는 멀찌감치 떨어져 앉아 렌과 쇼리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벌써 몇 시간이나 흘렀을까. 웃음기 사라진 그들의 얼굴은 그야말로 고군분투를 준비 중이었다. 정말 딱하기도 하지, 뭐 도와줄 거라도 없어? 아키가 다소 걱정되는 투로 물었지만 그들은 대답은커녕 서로 프레젠테이션 준비에 한창 열을 올리고 있었다.
“내버려 둬. 발표가 코앞인데 쟤들은 오죽하겠어?”
“그러니까 온 거잖아. 혹시 도움될 게 있나 싶어서.”
“네가? 경영학부도 아니면서 네가 어떻게 도와? 잔말 말고 지켜보기나 해.”
“그러는 넌? 같은 경영학부면 좀 도와야 하는 거 아냐? 이럴 때보면 넌 정말 무심한 것 같아.”
아키의 비아냥거리는 말투에 신지는 어깨를 들썩거릴 뿐, 별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차라리 도와줬으면 속이라도 편하겠다. 끼어들 자리도 없을뿐더러 저 분위기는 필시 그들을 위한 것이지 자신을 위한 게 아니다. 어디 톱클래스가 누구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기나 하겠는가. 말은 안 했지만 렌 역시 한다면 하는 놈인데. 신지는 축 쳐진 어깨를 일으켜 세웟다.
“어디가?”
아키의 가자미 같은 눈이 신지의 소매 끝을 잡아챘다. 도망가는 건 아니지, 신지?
“목 탈까봐 음료수라도 갖다 주려고 그런다. 너도 가만히 앉아만 있지 말고 돕지?”
“난 또. 의리 없이 뒤꽁무니 빼고 도망이라도 가려는 줄 알았지.”
이죽거리는 신지의 눈빛이 아키를 곱게 볼 리 없을 터다. 아키는 빙긋 웃으며 신지를 따라 나섰다. 얄궂지만 그런 신지 역시 그런 그녀를 미워할 수는 없었다. 아키의 성격이 워낙 통통 튀는 스타일이라 더 그런지 모르겠다. 활짝 연 문 사이로 솔솔 여름 바람이 들어왔다. 후덥지근한 더위는 온데간데없고 나오는 건 그저 한숨뿐. 막상 코앞으로 닥친 위기 때문인지 쇼리도 한껏 긴장을 늦출 줄 모르고 계속 발표에 관한 자료 따위에 눈을 붙이고 있었다.
“좀 쉬었다 해. 얼굴 말이 아니다.”
안쓰러워 먼저 말을 건넸다. 쇼리는 머뭇거리다가 흐리멍덩한 시선을 렌에게 보였다. 피곤이 덕지덕지 붙은 얼굴이 그저 가엽기만 했다. 그녀는 졸린 눈을 비벼가며 고개를 저었다.
“아르바이트까지 뺐는데 더 열심히 해야지. 내 점수뿐 아니라 엔도 군의 점수도 달려 있는 중요한 과제니까.”
“후회되지 않아? 그간 쌓아온 네 학점이 다 날아갈지도 모르는데…….”
“글쎄, 후회는 하지 않지만 후회할 시간에 글자 하나라도 더 보자는 게 내 신조라서. 그렇게 후회하진 않아.”
“후회 하는구나.”
“그치만 네가 있으니까.”
“날 믿어?”
렌의 한마디가 다시, 또 한 번의 정적을 이뤘다. 가시가 박혔다고 해야 할까, 렌의 어투에 쇼리는 한 번에 말을 잇지 못했다. 이건 믿고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단지 그가 안쓰럽다거나 혹은 친구라는 명목으로 그를 도와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도쿄대는 그런 친절도 독으로 쓰이는 곳이기 때문에 렌이 더 집요하게 묻고 캐물을 수 있는 이유기도 했다. 하기야, 필요이상이었지. 단지 친구를 빌미로 그를 도와준다는 건 억지에 불과한 변명이니까.
“왠지 타니구치 교수님이 적 같았어.”
우습지만 사실이다.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문득 깨달은 생각은 그거였다.
“여자들의 적이지, 맞는 말이야. 인정.”
“또…… 나도 렌처럼 타니구치 교수님을 공격하고 싶기도 했고.”
공격? 유치하지만 제법 귀엽게 말해주었다. 렌은 픽 실소를 터트리며 훑어보던 자료에서 눈을 뗐다. 짐짓 심각한 표정을 일관하며 그녀는 다소 가라앉은 음색을 내보였다. 그게 어찌나 귀엽던지, 간혹은 소녀처럼 순수한 데가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그 자체가 어쩌면 렌의 눈엔 판타지였을지 모른다. 환상 같은, 잡아도 잡을 수 없는 매력을 지닌 그 아이의 신비한 매력이 렌의 눈엔 꽤나 신선하게만 느껴졌다.
“그럼 렌은 왜 타니구치 교수님한테 그렇게 대한 거야?”
문득 질문 하나가 떠올랐나보다.
“별 뜻 없어.”
“나도 별 뜻은 없어. 단지…….”
“밉상이라서?”
렌은 그녀의 말을 낚아챘다. 밉상이라…… 그것도 말 되는 것 같다. 실질적으로 따지자면 그것과는 별개의 문제지만. 쇼리는 가벼운 미소를 띠고 다시 조사 중인 유니클로에 대한 인터넷 자료에 매진했다. 피로가 조금은 가신 것 같다. 아까와는 달리 선명한 초점을 띠며 컴퓨터 책상 앞에 앉았다.
프레젠테이션의 완벽한 성과를 이뤄내기 위해 아르바이트도 빼버렸다. 대신 황금 같은 주말을 반납하자는 조건이었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아무래도 렌을 알게 되면서부터 그녀의 눈은 더욱 생기 있게 빛나기 시작한 것 같다. 요루이치와 함께 하는 점심이라든지 혹은 그의 무리들과 섞여 모이는 것도 그리 나쁘진 않았다. 하지만 렌은 요루이치가 가지지 못한 걸 가졌기 때문에 더 기대하게 되는 건지도 모른다. 비록 일본이 좁은 땅덩어리기는 하지만 유년시절부터 소소하게 지내온 과거의 아이들과 그는 풍기는 뉘앙스부터 달랐다. 필시 그가 자신에게 좋지 않은 감정으로 다가왔더라도 말이다.
비록 반쪽짜리이긴 해도 자신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이 곁에 있다는 것. 그건 쇼리에게 있어 더할 나위 없이 위로가 되는 마음 안정제 같은 거였다.
신지와 아키가 만들어온 샌드위치를 뚝딱 해치운 뒤, 벌써 4시간이 흘렀다. 은은하게 빛나는 별들도 여느 때보다 더 많았고 더위도 여느 때보다 그들의 피부에 와 닿게 느껴졌다. 벌써 여름이라니……. 아직은 실감하고 싶지 않은 계절.
“애들은?”
“방금 갔어. 아키가 힘내라고 전해달라던데?”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신지와 아키는 돌아가고 없는 후였다. 쇼리는 웃으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이 널따란 방안에 그와 다시 적적한 기운을 남기며 둘이서만 있어야 한다니, 어색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그 어색함을 지우고자 쇼리는 더욱 자료를 모으는데 힘써야 했다.
“시간 늦었는데 괜찮아? 할머니 혼자 계시잖아.”
“아, 응. 주인집 아주머니한테 말해놨으니까 별 무리는 없을 거야.”
“그러고 보면 넌 참 대단해.”
렌은 팸플릿을 뒤적거리며 자연스레 말을 이었다.
“뭐가?”
“그냥, 네 모든 게.”
“구체적으로 말해서 어떤 게?”
가끔 그녀는 집요할 때가 있다. 렌은 팸플릿에서 눈을 떼고 쇼리 쪽으로 돌렸다. 이런 상황에서 할 말은 아니지만 이따금씩 생각해보면 그녀는 필요 이상으로 경계를 늦추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을 친구라 생각하기 전에, 남자라는 생각은 안 해봤는지……. 전혀 경계심 없는 눈치였다.
“뭐 하나 물어도 돼?”
다소 진지한 어조.
“응. 뭔데?”
“다른 사람한테도 그래? 아님 나한테만 그러는 거야?”
“뭐가?”
“경계심이 없잖아.”
“그야, 엔도 군은 친구니까.”
“친구기 전에 남자기도 하지.”
“…….”
“본심이 뭐야? 딱히 선수같진 않은데.”
본심이라…… 그의 말에 쇼리는 톡 웃음을 터트렸다. 본심, 본심? 설마, 그런 게 있을 리가.
“그러는 엔도 군은 저의가 뭐야? 나한테 접근한 저의. 단지 내가 한국인이라서? 그래서 잘해주는 건 아닐 거라고 보는데, 난.”
“딱히 저의라고 할 게 있나. 일종의 관심이지. 호기심이기도 하고.”
“어떤 호기심? 혹, 내가 어떤 맛을 갖고 있을까…… 하는?”
그래, 어쩌면 그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선수일지도 모르겠다. 렌은 순간 그녀의 입에서 터져 나온 한마디에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가끔은 이런 식으로 사람을 잘도 당황시키기도 하는군. 이것도 일종의 매력이라면 매력일 수 있겠지만 글쎄, 이런 건 꺼려하고 싶은 부분이다. 게다가 맛이냐니, 자신을 요루이치와 동등한 수준으로 바라보는 그녀의 건방진 시선에 살짝 화가 났다. 그런 자식과 비교하지 말아줬음 하는데, 아사.
쇼리는 고개를 조아리며 농담이라고 말했지만 기분이 나쁜 건 어쩔 수 없었다. 보통 계집들이라면 그런 말은 자신의 입으로 직접 하지 않지 않나? 그녀는 달랐다. 뭐랄까. 넌 날 그런 눈으로 보고 있어! 라고 당당하게 생각하는 이기적인 시선. 그래서 그 오해가 없도록 자신은 조금 더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행동해야했다.
“어떤 맛이냐고 생각하면, 맛보게 해줄 거야?”
덤덤한 채 묻는 그의 어투에도 본심은 있었다.
“아니, 만약 그런 생각으로 내게 호의를 베푸는 거라면 엔도 군의 따귀를 흠씬 때려줄 거야.”
“…….”
“물론 네가 그런 애가 아니라는 거 알아. 만약 네가 날 어떻게 해보려는 수작으로 덤비고 있는 중이라면 이쯤에서 그만 두는 게 서로에게 좋을 거야. 나, 그렇게 착하지도 순수하지도 않거든.”
“내가 그런 호색한이 아니라는 정의를 너무 쉽게 내리는 거 아냐? 그래도 방심은 하지 마. 본디 남자의 본능은 절제로 이뤄지는 게 아니라 단 한순간을 위해 이루어지는 몰상식한 자식이니까.”
“그거 충고야?”
새침한 그녀의 목소리가 렌의 청각에 맞닿았다.
“일종의 경고.”
“…….”
“친구이전에 나도 남자니까.”
그녀는 살짝 웃으며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불쾌하거나 싫은 내색은 보이지 않았지만 오묘한 미소를 짓고 있는 것만은 확실했다. 한 차례의 정적이 밀려왔다. 렌과 쇼리는 그들이 맡은 분야를 완벽하게 해내기 위해 열을 올렸다. 타니구치가 말한 3일도 어느 덧 내일이라 생각하니 한층 더 긴장이 몰려왔다.
렌은 찾은 자료를 모두 분석하고 내일의 프레젠테이션을 위해 다시금 발표문을 훑은 뒤 나직한 음색으로 소리를 내었다.
“프레젠테이션 끝나면 축제갈래?”
일본은 여름이 되면 하나비(花火) 축제라고 해서 무더운 여름과 함께 시작되는 불꽃축제가 매해 열리고 있다. 잠시라도 더위를 잊게 해주고자 열리는 축제기도 하지만 이미 하나비축제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축제로 각광받기도 한다. 쇼리는 본격적으로 그 축제에 가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 뜨거운 열기 속에서 붐비는 많은 인파들을 피해 할머니와 불꽃구경을 나간다는 건 다소 어려운 일이었다. 게다가 할머니는 다다미가 깔린 집안에서 시원하게 부는 여름바람을 더 좋아하는 그런 분이었다.
후쿠오카 학원에 다녔을 당시만 해도 그 곳에서 멋진 남자친구를 만들겠다는 친구들을 보며 한껏 부러웠던 적이 있었다. 물론 그때 놀던 친구들과는 연락조차 하지 않은 상태지만. 그녀는 파일을 정리하는 손을 멈추고 렌을 쳐다보았다. 건조한 얼굴과 그의 얼굴보다 더 건조한 멋대가리 없는 말투. 무신경하지만 그것 또한 자신을 위한 배려라고만 믿고 싶었다.
“데이트 신청하는 거야?”
그녀는 특유의 새침한 눈빛으로 그에게 대꾸했다. 흔쾌히 허락하지 않는 것 또한 그의 머릿속에 계산된 행동이었다.
“조건이 있지. 내가 만약 내일 열리는 프레젠테이션을 완벽하게 소화한다는 전제 하에서.”
“좋아.”
대답이 떨어지기도 전에 렌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됐어. 데려다 줄게. 이만하면 나 혼자서도 충분히 할 수 있으니까.”
고개를 끄덕이며 쇼리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도 이제 막 정리를 마친 상태라 그의 호의를 마다하진 않았다. 신코이와까지 가는 중에도 렌과 쇼리는 서로 다른 긴장의 묘미를 늦추진 못했다. 설렘이라던 가 기대, 혹은 복잡 미묘하게 얽히고설킨 애매한 감정 따위들을.
홀로 집으로 돌아오는 중에 자연스레 그의 입에 물린 담배는 대번 놈의 정신을 깨워주는 회복제 역할을 해주었다. 한산한 새벽이 와도 달큰한 잠자리에 들 수 없었다. 몇 번이고 체크하고 훑어가면서 렌은 본래의 자신을 보여주기 위해 철저하고 확실하게 발표문을 준비했다. 타니구치의 그 오만한 생각을 짓밟아 주기 위해서라도.
“잠은 잔거야?”
“넌?”
“난 조금. 너는?”
“나도 조금.”
다소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쇼리가 그의 안색을 살폈다. 조금 잔 얼굴치곤 대단히 컨디션이 좋지 않은가보다. 그의 낯짝이 어제보다 한층 더 어두워진 것 같아, 아침에 마트에 들려 사온 초콜릿을 불쑥 드밀었다. 청심환보다 초콜릿이 기분을 더 좋게 만들어 준대. 나도 늘 프레젠테이션 있는 날이면 초콜릿을 먹어. 라며 옅은 미소를 보였다.
“긴장 돼?”
쇼리가 물었다.
“긴장되기보다 이 400명 남짓한 적들을 어떻게 엿 먹이느냐가 문제겠지.”
그도 그럴 것이었다. 수업이 시작하려면 아직 10여분이나 남은 상태지만, 그의 프레젠테이션을 보기 위해 몰려든 학생만 해도 족히 400여명은 더 돼 보였다. 벌써 학교엔 심심치 않게 소문이 일파만파로 퍼졌다. 따분할 찰나에 어쩌면 잘 된 일인지도 모른다. 학구열에 불타있는 아이들을 4년이나 계속 맞부딪힌다는 것도 곤욕이고, 무엇보다 강 건너 불구경 하듯 교수와 학생 사이에서 무미건조하게 터지는 심리적 싸움도 그리 흔한 것만은 아니다. 거기다 엔도 준이치의 여식이 깐깐하기로 소문난 타니구치 교수와 정면 승부를 펼친다는데 이를 마다할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돈과 섹스만 밝히는 인하무인인 교수와 돈과 권력으로 똘똘 뭉친 엔도 가문의 여식 앞에, 승리의 여신이 과연 누구의 향해 달려 나갈지도 큰 관건이었다. 렌과 함께 강단 앞에 서 있던 쇼리 또한 그의 말을 비로소 실감할 수 있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어디서든 찾을 수 없다. 삭막하고 어디서부터 손봐야 할 지 모르는 아이들의 싸늘하고 냉랭한 눈빛이 모두 그들을 향해 있었다.
“쉽지는 않겠지.”
그녀가 나직이 읊조렸다.
“애초에 이러길 바랐는지도 몰라.”
“무슨 뜻이야?”
“처음부터 쉬운 건 없잖아. 특히나 우리 같은 사람은. 넌 한국인이란 게 하필 타지까지 와서 톱 먹은 걸로 멸시받고, 난 어설픈 일본인이라 냉대 받고. 쟤들은 우리가 엿 먹었으면 싶겠지만 나는 쟤네를 엿 먹일 목적으로 여기 있는 거니까.”
분명 쉽지는 않았다. 고양이처럼 앙칼지게, 삐뚤어진 관념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수 백, 수 천명에 달하는 시선이 그리 곱지만은 않다는 걸. 두려움을 떠나 그들이 주는 차디찬 냉대가 그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큰 공포로 다가왔음을. 하지만 저들이 없었다면 그 또한 이곳에 없었을 것이다. 렌은 분명 이런 삭막한 상황을 오히려 즐기는 태세였다.
“수업시작 하지.”
타니구치의 등장으로, 경영학부 강의실은 거대한 장막을 이뤘다.
창틀에 기댄 타니구치의 얼굴은 별 기대하지 않는 눈치였다. 렌과 스치듯 맞부딪치는 눈빛에선 남들이 모르는 강한 스파이크가 일었고, 그는 곧 타니구치에 대한 렌의 강한 적개심이었다. 그는 콧방귀를 뀌고, 놈의 시선을 빗겨 느글느글한 목소리로 천천히 주제를 읊었다.
“주제가 유니클로에 대한 마케팅 전략 분석이군. 시작하게나.”
타니구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는 강단 앞에 활짝 펴진 화이트 스크린으로 시선을 돌렸다. 준비해둔 자료들을 오버헤드 프로젝터(Overhead Projector)에 비춰 스크린으로 깔끔하게 나올 수 있도록 쇼리가 거들었다. 프레젠테이션 준비에 능숙한 도쿄대 브레인답게, 쇼리는 깔끔하게 필름을 스크린 상에 영사하여 움직임의 화영을 보다 깔끔하게 보정했다.
그 다음은 전적으로 렌의 몫이었다. 쇼리는 옆에서 그를 거들 뿐, 정작 중요한 발표 따위는 모두 렌에게 넘긴 상태였다. 렌은 레이저를 스크린 쪽으로 가져갔다. 스크린에 생긴 빨간 점이 그가 원하는 방향을 따라 자유자제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럼, 유니클로에 대한 마케팅 전략 분석에 대해 발표하도록 하겠습니다.”
나직한 그의 목소리는 전쟁의 서막을 알리는 나팔소리처럼 관대하게 울려 퍼졌다.
“제일 먼저, 마케팅 전략 분석 이전, 유니클로 기업에 대한 소개를 하도록 하도록 하겠습니다. 일본의 오랜 경기 침체는 고급 브랜드 따위에 사족을 못 쓰던, 일본인들의 실속 있고 싼 가격의 제품으로 눈을 돌리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기회를 가장 잘 이용한 곳이 바로 유니클로라는 브랜드죠. 유니클로는 미국 캐주얼 브랜드 갭의 복사판으로 불렸지만, 오히려 미국 경쟁업체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었습니다. 유니클로의 다양한 소재와 여러 가지 가격 정책을 통해 이제 일본의 국민 브랜드로 발돋움 했습니다. 어디가든 유니클로를 입고 있는 사람들이 넘쳐난다는 의미의 ‘유니바레’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 낼 정도로요. 하지만 유니클로가 더욱 주목 받은 이유는 제품의 기획과 원자재 공급에서부터 봉제에 이르기까지 모든 생산 및 제작 과정이 일원적으로 관리되는 SPA 시스템과 시장수요의 정확한 파악을 통해 적시에 그리고 적재적소에 상품을 공급하는 패스트 리테일링(Fast Retailing)에 있다는 겁니다. 만약 SPA 시스템과 패스트 리테일링이 없었다면 유니클로는 지금과 같은 성공을 거둘 수 없었겠죠. 유니클로 소개는 여기까지 하고 본격적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입은 바싹바싹 말랐지만 그는 오히려 이 상황을 즐기는 눈치였다. 멀찍이서 강단에 서 있는 렌을 바라보는 신지와 타쿠미의 낯은 그리 좋지는 못했다. 그가 2시간 안에 프레젠테이션을 무사히 마칠 수 있을지도 의문이지만, 더 걱정인건 그들을 에워싸고 있는 상당한 무리수의 적들이 그를 가만히 두지 않을 거란 거였다. 다양한 수재들이 많은 만큼 그 값을 톡톡히 치르고야 마는 극악무도한 녀석들이 파다하다. 절대, 절대로 그를 곱게 보내줄 리는 없었다.
그가 무리 없이 유니클로 브랜드에 대한 분석을 차분하게 해나갈 즈음, 여기저기서 빗발치는 쇄도가 끊이지 않게 됐다. 이제 막 그 서막의 장이 울린 것이다.
“너무 유니클로에 대한 좋은 인식을 심어주는 발표 같군요. 대부분 젊은 층들이 유니클로 옷을 안 입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우리 일본에선 국민 브랜드로 자리매김 한 기업은 맞는 사실이죠. 하지만 외국 시장은 다르다고 들었습니다. 일본을 대표하는 브랜드가 다른 나라에선 어떤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는지 궁금한데 답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수입 브랜드에 대해 가장 까다롭기로 소문난 나라가 바로 한국입니다. 한국 소비자들은 세계적인 글로벌 업체들에게 가장 까다롭기로도 유명하고요. 비단 패션업계 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제조업, 또는 물류유동 업체들이 한국시장을 테스트마켓으로 활용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시장의 동향을 분명하게 파악하지 못해 준비가 부족했던 업체들은 종종 실패를 맛보기도 했습니다. 이미 한국에는 SPA형이라고 정의를 내리긴 뭐하지만 그에 맞먹는 빠른 속도로 트렌드 반영에 임하는 시장이 있습니다. 그가 바로 패션 동대문 의류시장이죠. 하지만 동대문 의류시장의 제품에 대한 소비자들의 평판이, 합리적인 가격에 질 좋은 상품을 내놓는 외국 브랜드와의 경쟁에서 살아남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는 게 현실입니다. 또한 한국의 패션 브랜드 시장의 글로벌화와 함께 외국 브랜드를 접할 기회가 많아진다면, 한국에서도 의류브랜드 제품에서 볼 수 없는 같은 듯 다른 디자인을 선호하는 한국 소비자들이 보다 수입 브랜드의 옷을 찾게 될 거라는 예측을 할 수 있습니다.”
“질문 있습니다. 아까 한국에선 SPA형 브랜드가 없다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일본 브랜드가 한국 시장 진입을 가속화하는 건 어떻다고 생각하십니까?”
“SPA형 브랜드의 가속화 말씀 하시는 겁니까?”
질문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국시장에 진입하는데 상당히 까다로운 요구조건을 내세웠던 자라, H&M의 공식적인 론칭이 바로 코앞까지 다가왔다는 건 아십니까? 이미 세계적인 브랜드로 자리 잡은 이 두 브랜드와 이미 한국시장에서의 경쟁에 뛰어든 갭 등의 소위 빅3 라 할 수 있는 브랜드가 모두 들어오게 됨으로써 앞으로 매우 치열한 경쟁이 예상된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엔도 상이 만약, 유니클로 매장을 개선한다면 어떻게 하고 싶은지 묻고 싶은데요? 저는 유니클로 마니아이긴 하지만 언제보아도 매장 분위기는 정말 형편없다고 생각하는 사람 중의 하나거든요.”
경청하는 경영학부 학생들의 진지한 안면이 다소 풀리는 질문이었다.
“하라주쿠에 있는 유니클로 매장은 가보셨습니까?”
렌은 빼빼마른 사내에게 되레 질문을 던졌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아뇨!’라고 외치는 사내는 씩 웃으며 렌의 답이 얼른 내리길 기다리는 눈치였다. 상당히 난해한 질문이었다. 그는 하라주쿠에서 본 매장이 무척 독특하다고는 생각하지만 다소 난잡할 수 있는 그런 분위기보단 깔끔하고 심플한 분위기를 더 추구하는 편에 속했기 때문이다.
“혹시 시간이 널널하다면 하라주쿠에 있는 유니클로 매장을 추천하고 싶군요. 분명 그 쪽 마음에 들 겁니다.”
그는 숨을 고르고 다시 입을 뗐다.
“하지만 제가 유니클로의 CEO였다면 하라주쿠에 있는 매장 바닥을 송두리째 뜯어냈을지 모를 일이군요. 전 질문자처럼 그런 고상한 취미는 없기 때문에 오히려 무난하거나 심플한 걸 추구하는 편입니다. 해서 보통 유니클로 매장의 안정된 분위기를 더 좋아하죠. 하지만 고객들이 주 무대로 있는 매장의 경우는 상당히 지루하기 짝이 없습니다. 고객들이 입어 본 아이템들이 바로바로 정리가 되지 못한다면 혼잡하고 지저분한 상황으로 바로 바뀌니까요. 단순이 상품을 판매하는 곳, 이상의 의미를 지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매장 디스플레이 개선이 시급한 상황이죠.”
그는 다시 레이저를 들어 화이트 스크린을 빗대었다.
“보시면 매장 내부는 위의 그림처럼 언제나 깔끔하고, 정돈된 상태를 유지합니다. 하지만 의류 외에는 어떠한 시설도 갖춰지지 않은 게 대다수의 매장이겠죠. 카운터 주변에 대형 모니터 또는 멀티비전을 설치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또 유니클로 룩을 전시하거나 동영상광고를 방영해 현재 유니클로에서 벌이고 있는 캠페인을 고객들에게 효과적으로 알리며, 고객들의 심리적 대기시간을 줄여주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냐는 게 저의 작은 소견입니다.”
프레젠테이션을 경청하는 중청들의 고개가 절로 수긍하는 걸 볼 수 있었다. 그 뒤에도 그의 발표를 깎아 내리기 위해 많은 경영학부 학생들이 그를 가만 내버려두지 않았다. 이를 본 타니구치는 그의 의연한 태도에 고개가 모로 꺾일 수밖에 없었다. 고작 2시간 밖에 되지 않은 강의지만 이처럼 봇물 터지듯 그를 공격하는 끈임 없는 질문에도 지치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어느 덧 2시간의 기나 긴 프레젠테이션이 끝났다. 발표하는 시간보다 그들을 공격하는 클래스메이트들의 가차 없는 질문이, 보는 이들을 더욱 고조된 긴장 속으로 밀어 넣는 격이 되었다. 타니구치는 발표를 끝낸 렌과 쇼리를 지나쳐 강단 앞에 우뚝 섰다.
“여느 때보다 더 박진감 넘치는 발표가 아니었나 싶군. 뭐, 적이 따로 있는 건 아니니 말이야. 강의는 이것으로 끝내도록 하겠네.”
타니구치의 말이 끝난 뒤 바로 수업 종이 울렸다. 렌은 자신의 프레젠테이션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타니구치의 행동에 어처구니가 없었다. 보통은 발표가 끝나면 교수가 지적을 하던 칭찬을 하든, 학생의 노력한 성과에 대한 평가 정도는 해줄 줄 알았다. 헌데, 타니구치는 이를 넘어선 도가 지나친 행동을 보이기 일쑤였다. 자신은 물론, 쇼리까지 냉정하게 지나쳐버리는 안하무인 한 행동에 그는 부아가 치밀었다.
강의실을 나서는 학생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타니구치의 앞을 잽싸게 가로 막았다.
“칭찬은 바라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프레젠테이션에 대한 평가는 해줘야 도리가 아닙니까?”
차가운 음색이 북적대는 복도 안을 가득 메웠다.
“무슨 말을 듣고 싶은 건지 직접적으로 말하게. 칭찬? 아니면 너의 그 형편없는 프레젠테이션에 대한 내 속 깊은 평가라도 듣길 원하나?”
“형편없다는 건…… 제 발표문에 대한 얘깁니까, 아니면 제 인간적 가치에 대한 얘깁니까?”
“자네의 그 똑 부러지는 음색이나 3일 동안 준비했다고는 믿을 수 없는 유니클로에 대한 자료들은 모두 완벽했어. 오히려 내가 더 놀랄 정도였지.”
렌은 화를 삭이며,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똑바른 시선으로 타니구치의 시선을 곧이곧대로 대응해주었다.
“그렇다는 건 제 인간적 가치가 형편없다는 얘기가 되는군요.”
“형편없지. 그것도 아주 최악일세.”
“하지만 프레젠테이션은 어디까지나 객관적으로 판단해야 할 일이지, 교수님처럼 비상식적인 주관적 관념에서 평가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 일 텐데요?”
“자네는 내가 누군지 벌써 잊었나?”
렌은 입을 꾹 다물고 그의 싸늘한 시선을 마주했다. 타니구치 역시 이 애송이 따위에 지나지 않는 놈에게 자신을 굽히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다. 아니, 애초부터 그럴 생각이었다.
“처음부터 절 엿 먹일 작정이셨군요.”
렌의 칼칼한 음성이 비릿한 입술을 뚫고 새어 나왔다.
“맞아. 난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지. 과연, 준이치 의원의 여식답군. 발표는 잘 보았네. 하지만 엔도 군의 기대치는 나보다 더 컸던 것 같군. 자신보다 더 높은 위치에 서 있는 사람에게 겸손하게 구는 것도 그리 나쁘진 않았을 텐데 말이야.”
“저도 감사의 인사는 전해야겠군요. 그 낡아빠진 속물근성, 다시 한 번 뼈저리게 느끼게 해주셔서.”
“고맙다는 말은 안 하겠네.”
타니구치는 뻔뻔한 낯짝을 실룩거리며 이내 렌을 지나쳤다. 힐끗힐끗 그들을 쳐다보는 다른 시선들이 따갑도록 그의 얼굴을 훑었지만 전혀 개의치 않았다. 화가 났다. 애초부터 타니구치에게 농락당할 계략이었던 셈이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쇼리를 더 완강하게 밀쳐냈어야 했다. 그러지 못한 것이 더 화가 났다. 강의실 문밖에서 타니구치와 렌을 쳐다보는 쇼리와 신지, 타쿠미 역시 그의 차디 찬 시선에 선뜻 렌에게 다가갈 수 없었다.
하지만 쇼리는 자신의 학점보다 오히려 그가 더 걱정됐다. 몇 번이고 곱씹으며 화를 삼키는 모습이 눈에 역력했기 때문이다. 잠까지 설쳐가며 밤낮으로 정성스레 준비한 프레젠테이션은 정말 형편없이 끝났다. 그에 대한 타니구치의 점수 또한 상당히 냉정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며칠 후, 타니구치는 400명이 남짓한 경영학부 강의실에서 렌과 쇼리에게 ‘B-’라는, 다소 인위적이고 모순된, 정말 형편없는 점수를 내주면서 사건은 씁쓸히 일단락 됐다.
감사합니다. 주말 잘 보내세요.
첫댓글 렌과 쇼리 뿐만이 아니라 베이비페이스님도 같이 프리젠테이션 공부하느라 수고하셨어요 ㅠ-ㅠ정말 타니구치는 재수똥이에요 흑흑 7화도 재미있게 잘 봤습니다!
아, 그리고 저도 작가님과 함께 하나비축제에 가고싶군요 클클♥
-감사합니다 캔디맨님은 자주 뵌 것 같아요!
타니구치 저자식 좀 어뜨케해주세요 ㅋㅋㅋ 제옆에있었더라면 가운데 손가락들어주면서 진정한엿이 뭔지 날려줬을거임ㅋㅋㅋㅋ 이번편도 잘읽었어요 작가님화이링!!
- 글래스님 넘 감사드려요!! 뿌듯합니다 독자가 한분 늘었다니ㅠ^ㅠ
일단 항상 성실 연재에 좋은 글 감사드려요~~~~ 7편 쓰시느라 이것 저것 많이 알아 보셨을 모습을 상상하니 제가 괜히 진땀 나네요 ㅠㅠ 아으...... 타니구치 정말 못됐어요!!!!!!!!!!!!!!!!!!!!!!!!........ 쇼리랑 렌이 너무 불쌍해요 ㅠㅜ...... 으윽 ㅠㅠ 여튼 7화도 재밌게 잘 보구갑니다~~ 언제나 건필하세요 화이팅*.*
- 시선님! 제 마음을 헤아려 주시다니.. 그래도 열심히 한 보람이 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