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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한국 나이로 3살이다.전투기가 굉음을 내며 거의 땅에 다을듯하게 지나가기도하는 전투기(그때는 비-29)가
라이트를 번쩍 번쩍거리거나,멀리 굉음 소리만 들어도 땅바닥에 엎드리며 귀를 막고 논두렁 밑에나 바위 옆으로 몸을
감추며 대피를 하였다.
그 날도 등에 업혀 가는데 굉음을 내며 전투기기 지나갔다.
3살때 초여름 정오가 지나 작은 고무님의 등에 업혀 소 먹이러 가는데, 좁은 시골 골목길에서 (우리 집에서 30m정도
떨어진 외손 친척집 한씨 집앞 골목길)소 싸움이 시작하여, 작은 고무님은 나를 등에서 내려 길바닥에 내려 놓고 앉자
있라며, 작은 고무님은 소 싸움을 말리려 가고, 나는 우리 소 뒤에서 가만히 앉아 있는데, 그날 따라 우리 소가 갑작
스레이 뒤로 밀려 나의 허벅지 다리를 밟은 것이다.
나의 기억으로는 우리 소가 매번 이겼는데 불운하게도 그 날은 지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집 소는 암소고 상대 소는 숫소인데 만나기만하면 싸움을 하는것을 자주 보아왔기에, 우리 소가 이길 것
으로 생각하고, 그 자리에 앉아 있다가 변을 당한 것이다.나는 고함을 지려고는 기절을 한 것이다.조금후 깨어났는데
멀리서 빨래를 하시던 어머니와 마을에 있었던 사람들이 다 모여 들었고 ,논에서 일 하시던 아버지도 달려 오셨다.
나는 면 소재지에 있는 방의원으로 업혀 갔다.그당시 아버지께서는 허벅지 부분이니 괜찮을 것이라며 안도의 숨을
쉬는 것을 보았다.나는 할머님의 등에 업혀 매일같이 한달 넘게 병원을 단녔다. 그후로 할아버지의 명으로 작은
고무님은 나를 업어보지도 않고 일찍 결혼을 하여었다.
한여름의 무더위에도 나를 등에 업고 단녀셨던 할머니께서 오르막 신작로 길을 지나 쉬고 있을 때 ,나는 다 나았다며
걷기도하고 뛰어 보기도하였다.그후로 걷기도하고 업혀 단니기도 하였고 가을 녘에는 다리는 정상으로 회복 되었다.
17살 때 늦봄부터 초여름까지 매일 머리가 아파 무척 애를 먹었다.한의원에 가서 침도 맞고 한약을 달여 먹어도
아픈머리는 낫지를 않았다.여름이 되어서는 자리에 눕게 되었다.장티푸스에 걸린 것이다.그때는 시골이라 약도
없었고 치료를 받을 수도 없었다.나는 무척 심하게 장티푸스에 걸려 2달 이상을 고생한 것으로 기억 된다.
한여름 지붕옆 그늘 평상(나무로 털을 맞추어 대나무로 만던 이동식 마루)에 누워 있는데 큰집 재당숙 아저씨께
서 오셔서 ,나느 큰 아재 오셨으요하고 인사를 하였는데, 집안에 우환이 있다는 이야길 들어시고, 그냥 인사만하
시고는 돌아 가셨다(재당숙 아저씨께서는 그 후 돌아가시고 뵙지를 못하셨다 돌아가신 류해만 형님의 부친).
그때는 점심때가 훨씬 지나고 온 집안 식구들이 식음을 전폐하고, 일도 하지않고 나만 지켜보고 계셨던 것이다.
할아버지께서는 큰애야하고 아버지를 부르시고 울음섞인 목소리로 마음을 크게먹고, 각오를 하고, 그래도 아들
둘이가 있으니 희망을 가지고 더 기다리지 말고, 거적데기를 덮자고 하시는 말씀을 하셨다.(나는 이때의 기억을
생각하면 웬지 눈물이 절로 흘러 글을 쓸 수가 없으 몇번을 멈추었다.거적데기:짚으로 엮어 만들어 덮는데 사
용하는 기물로 애장을 하기전에 덮어 예방 역할을 하였음) 조금후 나는 말을 하는데도 생각으로만 말을 하여 주위
의 사람들은 못들은 것이다.재당숙 아저씨께 인사를 한것이 생각으로 하였고 ,남들은 듣지를 못하였던 것이다.
나가 말을하자 할아버지께서 무슨말을 한다. 살아났다 .내가 분명히 들었다며 확인을 하라고하니. 내 주위에 아
버지 어머니 할머니 온 식구가 모여 들어었다.나는 내가 왜 하는 말을 물었더니, 너가 아침부터 지금(오후 3시가
넘었을 시간)까지 꼼작도 않고, 숨도 쉬지않고 ,그대로 있었다는 것이다.그래서 죽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내가 일어나 집앞 골목길로 지팡이를 짚고 나왔을 때는 늦여름의 날씨로 벼들이 고개를 숙이는 단계였다.
내가 장티푸스병이라는 것을 면사무소에 신고를 하였을 때는 걸어 다녔고. 합천군 보건소에서 직원들이 방문
하여, 방역을 두번 하였던 것으로 기억 되는데 ,방역을 하고 나면 이웃집까지 모기가 없으 좋아하고 했다
가을이 되어 건강도 회복 되었지만, 머리가락이 전부 다 빠져 걱정도 하기도 하였지만, 몇달 후 정상적으로
건강을 되찾고. 면역으로 더욱더 건강이 좋아졌다 .그러나 그 병으로 키는 더 자라지않고 그때 키로 성장이
멈춘 것으로 생각된다.
2010년 9월 17일 20;30분경에 효창 운동장에 축구 경기를 구경하러 갔다가. 관중석 의자에 앉으려다가
몸이 기우려져, 몸이 앞으로 쏠려 세멘트 바닥에 머리를 부딪쳐 의식을 잃고 죽었었다(중앙 본부석 뒷
자리 앞줄)
나가 넘어지는 소리를 듣고, 누군가가 119에 신고를 하여, 어르신 정신 차리세요하며 나를 부르기에,
나는 눈을 뜨고 의식이 돌아와 대답을하니, 119라고하며 움직이지 말라며, 깨어났으니 괜잖다기에,
나는 내가 왜 이렇게 되었는지하며 흐느껴 울었다 119아저씨들은 나를 진정 시키고 이동식 침대로
옮겨 눈을 감고 진정을 하라고 위로를 해주며 ,병원으로 호송하였다.
중앙대학교 용산 병원 중환자실에 입원 되었다.간호원들은 기억나는 가족을 물어 나는 아들 기성
이 전화 번호가 생각이나 알려 주었다 .그래도 다행이었다. 그 기억외는 아무 기억이 나질 않았다.
병원에서는 담당 주치의와 연락이 되어 중환자실에서 즉시 CT찰영과 MRI찰영 과정을 거쳐. 뇌에
손상을 입어, 피가나 뇌안에 고여있다는 것이다. 앞이 캄캄하고 큰 걱정이 생겼다.병원비가 걱정이다.
결과는 내일 9월 18일 다시 CT찰영을 하여 결과를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살아야 한다 살아야 한다 살 수 있다. 퇴원도 해도 된다는 굳은 결심을 하고 주님께 기도를
드리고, 성모 어머니 마리아께 매달려 기도를 바쳤다.사고를 당할 때도 묵주신공을 드리고 있었
고 ,나는 주님께서 함께 하시라는 확신과 주님께서 도와 주시리라고 믿었다.
병상에 누워 여러가지 생각을 하고 있는데, 아들 기성이의 목소리가 들리고 얼굴이 보였다.
나는 너무나 미안하고 부끄러운 마음을 금치 못했다.기성이의 얼굴에는 걱정이 가득한 얼굴
표정이 보였다,나는 괜잖다고 말을 건너며 바쁜데 왔냐며 말을 건넜다. 조금후 두 남동생과
제수씨가 들어 오셨다 나는 어떻게 알고 왔느냐며, 나는 괜잖다며 안정을 시켰다
중환자실이라 면회도 재한을 받고 짧았다(한번에 두명씩으로 시간도 제한이다).나는 병상
침대에 누워 기성이와 동생들이 가는 모습을 보며, 걱정 말라는 말로 돌려 보냈다
나에게는 다섯개 정도의 링겔과 영양제를 꽂고 있으니 보기만해도 걱정이 되었을 것이다.
나는 부작용없이 수술도 하지않고 무사하기만을 하느님께 기도 드렸고, 머리 속에는 기도만
머리안에 가득 찼다
중환자실이라 잠도 오지않고 누워 있기조차 힘들었다.누웠다 앉았다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때마다 아픈곳이 나타났다.나는 정신적으로 이겨야 한다는 생각을 하며 주님께 기도
드렸고, 크게 다친데가 없기를 빌며, 잠을 재대로 잘 수 없었다.중환자실에서 헌신적으로
환자들을 위해 친절하게 일하는 간호원들을 보며, 백의의 천사라는 단어를 썼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잠 한숨 자지않고 환자들을 뒷바라지하며 불평 한마디 않고 시중을 드는 간
호원들을 보며 ,놀라움과 아름다움을 느끼며, 중환자들이 심하게 애를 먹이는구나하는 생
각을 하였다.
아침 새벽을 알리는 동녘이 터는 것을 보고, 무척이도 지루한 밤을보냈다.나는 괜잖다는
모습을 보여주며 빨리 병실에서 퇴원하고 싶은 생각뿐이다.나는 배가 고파 아침을 빨리
달라며, 간호원에게 물었다.머리를 다쳤기 때문에 먹을 것을 줄 수가 없다는 대답을
하며, 참아야 한다는 말을 하였다.힘들고 지루하고 걱정스럽던 밤이 지나고나면 운동
도 하고, 일반 병실로 옮겨 하루만 지나면 퇴원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지만, 밥도 주지
않고 15;00까지 기다리라는 말이다.오후 3시에 CT찰영을 하고 진단 결과를 기다려야
만 하였다.CT찰영을 하고 1시간 가량 지나고나니, 더디어 진단 결과 다행히 심하게 다
치지 않아 밥을 먹으도 된다며. 17;00쯤에 저녁 식사를 주는 것이다.괜찮다며 의사에게
일반병실로 옮겨 달라고 하니, 담당 의사는 내일 일반병실로 이동하자는 말을 하였다.
이것은 주님의 보살핌과 은총의 덕분이다.
나는 내일 퇴원을 하면 않 되겠냐며 말을하니, 몇일 치료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병원비가 걱정이다.중환자실에서 또 하루밤을 지내는 것이 무척이도 지겨운
밤이다.밤새도록 환자들의 실음 소리와 침해자들의 발버둥, 환자복과 침대 시트를 걷어
버리고 간호원들을 귀찮게하는 중환자들의 행동을 보며, 하루밤을 보내기란 고통과 힘
겨운 지루한 밤이다.
나는 주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며 성령으로 아픈 상처를 치유하여 달라며 기도 드렸다.
다행히 수술없이 약만 복용하여 출혈을 흡수하면 된다고 하며 ,다친 뇌는 약을 복용하여
치료한다면 된다고 하였다.일반병실로 이동하여, 점심 식사도 마음 놓고 먹고, 6인실이라
조용하다.오후에는 기성이와 큰남동생 작은남동생 내외도 방문하였다.추석 명절이 임박
하여 방문자들의 문병도 뜸하다. 자리에 누웠다 앉았다를 반복하며, 운동 아닌 운동을 하
였다.식사후에는 알약을 한 움큼씩 복용하니 부담스럽고 걱정이다.
다행스럽게 밥을 잘 먹고 단니니 ,달고 단니던 링겔도 빨리 맞지않고, 가벼이 움직일 수
있었다.가게 약도로 찾아가 동생들과 기성이는 신발도 가져다 주었다
멀쩡하던 내가 추석 명절을 병원에서 보내야하니 비참한 신세다.
추석 명절 뒤라 먹을 것들을 가지고 와 나누어 먹기도하고. 문병하는 사람도 늘어만
갔다.옆 환자는 가을 벼농사 수확을 걱정하는 모습을 보며, 주위 사람들을 안타깝게
하고, 웃기기도 하였다.추석 이튿날 삼종 형님과 기성이가 문병차 찾아왔다.
삼종 형님은 팔순이 가까워도 건강하시고 늙지도 않아셨다.기성이는 불만이 있는것 같았다.
그후 9월 24일 의사(신경과 남태균 주치의)의 만류에도 일찍 퇴원을 하여, 먹는 약도 집에서
복용하며 ,운동을 병행하여 건강을 빨리 되찾을 수 있었다.
나는 내가 넘어지는 소리를 듣고, 멀리 의자에 앉아 있던 분이 119에 신고를 하여준 분에게
고마움과 119소방 아저씨들게 고마움을 금치 못하는말을 늦었지만 전하고 싶다.
내가 장티푸스병으로로 누워서 죽어 있을대 ,조부모님과 부모님들께서 식음을 전폐하고 죽어있는
나를 지켜보았을 심정과 슬픔에 잠겨 말씀하신 할아버지의 말씀이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여
눈물이 절로 흘러 글을 멈추기를 반복하였다.일평생 육십대 중반까지 살면서 3번이나 죽었다가.
깨어났으니 얼마나 기구하고 이해할 수 없는 불운의 일생인가.
나는 늦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주님의 사랑과 은총 속에서 살고 성모 마리아의 보살핀
속에 지내니 얼마나 큰 축복이랴.나는 항상 하느님의 축복 받은 자녀 되었음에 늘 감사합니다.
주님은 찬미 찬양 받으소서.
아 멘.
시인 류해주 바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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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사랑과 평화님 ! 감사합니다 !
순간마다 기쁘시구요 건강하시길빕니다 !
잘 읽고 갑니다.
늘 건안 건필하십시요
마리아마리님 di시조사랑님 감사합니다.비온뒤 햇볕 나고 공기도 상쾌한데 그렇지도 않고 습기가 많고 우중충한 날이니 건강에 유의하시고 아름다운 마음으로 지내시길 빕니다. 아 멘.
사랑과 평화님하세요
맞아요 하나님의 자녀됨이 축복중에 축복입니다
주님을 찬양합니다 주님 사랑안에서 늘 평안하세요
주님의 자녀로써 늘 자랑스럽게 살아 가고 있습니다.감사할 줄 아는 자녀로써 찬미 찬양 하리라.미소의 향기님 건강하시고 아름다운 여정 되시길 빕니다. 아 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