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 무안면 경덕단景德壇에서
밀양박씨의 유적이 있다면 전국을 답사하는 종씨를 따라 경북 청도를 거쳐 밀양 무안을 다녀왔다. 청도 각북면 덕산2리에 밀양박씨 중시조 박언부 효자비(朴彦孚)가 있다는 자료를 보고 각북 덕산중개소에 들려 지도에 표기된 지번을 안내 받아 서너 시간을 헤매다가 헛걸음하고 돌아오는 중에 나물을 뜯으려 나온 환갑나이의 여자를 밭둑에서 만났다. 비각의 소재를 묻자 원래 저 근처 밭둑에 있었는데 몇 해 전에 저 쪽 한길가로 옮겼다 한다. 효자비는 덕산초교를 지나 풍각면 방향으로 한 1km 쯤, 한길 가에 새 비각이 있었다. 나중에 자료를 들추니 각북면에 덕산리는 없고 덕촌리였다. 덕산초교가 있으니 응당 덕산리로 인식한 것이 사달의 시초였다.
비문은 효자각 바깥에서 판독하기 어려웠다. 한 카페의 글에 “효자 박언부(朴彦孚)는 어렸을 때부터 효행이 지극하여 병수발은 물론 손수 반찬을 만들어 드리고 밤이 다하도록 그 곁을 떠나지 않았다. 식사 중에도 대소변을 뜻에 따라 빨리 응하였고 이부자리도 손수 빨아 깨끗하게 하였다. 부친이 남기신 음식을 자기가 먹는 등 정성을 다하였다. 그도 부친과 같은 병을 얻어 죽게 되었으나 아버지의 병이 전염되어 죽게 되었다고 말하지 않고 하늘이 내린 천명이라 하였다. 문중에서 그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1876년에 비를 건립하였다.”한다.
대단한 후손들이 숭조의 덕행을 기리는 모습을 보면서 다음 행선지인 무안 어변당(魚變堂)을 탐방하고 오는 길에 홍제사 뒤쪽에 위치한 경덕단을 들렸다.
경덕단은 멀리서 보아도 1900년대 초에 유행한 서울명동성당, 대구계산성당, 전주전동성당의 특색을 띤 적벽돌의 건축물이었다. 당시 성당은 대개 중국을 거쳐 온 신부들이 주관했지만 공사에 참여한 것은 중국인들이였다. 그 때 사대부 가문에서도 중국양식의 건축을 선망하여 벽돌로 지은 집을 선호하였다. 경덕단도 당시의 유행이었던 중국풍의 건물이고 경북 성주 한개마을에도 이런 풍의 집이 한 채가 있다.
대문은 삼문으로 가운데 문은 높고 우람하다. 대문채 좌우 바깥벽은 적벽돌로 벽면 사이에 흰색 줄눈으로 넣어 길상문자와 무시무종(無始無終)무늬들을 새겼다. 이 벽돌도 중국에서 수입한 것들일 것이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적벽돌을 생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깥벽은 벽돌로 담과 집채의 벽을 대신하고 삼문 좌우 벽에는 사진처럼 작은 글씨의 景자를 두고 큰 글씨의 네 자는 벽돌과 흰 선으로 길상문자를 표현했다. 景자를 뺀 나머지 여덟 글자 중 판독한 글자는 壽, 義, 福, 禮, 信, 慈 등 여섯 자이고 나머지 두 글자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대문 안으로 들어서면 넓은 마당 위쪽으로 제단을 차리고 제단 중심으로 ⨅형의 담을 두르고 담벽 위에는 중국산의 화려한 꽃문양과 다양한 문양의 타일로 장식하고 그 아래는 사방연속의 마름모 형 문양들을 채색 타일로 꾸며 화려함과 성스러운 분위기를 한껏 부렸다. 흡사 중국제단을 연상케 한다. 1900년대 선망한 독특한 중국풍의 건축양식이리라.
제단에는 세분의 단비(壇碑)를 모셨다. 가운데 비에는 (신라왕자밀성대군 박언침)‘新羅王子密城大君朴公諱彦忱祭壇, 우측 비에는 ‘高麗三韓壁控都大將軍朴公諱 郁祭壇’ (밀성대군의 아들) 좌측 비에는 ‘高麗遼東督捕使朴公諱 瀾祭壇’(밀성대군의 손자) 글자를 篆字로 각자하였다. 이 글씨는 3.1운동 때 독립운동가이며 서화가인 위창 오세창(吳世昌)님이 쓴 전사체이다.
제단 뒤 왼쪽 언덕에 ‘土地之神’의 석비가 놓였고 그 아래로 계단을 설치하였다. 사직단에서나 볼 수 있는 비석이다. 토지지신은 땅을 맡아 다스린다는 신이다. 봄에는 부엌에서, 여름에는 문에서, 가을에는 샘에서, 겨울에는 마당에서 움직이면 화가 미친다고 한다.
제단 앞, 마당 건너 대문채는 빈 공간이다. 옆벽에는 큰 매화나무와 두 마리의 황새와 학과 붉은 해를 그렸다. 매화나무 중심으로 양 옆에 두 마리의 학이 날거나 서 서있고, 가지에는 황새 새끼 3마리가 어미와 눈을 맞추어 노닐고 있다.
뒷벽 전체에는 6곡 병풍 2개를 펼치고 폭마다 그림을 그린 흔적이 남아 있다. 장남삼아 낙서한 곳도 여기저기 보여 교양 없는 짓들이 부끄럽다. 기둥과 보, 그리고 도리와 서까래에도 다양한 문양과 그림과 단청을 입혔다. 단소(壇所)의 성스러움과 상징성을 한껏 구사하고 싶었나 보다.
흡사 중국 고창고성의 고분처럼 모신 신위들의 내세(來世)의 삶을 위하여 치장해 놓았다. 많은 토벽화들이 세월을 감당하지 못하고 흙이 떨어지거나 퇴색되어 그 형체를 분간하기 어렵다. 더구나 타인들의 무관심으로 훼손되어 본래의 모양이 사라지고 있다.
1920년대 건물이라 보존의 맥도, 당시의 토벽화에 담은 내용들은 무엇이며 그 그림들을 지금은 어디서 다시 볼 수 있을지 못내 아쉽고 씁쓸하다.
첫댓글 (景德壇) ㅡ 밀성박씨 정국군파 종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