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소유의 비전 / 유영재
법정 스님의 ‘무소유’ 란 책을 읽었다. 스님은 깜빡 잊고 밖에 내 놓은 난을 들여 놓지 않고 출타를 했다가 그 난 이 햇볕에 말라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부랴부랴 산사로 뛰어갔던 기억을 더듬으며 물건으로 인해 애착이 생기고 그럼으로써 마음의 끄달림이 생긴다는 것을 우리들에게 담담히 들려주고 있었다. 그리곤 그 난을 다른 사람에게 미련 없이 주어버림으로써 마음의 평정을 얻을 수 있었다는 이야기를 통해 소유가 얼마나 인간의 마음을 구속하는지를 우리들에게 말해주고 있다.
흔히들 ‘무소유’ 하면 물건을 소유하지 않는 것을 말할지 모르지만 나는 뉴욕 대 박성배 교수의 무소유를 더 좋아한다. 박성배 교수는 물건은 말할 것도 없이 가지고 있는 머릿속의 것들까지 털어놓아야 진정한 무소유가 된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출가를 하기 위해선 속세의 모든 것을 다 던져버리고 산으로 향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속세의 것들을 모두 가지고 가는 것은 출가가 아니라 이사를 가는 것이라고 박 교수는 말하고 있다. 나의 낮은 생각이 박 성배 교수의 사고 영역에 얼마나 접근할지는 모르지만 나는 변산 공동체 윤 구병 대표의 방식으로 박 교수의 무소유에 다가가고 싶다. “무소유는 공동소유의 다른 이름이다.”
언젠가 해외여행을 갔다 온 나의 친구가 유럽이나 일본 등 선진국들은 개인은 가난하지만 국가는 부자이고 반면에 한국은 나라는 가난하지만 개인은 부자라는 말을 했던 적이 있다. 친구의 말 속엔 잘사는 선진국이라고 해서 가 보았지만 그들이 사는 것을 보니 별것 아니라는 비아냥거림 같은 뉘앙스가 들어있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이 지금도 같은지는 모르겠으나 친구의 말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다. 한국보다 국민 소득이 두 세배 많은 선진국 사람들을 보더라도 대체적인 그들의 씀씀이는 오히려 한국인들보다 못함을 알 수 있다. 한국 국민 소득의 두 배쯤인 호주를 보더라도 이들의 지출은 아주 신중하다. 그러면 호주인 들은 왜 그렇게 지출에 조심스러운가? 현금이 없기 때문이다. 그의 가장 큰 주범은 높은 세금이다. 그러나 세금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공유하는 것이 많다는 것이다. 우리는 많이 공유함으로써 저렴한 의료서비스와 교육의 기회를 갖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그의 결과로 동네마다 있는 공원이나 도서관 그리고 공공시설들을 무료로 아니면 아주 저렴하게 이용하고 있지 않은가? 호주는 땅이 넓기 때문에 그 커다란 공원이 있고 여가를 즐길 수 있는 공간이 많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윤 구병 대표의 생각처럼 공동 소유의 개념이 없었다면 아마 이 어마 어마한 녹지 공간은 모두 콘크리트 덩어리인 아파트로 변해 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이것은 땅의 넓고 좁음의 문제가 아니라 공동소유 의식의 있고 없음이라고 생각한다. 이렇듯 서양인들은 공동 소유를 통해 사회를 발전 시켰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의 가장 좋은 예가 논문 제도이다. 어떤 것을 새롭게 만들어 내거나 새로운 것을 발견해 내면 서양 사회에선 이것을 논문이란 형식을 빌려 발표함으로써 다른 사람들과 새로운 것을 공유하게 된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은 수고스럽게 똑같은 것을 다시 연구하지 않더라도 그 연구 성과를 토대로 더 발전된 기술을 개발하는 것이다. 이런 방법으로 인류의 과학 문명이 발전해온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고려청자의 비밀을 분명하게 밝혀내지 못하고 있다. 서양의 논문과 같은 공유의 문화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 공유의 문화는 책을 쓰는 것도 해당된다. 책을 통해 자기의 생각이나 사상 아니면 기술을 발표하면 그 책을 읽은 사람들이 그 아이디어를 가지고 그들만의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기 때문이다. 공유함으로써 더 커다란 발전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법정 스님도 ‘무소유’ 란 책에서 “크게 버리는 사람만이 크게 얻을 수 있다.” 란 말을 인용하였다. 그러나 나는 버린다는 말 대신에 공유라는 말을 쓰고 싶다. 버린다는 말은 내 것을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다 내다 버리는 것 같은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유는 내 것을 내 놓더라도 그것을 다른 사람들과 같이 나누는 것이기 때문에 버리는 것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친구가 말 했던 것처럼 개인은 가난하지만 나라는 부자라는 말 보다는 개인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것은 적을지라도 공유하고 있는 부분이 많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국가라는 것을 재물을 소유한 또 다른 남이라고 생각하기 보다는 우리의 공유재산을 한데 모아놓은 집합체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런 개념이 설 때에야 비로소 ‘크게 공유하는 사람만이 크게 얻을 수 있다는 말이 가슴에 와 닿을 것이다.
그러나 공유는 신뢰와 믿음위에서만 꽃을 피울 수 있다. 서양의 그 공유 개념도 철저한 계약을 통한 믿음의 토대위에서 발전했지 않은가? 서양에선 새로운 기술이나 발견을 논문이나 간행물의 형태로 다른 사람들과 나누기는 하지만 그것에 대한 수고비를 정당하게 받는다. 특허권이나 각종 권리들이 그것이다. 그래서 일찍이 이런 공유 문화를 발전시킨 서양 국가들이 원천 기술을 많이 가지고 있다. 컴퓨터를 보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는 있지만 우리는 기술의 댓가를 지불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안타깝게도 동양에선 그 공유의 문화가 발전하질 못했다. 믿음의 방법이 확실하게 정착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중국에선 가짜가 판을 치고 있다는 뉴스가 전해진다. 우리들도 한때는 가짜를 만들어 돈을 벌기도 하였다. 그러나 서양에선 가짜가 아주 드물다. 다른 사람이 발명했거나 발견한 것은 정당하게 돈을 주고 사용해야 한다는 그들의 사회적 믿음이 굳건하기 때문이다. 그런 믿음이 정착되지 않았다면 이들도 그들의 노하우를 쉽게 공개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되었다면 서양 사회는 지금 그들이 누리고 있는 이 물질적 풍요함을 이루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무소유’를 버린다는 개념보다는 공유한다는 윤 구병 대표의 개념으로 바꿔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공유는 개인으로선 도저히 소유할 수 없는 것 까지도 소유할 수 있게 만들기 때문이다. 요즘 집 뒤에 있는 커다란 공원을 내 개인 공원처럼 마음대로 뛰어다니며 새삼 깨닫고 있다. ‘무소유’의 위대함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