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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5월 2일
리틀엔젤스 예술단 일행 64명 평양 방문
1998년 5월 1일 오전 첫 민간차원의 평양
공연을 위해 김포공항을 통해 출국한 한국
문화재단의 리틀엔젤스 예술단이 환송객
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
박보희(朴普熙) 한국문화재단 이사장과
리틀엔젤스 예술단은 2일 오후 평양에 도
착, 송호경(宋浩京) 북한 아시아·태평양
평화위 부위원장 등 관계자들로부터 환영
을 받은 후, 공항에서 북한 만경대소년궁전
예술단원들과 함께 ‘우리의 소원’,북한 애창
곡인 ‘반갑습니다’를 불렀다.이어 이날 저녁
에는 인민문화궁전대연회장에서 열린 환영
만찬에 참석,한복차림으로 ‘그리운 금강산
’과 ‘선구자’를 불렀다.
송 부위원장은 환영사를 통해 “아태평화
위 이름으로 여러분들을 환영한다”며“조
국통일을 위한 하나의 목소리를 내자”고
말했고, 박보희 단장은 “리틀엔젤스 평양
공연의 꿈이 이루어져 북녘동포들의 열렬
한 환영을 받고 감개무량하다”고 밝혔다.
리틀엔젤스 예술단은 평양에서의 첫밤을
보통강호텔에서 보낸 후, 평양 시내를 둘러
봤고, 평양 시민들은 리틀엔젤스 단원들이
손을 흔들자 손을 마주 흔들며 환영했다.
방문 이틀째인 3일에는 평양 시내 개선문
과 주체사상탑, 노동당 창건 50주년 기념
탑, 놀이동산 등을 방문했다.
리틀엔젤스 예술단은 4, 5일 평양봉화
극장에서, 7일 만경대 학생소년궁전에서
세 차례 공연을 갖고 금강산과 묘향산을 관광했다.
▶2021년
더불어민주당 대표로 송영길 후보가 선출되었다.
▶2018년
충청북도 보은군에서 12시 34분 36초 보은군 북서쪽 11km 지점에서 규모 2.5의 지진이 발생했다.
▶2017년 - 이승엽이 팀 선배를 뛰어넘어 리그 1호 개인 통산 1,300득점의 고지를 밟았다.
▶2016년 - 영국의 축구 구단 레스터 시티가 팀의 132년 역사 가운데에 최초로 잉글리시 프리미어 리그 우승을 달성했다
▶ 2014년서울 지하철 2호선 상왕십리역 추돌 사고
2일 오후 서울 지하철 2호선 상왕십리역에서 발생한 열차 추돌 사고는 뒤따르던 차량이 급히 멈춰 서다가 발생했다.
이 사고로 서울 시내 교통은 밤늦게까지 큰 혼잡을 빚었다. 평소 지하철을 이용하는 시민들은 나흘 연휴를 앞둔 금요일 버스와 택시로 갈아타느라 큰 불편을 겪었다.
이날 오후 3시 32분쯤 사고가 발생하자, 서울메트로는 지하철 2호선 을지로입구역에서 성수역까지 9개 역의 양방향 운행을 전면 중단했다. 서울메트로는 성수역→을지로입구역 방면 열차 운행은 사고 발생 32분 후 재개했지만, 을지로입구역→성수역 방면(잠실 방향) 열차 운행은 사고 발생 8시간이 지난 자정까지도 재개하지 못했다.
사고가 난 뒤 앞차 승객들은 승강장을 통해 빠져나왔다. 선로에 멈춰 선 뒤차의 승객들은 객차를 나와 반대편 선로를 통해 탈출했다. 승객들은 “이 과정에서 대피 안내 방송은 없었다”고 말했다.
뒤차 승객 이현상(46)씨는 “갑자기 정전되면서 ‘일단 밖으로 나가야 한다’는 외침이 나왔다”고 말했다. 그는 “승객들은 누구의 안내 없이 스스로 대피했다”고 했다. 이씨는 “남자 승객들은 손으로 문을 열거나 유리창을 깼고 어두운 상황에서 승객들이 휴대폰을 켠 채 객차 밖으로 탈출했다”고 말했다.
이날 사고로 1000여명의 승객 중 200여명이 다쳤고 이 중 154명이 한양대병원 등 서울 시내 10개 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았다. 대부분은 경상이지만 2명은 중상을 입었다. 한 여학생 승객의 어머니는 “세월호 터진 지 얼마나 됐느냐”며 분개했다. 그는 “사고 소식을 듣고 집에서 달려왔는데 지하철마저 운행 안 돼 마음을 졸였다”며 “겁에 질린 애를 찾을 때까지 누구 하나 안내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서울시는 사고 직후 상왕십리역 주변에 시내버스 33개 노선 59대를 투입하고, 개인택시 부제도 해제했다. 하지만 복구가 밤늦게까지 지연되고, 지하철 운행이 약 8시간 이상 중단되자 시민들 항의가 빗발쳤다.
서울시는 사고와 관련해 3일 오후 3시 브리핑을 갖고, 지하철 추돌사고가 신호기의 고장으로 인해 열차 자동정지 장치(ATS)가 작동하지 않아 발생한 것으로 잠정 결론을 내렸다.
또, 사고 13시간이 지나서야 고장 난 신호기를 원래 상태로 복구했으며 당분간 신당역에서 상왕십리역으로 가는 구간에서 열차를 시속 45킬로미터 이하로 저속 운행하기로 했다.
▶2011년오사마 빈 라덴 사망
테러의 배후, 테러조직 알카에다의 지도자 오사마 빈 라덴(bin Laden·54)을 응징하기 위한 미국의 최종 작전 단초는 관타나모 수용소에서 시작됐다. 그리고 2일 미국은 빈 라덴을 사살하고 그의 시신을 바다에 수장(水葬)하는 것으로 10년간의 끈질긴 추적을 마무리했다.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은 1일 오후 11시 35분(미 동부시각) 백악관에서 발표한 특별 성명을 통해 “오늘(1일) 미군 특수부대가 빈 라덴이 숨어 있던 파키스탄 아보타바드의 가옥을 급습해 교전 끝에 그를 사살했다”며 “이제 정의는 실현됐다(Justice has been done)”고 했다. 그는 “미국은 지난해 8월 빈 라덴의 파키스탄 내 은신처에 관한 단서를 확보하고 이를 추적해 왔으며, 지난주에 빈 라덴의 제거 작전을 단행할 충분한 정보가 확보됐다고 판단해 작전 개시를 승인했다”고 했다. 이날 작전으로 빈 라덴과 함께 남성 3명, 여성 1명이 사살됐으며, 사망자 중 1명은 빈 라덴의 아들인 것으로 전해졌다. 미국 행정부의 한 관리는 “무슬림인 빈 라덴의 주검을 이슬람 전통에 따라 바다에 수장했다”고 밝혔다.
9·11 테러 직후 “‘죽여서든지 생포해서든지’ 빈 라덴을 원한다”고 했던 조지 부시 전 대통령은 이날 “미국은 물론 평화를 갈망하는 전 세계 모든 이들과 9·11 테러로 사랑하는 이를 잃은 모든 이들의 승리”라고 했다.
한편 알카에다는 이날 미국의 빈 라덴 사살 발표 약 9시간 후에 그의 사망을 공식 확인하고 미국에 대한 보복을 천명했다. AFP 통신은 알카에다가 성명을 내고 빈 라덴이 미군에 의해 사망했음을 인정하고, 그를 미국에 맞선 성전을 이끌면서 자신의 영혼과 재산을 바친 기사(騎士)로 추앙한다고 밝혔다고 보도했다.
▶2007년1기 대법원 양형위원회 발족
▶2003년중국 잠수함 사고, 70명 전원 사망
▶1999년파나마 대통령에 미레야 모스코소(女) 당선
▶1998년집중호우로 지하철 7호선 침수
1998년 5월 1일 밤부터 내린 비로 서울 지하철 7호선이 범람한 중랑천 물에 침수돼 5월 2일 오전 7시40분부터 지하철 운행이 전면 중단되는 사태가 빚어졌다. 물은 마치 점령군처럼 하행선쪽으로는 사가정역까지,상행선으로는 마들역까지 차례차례 진입해 7호선 강북구간 대부분을 잠식했다.
이번 지하철 7호선 침수사고의 직접적인 원인은 중랑천 지하철 6호선 6-12공구 공사장의 임시제방(가물막이) 붕괴였다. 그러나 이 임시제방의 붕괴에는 몇가지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하천변에 붙어 있는 6호선 공사장이 침수되면 7호선은 물론,5호선,2호선까지 연쇄적으로 침수돼 서울 전역의 지하철 교통이 마비될 수 있다는 취약점을 사전에 알고서도 대비책을 소홀히 한 것이 이번 사고의 가장 큰 원인이었다.
안전사고에 미리 대처하지 못해 이런 어처구니없는 사고가 발생했는데도 서울시 및 서울 지하철 건설본부와 시공사인 현대건설 등은 서로가 책임소재를 상대방에게 떠넘기는 모습이였다. 이번 사고로 1천억원이 넘는 피해를 입었고 복구작업 지연 등으로 극심한 교통체증을 빚었다.
▶1998년민속학자 임석재씨 별세
▶ 1994년 넬슨 만델라가 이끄는 아프리카 민족회의(ANC), 자유총선에서 승리
“가장 위대한 무기는 평화입니다”
착한 머리와 착한 가슴은 언제나 붙어 다닙니다. 강철 같은 의지와 필요한 기술만 있다면, 세상의 어떤 불행도 자기의 승리로 탈바꿈시킬 수 있습니다. 사람 간에는 무엇을 가지고 태어났느냐가 아니라, 무엇이든 자기가 가진 것으로 무엇을 이루어 내느냐는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어느 민족에게든, 발전을 이룩하기 위한 가장 위대한 무기는 평화입니다.
눈에 보이고 의사가 고칠 수 있는 상처보다, 보이지 않는 상처가 훨씬 아픕니다. 남에게 모멸감을 주는 것은 쓸데없이 잔인한 운명으로 고통 받게 만드는 것이라는 걸 나는 알았습니다. 용기란 두려움이 없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을 이기는 것이라는 걸 나는 알았습니다. 지금 기억나는 것보다 더 여러 번 두려움을 느꼈지만, 담대함의 가면을 쓰고 두려움을 감췄습니다. 용감한 사람은 무서움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두려움을 정복하는 사람입니다.
빈곤 퇴치는 자선의 몸짓이 아니라 의로운 행동입니다. 인간의 기본권과 존엄권, 그리고 인간다운 삶을 수호하는 일입니다. 남아프리카의 경험이 전 세계에 던지는 의미가 있다면, 그 의미란 다름 아닌, 선한 뜻을 가진 사람들이 공동의 선을 위해, 차이를 넘어 함께 모인 곳에서는, 손댈 수 없을 것만 같던 문제조차 평화롭고 정의로운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는 것이기를 바랍니다.
넬슨 만델라(Nelson Mandela) - 인권운동가, 정치가, 노벨 평화상 수상
1918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생. 1942년 변호사 자격증을 취득하고 2년 뒤 아프리카민족회의(ANC) 가입. 반인종차별 활동으로 1956년 내란죄로 구속, 1961년 무죄판결을 받았으나 1962년 다시 구속되어 복역중 다른 ANC 지도자들과 함께 내란음모 혐의로 종신형을 받았다. 27년의 수감 기간 대부분을 중죄인 형무소인 ‘로벤아일랜드’에서 보내는 동안 명성은 오히려 더해 갔다. 1990년 석방된 뒤 ‘다인종 남아프리카’ 건설을 위해 노력했으며, 1993년 백인 정치인 데 클레르크와 공동으로 노벨 평화상을 받고, 이듬해 남아프리카 최초의 민주 선거에서 최초의 유색인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1999년까지 재임했다.
▶1992년한국-중국, 투자보장협정 체결
▶1990년중국 정계거물 신화통신 허가둔 미국으로 망명
중국공산당 중앙고문위원 겸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으로 관영 신화통신의 홍콩 분사장이었던 허가둔이 1990년 5월 2일 홍콩을 통해 미국으로 정치적 망명을 했다. 그의 망명은 그가 중국의 막후 최고실력자 등소평과 군부의 최고실력자 양상곤의 측근이며, 중공당의 고급기밀은 물론 중국 최고지도자들의 사생활까지 알고 있는 인물이기에 중국지도부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신화통신 홍콩 분사장은 중국을 대표하는 사실상의 홍콩주재대사로 간주되고 있는데 허는 1983년 6월 홍콩 분사장으로 부임한 이래 약 7년간 재직해왔으며, 1985년 3월 중국 어뢰정사건 때 중국정부를 대표하여 한국 측과 접촉, 한-중 공식접촉의 첫 선례를 남긴 인물이다. 허의 망명은 천안문 사태 때 그 동기가 마련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당시 홍콩주재 중국대사격인 신화통신 홍콩 분사장이었던 허는 6.4사태 직전 홍콩에서도 벌어졌던 반중국 정권 시위에 좌익단체도 참가한 사실과 관련, 북경 당국과의 협의를 위해 북경으로 급히 날아갔다.
그러나 홍콩에서의 대규모 호응시위와 문회보, 대공보 등 허가 장악해야 할 중국계 언론들마저 천안문시위를 지지하는 것을 본 등소평은 허를 만나 주지도 않았다. 허는 결국 총리 이붕의 지시에 따라 1990년 2월 신화통신 홍콩 분사장직에서 보직도 없이 물러났다. 결국 인사불만에 따라 미국으로 망명을 한 것이다.
▶1986년올림픽대로 개통
가양지구에서 성산대교까지 8차선으로
시원하게 뚫린 올림픽대로.
서울시가 한강종합개발사업의 하나로 건설한 올림픽대로가 착공 3년 7개월 만인 1986년 5월 2일 개통됐다. 전두환대통령은 서울잠실종합운동장 앞에서 열린 올릭픽대로 개통식에 참석, 개통테이프를 끊고 잠실에서 양화대교까지의 신설도로를 시주했다. 전 대통령은 이날 개통식에 앞서 안상영 서울시 종합건설본부장으로부터 한강종합개발사업 및 올림픽대로건설현황을 보고받고 건설공사업계대표 및 공사관계자들을 격려했다.
이날 개통식은 오후4시20분부터 15분간 잠실서울종합운동장앞 올림픽대로상에서 있었으며 일반인 통행은 오후5시부터 허용됐다. 한강상류인 행주대교 남단에서 상류쪽 강동구 암사동까지 한강남쪽 강변을 따라 서울의 동서를 관통하는 올림픽대로는 총연장 36km, 폭 17.4~22m의 차량전용도로로 총사업비 1천4백12억원이 투입됐다.
▶1986년대처 영국총리 방한
▶1983년성교육 교재 초-중-고교 교사에 보급
▶1982년영국 잠수함 포클랜드전서
아르헨티나 순양함 격침
▶1981년미국 심리학자 데이빗 웩슬러 사망
▶1980년한국-키리바시 국교 수립
▶1980년서울형사지법, 남조선민족해
방전선 사건 선고공판(이재문등 4명사형)
▶1977년단국대 학술조사단 진천군서 국내최대 마애여래입상 발견
▶ 1972년 오늘,
미국 FBI 후버(John Edgar Hoover) 국장 미국 워싱턴 D.C.에서 (77세)사망 (1895년 1월 1일 미국 워싱턴 D. C.에서 출생~)
/1924년 7대 국장 /1924년 수사국(FBI의 전신) 국장으로 임명되어 1935년 FBI 창설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24년부터 1972년죽을 때까지 48년간
FBI에서 재직했고 여기까진 그렇다치고
37년간 FBI국장을 역임했다는 것이
경이롭기만 하다!
도데체 뭔 약점이,
미국 대통령이 5번 바뀔 동안 FBI 국장은 단 한명이었다. 존 에드거 후버는 초대 FBI국장으로 대통령들의 약점을 이용해 자리를 지켰다.
▶1972년이후락, 평양 극비방문
적대적 관계였던 미국과 중국이 이른바 ‘핑퐁외교’를 통해 중국 베이징에서 화해의 축배를 들고 양국 간 거리를 서로 좁혀가고 있던 1972년, 한반도에도 데탕트(긴장완화)의 바람이 불었다. 미·중 간의 밀사가 키신저였다면 한국의 밀사는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었다.
1972년 비밀리에 방북한 이후락 당시
중앙정보부장(왼쪽)이 11월 3일 평양에서 열린 제 2차 남북조절위원장회의에 참석해 김일성과 악수하고 있다.
1972년 5월 2일,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정홍진 대한적십자사 과장과 비서·의사 각 1명씩을 대동하고 비밀리에 판문점을 경유, 평양을 방문했다. 출발에 앞서 이후락은 만일을 대비해 청산가리를 챙겼다. 그만큼 긴장관계가 첨예하던 때였다. 이후락은 5월 5일까지 나흘간을 평양에 머물며 김일성과 두 차례 면담을 갖고 얽혀 있는 실타래를 풀어보려 했다. 김일성도 “과거는 과거고 다시는 남침 않겠다”며 ‘남침’을 시인했고, 청와대를 습격하려 했던 1·21사태는 자신이 한 짓이 아니라며 박정희 대통령에게 미안하다는 제스처를 보였다. 김일성은 박 대통령의 의중을 확인하기 위해 5월 29일 박성철 제2부수상도 서울로 보냈다.
이후락이 방북하기 전에 행해진 남북 간 비밀회담은 1971년 8월 12일 최두선 대한적십자사 총재가 ‘남북이산가족찾기’를 제안하고 북한이 이에 동의하면서 계기가 마련됐다. 11월 19일, 판문점에서 가진 제9차 남북적십자 예비회담에서 정홍진이 북한에 비밀접촉을 제의함으로써 시작된 11차례의 비밀접촉은 3월 28일 정홍진을 북한으로 보내 이후락의 방북을 합의하는 데까지 발전했다. 이후락·박성철의 상호 방문으로 최소한의 신뢰를 쌓았다고 판단한 남북한은 마침내 7월 4일, 이후락과 박성철이 서울과 평양에서 각각 ‘7·4 남북공동성명’을 동시에 발표했다.
▶1965년한국-벨기에, 국교 수립
▶1964년서울 도동서 4층집 무너져 14명 사망 27명 부상
▶1964년민주, 자민, 국민 3당 통합 선언
▶1962년국가재건최고회의, 주민등록법 통과
▶1960년곽상훈 국회의장 피선
▶ 1960년 오늘,
소련, 자국영공 침해한
미국 U2 초고속 정찰기 격추.
▶1958년제4대 민의원 선거
▶1957년‘매카시즘’의 선동자 매카시 사망
“정부의 가장 중요한 부처인 국무성이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유린되고 있다. 나는 그 205명의 명단을 갖고 있다.” 이 한 마디로 20세기 미국을 광기 ‘매카시즘’으로 몰아넣었던 매카시가 1957년 5월 2일 실의 속에 간장병으로 46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1908년 위스콘신주 아일란드계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수완가로 두각을 나타내 29세에 최연소 주 순회재판소 판사가 됐다. 진주만 기습으로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자 해병대에 자원, 이같은 경력을 배경으로 46년 상원의원 선거에 출마해 예상을 뒤엎고 당선됐다. 입심 좋은 의원으로 평판이 났으나 아직 전국적 지명도가 있는 정치인이라곤 말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날 밤 연설은 그를 하루아침에 여론의 초점으로 만들어버렸다.
이날부터 시작된 소위 ‘적색 사냥’ 소동은 온 매스컴에 대서특필되기 시작했다. 여론의 동태가 심상치 않자 트루먼 대통령은 즉각 조사위원회를 소집했다 . 애초에 매카시가 말한 ‘명부’란 없었다 . 석달 후에 그의 발언이 ‘근거 없음’으로 결론나긴 했지만 적색 사냥 선풍은 이미 손댈 수 없는 기세로 확산된 뒤였다. 매카시선풍의 마수가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군부에까지 미치자 1954년 마침내 상원 공청회가 열렸고, 전 국민은 36일 동안 TV를 통해 이 공청회를 주시했다. 무책임하고 야만적이며 정략적인 매카시의 언동에 사람들은 속았음을 깨달았고, 마녀사냥 열기는 급속히 식었다.
결국 매카시는 ‘상원의 전통에 위배되는 행동을 했다’고 파문됐고, 4년에 걸친 집단 광기는 이렇게 끝이 났다. 결국 매카시 선풍은 2차 대전 후의 냉전 전개와 한 정치신인의 야욕이 함께 빚어낸 한 시대의 우화였다.
▶1956년중국최고국무회의 백가쟁명 시사
▶1955년한미민간원조협정 조인
▶1953년요르단 후세인 1세 즉위
▶1953년이라크 파이잘 2세 즉위
▶1952년세계 첫 제트여객기 영국서 취항
영국의 자존심-세계최초의 제트여객기 "드 하빌랜드 DH.106 코멧(de Havilland DH.106 Comet)"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5월2일, 런던·히드로(Heathrow)공항에 빨간 카펫이 깔렸다. 그리고 세계최초의 제트여객기 취항을 위한 세기의 성대한 취항기념행사가 열렸다.
이날 영국항공(BA)의 전신인 영국해외항공(BOAC)은 간선 정기노선인 런던∼요하네스버그 노선에 세계최초의 제트여객기-‘de Havilland DH.106 Comet(드 하빌랜드 DH.106 코멧)’를 취항시켰다.
'DH.106 Comet'은 당시 영국이 자존심을 걸고 완성시킨 작품으로 길이 28.35m, 너비 35m크기 터보제트엔진 4기를 장착하고 후퇴날개와 객실에 여압(與壓)장치를 갖춘 36인승 최신형여객기였다. 여압장치를 갖추었다는 것은 고공비행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BOAC는 당대의 황금노선 런던·히드로(Heathrow)~로마(Rome)~베이루트Beirut)~카르툼(Khartoum:수단)~엔테베(Entebbe:우간다)~리빙스턴(Livingstone:잠비아)~요하네스버그(Johannesburg)간에 세계최초의 제트여객기를 취항시키면서 런던~요하네스버그 간 소요시간을 23시간으로 단숨에 절반으로 단축시켜버렸다.
뿐만 아니다. 당시 경쟁기인 DC-6이나 콘스텔레이션(Lockheed Constellation : 애칭 Connie)이 피스톤엔진을 사용한 프로펠러기임에 비해 제트엔진을 장착하여 진동도 적어 발군의 쾌적성을 보였다. 그보다도 순항속도가 2배인데다, 날씨 영향을 거의 받지 않는 고고도를 날기 때문에 결항률이나 정시성에도 뛰어났다. 이 때문에 BOAC는 초년도 탑승객 3만명이라는 초인기를 누렸다.
그러나 화려한 출발과는 달리 정기운항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기체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953년5월과 1954년1월 연거푸 공중폭발 및 추락사고를 일으켰다. 종전 여객기에 비하여 훨씬 높은 고도(1만 m)를 비행하다보니 지상에서의 고기압과 고공에서의 저기압 상태를 되풀이 겪으면서 기체가 신축과 팽창을 반복하는 바람에 금속피로가 쌓이게 되었다. 또, 유리창을 사각으로 설계한 탓에 기압이 낮은 고공에서 모서리 부분에 하중이 걸려서 균열이 발생한 것이다.
이 2건의 사고는 결과적으로 항공기술, 특히 안전향상에 많은 교훈을 안겨 주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 사고 이후 항공기 객실창 모양이 사각형에서 원형 또는 끝이 둥글게 처리된 사각형으로 만들게 되었다.
▶1945년영국-인도군 랑군점령
▶1945년소련, 독일 베를린 점령
▶1936년영화감독 임권택 출생
▶ 1933년 영국 스코틀랜드, 네스호 괴물 첫 보도
▶1927년흥남 질소비료공장 설립
▶1924년경성제국대학 관제공포. 예과 개설
▶1921년시인 조병화 출생
▶1902년서인도제도 마르티니크섬 펠레이 화산 분출로 4만명 사망
▶ 1896년 한국 최초의 육상경기대회 개최
▶ 1893년 미국 국립광업회사 파산. 전미국에 대공황
▶ 1857년 프랑스 시인 알프레 드 뮈세 사망
▶ 1519년 레오나르도 다빈치 사망
천재 중의 천재, 몇 세기를 앞서간 과학자, 르네상스를 이끈 거장….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둘러싼 수사는 실로 다양하다. 그중에서도 르네상스기의 뛰어난 화가, 기계학·해부학·건축학 등에 비상한 능력을 보인 자연과학자가 구체적으로 그를 설명하는 수식어다.
다빈치는 화가로 널리 알려져 왔으나 ‘모나리자’와 ‘최후의 만찬’ 외에는 화가로서 이름을 알릴 만한 작품이 흔치 않은 화가다. 열다섯 남짓한 회화 가운데 몇 점은 미완성이고 또 몇 점은 공동작품이기 때문이다. 조각은 단 한 점도 남기지 않았다.
그가 신의 총애를 한몸에 받은 듯 역사상 가장 위대한 천재로 손꼽히는 것은 어느 분야든지 그가 관심을 갖고 파고든 후에는 여느 전문가 못지않은 업적을 보였기 때문이다.
그는 미처 분화되지 않은 해부학, 천문학, 지질학, 항공학, 기계공학, 지리학, 광학 등의 다양한 분야를 섭렵해 '과학'이라는 용어가 아직 생소한 시대에도 사물을 과학적으로 바라보고 과학적으로 사색했다. 특히 사물에 대한 정교한 습작과 라이트 형제에 영감을 준 비행기 설계도 등의 각종 기록을 1만 3,000쪽 분량의 노트에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일종의 성형술을 창안하고 정교한 카메라의 반사장치를 발전시키고 콘택트 렌즈와 증기의 힘 등을 기록한 것만으로도 그가 발명가의 반열에 오르는 데 손색이 없지만, 특히 해부학에서 보인 노력과 성과는 단연 발군이다. 다빈치는 인체의 비밀을 풀기 위해 30여구의 시체를 해부했다. 교회가 인체의 분해를 엄격히 금했음에도 송장까지 철저히 해부했으며 간과 심장 등까지 조각조각 저몄다. 평생을 이탈리아의 피렌체와 밀라노에서 생활했으나 프랑스에서 말년을 보내다가 1519년 5월 2일 67세로 숨졌다.
▶ 1360년 중국 명조의 제3대 황제(1402~24 재위) 영락제 출생
▶ 1036년 고려 정종, 내외명산 벌목금지령
https://youtu.be/7C4-T31G6X4
출처 네이버지식백과, 반가운의hi스토리,솦트리종려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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