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덧붙여:이 글은 한겨레신문 3월 5일(화)자 30쪽에 있는 고정 칼럼난인 [유레카]에 노형석님이 "정중부의 난"이라는 제목의 칼럼입니다. 좋은 글이라 여겨 이곳에 그대로 옮겨 놓았읍니다. 읽으시기를 권합니다.
노형석의 [유레카]
정중부의 난
노형석(한겨레신문 기자)
12세기 무신 정변 ‘정중부의 난’이 새삼 회자되는 중이다. 국가정보원장에 내정된 남재준 전 육군참모총장이 2004년 재임 시절 군 개혁에
반발해 ‘정중부의 난’을 입에 올렸다는 언론 보도가 부각된 탓이다. 사실무근이라고 해명했지만, 당시 발언이 조직적으로 은폐됐다는 군 내부 증언이
새로 나오면서 쟁점화를 피할 수 없게 됐다.
1170년 일어난 정중부의 난은 ‘경인의 난’으로도 불린다. 대장군 정중부가 무뢰한이었던 영관급 산원
이의방, 이고와 짜고 의종의 보현원 행차 때 문신과 내시 140여명을 살육한 한국 사상 초유의 이 군사쿠데타는 고려 전·후기의 분수령이었다.
1961년 5·16 쿠데타의 역사적 뿌리로서 정변의 의미를 간파한 이가 1962년 주한 미대사관 참사관 필립 하비브(훗날 대사)였다. 그의
기밀보고서는 5·16의 배경이 군-민 파벌주의이며, 그 뿌리가 “한국의 근대 혹은 중세 역사에서 유일하게 성공한 쿠데타인 정중부의 난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지목했다.
정변은 의종이 벌인 무술경기에서 패한 노장군 이소응을 문신 한뇌가 뺨을 때려 조롱한 게 빌미가 됐다. 문신
우대 정책이 원인이라고들 하지만, <고려 무인 이야기>를 쓴 이승한씨 등 일부 학자들은 의종이 문신 견제를 위해 무신 친위세력을 키운
게 화근이 됐다고 주장한다. 선왕 인종 때 외척 문신들의 전횡을 겪은 의종이 친위군에 천민 출신들을 특채해 총애했으나, 문신들을 의식해 걸맞게
처우해주지 않은 특수한 정치상황이 야기한 참극이라는 것이다. 무신들은 “문신의 관을 쓴 이는 씨를 남기지 말라”며 ‘삼을 베듯’ 문신들을 죽이고
저택까지 헐어버렸다. 무신 통치기구 중방은 중앙정보부 같은 공포정치의 본산이었다. 이런 무신정권을, 몽골에 맞선 후예 삼별초를 앞세워 호국
상징으로 치켜세운 이가 5·16 주역 박정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