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민, 필요하지만 위험한 것,
티베트 답사에서 돌아온 것이 불과 며칠 되지 않았는데,
까마득한 옛일처럼 아득한 것은 무슨 이유일까?
오자마자 산적한 일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고,
그 일에 푹 빠져 있지도 못하면서 마음속에 큰 짐으로
억누르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사람들의 삶은 이렇게도, 저렇게도 펼쳐져 있고, 우리는 그 삶을 걸어가는 나그네이다.
그 여정 중에서 만나는 사람이나 풍경을 보면서 이런 저런 생각에 잠기게 된다. 그렇다면, 이 번 티베트 답사 중에 가장 내 마음 속에 각인 된 것은 무엇일까?
연민이었을 것이다.
“연민 (憐憫/憐愍)은 다른 사람의 처지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다. 동정과 비슷한 의미로 사용되지만,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동정과는 달리 연민은 그 자체의 감정을 의미한다.”라고 지식백과에 실려 있는 연민의 감정, 끝도 없이 펼쳐진 초원과 새롭게 창조되고 있는 라싸나 그 밖의 도시들, 그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티베트 사람들의 종교관과 그들의 외모만을 들여다본 단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가슴속 깊은 곳에서 시작된 연민의 마음이 지금껏 남아 있는 것은 무엇일까?
“연민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라면 참된 인간이 아니지. 만일 세상의 고통을 보고도 울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절반만 인간이야. 그리고 세상에는 항상 고통이 존재하게 마련이야. 이 사실을 안다고 해서 인간이 꼭 절망하는 것은 아니지. 훌륭한 인간은 그가 겪은 일로부터 고통을 몰아내려고 노력하지. 어리석은 인간은 자기 내면 이외의 고통은 의식하지도 못해. 그리고 불쌍하고 불우하고 사악한 인간은 고통이 점점 더 깊이 뿌리를 내리게 만들고, 어디를 가나 그 고통을 사방에 퍼뜨리지.
하지만 사람들은 저마다 미지의 곳이나 무無에서부터 아주 새로운 인간으로써 온 것도 아니고, 이곳으로 오겠다고 자청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내 생각엔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은 죄가 없을 것 같아. 사람들에게서 온 셈이니까, 악마는 악이 스스로 악임을 안다고는 정말 믿지 않아. 그냥 운이 나빴을 뿐, 그것이 전부란다. 기각 있는 사람답게 아침이나 먹어라.“
월리엄 사로얀 <인간 희극> 194페이지에 실린 글과 같이 누구나 자청해서 그곳에서 태어난 것도 아니다. 그냥 운명이 그들을 그곳에서 태어났고, 우리 또한 분단 조국 이곳에서 태어나 항상 불안 속에서 삶을 영위하고 있는 것이리라.
그러나 나 한 사람이, 아니 세상의 모든 사람이 연민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세상이 달라지고 사람의 마음이 달라져서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나, 호프밀러 소위가 누군가를 도울 수 있다고? 누군가를데위로할 수 있다고? 내가 하루나 이틀 저녁을 장애인 아가씨와 함께 수다를 떨면 그녀의 눈빛이 반짝이고, 볼에 생기가 돌고. 내 존재로 인해 암울했던 집안이 환하게 밝아진다고?”
슈테판 츠바이크는 <초조한 마음>에서 아니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아니 부정한ㅁ다.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음의 글은 더 가슴을 아리게 만든다.
“연민이라는 것은 양날을 가졌답니다. 연민을 잘 다루지 못하겠으면 거기서 손을 떼고, 특히 마음을 떼야 합니다. 연민은 모르핀과도 같습니다. 처음에는 환자에게 도움이 되고 치료도 되지만 그 양을 제대로 조절하지 못하거나 제때 중단하지 않으면 치명적인 독이 됩니다. 처음 몇 번 맞을 때에는 마음이 진정되고 통증도 없애주죠. 그렇지만 우리의 신체나 정신은 모두 놀라울 정도로 적응력이 뛰어나답니다. 신경이 더 많은 양의 모르핀을 찾게 되는 것처럼 감정은 더 많은 연민을 원하게 됩니다.(...) 소위님,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연민은 무관심보다도 더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옵니다. 우리 의사들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고, 판사나 법, 집행관, 전당포 주인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가 연민에 굴복한다면 이 세상은 제대로 돌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연민이라는 거 아주 위험한 겁니다.” 슈테판 츠바이크 <초조한 마음>에 실린 글이다.
누군가에 대해 세상의 어딘가에 대해 품는 연민, 물론 그런 마음이 없다면 세상은 너무 각박한 것이리라. 좋은 것이지만 위험한 것, 그게 연민이다.
그 연민이 상대적이지만 가장 알지 못하고 지나칠 때가 많은데, 가장 연민을 받아야 할 사람은 ‘나’ 자신이 아닐까?
우리들 ‘자신’은 스스로를 알지 못하면서.그 자신도 제대로 주체 못하면서, 그 자신이 연민을 받아야 할 사람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연민의 마음을 품고 사는 것은 아닐까?
스스로를 잘 알고, 스스로를 잘 사는 것, 그것이 이 세상을 잘 사는 방법은 아닐까?
2016년 8월 22일 월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