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월4일 [대림 제1주간 수요일]
마태오 15,29-37
선악과는 동물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일에 사용된다
오늘 봉헌에서 예수님께서는 외딴곳에서 당신을 따르던 이들의 병을 고쳐주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배고프게 돌려보내서 쓰러지는 일이 없도록 그들을 먹이려고 하십니다.
이를 위해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제자들의 빵이 없었으면 기적을 하시지 않으셨을까요?
그분은 마치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시는 것처럼 그럴 능력이 있으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에게도 무언가 요구하시는 이유를 알아야만 합니다.
중국 소설 『나는 남편을 파산시키려고 매일 열심히 일한다』는 자기 삶이 미리 정해졌다고
믿는 여성 린멍(Lin Meng)의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부유하고 헌신적인 남자인 그녀의 남편은 더 큰 성공을 거둔 후 그녀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재혼하게 될 운명입니다.
린멍이 그렇게 믿는 것입니다.
린멍은 그래서 남편의 사업을 망하게 하려고 결심합니다.
그녀는 남편의 돈으로 실패한 엔터테인먼트 프로젝트에 투자하고, 값비싼 직원을 고용하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남편의 자원을 고갈시킬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남편은 당황하지 않습니다.
그는 그녀의 행동에 저항하거나 의문을 제기하는 대신 그녀의 새로운 노력과 꿈을 지원합니다. 남편을 파산시키기 위해 쉬지 않고 노력하는 동안
예상치 못한 성공이 뒤따릅니다.
그녀가 자금을 조달한 영화는 실패할 것으로 예상되었지만 대 히트가 되었습니다.
그녀가 쇼를 위해 고용한 값비싼 유명인은 기록적인 시청률을 기록합니다.
그녀의 가장 무모한 사업 결정조차도 예상치 못한 이익을 가져옵니다.
그녀의 노력은 파멸을 초래하기는커녕 자신만의 제국을 건설하기 시작합니다.
그녀는 자신을 운명의 희생자가 아니라 남편의 그늘을 넘어 자신의 정체성과 가치를 형성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보기 시작합니다.
그러자 남편도 아내인 린멍을 더 존경하는 눈으로 바라보며 더욱 신뢰하고 사랑하게 됩니다.
그녀를 단순히 사랑하는 아내가 아니라 엄청난 힘과 비전을 지닌 파트너로 보기 시작한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과를 왜 요구하셨을까요? 단순히 당신에게 받은 것에
감사하기만을 위하셨을까요? 아닙니다.
본래 그들은 동물들에게 이름을 지어주어야 했습니다.
그 일에 그들이 봉헌한 것이 쓰여 자신들도 하느님의 일에 합당한 사람이라고 여기고 하느님도 그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저도 신학생 때 유학을 다녀오고는 공부가 쉽지 않음을 알고 신부가 되었을 때 다시 유학 가라고 하셨을 때는 거부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느낍니다.
주교님이 저에게 있는 무언가를 요구하시는 이유는 상호 존중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을.
내가 그분을 위해 아무것도 봉헌하지 않는다면 본당에 나가 본당신부를 하였어도 크게
고마워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물론 저 자신도 그분께 합당한 사제가 아니라고 여겨 적당히 살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몸소 인간의 죄를 위해 모든 보속을 해야 더 완전하겠지만 예수님은 당신 혼자 모든 것을 이루길 원치 않으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명확하게 예수님의 보속에 부족한 부분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기꺼이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 수난의 부족한 부분을 내 몸으로 채우고 있습니다.” (골로 1,24)
저는 신자들에게 봉헌을 강조합니다.
그 이유는 그 봉헌된 것으로 신자들에게 다시 돌려줘 그것으로 선교할 자금이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소공동체에 돌려줘 가정방문 할 때 선물을 사라고 하고 가두 선교할 때도 다른 사람들에게 선물을 나누어주라고 합니다.
그것들은 모두 봉사하는 그분들이 낸 교무금과 헌금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렇게 저는 신자들을 존경하게 되고 신자들도 본당 신부에 합당한 신자라는 자부심을 가지게 됩니다.
1849년 세관의 검사관으로 일하던 어떤 사람이 직장에서 해고당했습니다.
아내는 오히려 기뻐하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드디어 당신이 좋아하는 문학을 본격적으로 할 수 있게 되었네요.
아마 이 해고가 당신에게 좋은 기회가 될 거예요.”
그리고 아내는 현금 뭉치가 든 작은 가방을 가져와 꺼내 놓으며 또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혹시나 해서 당신 봉급에서 지금까지 따로 마련해 놓았어요.
당신이 글을 쓸 동안 우리는 이 돈으로 살아갈 수 있을 거예요.”
그 남편의 이름은 너새니얼 호손이고 그가 그렇게 해서 쓴 소설이 유명한 ‘주홍글씨’입니다.
‘주홍글씨’나 ‘큰 바위 얼굴’과 같은 위대한 소설을 집필하게 된 것에 어떤 누구도 호손이 자기 능력만으로 그렇게 할 수 있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 영광은 아내와 함께 받아야 정당할 것입니다.
부부가 함께 무엇을 이루어냈을 때 그것이 누구의 공로인지 정확히 나눌 수 없습니다.
다만 두 사람이 함께 같은 영광을 받는 것입니다.
이렇게 두 부부가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2월4일 [대림 제1주간 수요일]
이사야 25,6-10ㄱ
마태오 15,29-37
이사야의 예언은 심판하고 부수는 말씀이면서도
동시에 소생시키고 부활시키는 말씀이었습니다!
이번 대림 시기는 크게 전례의 성격상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눠집니다.
11월 28일~12월 16일까지가 전반전이라고 할 수 있고, 12월 17일~24일까지가 후반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반전의 전례는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며 깨어 기도하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반면 후반전의 전례는 임박한 예수 그리스도께로 우리의 시선을 고정시킬 것을 제안합니다.
전반기 매일 미사 첫 번째 독서는 이사야서가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예언자 중의 예언자, ‘예언자들의 왕’으로 손꼽히는 이사야는 기원전 765년에 태어나,
742년에 예언자로 소명을 받았으며, 700년대 신앙과 정치적 위기에 몰려있던 남왕국 유다에서 활동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단 한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혼동과 우여곡절의 시절, 갈팡질팡하던 백성들에게 희망과 격려의 언어로 위로했던 참 예언자였습니다.
40여 년간 예언자로서 백성들의 영적생활을 동반했던 그의 메시지 핵심주제는 주님을 향한 백성들의 불충실을 고발하는 것이었습니다. 동시에 그 결과 이스라엘의 멸망을 예언하는 것이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듣기 좋은 말로도 사람들의 마음을 잡기 힘든데, 가슴을 후벼 파는 ‘지적질’과 듣기 싫은 멸망과 심판을 선포하니 그의 삶이 얼마나 힘겨웠을까, 상상이 갑니다.
이사야 예언서를 읽어보면 알 수 있듯이 그의 언어는 하느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영감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의 예언은 심판하고 부수는 말씀이면서도 동시에 소생시키고 부활시키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는 메시아 예수님의 도래를 가장 세밀하고 밝히고 계시한 예언자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창조주 하느님과 인간에 대해서 깊이 통찰했습니다.
하느님께서 계시를 주시지 않았다면 도저히 깨달을 수 없는 진리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사야 예언서의 메시지가 얼마나 참되고 강렬했으면 예수님께서도 즐겨 읽으셨고 인용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이사야 예언서 안에서 앞으로 자신에게 펼쳐질 인생 드라마 각본의 원본을 발견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각본에 따라 당신의 인생을 장엄하게 마무리 지으셨습니다.
이사야 예언자가 선포한 말씀은 너무나 신랄하고 강렬해서 청중들의 가슴을 칼로 후벼 파는 느낌을 줄 때가 많았는데, 다른 한편 마냥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한없이 부드러운 어조로 백성들을 달래고 격려하며 신속히 주님께로 돌아서도록 자극하고 있습니다.
오늘 첫 번째 독서가 그렇습니다.
“그날 만군의 주님께서는 이 산 위에서, 모든 민족들을 위하여, 살진 음식과, 잘 익은 술로 잔치를, 살지고 기름진 음식과, 잘 익고 잘 거른 술로 잔치를 베푸시리라.
그분께서는 죽음을 영원히 없애 버리시리라.
주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 내시고, 당신 백성의 수치를 온 세상에서
치워 주시리라.”(이사야서 25장 6~8절)
보시다시피 이사야 예언자의 예언은 강렬한 에너지로 가득 찼습니다.
뿐만 아니라 생생하게 살아 숨 쉬는 말씀이었습니다.
따라서 백성들의 마음을 건드렸고, 삶을 변화시키도록 자극하였습니다.
이 시대 또 다른 의미에서 이사야 예언자이신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 역시 그러합니다.
그분께서 우리에게 건네시는 말씀은 현실과 동떨어진 구름 위의 말씀이 아닙니다.
당신이 삶의 현장에서 직접 느끼고 아파했고 살았던 생생한 체험을 바탕으로 한 진실한 언어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언어는 일방적으로 가르치고 훈계하는 언어가 아니라
인생의 선배이자 동료 인간으로서 건네는 희망과 생명의 언어, 위로와 격려의 언어입니다.
그러다보니 그분의 말씀에는 허점이 없습니다. 또한 당신이 선포하신 말씀을 실제 삶에서 살고 계시니 그 말씀에 힘과 생명력이 넘칩니다.
교황님께서 매일 세상을 향해 던지는 메시지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경종을 울려 삶을 변화시키도록 촉구합니다.
우리 시대 여타 수많은 지도자들이 사용하는 ‘빈말’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오늘 이 시대, 대한민국 사회는 어쩌면 그 옛날 이사야 예언자가 살았던 시절과 비슷합니다.
우리 국민들은 또 다시 단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짙은 안개 속을 헤쳐 나가고 있습니다.
정말 ‘깜’도 안 되는 이, 정말 파렴치한 이, 어쩌면 그렇게 얼굴 두꺼운 이까지 나서서 스스로를 향해 적임자 운운하고 있습니다.
그 옛날 서슬 퍼랬던 이사야 예언자 같은 지도자가 필요한 우리나라입니다.
사심이나 자신의 안위에는 털끝만큼의 관심도 없는 사람, 그저 이 나라 이 백성이 삶의 전부인
그런 지도자의 등장이 필요합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대림 제1주간 수요일 강론>
(2024. 12. 4. 수)(마태 15,29-37)
<예수님은 모든 것을 원상복구하려고 오신 메시아입니다.>
“많은 군중이 다리 저는 이들과 눈먼 이들과 다른
불구자들과 말 못하는 이들, 그리고 또 다른 많은 이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다가왔다.
그들을 그분 발치에 데려다 놓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고쳐 주셨다.
그리하여 말 못하는 이들이 말을 하고 불구자들이 온전해지고 다리 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눈먼 이들이 보게 되자, 군중이 이를 보고 놀라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저 군중이 가엾구나. 벌써 사흘 동안이나 내 곁에 머물렀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말이다.
길에서 쓰러질지도 모르니 그들을 굶겨서 돌려보내고 싶지 않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이 광야에서 이렇게 많은 군중을 배불리 먹일 만한 빵을 어디서 구하겠습니까?’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 하시자, 그들이 ‘일곱 개가 있고 물고기도 조금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땅에 앉으라고 분부하셨다.
그리고 빵 일곱 개와 물고기들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았더니 일곱 바구니에 가득 찼다(마태 15,30-37).”
1) 이 이야기는 “예수님은 메시아” 라는 증언입니다.
대림 시기는 모든 억압과 고통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시고 구원해 주시는 메시아, 즉 구세주를 기다리는 시기이고, 메시아(구세주) 예수님께서 주시는 해방과 구원을 잘 받기 위해서 준비하는 시기입니다.
30절-31절의 ‘예수님께서 장애자들을 고쳐 주신 이야기’는 앞의 11장에 있는 말씀에 연결됩니다.
“요한이,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감옥에서 전해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듣는 것을 전하여라.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 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마태 11,2-6)”
여기서 예수님 말씀은, 당신이 실제로 하시는 일을 설명하신 말씀이기도 하고, 구약성경 이사야서의 예언을 인용하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날에는 귀먹은 이들도 책에 적힌 말을 듣고, 눈먼 이들의 눈도 어둠과 암흑을 벗어나 보게 되리라(이사 29,18).”
이 예언은 ‘메시아 시대’에 대한 예언입니다.
예수님은 구약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바로 그 메시아, 즉 인간들을 구원하려고 오신 구세주이신 분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여러 가지 신체장애를, 인간들을 괴롭히는 여러 가지 억압들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굶주림의 고통’도 그런 고통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래서 ‘사천 명을 먹이신 이야기’도 “예수님은 우리에게 해방과 구원을 주려고 오신 메시아” 라는 증언입니다.>
2) 예수님께서 메시아로서 하시는 일에 관해서,
마르코복음에 있는 다음 이야기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에게 손을 얹어 주십사고 청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군중에게서 따로 데리고 나가셔서,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셨다.
그러고 나서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쉬신 다음, 그에게 ‘에파타!’ 곧 ‘열려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곧바로 그의 귀가 열리고 묶인 혀가 풀려서 말을 제대로 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더할 나위 없이 놀라서 말하였다. ‘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 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시는구나.’(마르 7,32-35.37)”
여기서 “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를
원문대로 번역하면, “저분이 모든 것을 좋게 하셨다.”인데, ‘좋게 하다.’ 라는 말은, 천지창조 이야기에 반복해서 나오는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에서 온 표현입니다.
그래서 “저분이 모든 것을 좋게 하셨다.”는 “저분은 고장 난 이 세상을 고쳐서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던 처음의 상태로 회복시켜 주시는 메시아시다.” 라는 뜻이 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 한 사람의 범죄로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죽음이 지배하게 되었지만, 은총과 의로움의 선물을 충만히 받은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통하여 생명을 누리며 지배할 것입니다(로마 5,17).”
<한 사람의 죄로 죽음이 지배하게 되었다는 말은,
원죄 때문에 세상이 온통 망가지고 고장 났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이 세상과 인간들을 고쳐서
원상복구하시는 분, 즉 메시아이신 분입니다.>
3) 하느님 앞에서 완전하고 완벽한 인간은 없습니다.
이야기 속의 장애자들과 배고픈 사람들은 곧
나(우리) 자신입니다.
예수님은 나(우리)를 고쳐 주시고, 구원하시는 분입니다.
<이야기 속의 ‘군중’과 ‘장애자들’을 따로 구분해서 생각할 이유가 없습니다.
여기서 ‘군중’이라는 말은 장애자들과 병자들을
모두 포함하는 말입니다.
비장애인이 장애인들을 데리고 온 단순한 상황이 아니라, 절박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함께 온’ 상황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고쳐 주신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완전해지는 것도 아니고, 저절로 구원받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 쪽에서도 최선을 다해서 응답해야 하고
또 스스로 노력해야 합니다.
종말의 하느님 나라는 ‘한처음의 완전함’이 회복된 나라이고, 신앙생활은 그 ‘완전함’에 참여하기 위해서 나아가는 생활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