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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애 가장 길고도 무서웠던 밤
- 사드반입저지 1박 2일간의 투쟁기
9월 6일 소성리 수요연대집회가 있는 날은 1시부터 수요평화미사가 있어 조금 일찍 출발했다. 사드4기가 반입될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서였다. 하지만 꼭 들어올 지도 의문이었다.
사드문제가 진행되면서 시민들이나 대책위 집행부의 판단은 늘 빗나갔다. 많은 사람들은 작년 9월30일 전날까지도 부지는 성산포대가 될 거라고 예측했다. 성산포대는 군 기지가 있기 때문이었다.올 2월 26일에도 롯데가 부지 교환을 하지 않고 버틸 거라 믿었다. 롯데는 장사꾼이니 중국을 포기하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다. 4월 26일에도 경찰의 수상한 행동을 눈치는 챘으나 우물쭈물한 것은 설마 대통령 권한 대행이 그런 대통령 유고라는 상황에서 그런 일을 하리라 생각 못했던 것 같다.
왜 우리는 늘 판단을 잘못 할까? 너무도 상식적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박근혜 정부가 그리고 황교안 대행이 하는 일은 상식에서 벗어난 일이었다.
그런데 기대했던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이 안보특사로 임명되어 제일 먼저 미국을 방문했을 때 뭔가 불안했다. 홍석현이 대표적인 친미파라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다. 청와대에서 나온 문건 중 안보에 관한 건 그냥 대통령기록물로 하여 국가기록원에 이관할 때도 불안했다. 더 큰 불안은 아직 내각도 제대로 짜여지지 않은 상태에서 한민구, 김관진과 같은 인물을 대동하고 미국에 가는 것이었다.
“혹시나 사드를 더 사 오면 어쩌지?”하고 불안해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 미국에 가서 제일 먼저 “장진호전투 기념비”에 가서 머리 숙인 일임도 그러했다. 장진호 전투기념비는 박승춘 보훈처장이 미국에 세우려 했던 것으로 그때 민주당이 비판했던 그 기념비에 가서 머리 숙일 것 같으면 박승춘 보훈처장을 자를 것이 아니라 표창해야 하지 않느냐고 어떤 이는 비판했다.
‘제주 강정마을을 해군기지로 만든 장본인’인 송영무가 국방부장관으로 내정되고 조금씩 사드배치를 되돌릴 수 없다는 말이 나왔다.
이제 평화광장의 시민들은 문재인이 아무래도 박근혜가 알박기해 놓은 사드를 용인해 줄 것 같다고 불안해했다.
아무튼 비록 경찰 병력으로 다 차단해놓고 통보해주더라도 전에처럼 밤에 들어오진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 오늘따라 늘 넣어두고 다니던 담요도 빼고 비옷도 빼고 그렇게 우리는 출발했다.
도착하자 사람들이
“왜 이렇게 입고 왔어요? 오늘 밤샘해야 하는데.......”해서 당황했지만 아무튼 미사를 보고 수요집회에 참여했다.
“남은 건 단 하나! 막을 수밖에 없다. 긴장이 될 수밖에 없다. 두려워하지 마라! 겁을 내면 안 된다.굴복하면 안 된다. 사드 문제는 집회에 참석한 우리가 주체이다. 우리가 막아야 한다.
성경의 진리는 무수한 저항이다. 권력에 두려워하지 말고 나가야 한다.”고 집회 마지막에 예수살기 목사님이 피 토하듯 외쳤다.
“실제 사드가 들어오면 여기가 제 1 공격 목표가 될 수 있다. 우리가 막아야 한다.”
두려움 떨치고 우리가 막아야 한다고 사회자가 말했다.
이어서 행진과 카퍼레이드가 진행되었다. 들어온 소식으로는 경기도에서 경찰이 출동했다고 한다.사드 반입하려는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자리를 정리하고 행진 대열을 지었다. 꾸물거리니 재촉을 했다. 두렵고 떨렸다.
원불교 사무여한단이 앞에 서도록 했다. 어느 정도 정렬이 되자 행진이 시작되었다.
“사드배치 철회하라!”
“추가반입 중단하라!”
오늘은 늘 하던 진밭교로 행진하지 않고 삼거리 쪽으로 행진했다. 돌아 다시 마을회관 앞으로 와서 자리를 잡았다.
트럭 두 대가 무대가 되었다. 그리고 중간에 차들을 대어 바리케이드를 쳤다. 이때쯤에는 긴급공지가 떴다. ‘경찰이 소성리를 향해 달려오고 있다, 빨리 소성리로 달려오라’는 문자가 뿌려졌다. 김천시민대책위도 밴드에 공지를 올리고 촛불 집회할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어디 숨어 있었던지 경찰들이 위에서 몰려 내려왔다. 와, 많기도 해라. 그들은 폴리스라인을 치고 우리를 막기 시작했다.
“불법사드 막아내자!”
“경찰들은 물러가라!”
구호를 외쳤다. 줄지어 선 차들이 크락션 울리는 것으로 동참했다.
“우리도 대한민국 국민이고 소성리에도 사람이 살고 있다. 다시 사드가 들어간다면 절대 용납할 수 없다. 우리가 사랑하는 가족이 평화롭게 살 수 있는 것을 여기서 만들어내야 한다.”는 원불교 교무님의 발언.
밖에서 경찰이 깃발을 들고 들어오고 있었다. 경찰의 인권침해에 대해 인권감시단이 잘 감시하길 당부했다. “사드가 잘 들어오도록 협조하는 게 경찰의 임무가 아니다”라고 하는데 차량을 빼라는 방송이 나왔다. ‘도로교통법 위반으로 처벌 받는다’ 어쩌고저쩌고...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속보가 있었다. ‘사드반대 미국반대 청년결사대’ 소속 청년들이 사드부지 안에 들어갔다는 소식이었다. 박수!
진밭교당 강의가 진행되었다.
서보혁 서울대교수의 ‘동아시아 분단체제와 한반도 평화’ 강의. 원래 수요집회 후 진밭교당 강의가 배치되어 있어 오늘 8번째 강의인데 뜻밖에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사회를 맡은 원익선 교무가 미안해했다.
강의는 거의 10분 단위로 방송되는 해산종용 방송과 이에 대응하는 야유 소리, 사이렌 소리로 계속 끊어져 나중엔 제대로 다 못하고 서둘러 끝내는 느낌이 들었다.
사드를 배치하려는 명분은 북한의 미사일 공격을 막으려는 것이다.
따지고 올라가 보면 분단 때문이고 분단의 원인은 미국과 소련에 있다. 남북분단은 동아시아 전체 분단의 일부분으로 진행되었음을 말하고 싶다. 북한과 미국의 적대 관계를 청산하지 않고는우리의 생명과 평화를 위협하는 이런 일들은 반복될 듯하다. 동아시아 전체의 평화를 위해서는동아시아 분단 체제를 극복해야 한다.
80년대 말 유럽에서는 냉전체제가 극복되었다. 그러나 북한은 사실상 핵보유 능력을 갖게 되었고, 김정은 정권에 들어서 핵, 장거리 미사일 개발을 계속하고 있다.
88서울 올림픽때 남북간 화해를 이루려 했다. 남북 올림픽 공동 개최를 시도했다. 적대적 관계에 있던 세력(공산국가)과 수교했다. 북한도 사실 미국 일본과 관계 정상화하려고 회담을 많이했으나 자유진영과 수교하지 못했다. 그 당시 관계를 정상화했었으면 지금 이 문제가 한반도에서 가셨을 거라는 안타까움이 있다. 그때 못한 가장 큰 이유는 미국이 북한에 대한 선제공격(군사전략)을 포기하지 않아서였다.
그때부터 미국의 북한 정책은 공격적이었다. 북한은 악의 축, 악마라 했다.
남북이 화해하려면 평화적인 한미관계가 재정립되어야 한다. 미국과 대등한 평화지향을 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해야 한다. 여러분은 남북화해와 평화를 지향하는 대표적인 집단이다.
전쟁위기가 있어도 사람들은 피신하지 않는다. 왜? 차이가 없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제 자리에서 자기 할 일을 한다. 이것을 대통령이나 정부가 제대로 보고 보장해줘야 한다.
문대통령도 개인차원에서는 사드가 부당하다, 한반도 평화를 위협한다고 생각하리라 본다. 착한 전쟁은 없다. 노무현 대통령이 파병하여 자기지지 세력이 떨어져 나가고, 오점을 남기는 파병이 되었다. 북한 핵을 막기 위해 사드를 배치하고, 머리에 핵을 이고 잠을 자는 것은 대통령이 할일이 아니다. 이 위험한 일에 대해 주민 의견을 물었는가? (“없었다!”는 대답) 절차를 지켜 주기를 바라고...
자유한국당이 문재인 대통령을 공격하고 있다. 그런데 (대통령이) 가면서 배치를 하라 했다 한다. 전쟁의 위험이 명약관화한 사드배치를 하는 것은 부당하다. 정상외교를 하는 과정에서 사드배치하는 것은 많은 문제가 있으니 일단 중지하고 오셔서 주민과 허심탄회하게 대화했으면 한다.
겨우 강의를 마쳤다. 군데군데 경찰방송 때문에 끊어져 앞말을 놓치기도 했고, 중요한 말이 옆길로 새기도 했다. 1시간을 겨우 채운 것 같다.
사람들이 속속 들어오고 있었다. 처음엔 삼거리쪽과 노곡리쪽에 트랙터와 차량으로 막아놓고 차로 들어오는 사람들을 실어날랐으나, 나중엔 주변에 차를 놓고 걸어 들어오고 있다 했다. 이 자리를 굳건히 지키는 것이 많은 국민이 이 자리에 모이도록 하는 길이라 했다. 되도록 자리를 뜨지 마라 해서 물도 삼갔다.
그렇게 자리를 지키고 전국에서 사람들이 달려오길 기다린 이유는 우리가 몇 시간만 버티면 문재인 정부는 무리한 진압을 하지 않으리란 믿음 때문이었다.
자리가 좁았다. 애초에 너무 좁게 농성할 자리를 만들었던 것 같다. 나중에 들어온 사람들이 대오에 들어오지 못하고 마을회관에 100여 명이 넘는 인원이 남아 있음에도 시간을 끝까지 못 끈 원인이 되었던 것 중 하나는 자리가 너무 좁다는 것이었다. 물론 현장을 지휘하는 사람이 나중엔 없었기도 했지만.
언론들도 속속 몰려오고 있었다.
사드기지에 진입한 '사드저지 미국반대 청년결사대' 청년들 4명이 '사드반대 미국반대'를 외치며 사드 포대쪽으로 행진하던 중 4시 반 경 군인들의 제지 속에 경찰이 연행해 김천경찰서로 이송되었다는 소식도 전해졌다.
5시쯤 3부 ‘달뫼 세계평화공원’ 선포식이 열렸다. 그동안도 계속 경찰의 경고방송이 나왔다.
원불교 강해윤 교무가 나와 평화공원을 조성하여 정산종사가 나시고 구도하신 이곳을 평화의 땅으로 만들도록 한다고 했다.
“182일째 기도하는 곳, 이곳은 전쟁무기가 들어올 곳이 아니라 세계의 평화의 발상지가 되었다. 그래서 다함께 참여하여 우리 모두의 것으로 만들어가자”고 했다.
평화시스터즈라 이름 한 두 여성교무가 나와 노래를 불렀다.
잘 살고 있는데/ 평화롭게 사는데/ 난데없게 사드가 쳐들어왔네/
더 이상은 안 된다/사드야 너거집에 가거라
그리고 김천대책위 공동위원장인 최용정 교무와 함께 최용정 교무가 작사 작곡한 ‘달마산이 품은 성자’, ‘힘내라 촛불아’ 노래도 했다.
사드가고 평화오라/ 사드가면 평화온다/ 전쟁싫어 평화좋아/ 힘내라 촛불아-/힘내라 촛불아-
평화공원을 만들 땅을 한 평씩 사는 약정식을 미리 한 사람들이 나와서 한 마디 하고 구호도 외쳤다. 교무님도 신부님도 일반인도 있었다.
선언문을 낭독했다.
미국의 패권추구를 위해 들여놓으려는 사드를 반대한다. 한반도 어느 곳에서도 전쟁무기가 들어오는 것을 반대한다. 사드배치 반대운동은 세계평화의 실현을 알리는 것이다. 우리는 세계 모든어두운 전쟁을 반대한다. 세계평화를 위해 헌신할 것을 맹세한다. 이곳에서는 인종, 남녀, 사상과 이념으로 인하여 차별받지 않고 함께 세계 평화를 논의하는 장소로 개방할 것이다.
향후 한반도에 영구평화정착을 위한 남북대화의 창구로 되도록 한다.
소성리에 평화대학을 건립하고 평화학을 특히 연구하도록 하여 분쟁문제해결전문가를 양성하도록 하겠다.
평화의 순례지가 되도록 세계에 적극 알리도록 한다.
위기가 기회, 소성리는 세계 평화를 품은 마을로 발돋음하려 한다.
“사무여한 정신으로 사드 막아낸다!”
사회자가 또 들어온 소식을 전해주었다. 서울 인권위원회에서 13명의 인권위원이 내려오고 있다 한다. 노곡리에서는 차량과 농기계를 이용해서 막고 있는 주민들을 경찰이 진압작전을 펴고 있다 한다. 막고 있는 노곡리 주민에게 힘찬 함성을 보냈다.
잠시 쉬는 시간이 주어졌다. 그런데 조금 있으니 노곡리가 뚫려서 경찰이 들어오고 있다고 자리를 비우지 말고 교대로 화장실로 가라 안내를 했다.
국방부가 내일 새벽에 사드를 설치하고 추가 보강장비를 반입하겠다고 했다는 보도가 났다고 한다. 전국에서 많은 시민들이 소성리로 달려오고 있다 한다. 우리가 뭉쳐서 이 자리를 비지 않고 지켜내는 것이 사드를 막는 길이라 강조했다.
나눠준 비옷이 너무 얇은데다 짧아서 불편했다. 주먹밥과 간식이 나눠졌지만 입맛이 없어 두어 모금 먹다 남겼다. 조금 전에 컵라면을 조금 얻어먹어서 그런가보다.
집회를 이어갔다. 들어오는 길은 점점 막혀가기 시작하여 우리는 점점 고립되어 갔다.
그래도 우리가 시간을 끌면 못 들어온다고 생각했다. 문재인 정부는 박근혜와 다르다고 여전히 우리는 믿고 있었다.
7시가 되어 미사가 시작될 무렵엔 경찰이 계속 증원되어 갔다. 비는 주룩주룩 내린다. 이젠 집회시간이 종료되어 불법이라 한다. 그럼 아까까지 방송했던 해산방송은 뭐였지? 왜 5시 40분 이전에도 그렇게 10분 단위로 방송해서 우릴 겁주었을까?
9시가 지나자 소성리로 들어오는 모든 길이 막혔다 한다.
30분 무렵 마을회관보다 앞쪽 초전면 용봉 쪽 주민들이 경찰을 저지하려고 막아놓은 차량을 지게차, 대형크레인을 동원해서 뜯어내고 있다 했다. 다른 쪽도 경찰이 막아서 사람들이 밀려나고 있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12시 다 되어갈 무렵 천주교 미사를 마쳤다. 목사님이 예배를 하기 위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옆에 사람이 비명을 질렀다.
“재들, 화이바 썼어!”
“밖에 있는 사람 빨리 들어와요!”
0시를 기해서 작전을 한다고 했다. 무대 앞으로 모여 달라 사회자가 호소했다. 넓은 곳을 메꾸었다.의자를 밖으로 치우고 깔개로 바꾸었다.
눈앞에 붉은 조명탄 같은 것이 떠올랐다. 그게 작전 시작 신호였던 것 같다.
우선 월명리 천막이 뜯겨지기 시작했다. 아수라장이 되었다.
“어이쌰! 어이쌰!”
“폭력경찰 물러가라!”
하고 앉은 자리에서 소리를 질렀다. 연기가 나오는 것 같았다. 불을 질렀나보다 겁에 질려 보니 그런 것 같지는 않고 “환자 발생!”이라는 소리가 들렸다.
열에 들어오지 않고 갓길에 있던 사람들이 몰려들어 필사적으로 저항했으나 천막은 뜯겨나갔다. 들어갈 길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
그다음 기독교현장기도소 천막이 뜯겨나가고 있었다. 강형구 장로님의 석달치 심장병 약이 마구 짓밟히고 성경도 비슷하게 취급당한 것 같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는데 눈앞이 밝아졌다. 앞쪽에 밝은 불빛이 떠올랐다. 그 불빛에 비가 내리는 것이 마치 환상적이기도 하고 영화의 한 장면 같기도 했다. 사람들이 다시 비명을 질렀다.
“레카차다!”
그것을 시작으로 이제 대오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들려나가기 시작했다. 여전히 앉아있는 상태에서 함께 소리를 지르며 응원했다.
치열한 싸움 끝에 경찰과 간격이 훨씬 좁혀졌다. 가만 보니 규칙이 있었다. 한동안 왼 쪽을 마구 밀어붙이다 다시 오른 쪽, 그러다 앞쪽, 이렇게 몰고 있었다.
“의료진!”하는 외침 소리가 들리고, 비명 소리, 욕지거리, 그런 속에서도 우리는 그냥 자리에 죽 치고 앉았다. 그것이 최선의 저항일 것 같아서였다.
앞에 앉은 사람들이 격렬하게 저항하고 있었다. 보다 못한 문규현 신부님이 십자가를 들고 갔으나 밀려났다.
한참 있다가 세 신부님과 목사님, 원불교 정상덕 교무님이 앞으로 나갔으나 또 밀려났다.
인권단체 사람이 높은 데 서서 처음엔 경찰에게 때리지 마라는 등 제재를 가했으나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니까 나중엔 우리 쪽에 와서 멍하니 지켜볼 따름이었다.
시계를 보니 3시가 넘었다. 5시에 사드가 들어온다더니 경찰의 밀어붙이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거칠어졌다. 오늘은 기어이 들일 모양이구나! 정신없이 몰아치는 가운데 앞자리가 조금씩 환해지기 시작했다. 여자들마저 남자경찰이 뜯어내려 해서 소리를 지르니 여경으로 바꾸어 사람들을 뜯어내는데 잘 못 뜯어내니까 지휘하는 여경이 그 여경을 때리는 모습도 보였다.
도무지 협상의 여지가 없었다.
“경찰 좀 살살 해라. 다친다! 왜 그리 열심히 하나? 미쳤구나!” 하고 마이크를 잡고 정상덕 교무가 탄식할 따름 그들은 어떻게든 사람들을 몰아내고 사드를 들이려고 미친 듯이 몰아쳤다.
교무님들이 조용히 기도문을 읊었다. 내 앞뒤 양옆으로는 여성 교무님들이 많았다. 팔짱을 끼고 있다가 옆에 앉은 교무님이 앞 사람을 끌어안자고 했다.
여자들을 의경들이 마구 끌어내면 우리는 아까처럼 “여자야!” 소리를 질렀고, 그러면 조금 있다 여경이 투입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이 눈앞에 왔다. 앞자리에 앉은 교무님 법복이 찢어졌다. 옆자리 교무님은 치마가 들려져 두 다리가 드러났다. 나는 모자를 벗었다. 혹시 내 흰 머리를 보고 조금 덜 폭력적으로 하지 않을까 기대해서였다. 그러나 아주 짧은 순간 머리부터 한 대 맞았다.
앞 사람(젊은 여자였다.)을 마구 끌고 가려하고 나는 뒤에서 그를 꼭 끌어안고 안 되어서 옷을 마구 잡아당기었다. 마침내 그가 끌려가고 내 앞으로 너댓 명이 에워싸는데 우선 숨이 막혔다. 뒤로 조금 밀려나니 다시 에워싸고 다리를 끌었다. 신발과 양말 한 짝이 벗겨진 채 끌려났다.
뜯겨진 월명리 천막 쪽으로 몰려났다. 의경들이 빼곡이 드러차 있고 들려난 사람들이 서 있었다. 한 여성이 땅에 쓰러져 가쁜 숨을 쉬고 있었다. 지휘관이 기다리라며(아마 전화가 안 된다 했던가 시끄러워 소리쳐도 못 듣는다 했던가 대답했던 것 같다.) 방치하고 있자 보다 못한 의경이
“무전기로 연락하면 되잖아!”
하고 소리쳤다.
“그래. 니가 보기에도 너무 하단 생각이 들지?”
하고 말했다.
들 것이 와서 여성을 실어갔다. 입었던 비닐 비옷은 갈갈이 찢어지고 모자는 진작 없어졌다. 한 발은 맨발인 채 뒤로 해서 천주교 천막에 와서 앉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천주교 천막은 칼로 찢어서 뼈대만 남아있었던 것이다. 천막을 다 아작낸 것은 다시는 농성하지 못하게 하려는 속셈인 것일까?
누가 신발 한 짝을 가져다주었다. 그걸 신고 겨우 남편과 전화를 해서 마을회관 쪽 정형환자가 신는 신발 하나를 남편이 구해서 내 쪽으로 던져주었다. 그걸 신고 회관 쪽으로 가니 여기 세워놓은 게시판도 다 부서지고 그 앞 천막도 한 개만 남고 다 부서졌다.
ㅁ님이 울면서 ㅎ님이 4사람한테 깔렸는데 어디 있는지 모르겠고, ㅂ님은 아이를 데려왔는데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다고 걱정했다.
“날이 밝는다.” 소리에 고개를 들어보니 하늘이 밝아지고 있었다.
하룻밤을 꼬박 새우고 밤에 제대로 먹지도 못했는데 잠도 오지 않고 배도 고프지 않았다. 그냥 입안만 말라왔다. 회관에 물이 떨어져 그냥 수돗물을 마시라고 했다.
아직 차 안에 탄 사람들은 버티고 있는 중이었다. 레카차들이 사람이 탄 채로 차를 들어내고 있다 했다.
마지막 남은 천막을 경찰들이 철거했다. 사람들이 달려들어 싸웠지만 결국 철거되었다.
“사드 들어온다!”는 비명에 달려 나가 경찰을 밀어대는 사람들 뒤에서 밀었지만 힘이 모자랐다. 밀려나 멍하니 바라보니 그건 사드가 아니라 화장실 차였다. 또 좀 있으니 진짜 사드가 들어왔다. 이번에도 사람들이 열심히 밀었으나 마침내 사드는 들어갔다. 민다고 보지도 못했다. 들어갔다는 소리에 한참 이렇게 쉽게 끝나는가 싶어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ㄱ언니에게 전화를 했다.
“언니 사드 들어갔어요. 난 민다고 보지도 못했어.”
말하는데 눈물이 주르르 나왔다. 못 본게 슬픈 건지 들어간 게 슬픈 건지 나로서도 알 수 없었다.
“이제 우리 어쩌죠?”
“그냥 지금은 슬퍼하고 분노만 해. 어떻게 할까는 나중에 생각하고.”
하는데 또 들어온다고 했다. 밀다가 힘에 부쳐서 그 자리에 서서
“양키 고 홈! 양키 고 홈!”을 외쳤다.
그렇게 나머지가 다 들어가고 장비가 들어가고 우리 18시간 투쟁은 울음으로 막을 내리고 있었다.
내 마음 속 문재인도 그 순간 죽었다.
생각해보면 문재인을 지켜줘야 한다는 생각은 문재인이 좋아서가 아니었다. 우리는 많든 적든 노무현에게 지·못·미(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하다)의 부채의식을 갖고 있다. 투표장에서 한참 고민하다가 심상정에게 표를 찍은 이유도 정의당이 비판과 연대를 해주어 이번만큼은 사회 곳곳에서 민주주의가 꼭 제대로 이루어지도록 해주길 간절히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그러나 사드가 들어가는 순간, 어쩔 수 없는 대한미국의 슬픈 민낯을 보면서 비겁하게 추가배치라는 큰 결정을 내리고는 해외로 도망간 대통령을 용서할 수는 없었다.
사드가 들어가고 나니 배고픔이 밀려왔다. 마침 빵을 돌리고 있었으나, 밥을 꼭 먹는 습관이 있어 컵라면이라도 먹으러 회관 앞 마루로 가니, 마침 밥을 내놓아서 1회용 밥그릇에다 밥과 김치, 깻잎,멸치를 넣고 깔개가 없어 서서 먹고 있는데, 저만치서 종희님이 울먹이며 발언하고 있었다. 그 소리를 들으니 이 와중에도 배가 고프다는 사실이 너무 슬퍼서 자리에 앉아 꾸역꾸역 먹었다.
소식이 궁금해서 전화를 했다. 아침 뉴스에 어떻게 나왔는지 물었다.
“JTBC는 그냥 스쳐 지나듯 하고 오히려 북핵 이야기만 메인으로 잔뜩 하고, 차라리 YTN이 계속 생방송해 주더라. TV 조선이 자리를 잘 잡았는지 가장 선명하게 사드 들어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주민은 안 보여주더라.”
TV 조선? 그런 로고 단 카메라는 못 보았는데? 물어보니 지난 번 조선일보가 소성리에 왔을 때도000이라고 거짓말했다가 들통 나서 쫓겨났는데 나중에 몰래 들어와 사진 찍고 갔단다. 자기네 회사 로고도 제대로 못 붙이고 와서는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찍어댄 TV조선을 생각하니 화가 났다.
좀 있으니 연합뉴스와 YTN이 우리더러 폭도라 했다고 누가 흥분했다. 나중에 연합뉴스 기자더러 말하니 “우린 그냥 사진만 찍을 뿐이다.”고 대답했다.
기자들은 그 절박한 와중에 우리 자리를 비집고 들어와 사다리를 갖다놓고 사진을 찍어대어 원성을 샀다. 목욕용 의자가 자칫 흉기가 되어 우리를 위협하는 상황에다 조금의 틈이라도 있으면 경찰이 치고 들어올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는 사람들에게 기자들의 행동은 매우 거슬렸다.
KBS와 MBC 기자들도 나중에 알고 보니 파업하는 조합원들은 현장에 오지 않았다고 하는데 와서는 찍어대고 그날 보도에선 빠졌던 것 같다.
사복경찰들도 그 기자들 사이에 섞여서 채증을 하였다. 그 중 한 남자는 우리중 누가 발버둥치며 마구 차니까 그걸 찍어댔다.
우리가 마침 옆에 있는 기자에게 “저 사람 누구인지 좀 알아봐 달라.”해서 대신 물었더니
“경찰”이라고 짧게 답하고 다시 반항하는 시위대를 찍었다.
10시가 넘어서 기자회견을 했다. 부녀회장이 “이제 우린 어떻게 해야 하나요?” 묻는데 사실 대답할 말이 없었다.
잃어버린 신발 한 짝과 모자를 찾았다. 모자에 붙여놓은 파란나비리본은 뜯겨나가고, 세월호 뱃지 앞부분도 뜯겨 있었다.
온통 전쟁터와 같은 마을회관 앞과 길을 치우고 있는데 의경들이 빼앗긴 방패를 찾는다고 쓸어놓은 곳을 밟으며 지나갔다. 사람들이 화를 내며
“청소 끝나고 찾으러 와!” 소리를 질렀다.
조금 치워놓으니 몇몇이 선한 표정으로 와서 방패를 달라고 했다. 안된다고 거절하는데 눈에 태극마크가 보였다.
“그 태극마크 성조기로 바꿔!” 소리를 쳤다.
의경을 볼 때 제일 화가 나고 가슴 아픈 것이 그 태극마크였다. 자국민을 적대하고 몰아대면서 왜 태극마크를 붙이는가? 차라리 그 마크가 성조기라면 이만큼 분하지는 않을 것을!
마찬가지로 민주당에도 화가 나 민주당원인 시민들에게 “당장 민주당을 탈당하라!”고 하니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도 있고, 그래도 문재인을 아직은 버릴 수 없다는 사람도 있었다. 안보와 외교, 국방을 희생하고 검찰 개혁, 언론 개혁, 재벌 개혁을 제대로 할 수 있을까? 계속되는 이상한 인사를 보면 왠지 우리를 희생시키고도 좋은 결과를 만들어낼 것 같지 않아 불안하다.
돌아오는 길에는 잠이 쏟아져서 힘들었다. 하루 종일 버텼으니 잠이 쏟아질 수밖에. 다음 날 씻을 때 보니 종아리에 시퍼렇게 멍든 것이 보였다. 그날은 후닥닥 씻고 자느라 못 보았는데 이제야 볼 수 있었던 것이다. 멍은 1주일이 지나자 가라앉았다.
그보다는 가끔 눈앞에 밝은 불빛과 함께 비 내리던 장면이 떠오르는 것이 아마 그 때가 가장 무서웠나 보다.
언론에는 온통 돈 얘기로 도배되고 있었다. 김천이 7조를 요구했다는 보도도 있었다. 예상하던 순서가 아닌가. 외부세력 운운, 다음엔 돈, 그다음엔 또 무슨 개인 잘못을 털어낼까?
그래도 촛불은 변함없이 켜졌다.
1주일 지나니 사건 후 보이지 않던 분들도 몸이 추슬러졌는지 많이 나왔다. 그래, 그렇게 가는 거다.우리는 여전히 촛불을 켜리라. 그리고 소성리로 서울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힘 닿는 대로 하리라. 이제 우리 싸움은 단순히 사드 철거가 아니라 반미 평화를 부르짖는 독립운동의 길로 나아가고 있다.
소성리도 변함없었다. 그날 부러져 낮아진 십자가를 들고 천주교는 여전히 평화미사를 드리고 있었고, 소성리 수요집회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와서 변함없이 투쟁할 것을 다짐했다. 원불교 진밭교당 강의도 변함없이 진행되었다.
소성리 어른들은 이젠 경찰이 아예 들어오지 못하도록 그날의 잔해들을 바리케이드 삼아 쳐놓았다.경찰도 삼거리 쪽으로 나와 눈치를 보고 있었다.
문재인으로서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으리라 이해하는 사람들도 대통령이 해외로 나간 사이 이 모든 일을 처리하고 밤에 사과를 한 점에 대해선 비판했다. 대통령이 소성리에 와서 미안하다 말할 순 없었을까? 우리들은 기꺼이 대통령을 엄청나게 몰아치는 미국과 싸울 수 있는데 우리 힘이 대통령과 정부에 믿음을 주지 못했을까?
하긴 여론에서 이미 우리는 졌다. 그 사실은 솔직히 인정해야겠다. 지역이기주의 운운하며 조롱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나는 지역이기주의가 결코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 지역에 사드라는 전쟁 무기가 안 들어왔으면 남북분단에 대해서도 미국의 지배에 대해서도 모르는 채로 내 인생은 끝났을 수도 있다. 오히려 가장 가까운 곳에 천주교 피정의 집과 요양원, 실버타운이 있음에도 침묵하는 천주교대구대교구가 더 비난받아야 하지 않는가? 사드부지 뒤에 사는 소성리 주민들보다 그 앞쪽에 사는 월명리 주민들이 좀더 적극적으로 임했으면 김천의 투쟁이 좀 더 이해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이런 저런 아쉬움이 있지만, 여기까지 우리는 뚜벅뚜벅 걸어왔다. 아직 가야 할 길은 멀고 이제 우리는 다시 일어서 걸어간다.
첫댓글 아 네. 괜찮습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잘 읽을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