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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자 김정호가 만든 대동여지도 (大東輿地圖)
대동여지도는...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는 고산자(古山子) 김정호가 1861년 제작한 한반도의 지도이며, 지도첩이다.
3건이 대한민국의 보물로 지정되어 있으며,
2008년에는 대동여지도 목판이 대한민국 보물 제1581호로 지정되었다.
고산자(古山子) 김정호(金正浩, 생몰년 미상)가 1861년(철종 12)에 제작한 이 지도는
조선의 지도 발달에서 정점에 있으면서 고지도의 백미로 평가받고 있다.
대동여지도는 조선후기 지리학자인 고산자 김정호가
순조 34년(1834)에 자신이 만든 <청구도>를 27년 후에 증보 수정한 대축척 지도로 분첩절첩식지도첩이다.
형태를 보면, 남북을 120리 간격으로 22층으로 구분하고, 동서를 80리 간격으로 끊어 19판으로 구분했음.
근대적 측량이 이루어지기 전 제작된 한반도의 지도 중 가장 정확한 지도이다.
〈청구도〉의 자매편으로 내용의 첨삭이 이루어졌다.
지도 제작자인 김정호는 실학자이자 지리학자이다.
오직 지도를 만들고 지리지를 펴내는 데에만 일생을 바쳤다.
지리지로서 『여도비지』,『동여도지』, 『대동지지』를 편찬하였을 뿐만 아니라
『청구도』(1834)와 『대동여지도』를 제작하였다.
『대동여지도』는 이전에 만들어진 지도와 현지 답사를 바탕으로 여러 해에 걸쳐 제작한 것으로,
이전의 필사본 지도와는 다르게 목판본으로 제작함으로써 지리정보가 사회에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대동여지도는 고산자 김정호가 직접 발로 뛰며 만들었다?
나(신헌)는 일찍이 우리나라 지도에 뜻을 두고 비변사와 규장각에 소장된 것,
오래된 집안에 좀먹다 남은 것들을 널리 수집하여 증정하고, 여러 본들을 서로 참고하고,
여러 책들에 근거하여 합쳐서 편집하였다. 이리하여 김백원에게 물어 그것을 맡겨 만들게 하였다.
가리켜 증명하고 입으로 전해주기를 수십 년이나 하여 비로소 한 부가 만들어졌는데 모두 22권이다.
— 신헌
위 글은 김정호에게 발주를 준 당시 조정고관 신헌의 글이다.
저기 등장한 김백원이 바로 김정호로, 백원은 김정호의 자(字)이다.
말하자면, 김정호가 백두산을 몇 번 올라갔다느니 전국을 구석구석 답사했다느니 하는
전설적인 풍설은 그냥 최남선이 만든 허구의 이야기이다.
정보를 갱신, 보충하기 위해 몇몇 지역을 직접 답사를 했을 가능성은 있지만,
지도 자체가 무에서 태어난 김정호의 창작품이 아니다.
기록에 따르면 관리들의 허가를 받아 비변사 등이 소장하고 있는 행정용 지도를 취합했다고 한다.
특히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많이 참고했다.
현실적으로도 일개 개인이 조정의 허가 없이 봉수대와 주요 관공서를 다 지도에 찍고 다녔으면
정말 잡혀가도 할 말이 없으며, 그 전에 애초에 당대의 치안, 교통 등의 문제를 고려하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당시까지는 대지도로는 개념도가 우세했고, 행정용, 군사용으로 쓰이던 군현 지도는 상세도가 우세였는데
김정호는 이러한 지도들을 엮어 하나의 상세한 대지도를 만들었던 것이다
흥선대원군이 불태웠다?
김정호가 지도를 만든 뒤 '이렇게 정확한 지도는 외적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라는 혐의로 옥사했으며
목판도 불태워졌다는 설은 사실이 아니다.
흥선대원군이 불태웠다는 낭설은 1925년 동아일보에서 최남선이 쓴 걸로 추정되는 칼럼
〈고산자를 회(懷)함〉상하 내용에서 비롯된다. 여기에서는 대동여지도의 위대함을 칭송하면서
그 가치를 몰라본 조선 관헌들에 의해 목판을 압수당했다고만 기술되어 있다.
그런데 이를 기초로 1935년에 발간된 조선어 교본인 《조선어독본》에는
이것이 흥선대원군의 명이었다는 내용이 덧붙여진다.
하지만 여기서도 지도를 찍어낸 목판을 압수했다고만 되어 있지 '불태워졌다'는 말은 없다.
원래 돈업시 하는 일이고 보니, 그 엇지 용이(容易)하랴마는, 철석(鐵石)과 같은 그가, 이런 것을 구애하랴.
즉시 경성(京城) 서대문(西大門)밖에 집을 잡고, 소설(小說)을 지어 얻은 돈으로,
근근히 일가(一家)의 생계(生計)를 삼아가는 한편, 하나 둘식 판목(版木)을 사 모아서,
틈틈이 그의 딸과 함께 지도판(地圖版)을 새겻다.
그리하야, 다시 십여년(十餘年)의 세월(歲月)을 걸려서, 이것도 완성(完成)하얏슴으로,
비로소 인쇄(印刷)하야, 몇 벌은 친(親)한 친구에게 나누어 주고, 한 벌은 자기(自己)가 간수하야 두엇섯다.
그런지 얼마 아니되여, 병인양요(丙寅洋擾)가 일어남으로, 자기(自己)가 간수하얏든 것을,
어느 대장(大將)에게 주엇드니, 그 대장(大將)은 뛸 듯이 깃버하며, 곳 이것을 대원군(大院君)께 바첫섯다.
그러나, 대원군(大院君)은 다 아는 바와 같치, 배외심(排外心)이 강(強)한 어른이시라,
이것을 보시고 크게 노(怒)하사
"함부로 이런 것을 만들어서, 나라의 비밀이 다른 나라에 루설되면, 큰일이 아니냐." 하시고,
그 지도판(地圖版)을 압수(押收)하시는 동시(同時)에, 곳 정호(正浩) 부녀(父女)를 잡아 옥(獄)에 가두섯드니,
부녀(父女)는 그 후(後) 얼마 아니가서, 옥중(獄中)의 고생을 견디지 못하얏는지,
통탄(痛嘆)을 품은채, 전후(前後)하야, 사라지고 말앗다.
《조선어독본》 5권 4과 〈김정호(金正浩)〉
이후 이 이야기가 널리 퍼지면서 목판이 불태워졌다고 확대되어
해방 후 국어 교과서와 위인전에도 널리 실리는 바람에,
1980년대까지만 해도 모두가 이를 사실이라 여겨왔다.
하지만 소실된 것으로 알려졌던 대동여지도 목판은 두 차례에 걸쳐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대동여지도 목판 (大東輿地圖 木板)
조선시대 최대, 최고의 과학적 지도로 평가되는 <대동여지도>를 제작하기 위해 사용된 목판이며,
현전하는 것으로 알려진 12장의 목판 중 11장이다.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에 1장이 있다.
재질은 수령 100년 정도의 피나무로 목판의 앞뒤 양면에 모두 조각이 되어 있다.
목판 한 면에는 남북으로 120리, 동서로는 160리 범위의 지리정보가 판각되어 있다.
일부 해안 도서지역을 판각할 경우 전체 목판면의 일부만을 활용하게 되는데,
이 때 여백으로 남는 공간에는 다른 지역의 지도를 판각함으로써
목판의 활용도를 높인 사실도 확인할 수 있다.
고산자 김정호(古山子 金正浩, 1804?∼1866?)가 목판제작에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한국 과학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귀중한 자료이다.
일제강점기까지 가장 정확한 (한반도) 지도였다?
대동여지도가 대단함을 강조하려는 생각이었는지
마치 대동여지도가 '정확한 (한반도) 지도'의 시초라도 되는 듯 이야기되기도 한다.
사실 지구가 구형에 가까운 이상 100% 정확한 지도는 지구본 형태의 지도가 아닌 이상 존재할 수는 없으나
김정호가 태어나기 이전에 제작된 높이 3미터 정도인 지도는 몇 가지 존재한다.
다만 지도를 만드는 데 필요한 지리정보가 부족해서 언제나 몇몇 부분이 '많이' 틀렸다.
대동여지도 역시 그러한 오류가 많았으며,
특히 북쪽으로 갈수록 지리정보가 부족해서 이 부분이 가장 오류가 많다.
대동여지도가 기존 지도의 잘못된 정보를 상당히 많이 고쳤음은 사실이다.
만든 이후로도 수정할 점이 많아서
김정호 본인은 이 지도를 제작하고 수정하는 데 여생을 다 보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군 육군이 경부선을 건설하기 위해
조선의 지리를 몰래 측량하러 일본인 측량기술자와 조선인 인부들을 고용하여
전국지도를 만들도록 지시한 적이 있었는데, 만든 후에 일본군이 대동여지도를 보고
자신들이 그렇게 오랫동안 제작한 지도와 별 차이도 없다는 사실을 알고
경악했다는 에피소드가 있다고 하지만 이 에피소드는 과장된 주장이다.
일본은 한일강제병합 이전에,
정확히는 최소 1872년(고종 9년)부터 조선에 몰래 잠입하여
한반도 전도를 몰래 30년간 제작했다.
이때 일본은 당시 유럽의 최신 제작기법을 도입하여 축척이 일관되고
각 산의 능선과 등고선을 체계적으로 그린 정확한 지도를 만들었다.
두 지도를 비교하면 안타깝게도 세밀함과 정보의 양에서 엄청난 현실적 격차가 난다.
일본은 이 지도를 이용하여 청일전쟁에서 주요거점을 안방처럼 훤히 알고 승승장구했고,
조선의병의 기지를 전략적으로 공격하고 퇴로까지 미리 막을 수 있었다.
이러한 전략적 우위가 뒷받침된 결과가 남한 대토벌 작전이다.
(2011년 11월 3일 방송된 KBS 역사스페셜 '30년간의 도둑 측량, 일제는 무엇을 노렸나'에 나온 내용)
그리고 대동여지도도 메르카토르 도법으로 만든 지도들과 마찬가지로
북쪽으로 갈수록 땅이 더 커보인다고 한다.
사실 이는 대동여지도의 모양이 지구본처럼 실제 지구의 모양과 거의 같은 구형이 아닌
네모난 형태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오류이다.
대동여지도의 구성
1-2면: 속표지. 간행연도, 제목, 제작자가 서술되어있다.
3-4면: 지도유설(地圖類說)에서는 지도의 목적과 효용을 기술한다.
나라를 다스리기 위해 국방상의 요충지를 잘 알아야 하고, 재물과 세금이 나오는 곳과
군사를 모을 수 있는 원천을 잘 알아야 하며, 여행과 왕래를 위해 지리를 잘 알아야 하므로
지도를 제작한다고 하였다.
또 세상이 어지러우면 쳐들어오는 적을 막고 사나운 무리들을 제거하는 데 지도가 쓰이고,
시절이 평화로우면 나라를 경영하고 백성을 다스리는 데 지도가 소용된다고 하였다.
김정호, 지도유설(地圖類說)에서
5-6면: 전국 팔도 군현 통계
7-8면: 축척을 표시한 방안표(方眼表)
9-10면: 온성을 포함한 함경북도 최북단 및 범례인 지도표(地圖表)
11-12면: 한양과 그 주변을 그린 경조오부도(京兆五部圖)
13-14면: 한양을 세밀하게 묘사한 도성도(都城圖)
〈대동여지도〉는 동여도와 마찬가지로 가로 80리, 세로 120리를 한 개의 방안(方眼)으로 하여
한 개 면(面)으로 하고, 2개 면은 한 개 도엽(圖葉)인 목판 한 장에 수용하였다.
그러므로 대동여지도는 전체 지도 도엽은 목판 121매이고, 제책하였을 때의 면수는 213면이다.
그러나 여기에 부록 격인 지도유설·도성도·경조오부도 등이 첨가되었기 때문에
실제 도엽은 126목판이고, 전체 면수는 227면이다.
전체 크기는 가로 19판, 세로 22층(22첩이라고 표시하기도 한다)이며,
미터법으로 환산하면 가로 360센티미터, 세로 685센티미터이다.
이는 지도의 대량 보급을 염두에 둔 제작 기법으로,
동서 19판을 연폭으로 남북 22첩을 계속 인접하면 한반도 전체의 지도가 되게끔 하였다.
한편 서울역사박물관 소장본은 21첩인데 이는 다른 간본의 제22첩에 수록된 제주도 부분이
제21첩의 추자도의 서쪽에 배치하는 방식으로 21첩에 포함시켰기 때문이다.
한편 한양이, 〈청구도〉에서는 두 면에 걸쳐 있었는데,
〈대동여지도〉에서는 한 면의 중앙 부위에 위치하여 한양을 둘러싼 경계가 모두 수용되었다.
이는 당시의 수도권의 지역적 범위를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
또한 〈대동여지도〉에서는 각 층의 도엽을 동에서 서로 연폭(連幅)으로 길게 잇고
이것을 병풍식으로 접어 모두 22층으로 하는 분첩절루(分帖折壘)
또는 분첩절첩(分帖折帖)의 방법으로 제책하여 지도첩이 되게 하였다.
이때 책의 크기는 가로 20센티미터, 세로 30센티미터로서
당시 서지류의 크기와 비슷하게 만들어 책처럼 보관할 수 있다.
이 지도의 제작에서는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을 참고하였으며,
위도 측정에 다소 오차는 있으나 서양 지도학의 영향을 직접 받지 않고
한국의 전통적인 지도학을 대성한 것이다.
대동여지도의 편찬과 내용
이 지도는 철종 12년(1861)에 처음 찍어낸 뒤 고종 1년(1864)에 다시 재판되었다.
초판과 재판의 간행부수는 확실하지 않으나
현재 30여점이 넘는 판본이 국내외에 소장된 것으로 볼 때 적지 않게 간행된 것으로 보인다.
19세기에 만들어진 축적 약 90만분의 1의 『대동여지전도』는
이 지도를 축쇄하여 만들어 보급된 것이다.
전국의 남북을 22첩으로 나누어 분첩절첩식(分疊折帖式) 형태로 제작하여
모두를 아래 위로 맞추면 전국지도가 된다.
지도의 제1첩에는 방안표, 범례인 지도표와 지도유설, 경도오부지도 등과 함께
조선의 최북단인 온성(穩城), 종성(鐘城), 경원(慶源) 일대의 지도가 수록되어 있다.
「지도유설」에서는 중국의 지도와 지리지의 기원을 말하고
그것들이 가지는 중요성을 역사적으로 고찰하면서, 정치·경제·국방·학문연구의 모든 분야에서
지도와 지리지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고 그 편찬목적을 밝히고
지도제작에 있어 정확한 측정원리를 제시하였다.
지도의 각 첩에서 한면은 동서 80리, 남북 120리를 포괄하고 있다.
목판은 2면을 담고 있으며, 양면에 판각되어 있다.
지도를 제작하는데 약 70장 내외의 목판이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22첩을 함께 합치면 남~북 약 6.7m 동~서 3.8m의 대형 지도가 되며 축적은 약 16만분의 1로 알려져 있다.
동서방향은 구획된 판을 접어서 연결시켜 1첩으로 만들어 쉽게 볼 수 있도록 했음.
남북으로 동서의 방향을 연결시킨 각 첩을 펼쳐서 순서대로 이어대면 연속된 남북을 볼 수 있게 했음.
지도의 제 1층에는 지도의 제목과 발간연도 및 발간자를 명시하고
본도와는 별도로 서울의 도성도와 경조오부도를 상세하게 그렸음.
축척을 보면, 지도의 제 1층 첫머리에 그려져 있는 지도 방안에 매방십리라고 되어 있어서
간접적으로 축척이 표시되어 있음.
지도의 좌표에 해당하는 이 방안은 지도를 동서로 접은 1면을
남북 12방안, 동서 8방안으로 구분하고 있고 남북이 120리, 동서는 80리로 되어 있음.
그리고 1면의 실제 길이는 남북이 약 30cm, 동서가 약 20cm임.
그러므로 동서 20cm가 80리(32km)에 해당되는 축척이므로 대동여지도의 축척은 약 1/160000이 됨.
지도표의 범례
제1첩의 10면에 표기된 '지도표'에서는 지도에 사용된 범례를 적고 있다.
여기서는 총 14개의 항목을 22개의 서로 다른 기호로 표기하였고 채색도 하였는데,
이 때 사용된 색과 채색법은 지도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다.
《세계 지도학 통사(The History of Cartography)》에서
〈한국의 지도학(Cartograhpy in Korea)〉 부분을 집필한 미국의 지도학자 개리 레드야드(Gari Ledyard)는
《대동여지도》가 조선의 지도학적 명확성을 향상시켰다고 평가한다.
대동여지도의 1면은 동서 80리, 남북 120리의 영역을 담고 있으며,
지도 전체로는 동서 1,520리, 남북 2,640리이다. 이때 축척은 약 1:216,000이다.
이는 〈청구도〉의 남북 2900리보다 260리의 차이를 보이는데,
〈청구도〉에서 공백 및 여백으로 표시한 부분을 〈대동여지도〉에서는 생략하였기 때문이다.
산줄기는 봉우리와 능선을 따라 이어 그렸다.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지리산에서 끝나는 백두대간을 하나의 줄기로 표기하였다.
지도에는 해안선 도서, 산과 하천의 지형, 지방 군현 등이 실제와 거의 유사하게 그려져 있다.
각 군현간을 잇는 도로에는 10리마다 방점이 찍혀 있어 군현간 거리 측정이 가능하다.
도읍은 원으로 표기하고 원 안에 이름을 표기하였다.
각 군현 안에서는 영아(營衙), 읍치(邑治), 성지(城池), 진보(鎭堡), 창고(倉庫), 목소(牧所), 봉수(烽燧),
능침(陵寢), 방리(坊里), 고현(古縣), 고진보(古鎭堡), 고산성(古山城), 도로(道路) 등이 표시되어 있다.
산
산줄기는 굵은 줄로, 높은 산은 위로 솟은 톱날 모양으로 표현했다. 이름난 산이면 보다 구체적으로 묘사했다.
예: 한라산 백록담과 그 주변
강
배를 타고 수송을 할 수 있는 강이면 푸른 색으로 두껍게, 그렇지 않으면 중간 굵기의 선으로 표시했다.
예: 북한강·남한강·경안천의 합류지점 (지금의 팔당호)
도로(道路)
가는 줄을 그리고 십리마다 표시했다.
영아(營衙)와 진보(鎭堡)
영아는 군영을, 진보는 전방·해안 등에 배치한 진지를 말한다.
각각 크고 작은 사각형으로 표시하며 성이 있을 때에는 빨간 테두리를 그렸다.
예: 경상좌수영(큰 사각형)과 동래 근처의 진들(작은 사각형)
읍치(邑治)
노란 원으로 표시하고 성이 있을 때에는 빨간 테두리를 그렸다.
예: 녕변 철옹성
성지(城池)
성과 해자 등을 말한다. 산성(山城)과 관성(關城)을 구분해서 표시했다.
예: 칠곡 가산산성, 삭주 막령진 주변의 성곽
역참(驛站)
노란 원 안에 세로줄을 그렸다.
예: 삼례역
창고(倉庫)
검은 사각형으로 표시하고 성이 있을 때에는 빨간 테두리를 그렸다.
목소(牧所)
나라에서 말을 기르는 곳이다. 빈 사각형 안에 ‘牧’으로 표시했다.
봉수(烽燧)
산 위에 붉은 삼각형으로 표시했다.
예: 최북단인 온성 미전보 주변의 봉수대들
능침(陵寢)
왕릉을 말한다. 붉은 원으로 표시했다.
예: 선정릉(위)과 헌인릉(아래)
방리(坊里)
빈 원으로 표시했다.
고현(古縣)
검은 원으로 표시하고 성이 있을 땐 붉은 테두리를 그렸다.
예: 경주 옆의 상성
고진보(鎭堡)
검은 삼각형으로 표시하고 성이 있을 땐 원으로 테두리를 그렸다.
예: 안산의 구 초지진 (현종 때 강화도로 옮겼다.)
고산성(古山城)
산 모양 안에 흰 원으로 표시했다.
예: 영춘 옆의 온달산성과 석굴
대동여지도의 특징
〈대동여지도〉는 한국 고지도를 집대성한 최고의 옛 지도이다. 이 지도는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1. 목판본으로 만들어 필사할 때 생기는 오류를 막고 대량 생산이 가능하게 했다.
2. 지도표(지도식)를 사용하여 지도의 주기 내용을 간결화하고 옛 지도를 근대화했다.
3. 분합이 자유롭게 22첩으로 만들어 상하를 잇대면 도별 지도도 되고 전부 연결하면 전국도가 되도록 제작하여
이용하기 편리하며, 접으면 책 크기로 되어 휴대하기 편하도록 제작하였다.
4. 전통적인 지도 제작법인 배수(裵秀)의 6체(六體)에 따랐으며, 방안도법을 이용하였고,
확대와 축소를 할 때 서양의 과학기술을 가미하여 지도의 정확성을 높였다.
5. 주기 내용이 많아 정보가 풍부하다.
6. 10리마다 점을 찍어 여행할 때 이정을 알기 쉽게 하였다.
7. 정확한 해발고도는 알 수 없지만 대략적인 높낮이 구분은 크고 작음으로 구분이 가능하다.
8. 배가 뜰수 없는 하천은 표시하지 않는 등 군사적, 상업적으로 유용한 지도였다.
지도의 내용을 보면, 일반 지도에서는
지형표시에서 개개의 산지나 평지를 있는 그대로 나타내는 것이 보통이나
대동여지도에서는 개개의 산보다 산줄기를 표시하는 데 역점을 두었으며,
물줄기도 체계적으로 정리하였음.
거리는 붉은 선으로 처리하였는데 거의 직선으로 표시하고 십리마다 표시를 하여
어느 지점간이라도 방표의 수를 헤아려봄으로써 거리를 알 수 있게 하였음.
한편 14개 항목의 지도표를 만들어 가능한 부호로 처리한 점도 이 지도의 특징 중의 하나임.
대동여지도는 1861년에 처음으로 만들어 김정호가 목판으로 인쇄하였으며,
그 후 고종 원년(1864)에 수정본이 재간되었음
김정호가 제작한 세 지도, 곧 〈대동여지도〉와 〈청구도〉, 〈동여도〉를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청구도〉가 필사본이기 때문에 일어날 수 있는 오류를 막으려고 〈대동여지도〉는 목판본으로 만들어졌다.
이때 〈대동여지도〉의 주기(註記)의 수는 〈청구도〉의 15,485개에서 13,188개로 줄었으며,
이는 총 2,297개 줄어들었다.
다만 몇몇 주기, 곧 하천·누정(樓亭 : 누각)·진보(鎭堡)·포(浦, 항구)·부곡(部曲)·교(橋, 다리)·평주(坪洲)·목장·리(里)
항목은 늘어났다.
〈동여도〉는 현존하는 지도 가운데 가장 자세하며,
또한 이 지도는 〈대동여지도〉를 판각하기에 앞서 제작한 선행 지도이기도 하다.
주기 내용을 비교하면, 산악·하천·방면 항목은 〈동여도〉가 〈대동여지도〉보다 훨씬 많으나,
역원·창(倉)·진보 등의 항목은 두 지도의 기재 내용이 비슷하다.
전체적으로는 〈동여도〉가 총 18,376개로 〈대동여지도〉의 총 13,188개보다 5,548개나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