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영화이야기를 쓴지도 어언 1년이 지났다. 언젠가 얘기했지만 내가 이 어려운 여정을 시작하게 된 동기는 작년 겨울 ‘그 해 여름’을 본 후이지만 아직 처음 생각한 것을 이루지 못했다. 그것은 전적으로 내 게으름 탓이다. 빨리 내 첫걸음을 마무리하고 내가 가진 영화에 대한 내 나름대로의 생각을 좀더 다른 시각으로 전할 생각이다.
지난 해에도 난 수 십 편의 영화와 공연을 보았지만 그 전해와는 못했다. 그것은 지금 우리나라의 영화산업의 위기와 맥을 같이 한다. 빨리 애초에 계획했던 ‘그 해 여름’과 ‘오래된 정원’을 끝내고 지난 해 우리나라 영화에 대한 평가도 해 보고 감독들과의 대화도 해보고 이 자전적 영화이야기를 현재진행형으로 전개하고 싶다.
얼마 전 某시인이 ‘카프카’의 개인적인 일을 쓴 아주 작은 칼럼을 읽은 적이 있다. ‘우연과 필연’이란 글이었는데 그 글에서 그녀는 ‘카프카’의 말을 인용하며 ‘이 세상에 우연은 없다. 우연과 필연은 대립되는 게 아니라 우연 자체가 필연인 것이다. (중략) 그 어떤 우연도 보이지 않는 인과 고리에 의해 다 예정된 일이고. (중략) 우연은 말하자면 환상이다.’라고 말한다. 그 글을 읽고 한동안 멍했다. 그리고 결국에는 무척 공감이 갔다.
내가 애초에 ‘클래식’ ‘노트북’ ‘그 해 여름’ ‘오래된 정원’을 영화이야기의 첫 소재거리로 선택했던 배경은 ‘순수한 사랑’이다. 그런데 그 ‘순수’에는 꼭 ‘우연’과 ‘필연’이 존재했다. 某시인 말처럼 우연이 없을지 몰라도. 그것이 환상(꼭 멋있는 분들은 ‘판타지’라고 표현한다.)일 수 있고 그래서 꿈일 수 있다. 아주 아름다운.
사실 ‘그 해 여름’을 보고 너무 실망스러웠고 그것이 자극이 되어 이 어려운 여정을 ‘우연’히 시작했지만 어쩌면 그것은 ‘필연’일지 모른다.
‘그 해 여름’은 도회적이고 자유로운 부자 남학생 ‘석영’(이병헌)과 오지 산골 고아 여자 사서 ‘정인’(수애)의 사랑 얘기다. 그러나 ‘노트북’과는 달리 남녀 신분의 차이가 바꿨고 여기에도 여지없이 시대의 아픔이나 불균형이 그들의 순수에 파고 든다. 물론 그들의 초연한 순수에 자본이나 이념은 끼어들 공간이 없지만 시대의 절절한 아픔은 현실적으로 그들에게 영향을 미쳤고 개입했다. 이것은 시대와 내용만 다를 뿐 위의 네 가지 ‘사랑얘기’가 모두 꼭 같다.
‘오래된 정원’은 조금 다르지만 (영원한) 사랑은 순수해야 하고 그 순수에는 꼭 빈부(자본), 전쟁, 이념, 신분, 운명들이 꼭 끼어들고 꼭 짧은 만남, 긴 이별이 있고 그러면서도 꼭 ‘영원히’, ‘언제나’, ‘아름다운’, ‘아련한’, ‘같이’, ‘운명’ 같은 단어들이 나오고 꼭 시골이나 산골이 나오고 꼭 여름철에 소나기가 나온다.
따라서 ‘그 해 여름’도 신파다.
그런데 이 신파 영화가 왜 내 감상을 자극하여 날 이렇게 고생시키나 하고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그것은 바로 ‘아쉬움’이란 것을 깨닫게 되었다. 너무도 다중적인 의미를 갖는 ‘아쉬움’이다.
이 자극이 무의식적으로 이 글의 제목을 ‘자전적 영화이야기’라고 붙였고 그 배경에는 ‘자전적’과 ‘영화’와 ‘이야기’가 따로 떨어져서 노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 해 여름’은 60년대 말이 시대 배경이니까 내가 학생시절을 보냈던 시기보다는 다소 조금 앞서지만 정말로 ‘내 젊은 날의 초상’과 많은 부분에서 닮았다. 난 4년 동안 내리 내가 속한 서클(지금으로 얘기하면 동아리)에서 농촌봉사를 갔었다. 그것도 3,4학년 때는 여름에 ROTC 병영훈련을 1개월씩 다녀와야 하는데도 난 병영훈련 전에 먼저 농촌봉사를 갔다.
그리고 그 서클은 우리의 목적은 전혀 그렇지 않았는데도 서슬 퍼런 유신독재 치하에서는 이념서클로 분류되어 경찰의 감시를 받았다. 그리고 ‘그 해 여름’ 같이 농활을 하면서 강원도 두메산골의 자연에 매료되었고 등장인물들과 똑 같은 많은 시골 분들의 순수와 무지와 순박한 마음씨도 경험했다. 대부분 나이가 많이 드신 분들이었지만 상록수의 주인공 ‘영신’이 같은 분도 만났고 도시 근로자로 있다가 몸과 마음을 다쳐 은둔생활을 하는 ‘주태공’도 만났다. 그리고 그곳에서 첫사랑도 만났고 기쁨과 행복, 좌절과 이별과 아픔도 맛보았다.
‘그 해 여름’이 그런 내 마음속 깊이 감추어 두었던 젊은 날의 초상의 일단을 다시금 들춰 내 주었다. 그래 그 ‘젊은 날’은 ‘그리움’이고 ‘아쉬움’이었고 그래서 무의식 중에 ‘자전적’이란 단어가 떠올랐을지도 모른다. 영화가 끝나고 환해지고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옆에 있는 사람에게 괜히 뭘 들킨 것 같이 계면쩍어 했다. 그래서 ‘자전적’이다.
난 시종일관 얘기했지만 영화를 참 좋아한다. 허리우드 키드를 동경했다. 그러나 전문가는 아니다. 그런데도 전문가然하면서 영화를 보기 때문에 스토리부터 극본, 편집, 배우들의 연기, 카메라 앵글, 각종 기법 등등 아주 세밀하게 따지면서 영화를 보고 되새김질하는 나쁜 버릇이 있다.
그런 면에서 ‘그 해 여름’은 많은 ‘아쉬움’이 남는 영화다. 우선 배우들의 캐스팅과 캐릭터를 보자면 일본의 수입/배급사에게 선판매를 해서 그랬겠지만 한류스타인 이병헌에게 너무 많은 비중을 두었고 특히 과거 회상 장면이 수내리는 그래도 괜찮았지만 ‘현재’가 문제였다. 김PD(유해진)와 방송작가 수진(이세은)의 캐릭터도 어정쩡하고 나이든 윤교수(이병헌)도 그렇다.
서클 회장인 균수(오달수)의 설정은 또 어떻고? 그의 코믹 연기 설정은 일부 비평가들이 60년대 말의 순수를 21세기인 지금에 소통하기 위한 고육지책이라고 두둔했지만 난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적어도 내 경험적 판단으로는 균수의 역할은 그 시대의 그 모습 그대로 그렸어도 21세기 지금의 젊은이들도 충분히 공감했으리라고 생각한다. 순수를 탈색시키면서까지 연결고리를 찾지 않았어도 되었다.
정말로 ‘균수와 수내리(사람들) 같은 탈색된 순수를 통해서 가치보다 효용을 따지는 시대를 거슬러 순수한 사랑의 가치를 감동적으로 웅변한다는 선택에는 용기가 필요’했었고 그것은 실패했다. 앞서 짚은 ‘첫사랑’이나 ‘노트북’도 ‘순수를 확신하고 향유하는 건 불가능한 시대가 아니냐는 역설’을 보기 좋게 극복했다. 그런데 이 영화는? 그래 아쉽다.
다만, 그 시대를 표현하고자 노력한 시골마을 풍경과 만남의 배경이 되는 ‘청운재’, 미술, 의상, 소품 등과 오지 시골 마을에 처음 전기가 들어오고 처음 텔레비전을 구경하는 날 아폴로 우주선이 달에 착륙하여 암스트롱이 달을 거니는 장면 등의 설정은 조근식 감독의 역량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마지막으로 ‘이야기’다.
난 글을 쓰면서 항상 열등의식이 있다. 왜냐하면 너무 어휘력이 없고 또한 너무 산문적이고 서술적이다. 난 적어도 글쓰기로 제일 부러운 사람들이 시인들이다. 어떻게 자기 사고를 그렇게 간결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그래 그런 분들을 보면 그리고 그 정제된 언어를 읽으면서 항상 부족함을 느낀다.
그런데 아직 길지 않은 삶을 살면서 느끼고 경험한 그 행간마다 난 내 ‘이야기’를 쓰고 싶은 유혹을 너무 심하게 느끼고 있다. 영화만큼이나 강한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있다. 능력도 없고 실력도 없는 놈이 ‘이야기’를 하고 싶은 만용을 부리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그 만용은 만용으로 그쳐야 하는데 영화만 보면 카타르시스만 느끼면 되는데 자극이 오고 자꾸 ‘forget me not’ ‘forget me not’ 하니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다. 특히 점점 나이가 들면서 말수는 적어지면서 그 치기는 자꾸 되살아나고 있으니.
그래 ‘이야기’다.
순수, 추억, 만용, 치기 등등이 어우러지면서 경찰서 취조실에서 ‘정인’을 모른다고 부정한 ‘석영’같이 새벽닭 울기 전에 예수님을 세 번 부정한 수제자 ‘베드로’같이 아니라고 부정을 하고 또 하지만 그 ‘아쉬움’으로 인해 난 자꾸 ‘추억’을 들추어 내고 또 ‘이야기’ 하려는 지도 모른다.
그래 내 ‘자전적 영화 이야기’는 계속 될 수밖에 없는 ‘필연’이 있다.
누군가에게 알릴 게 있거든요.
이렇게 한 사람, 두 사람 나눠주다 보면
내 손 떠난 이 나뭇잎이 언젠가 그 사람 손에 가게 되겠죠.
그럼 알게 될 거예요. 우리들의 암호거든요
‘나 잘 있어요, 내 걱정하지 말아요, 난 행복해요.’
내 인생이 힘들 때 언제나 당신과의 시간을 생각해요.
우리 울지 말아요. 소중한 시간들 아름답게 기억해요.
첫댓글 오랜만에 내 영화 이야기를 시작 했다. 그간 내가 너무 뜸했지. 이제 자주 만나자. 그리고 새해 복 많이 받고....
기훈이는 참 부지런하네 작년에 본 영화와 공연이 수십 편 이라니 난 한편도 없는거 같은데.. 아! 케이블 TV 같은 걸로 본 영화는 서너개 되겠다... 명절 잘 보내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