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의댐 탄생
평화의 댐은 강원도 화청군 화천읍 동촌2리 애마골에 위치해 있다. 휴전선으로부터 북한강을 따라 북으로 26km 지점에 금강산댐(임남댐)이 있고, 휴전선으로부터 남으로 10km 지점에 평화의댐이 있다. 두 댐은 북한강을 따라 36km 떨어져 마주 보고 있는 것이다.
이 평화의댐은 민주화운동이 하늘을 찌를 때 전두환 정권이 건설한 댐이다. 1986년10월30일, 이규호 건설부 장관이 중대기자회견을 열었다. 북한이 비밀리에 금강산댐을 짓고 있는데 그 댐을 무너트리면 서울이 물바다가 된다는 내용을 발표했다. MBC 등은 “금강산댐 건설음모”라는 특집방송을 하여 금강산댐의 물 200억톤이 쏟아지면 서울은 12-16시간 내에 물바다가 되고, 국회의사당은 꼭지만 남고, 63빌딩은 3분의2가 수장될 것이라는 모의 동영상까지 제작하여 안방들을 경악케 했다.
86년 12월, 모든 방송과 뉴스매체들은 국민성금을 독려했다. 달동네 아이가 생활비의 20%를 털어서 성금을 냈다는 눈물겨운 이야기도 소개했다. 이렇게 해서 88년6월까지 방송국 등에 모인 성금이733억원, 정부에 전달된 돈이 661억원, 그중 639억원이 건설공사에 투입됐고, 20억원은 저금을 해놓았는데 1990년 10월까지 돈이 불어나 90억원이 되었다고 한다.
정부는 평화의 댐을 1986년10월에 착공하여 15개월 후인 1988년5월에 1단계 공사를 마쳤다. 1단계 공사는 댐 높이 80M, 저수량 5억9천만 톤을 수용할 수 있는 댐이었고, 나머지 공사는 금강산댐 공사를 지켜보면서 대응하기로 했다. 이것으로 88년 올림픽을 방해하기 위한 수공에는 충분하다고 했다. 금강산댐은 북한이 먼저 쌓기 시작했지만, 우리가 평화의댐을 건설하자 공사진도가 늦어졌다.
김영삼과 이회창에 의해 사기극으로 판명된 평화의댐
금강산댐의 공사가 지연되면서 김영삼 시대를 맞았다. 김영삼이 들어서면서 5-6공을 청산하자는 열기가 높았다. 5-6공의 3대 의혹이 지목됐다. 12.12. 평화의댐, 차세대전투기사업, 이렇게 세 가지였다. 12.12는 전두환과 노태우가 공동으로, 평화의댐은 전두환이, 차세대전투기사업은 노태우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전두환과 노태우가 추진한 사업은 모두가 사기라는 정서가 팽배했다. 이때부터 평화의댐이 뭇 언론의 몰매를 맞는 동네북이 됐다. 야당 의원들과 민주화세력이 바람을 일으키자 모든 언론들이 인민재판에 나섰다. 조선일보는 93.6.17.에 감사원장의 감사결정을 “시의적절한 일”이라 극찬하면서 과거에 평화댐건설을 앞장서 홍보했던 뭇 언론들을 대신하여 반성한다 했다. 옛날에 평화의댐 건설과 국민성금 모금에 앞장섰던 언론들이 이제는 그 모금행위가 대국민사기극이었다고 몰아기 시작했다. “정권안보용 댐” “독재정권유지를 위한 전시용 댐”"국민을 기만한 사기극“ ”우스개 된 평화의담“(1993.6.17 조선일보 사설). . .
2003년 9월4일, 이회창 감사원장이 감사결과를 발표했다. 한마디로 존재하지도 않은 위협을 여론 호도용으로 만들어 낸 사기극이라는 취지의 발표였다. 9월1일, 조선일보는 감사원 감사 결과를 미리 내보냈다. “수공 과장 정권안보 이용”이라는 제목의 기사는 감사원의 발표를 그대로 인용한 것이었다. 이 이회창 감사원장의 발표는 야권과 야당에 힘을 실어 주었다. 이때부터 국민은 평화의댐을 “정권안보용” “국면전환용” “사기극”으로 인식하게 되었고, 이런 사기극을 벌인 전두환은 몹쓸 사람으로 짓밟히게 되었다. 감사원 발표는 국회청문회를 촉발시켰다.
93년9월, 국회청문회가 열렸다. 청문회에 불려나온 증인들을 향해 국회의원들이 죄인 다루듯 고성을 쳤다. 증인들은 인격이 없는 존재들이었고, 그들의 성에 차지 않는 말을 하면 호령들을 했다. 건설부 장관, 통일부장관 들이 나가 증언을 했지만 이들은 한결같이 북괴의 위협으로부터 우리를 스스로 지키기 위해 결정한 정당한 조치였다고 항변했다. 북한이 금강산댐을 쌓다가 중지한 것은 우리가 대비를 했기 때문에 쌓아봐야 소용이 없다고 생각해서였을 것이라고 항변했다. 93년9월8일, 국회건설위원회는 영등포 구치소 회의실에서 청문회를 열었다. 86년 당시 국안기부장이었던 장세동이 구치소에 수감돼 있었기 때문이었다. 거듭된 질문에도 그는 한 결 같이 이렇게 답했다, “건설된 평화의댐은 적의 기도를 말살했다.” 당시 평화의댐은 전두환과 안기부장이었던 장세동이 주도했다는 여론이 팽배했었다.
김대중에 의해 몰래 다시 효자로 등극한 평화의댐
2002년4월 KBS가 금강산댐의 안전문제를 처음 보도했다. 2002년5월7일, 평화의댐을 사기극으로 폄하했던 조선일보가 전혀 뜻밖의 기사를 실었다. “15년동안 천덕꾸러기로 여겨왔던 평화의 댐의 중요성이 다시 부각되고 있다”는 것이다. 신동아는 2002년 7월호에서 “금강산댐은 제2의 노동미사일이고, 또 하나의 핵무기다. 고의든 부실공사 때문이든 터지면 전시체제로 돌입할 수밖에 없다”. 여러 신문들이 이에 가세했다. “평화의댐 존재가치 다시 부각”
인공위성 사진에 의하면 26억톤 이상을 저수하는 금강산댐에 커다란 함몰부분이 생겼다. 북은 7월부터 금강산댐의 증축공사를 시작했다. 2002년8월30일, 남북경협추진위가 열렸다. 여기에서 양측은 금강산댐의 안전문제를 공동조사하기로 합의했다. 하지만 북한은 20일 만에 약속을 깼다. 정부는 부랴부랴 기존의 80m 높이의 댐을 125m로 높이는 공사를 계획했다. 2002년9월에 착공하여 2004년12월까지 총 공사비 1,950억원을 투입하기로 했다. 그리고 실제는 2005년5월에 26억3천만 톤의 저수량을 갖는 한국 제3위의 댐으로 증축됐다. 이는 금강산댐보다 1천억 톤이 더 많은 저수량이다. 소양강 댐의 저수량이 29억톤, 충주탬이 27.5억톤이다. 평화의댐은 현재 홍수조절 기능이 아주 훌륭한 것으로 입증되고 있다.
평화의댐은 전두환이 건설했기 때문에 사기극이 됐다. 전두환이 한 것이면 무든 것이 사기였다고 몰아 부쳤던 마녀사냥 시절에 이회창은 민주화 여론에 영합하면서 대쪽이미지를 창출해냈다. 그러나 금강산댐은 군사전략적 측면에서 보아야 했다. 이회창은 법조계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이었다고 소문났던 대법관 출신이고, 전두환은 무골 군인 출신이다. 지금쯤은 이 두 사람을 놓고 평가를 해야 할 때라고 본다. 전두환은 한 때 사기꾼으로 몰렸지만, 이제는 해야 할 일을 한 애국자였다. 하지만 이회창은 전두환을 팔아 대쪽 이미지를 창출해냈을 뿐이다. 공명심에 강했던 것이다.
대쪽 이미지 반납해야
이회창은 차세대전투기사업도 이런 식으로 감사했다. 노태우 전직 대통령에게 감사질의서를 보내고, 미국 회계감사원(GAO)에도 질문서한을 보내는 등의 특이한 제스처를 써서 대쪽 이미지를 만들어가면서 차세대전투기사업에 대해 70일간을 감사했다. 하지만 그는 소설 같은 의혹들만 잔뜩 증폭시켰을 뿐, 단 한 개의 비리도 찾아내지 못했다. 그가 그의 입으로 직접 제기한 의혹은 태산 같았지만 그 중에서 증명해낸 것은 단 건도 없었다. 그가 의혹을 사실인 것처럼 증폭시킬 때 국민들은 그를 연호했고, 그래서 그는 대쪽의 영웅이 되었던 것이다. 반면 노태우와 사업 담당자들은 저항조차 하지 못한 채, 인격살인을 당했다. 지금 와서 보면 차세대 전투기 사업에서 노태우는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해낸 사람이었지만, 이회창은 성한 사람을 몹쓸 사람으로 만들어내면서 여론에 영합함으로써 대쪽이 됐다.
증축된 평화의 댐은 언론에 노출되지 못했다. 평화의댐을 비하했던 김대중이 제 스스로 그 가치를 인정하면서 증측하려니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오늘날 효자노릇을 하면서도 평화의댐은 아직도 대부분의 국민에 의해 사기극의 산물로 인식되고 있다. 전두환과 평화의댐을 짓밟고 대통령이 되고 대쪽이 된 사람들은 잘못에 대해 사과 한 마디 없다. 그리고 지금도 대통령이요 지금도 대쪽인 것이다.
< 평화의댐>
2008.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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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저도 김대중정부 시절에 금강산댐을 증축했다는 말을 듣고 무척 놀랐습니다.
제 글에 관련 사항 적어 놨으니 꼭 읽어 보시도록. 댓글로 쭈욱 적었는데 너무 길어 보이니 밑에 새글로 본문에도 적어 두겠으니 눈 아파 댓글 읽기 불편하시면 새 글을 읽어 보시길.
참 쥐뿔도 모르는 사람들이 진실 운운하며 사실 왜곡하는 모습들이 우습기 그지 없습니다. 86.10.30일 이규호 당시 건설부 장관이 중대 기자회견이라며 북괴가 비밀리에 금강산댐을 짓고 있으며, 그 댐을 무너뜨려 서울을 물바다로 만들려한다는 내용을 발표합니다. 그 때부터 언론은 난리가 났습니다. 매일 저녁 뉴스에 국회의사당이 잠기고 63빌딩 반이 잠기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지요. 안수환 서울대 교수는 86.10.30일에 방영된 MBC특집방송 "금강산댐 건설음모"에서 출연하여 "금강산댐의 200억톤의 물이 쏟아지면 그 피해는 상상불가"라고 발언을 하였습니다. 정부는 북괴의 88올림픽 방해공작이라고 발표하였습니다.
상기 내용은 지만원 본문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이제 위 내용이 왜 후대에 사기라 불렸는지 알기 쉽게 말하겠습니다. 200억톤에서 피식 웃음이 나오시지 않습니까? 전두환 정권에 만든 1차 평화의 댐 저수용량은 5억 9천만톤입니다. 200억톤의 물을 막기 위해 5억 9천만톤의 저수용량이면 88올림픽을 방해하기 위한 수공에는 충분하다고 하였습니다.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십니까? 200억톤의 물을 6억톤의 저수용량을 가진 댐이 막는다는 것이? 간단히 말해 사기, 즉 거짓말을 국민들에게 한 것이지요. 애초부터 200억톤의 물폭탄이란 것은 존재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아래에 그것을 엄밀히 과학자의 견해에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김의홍 당시 KIST 시스템공학연구소 연구원의 발표에 따르면 200억톤 규모는 지형상 불가능하며 설령 저수량이 150억톤이라고 가정해도 매일 트럭 천대가 건설자재(흙 등)을 13년 동안 쌓아야 하며 또 댐을 만든뒤 물을 채우는데만 14년이 걸린다고 하였습니다. 김의홍 교수는 200억톤이라는 수치가 터무니없다는 보고서를 냈다가 안기부에 끌려가 곤혹을 치뤘다고 MBC "사실은"이란 프로에 나와 밝혔습니다. 200억톤이라는 수치는 안기부의 지시를 받은 한국전력공사직원 한명이 불과 몇 시간만에 계산해낸 것입니다. 핵폭탄보다 더 한 피해를 준다는 금강산댐의 파괴력을 이따위 주먹구구식으로 계산해 국민을 겁준 것입니다.
끊임없이 안보위협을 제기하는 세력과 이를 확인없이 글을 써서 불안감을 조성하는 일부 인사들의 발언처럼 북괴의 금강산댐이 물폭탄을 퍼붓기 위해 지은 댐일까요? 전혀 아닙니다. 일단 북괴 금강산댐은 전두환 정권시 발표와는 전혀 다르게 200억톤이 아닌 26억톤의 저수용량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수력발전의 용도로 쓰이는 유역변경식 댐입니다. 즉 남으로 물을 흘려보내지 않고 동해로 매년 17억톤의 물을 보내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해 전두환 정권의 희대의 사기극인 것입니다.
위에 지만원도 그렇고 제3의 사나이님도 김대중 정권때 평화의 댐 증축을 놓고 그것봐라 김대중 역시 수공을 감지하고 증축한 것이 아니냐는 듯이 글을 남기셨는데 그것은 정말 웃긴 헛소리입니다. 2002년 1월 북괴가 수공을 하지 않더라도 금강산 댐이 부실공사로 인해 붕괴의 위험성이 발생할 수 있다는 징후가 발견되었기 때문에 증축을 한 것입니다. 금강산댐의 저수용량과 더불어 막대한 양의 댐 붕괴 잔해물들이 유입하여 화천댐 등 하류 댐들에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에 증축을 한 것입니다. 이를 마치 김대중이 전두환 시절처럼 금강산 댐 수공에 대비하여 증축한 것 처럼 오도하는 것은 정말 웃긴 일 입니다.
지난 20년 동안 금강산댐은 단 한번도 무너진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전두환 정권 시절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가 거세질 때마다 금강산댐의 붕괴위험을 내세워 가공할 만한 금강산댐 수공을 펼쳐왔습니다. 86년 10월 민주화 요구를 담아 건국대학교에 학생들의 집회가 열리는데 그 이틀 뒤 정부는 북괴의 금강산댐 건설 계획을 발표합니다. 11월 4일 김대중이 대통령 직선제를 조건으로 대선에 불출마 약속을 하게됩니다. 김대중은 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으나 직선제 요구 바람이 거세게 일게 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 이튿날 국방부장관 명의로 북괴가 금강산댐을 군사용 목적으로 만들었다는 수공설을 발표합니다.
직선제 논의에 찬물을 끼얹은 셈이죠. 이어서 정의구현 사제단이 이번엔 민주화 시국선언을 하게 되는데요. 정치권은 이에 화답을 하면서 전국적으로 대통령 직선제 쟁취투쟁을 전개할 것을 밝힙니다. 곧 이어 전두환 정권은 평화의 댐 성금 모금 운동을 전국적으로 벌이게 됩니다. 그리고 87년 1월까지 다시 직선제 논의는 물밑으로 가라앉게 됩니다. 그 이후 박종철이 고문을 당하던 중 사망하는 사고가 생기고 국민은 분노하게 됩니다. 이에 다시 전두환 정권은 충분한 조사와 논의과정을 생략한 채 전격적으로 평화의 댐을 착공하면서 국민의 관심을 돌리려고 합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의 과정 속에서 평화의 댐은 이해되야 합니다.
잠시 금강산댐 관련 외신기사를 봅시다. 타임즈지 86년 11월 24일자에는 "남한 각처에서 금강산댐 규탄대회가 일어나고 있는 것은 대학생들이 주장하는 대통령 직선제 개헌문제 같은 국내문제로 부터 관심을 돌리게 하는 전두환 정권의 정치적 목적이 있을지도 모른다." 워싱턴포스트지 88년 8월 1일자 "불신과 낭비가 빚어낸 사상 최대의 기념비적 공사"라며 조롱섞인 기사를 내보냈다.
이 글을 퍼오는 능금이는 지만원의 말이라면 성경처럼 신봉하는 자이니 뭐 새삼스럽지도 않습니다만. 지만원이는 결론에서 증축된 평화의 댐이 언론에 노출되지 않았다고 당당히 말합니다. 뻔뻔함이 부러울 정도인데요 평화의 댐 증축관련 기사는 제가 인터넷 기사 검색 잠시했는데도 200건이 넘는군요. 지만원이 이번에는 이회창을 걸고 넘어지면서 어떻게든 흠집을 내보려 하는군요. 다만 이번에는 저번 이명박 대통령 명예훼손 사건때 처럼 지만원이 사과편지 보내고 용서를 비는 우스운 이벤트가 벌어지지 않았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