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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곡리(釜谷里)
대구광역시 달성군 다사읍에 속하는 법정리.
부곡리에는 다사읍의 북서쪽을 에워싸고 있는 마천산령(馬川山領)에서 남쪽으로 뻗어 내려온 산줄기의 일부가 자리 잡고 있으며, 부곡리의 남쪽은 낙동강(洛東江)이 흐른다. 산줄기의 서사면 산기슭에 새터·가마실 등 자연 마을들이 들어서 있으며, 마을 서쪽으로 부곡천(釜谷川)이 흘러 낙동강으로 유입된다. 부곡천 유역 평야는 농경지로 이용되고 있다. 남쪽사면 산기슭에는 새마·부웃터·부굿터 등의 자연 마을이 있으며 부곡리 앞으로 낙동강이 흐른다.
본래 대구부 하남면에 속한 지역이었으나,
-1914.4.1 행정 구역 폐합으로 하남면이 다사면으로 재편됨에 따라 경상북도 달성군 다사면 부곡동이 되었다.
-1988.5.1 동을 리로 개칭하면서 경상북도 달성군 다사면 부곡리가 되었다.
-1995.3.1 달성군 전역이 대구광역시에 편입되어, 대구광역시 달성군 다사면 부곡리가 되었다.
-1997.11.1 다사면이 다사읍으로 승격되면서 대구광역시 달성군 다사읍 부곡리가 되었다.
부곡리(釜谷里)는 이곳의 자연 마을인 가마실·부곡(釜谷)·부앞에서 나온 명칭으로, 옛날 이곳에 그릇을 굽던 가마굴이 있었다 하여 가마실 또는 가마 부(釜) 자를 써서 부곡 또는 부앞[가마굴 앞 마을]이라고 하였으며, 마을 지형 또한 가마 같다고 한다.
부곡리는 다사읍의 남부 중앙에 있으며, 행정리는 부곡리 하나로 구성되어 있다.면적은 2.6㎢이며, 총 110가구에 241명[남자 131명, 여자 110명, 외국인 제외]의 주민이 살고 있다(2015.12.31 현재). 부곡리는 농촌 마을로 인구 규모가 작은 지역이다. 부곡리의 인구는 다사읍 전체 인구인 6만 3742명[외국인 제외]의 0.4%에 불과하다. 동쪽은 달성군 다사읍 매곡리, 서쪽은 문양리·문산리, 북쪽은 이천리와 접하고 있으며, 남쪽은 낙동강을 건너 경상북도 고령군 다산면과 마주 보고 있다.
부곡리는 남쪽으로는 국도 30호선이 통과하며, 부곡리와 인접한 달성군 다사읍 문양리에는 대구 도시 철도 2호선[지하철]의 종점인 문양역이 있어 교통이 매우 편리한 편이다. 국도 30호선은 대구광역시 성서 방면에서 강창교를 건너 진입하며, 매곡리·죽곡리 등 다사읍의 중심 시가지를 경유하여 부곡리의 남단을 통과하여 서쪽의 하빈면과 경상북도 성주군 방면으로 향하게 된다. 또한 부곡리의 북부 새터 마을 옆으로는 매곡리 중심 시가지로 넘어가는 도로망이 연결되어 있다.
부곡리는 농촌 마을로서 부곡천 옆 농경지에는 시설 원예 농업 중심으로 농경이 이루어지고 있다. 한편 도시 철도 2호선의 개통으로 인한 부곡리의 획기적 변화는 대구 10미(味)의 하나로 잘 알려진 논메기 매운탕집들이 명소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이곳의 논메기 매운탕 마을은 1990년대 중반부터 형성되었다. 그러나 2005년 개통된 도시 철도 2호선의 기점인 문양역에 논메기 매운탕 마을에 인접하여, 주로 도시 철도를 무료 이용하는 노년층을 대상으로 한 논메기 매운탕 음식점이 성황을 이루게 되었다. 즉 지하철을 내린 승객들을 소형 승합차[봉고차]에 태워 음식점으로 이동시켜 주는 영업 형태를 띠고 있다. 논메기 매운탕집은 주로 자연 마을 새터에 밀집해 있으며, 그 외 부곡리 곳곳에 산재해 있다. 이 외에도 부곡리에는 교통이 편리한 국도 30호선 인근 마을 및 기타 자연 마을에 다양한 유형의 음식점들이 들어서 있다.
부곡리(釜谷里)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에 속하는 법정리.
동쪽에 도봉산 자락과 서쪽에 일영봉을 두고 가운데로 흐르는 공릉천 주변에 평야 지대가 있다.
부곡·부곡리·가마골·가막동(加莫洞)이라는 땅 이름은 19세기 초반의 문헌에서 처음 확인된다. 『청구도(靑邱圖)』[1834]는 이곳을 가막동이라 소개하였는데, 이는 가마골 즉 오늘날의 부곡리를 가리키는 땅 이름으로 추정된다. 한편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1861]에 비로소 부곡이라는 이름이 등장하고, 대한 제국 시기에는 부곡상리와 부곡하리로 보다 세분화되었다.
-1914년 일제의 행정 구역 개편에 따라 부곡상리 일부와 부곡하리를 합쳐 현재의 부곡리로 개편하였다.
-통합 당시 부곡리를 구성했던 마을은 무두리·일짜골·동내말·장내말 등이었다.
-2003.10.19 양주군이 양주시로 승격되면서 양주시 장흥면 부곡리가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부곡리(釜谷里)라는 땅 이름의 유래에 두 가지의 설이 있다. 첫째, 이곳이 가마골 혹은 교동(轎洞)으로 불려왔다고 한다. 이름난 인물들의 묘가 많아 성묘하는 사람들이 가마를 타고 들어오므로 이와 같은 땅 이름이 붙여졌다는 것이다. 둘째, 그릇을 굽는 가마가 있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부곡’이 가마 ‘부(釜)’자와 골짜기 ‘곡(谷)’자로 되어 있고 부곡리에 사기장골이라는 마을 이름이 등장해 이러한 설을 뒷받침하고 있다.
부곡리는 양주시 장흥면의 중북부에 위치한다. 총 1,413가구에 3,800명[남자 1,844명, 여자 1,956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2010.12.31 기준). 부곡1리부터 부곡5리까지 5개 리로 구성되어 있다.
자연 마을로는 건너마을·긴골[장골, 장굴, 장동(長洞)]·도래말[도랫말]·동내말[동산동(東山洞)]·무두리[수회동(水廻洞)]·서산(西山)·아랫말·안골·옥수들[옥수뜰]·윗가마골[상부곡(上釜谷)]·윗말·은행정(銀杏亭)[은행쟁이, 은행동]·일짜굴[일짜고을, 인쩌굴, 일주꿀]·장내말[장천동(長川洞)]·정가마골·토다리[토교(土橋)] 등이 있다.
도봉산 계곡부터 부곡리에 이르는 지역에서 고려 말기의 청자와 조선 전기·중기 분청사기의 파편이 산재해 출토되고 있다. 도자기 원료인 도토(陶土)의 채취에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현재도 부곡도방(釜谷陶房)을 비롯하여 여러 도자기 공장이 모여 있다. 현재 부곡리는 옛 교외선의 송추역 부근과 송추초등학교 주변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조성되면서 급격하게 변모하고 있으며, 수도권 제1순환고속도로의 송추인터체인지가 개통하면서 교통량이 많아졌다. 동쪽은 양주시 장흥면 울대리, 서쪽은 석현리·일영리, 남쪽은 삼상리·교현리, 북쪽은 백석읍 복지리와 접한다.
부곡리(釜谷里)
경기도 연천군 연천읍에 있는 리(里).
본래 강원도 철원도호부 관인면의 하리 지역인데,
-1906년 연천군에 편입되었다.
부곡리는 한국전쟁 이후 전 지역이 군사보호구역으로 편입된 곳으로 민간인이 살지 않아 행정리와 반이 설치되어 있지 않다. 자연마을로 문지터(文址基), 샛말, 안터(內垈), 점말(店村, 沙器幕), 지장골(地藏洞), 칡목이(葛項洞) 등이 있다.
부곡리(釜谷里)
경기도 파주시 파주읍에 있는 리(里).
가까이 연풍천이 흐르는 평야지대에 위치한 마을이다. 지형이 가마솥처럼 생겼으므로 가마울, 가말 또는 부곡이라 한데서 부곡이라는 명칭이 생겼다. 자연마을로는 너분여울, 오봉산, 진골안 등이 있다. 너분여울은 너분여울 가가 되어 붙은 이름이다. 오봉산은 오봉산 밑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은 이름이다. 진골안은 마을의 땅이 질어 붙은 이름이다.
부곡리(釜谷里)
강원도 횡성군 강림면에 있는 리(里).
남쪽으로 강림천이 흐르고 있고, 치악산 자락에 위치한 중산간마을이다.
자연마을에는 가래골, 가마골, 갈골, 양지말 등이 있다. 가래골은 이 마을에 가래나무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추동’이라고도 한다. 가마골은 마을이 가마솥처럼 생겨서 붙여진 이름이다. 또는 이 마을에 가마소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유래도 있다. 부곡리는 옛날 이 지역에 그릇 가마가 있었으므로, 가마골, 가메골, 또는 부곡이라 하였다고 한다.
부곡리(富谷里)
충청남도 공주시 사곡면에 속하는 법정리.
부곡리의 서부와 동부·북부에는 각각 해발 고도 500여m의 산지가 있고, 중앙부와 남부에도 해발 고도 300~400m의 산지가 형성되어 있다. 특히 북부로는 국사봉(國師峰)[590.6m]이 높이 솟아 있고, 남북 방향으로 흐르는 마곡천(麻谷川) 유역에는 해발 고도 200여m의 소규모의 충적 평야가 펼쳐져 있다.
조선 말기 공주군 사곡면(寺谷面) 지역으로,
-1914년 사곡면 부곡리가 되었다.
-1995년 공주군이 공주시와 통합되면서 공주시 사곡면 부곡리가 되었다.
예전에는 달이 높이 떴다 해서 고비월(高飛月)이라 불리고, 골이 가늘고 길며 굽은 여울이 있어 곱여울이라 하던 것이 변하여 고비울 또는 고비들로 불리다가 조선 후기부터 부자 마을이 되어 부곡(富谷)이라 하였다.
사곡면의 북부에 위치하고 있다. 면적은 4.08㎢이며, 총 37세대에 106명(남 55명, 여 51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2016.3.31 현재). 총 경지 면적은 33.43㏊로 면 전체 면적의 3.14%를 차지하고 있다. 마곡천 연변의 평야는 벼농사 지대이며, 산기슭은 밭농사 지대이다.
하천을 따라 평야 지대에 부곡과 아랫말 등의 촌락이 들어서 있다. 국도는 지나지 않으나, 지방도 629번이 남북 방향으로 뻗어 있어 남쪽으로는 운암리에, 북쪽으로는 유구읍 동해리에 연결된다. 이외에도 작은 도로가 있어 남서부에서 운암리를 지나 유구읍으로 연결된다.
부곡리(芙谷里)
전라북도 고창군 고수면에 속하는 법정리.
지형은 대체적으로 평지와 낮은 산지로 이루어져 있다. 중앙에는 증산봉[179m]과 남쪽에 100~200m 내외의 산들이 형성되어 있다. 북쪽으로 고수천, 남서쪽에 평지천이 흐른다. 관개 시설로는 연동마을 북쪽에 연동제, 남서쪽에 묵동제, 증산마을 서쪽에도 저수지가 있다. 마당바위에는 마당처럼 넓은 큰 바위가 있다.
부곡리는 지형이 가마처럼 생겨 ‘가마골’ 또는 ‘부곡(芙谷)’이라 하였다고 한다.
1400년대 연안이씨(延安李氏)가 터를 잡아 살기 시작하면서 마을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본래 고창군 수곡면(水谷面)의 지역으로,
-1914.4.1 조선총독부령 제111호에 따라 장암리(場岩里)·연동(連洞)·신평리(新平里)·증산리(甑山里)와 고사면(古沙面) 신곡리(新谷里) 일부, 산내면(山內面) 점촌(店村)의 일부가 병합되어 부곡리가 되었고, 고수면에 편입되었다.
부곡리는 고수면 중앙부에 있다. 면적은 3.37㎢이며(2010년 3월 기준), 인구는 총 132세대에 250명[남 126명, 여 124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2014.12.31 기준). 경지 면적은 1.40㎢로 밭 0.39㎢, 논 1.01㎢, 임야 1.32㎢ 등으로 되어 있다. 부곡리·연동리·증산리 3개의 행정리와 부곡·마당바위·강촌·연동·먹점·증산 6개의 자연 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문화 유적으로는 연동마을 소류지 제방 북쪽 30m 야산 중턱에 석실로 된 고려장 터가 원형을 유지하며 보전되어 있고, 성균진사 안중섭(安重燮)이 강학하던 용강정사(龍岡精舍)가 있다. 고인돌군은 증산마을 서북쪽 야산에 12기, 연동마을에 20기, 칠암산 정상과 시루봉 북쪽 말단부 등에 34기가 각각 분포되어 있다.
부곡리 중앙으로 고창담양고속도로가 서해안고속도로와 합류하는 고창 분기점과 전라남도 장성군을 향해 비스듬히 지나가며, 서해안고속도로와 합류하는 고창 분기점이 있고, 2009년 10월 말 개통한 남고창 나들목[IC]이 있다. 북서쪽에는 국도 23호선이 남북 방향으로 성송면 소재지와 흥덕면 소재지를 연결 하고 있다.
부곡리 고인돌
전라북도 고창군 고수면 부곡리에 있는 청동기 시대 고인돌군.
부곡리 고인돌 중 덮개돌을 갖추고 있는 고인돌은 모두 3기에 불과했다. 덮개돌의 무게는 10톤 내외로 고창 지역 고인돌 중 큰 편이 아니다. 부곡리 고인돌의 형식은 지상 석곽식에 주형 받침돌을 부가한 형태이다.
부곡리(富谷里)
전라북도 군산시 나포면에서 관할하는 법정리.
전라북도 군산시 나포면 부곡리는 나포면에서 관할하는 여섯 개 법정리 중 하나로, 나포면 주민 센터 남쪽에 위치해 있다. 전라북도 군산시 나포면 부곡리는 망해산에서 갈라져 나온 산줄기가 북쪽과 동쪽에 걸쳐 산지를 이루고 서남쪽에 소규모의 평야 지대가 펼쳐져 있다.
전라북도 군산시 나포면 부곡리는 조선 시대 임피군 하북면 지역이었다.
-1914.3.1 행정 구역을 개편하면서 진잠리, 입점리, 상주리 일부를 병합하여 부곡리를 개설하였고, 나포면에 편제시켰다.
-1995.1.1 옥구군과 군산시가 통합되면서 전라북도 군산시 나포면 부곡리로 편제되었다.
전라북도 군산시 나포면 부곡리는 조선 시대 임피군 하북면 지역으로 부유한 장자(長子)가 살았다고 하여 “장자벌”, “장재밀”, 부자 계곡이라는 의미로 “부곡(富谷)”이라 불렸다. 1914년 행정 구역을 개편하면서 옛 지명을 빌어 “부곡리”라 칭하게 되었다.
전라북도 군산시 나포면 부곡리는 동쪽으로 임피면 축산리와 접하고, 서쪽으로 성산면 여방리, 대명리에 접한다. 남쪽으로 성산면 창오리와 인접하고 북쪽으로 나포면 옥곤리와 접한다. 후죽 마을, 원부곡 마을, 입점 마을, 진장 마을, 뒷멀 마을, 봉림 마을, 부곡 마을, 새떰 마을, 새태 마을, 서죽동 마을, 쇠적굴 마을, 신기 마을, 장자멀 마을 등의 자연 마을이 자리하고 있다. 지방도 744호선이 중앙을 지나 북쪽에 인접한 나포면 옥곤리로 이어진다.
부곡리(富谷里)
전라북도 부안군 보안면에 있는 법정리.
북서쪽에 배메산[232.2m]과 묵방산[146m]이 자리하고, 북두제[북두 저수지]에서 농업용수를 공급한다. 부곡마을과 성산마을 사이가 골짜기 형태를 띠는데 넓은 농지가 자리하고 구릉을 따라 자연 마을들이 이어진다.
1914년 이전에는 부안군 입상면 지역이었다.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때 우산리, 성산리, 성동리, 영수동, 진목동, 하석교, 상석교, 소성산(小城山), 월천리와 입상면 묵방리 일부, 소산면의 화봉리 일부를 병합하고 보안면 부곡리로 개설하였다.
-1918년 조선총독부가 제작한 『조선 지형도』「부안」에 부곡리, 성산(城山), 소성산, 영수(永水) 등의 지명이 보인다. 영목동(永木洞)은 연소동(燕巢洞)[영수동]과 진목동(眞木洞)[참나무정이]을 합친 마을이다.
부곡리(富谷里)는 배메산 아래 북두지 방죽[북두제]의 넉넉한 물로 인해 농사짓기가 편하여 예로부터 살기 좋은 마을이라는 의미로 ‘부골’이라고 불렀다. 원래 부골은 ‘큰부골’로 주산면 동정리에 속하고, 갈라져 나온 ‘작은부골[小富谷]’이 보안면의 부곡리가 되었다고 한다. 주산면 동정리의 부골은 한자로 ‘지아비 부(夫)’나 ‘스승 부(傅)’ 자를 쓰는 반면 부곡리는 ‘부자 부(富)’ 자를 쓴다. 한편 북두지 방죽과 관련하여 ‘불곶이’가 ‘북두지’로 변하고, 다른 갈래로 불곶이[불꼬지]에서 부꼴, 부골로 변한 것으로 보는 설도 있다.
부곡리의 동쪽은 정읍시 고부면, 남쪽과 서쪽은 보안면의 상림리와 월천리, 북쪽은 주산면 동정리와 접한다. 면적은 1.74㎢이며, 이 중 밭이 0.35㎢, 논 0.71㎢, 임야 0.27㎢ 등이다. 부곡리·성산리·영목리의 3개 행정리에 91가구, 149명[남 70명/여 79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2020.12.31 현재).
유적으로 부곡리 토성이 있는데, 주산면 사산리[도롱이]의 사산리 산성, 소산리 산성과 함께 백제 시대 토성이다. 부곡리 토성 북서쪽으로 서해안 고속 도로가 지나가기 때문에 일부가 훼손되었다. 부곡리 토성으로 인해 성메[성산(城山)]라는 지명이 생겼다. 성산마을에는 태인 허씨가 세거하는데 이들은 ‘성메 허씨’로도 불린다. 태인 허씨 입향조는 조선 세종(世宗) 때 문과에 장원 급제한 허사문(許斯文)으로, 그 후손이 크게 번창하였다. 보안로가 상림리와 접하는 지점에 진목마을과 영수마을이 있고, 부곡리 토성 앞에 성산마을이 자리한다. 또한 선돌로에서 분기하는 동정로에서 부곡길이 이어지는 곳에 부곡마을이 있다. 부곡마을은 전주 최씨, 평강 채씨 집성촌이다.
부곡리(富谷里)
전라북도 익산시 성당면에 속하는 법정리.
인근에 낮은 산지와 더불어 평야 및 밭이 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당시 안평리(安坪里)의 전체 지역과 부곡리(富谷里)와 용안군(龍安郡)에 속한 군내면(郡內面) 연동리(蓮洞里) 일부 지역을 통합하여 전라북도 익산군 성당면 부곡리로 개설하였다. 가장 중심마을의 명칭인 부곡리를 따 지명화하였다.
-1995.5.10 익산군과 이리시의 통합으로 전라북도 익산시 성당면 부곡리가 되었다.
조선 시대 도평부곡(桃坪部曲) 자리였기에 ‘부곡(富曲)’이라는 명칭을 따서 마을 이름을 삼은 것이라 전해진다. 이는 신라나 고려 시대 존재하였던 특수행정구역인 향(鄕), 소(所), 부곡(部曲)과 관련있는데, 특히 부곡은 천민 집단의 취락을 일컫는 말을 상징하였다. 하지만 이후 사회변화와 더불어 계급의 구분이 무의미해짐에 따라 부곡(部曲)의 한자어를 ‘부곡(富谷)’으로 바꾸었다.
면적은 1.3㎢, 가구 수 59세대에 104명[남자 59명, 여자 45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2020년 2월 기준). 주요 건물로는 성당면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부곡교회가 있다. 1912년 창설된 부곡교회는 초가 5칸으로 시작하였고 이후 신축 준공을 거쳤다.
부곡리(富谷里)
전라남도 해남군 황산면에 있는 법정리.
부곡리(富谷里)는 북쪽으로 관춘리, 동쪽으로 연당리, 외입리, 남쪽으로 바다, 서쪽으로 옥동리, 바다와 접하고 있다. 부곡마을은 마을 앞에 넓은 들이 있는 평야촌이다. 성산마을은 산에 둘러싸여 있으며, 가옥들은 해안선을 끼고 들어서 있다.
본래 해남군 황원면 지역에 속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황원면의 춘정리, 부곡리, 소정리, 외립리 일부를 병합하여 해남군 황산면 부곡리로 개설되었다. 현재 부곡마을, 신곡마을, 소정마을, 춘정마을, 성산마을 등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1789년에 편찬된 『호구총수(戶口總數)』에 부곡은 부곡촌으로, 춘정과 성산은 내립암 지역으로 황일면에 속하였다.
부곡마을은 1600년 경 밀양박씨가 최초 입향하였고, 조선 후기 전주이씨 영양군파의 후손 이갑운이 영암에서 입거하였다고 한다. 신곡마을은 본래 부곡마을과 한 마을로 신곡마을을 상마을, 부곡마을을 하마을로 불렀다. 신곡마을 입향조는 문화유씨와 서흥김씨로 250년 전에 정착하였다고 전한다. 소정마을은 광복 후에 부곡마을에서 분리되었고, 1900년 경 삼덕농장과 옥동농장이 간척지화 될 때 몇 가구가 모여 마을을 이루었다. 최초 입향조는 문화유씨 유동로라고 전한다. 춘정마을은 이천서씨 서진걸이 1500년쯤 함평 월야면에서 최초로 들어왔다고 전한다. 이후 1780년에 서울에서 달성서씨 서익수가 내려와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전한다. 성산마을은 일제강점기에 성산광산이 개발되면서 인구가 점차 유입되었다. 마을 단위로는 최초로 신사(紳士)가 세워진 아픔을 간직한 마을이기도 하다.
부곡(富谷)이란 명칭은 마을의 형국과 관련이 있다. 간척공사 전, 마을 앞까지 바닷물이 드는 형세를 동남쪽 언덕 위에서 내려다보면, 마을은 물 위에 떠 있는 연꽃처럼 보인다는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이었다고 한다. 여기에서 부수(浮水), 부실, 부옥촌, 부뜰이라 불렀는데, 후에 부곡이라 개칭되었다고 한다. 한편으로는 부자 양반만이 살았다고 하여 부곡(富谷)이라 하였다고도 한다.
면적은 6.390㎢이고, 부곡리, 신곡리, 소정리, 춘정리, 성산리의 5개 행정리에 259가구, 524명[남자 258명, 여자 266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2018.10.31 현재). 부곡리의 생업은 농업이며, 주 소득원은 쌀이다. 특산물로는 배추가 있다. 부곡리에 있는 은산광산에서는 금광개발회사가 금을 채굴하고 있다.
부곡리(富谷里)
전라남도 화순군 춘양면에 속하는 법정리.
화순군 춘양면 부곡리는 부춘·부평·금곡 등 3개의 자연 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동쪽으로는 용암산[546.9m]이 위치하고 있어 그 산줄기가 서쪽으로 이어지며 하천을 따라 평야가 펼쳐져 있다. 지석천이 마을의 서쪽을 따라 남북으로 흐르고, 남쪽으로 우봉리와 경계되는 산등이 있다.
1789년 『호구 총수』에는 능주목(綾州牧) 남일면(南一面) 상우촌(上牛村), 오평리(鰲坪里)[=오들]로 기록되어 있으며,
-1864년 『대동지지』에는 능주목 석정면(石亭面),
-1895.5.1 전국 행정 구역 개편에 의거 나주부(羅州府) 능주군(綾州郡) 부춘면(富春面),
-1896.8.4 지방 행정 구역 개편에 의해 전라남도 능주군 부춘면,
-1912년 『지방 행정 구역 명칭 일람』에는 능주군 부춘면 부춘동(富春洞)으로 기록되어 있다.
-1913년 능주군의 폐지로 화순군(和順郡) 부춘면,
-1914.3.1 행정 구역 변경에 의해 화순군 춘양면(春陽面) 부곡리[금곡리·부춘동]로 개편되었다.
부곡리의 지명은 부춘 마을의 부(富)자와 금곡 마을의 곡(谷)자를 합하여 만들었다. 부춘 마을은 원래 우메기 마을의 일부로 안우메기의 바깥쪽에 있다 하여 밖우메기라고 했다. 조선 시대 명종 때에 이르러 조수겸이 부춘정(富春亭)이란 정각을 지은 후 마을 이름을 부춘동으로 하였다고 전한다.
금곡 마을은 쇠일이라 부르는데 ‘쇠일’은 원래 이름이었던 ‘쇠실’에서 와전된 것이다. ‘쇠실’·‘쇠일’은 쇠와 상관없이 ‘사이골’이라는 의미이고 이를 한자로 표현하여 금곡(金谷)이라 불렀다고 한다.
부평 마을은 원래 오들이라 했었는데 부춘동에서 보아 위쪽에 위치한 들이라 하여 웃들로 부른 것이 와전되어 오들이라 한 것이다. 부춘들의 지명에서 축약되어 ‘춘’자가 탈락하고 ‘부들’, 즉 부평이 되었다.
부곡리는 춘양면의 북동부에 위치한 법정리이다. 면적은 3.2㎢, 83가구에 남자 82명, 여자 77명으로 모두 159명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다(2011년 12월 기준). 동쪽으로는 한천면 금전리, 서쪽으로는 춘양면 화림리, 남쪽으로는 춘양면 우봉리, 북쪽으로는 한천면 모산리와 이웃하고 있다. 주요 산업은 농업으로 주로 벼를 재배하며 주산물은 쌀과 보리, 특산물은 담배·단감·고추 등이다.
유물 및 유적으로는 상지재(尙志齋), 춘산사(春山祠), 부춘정(富春亭), 부춘 정사(富春精舍) 등이 있다.
부곡리(釜谷里)
경상북도 청송군 진보면(眞寶面)에 속하는 법정리.
부곡리는 진보면의 최북단에 있는 지역으로 행정리는 부곡리 한 개로 이루어져 있다. 북쪽의 영등산(嶺登山)[505.2m]에서 내려온 산줄기가 부곡리를 가마처럼 감싸면서 다른 법정리와 자연적인 경계를 만들고 있다. 마을들은 이 산줄기 사이의 골짜기에 분포하는 구릉성 평지를 따라 형성되어 있다. 부곡리를 감싸는 산줄기의 작은 골짜기들은 중앙을 관통하는 하나의 큰 골짜기로 합쳐진다. 계곡에서 발원한 작은 하천들은 석장골못과 재피골못, 고무곡지와 같은 작은 못을 만들면서 중앙 골짜기로 합류하여 흐르다가 부곡리의 남쪽 끝에서 반변천(半邊川)으로 흘러들어간다. 계곡 사이 완만한 경사지에 농경지가 만들어졌으며, 자연마을들이 형성되어 있다.
본래 진보군 서면(西面)의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석장곡, 약수동을 병합하여 부곡동이라 해서 청송군 진보면에 편입되었다.
-1988년에 군조례에 의해 부곡동이 부곡리로 개칭되었다.
자연마을로는 부곡. 석장골, 고무골이 있다.
마을 뒷산이 가마솥 형상이었다 하여 가매골이라 불리어졌던 것을 일제강점기 이후 한자로 가마 부(釜) 자와 골 곡(谷) 자를 써서 부곡(釜谷)이라고 했다. 자연마을인 석장골은 마을 근처 돌 속에 보화가 감추어져 있다는 전설로 인해 만들어진 지명이라는 설과 바위와 돌이 많고 골이 깊어 아름답다고 해서 붙은 지명이라는 설이 있다. 고무골은 예전에는 마을이 없었다는 뜻으로 고무곡(古無谷)이라 불렀다는 설과 고목(古木)이 많아 고목곡으로 부른 것이 발음이 와전되어 고무골이 되었다는 설이 있다.
행정리는 부곡리 한 개로 이루어져 있다면적은 8.8㎢이며, 인구는 57가구에 97명[남자 45명, 여자 52명, 외국인 제외]이 거주하고 있다(2016년 12월 말 기준). 부곡리의 서쪽은 안동시 임동면 갈전리 및 진보면 추현리와 접하고 있으며, 동쪽은 진보면 세장리, 남쪽은 진보면 합강리, 북쪽은 영양군 입암면 산해리와 접하고 있다.
마을들은 부곡리의 중앙부를 지나는 개천이나 도로를 따라서 길게 늘어선 열촌(列村)의 형태를 보인다. 다만 현재는 마을이라 할 만한 규모를 보이는 곳은 석장골과 부곡[가매골]뿐이다. 자연마을로는 부곡리의 가장 남쪽인 골짜기 초입에 있는 부곡과 중간쯤에 위치한 석장골, 가장 위쪽에 있는 고무골이 있다.
부곡은 부곡리에서 가장 규모가 큰 마을이다. 밭작물과 사과가 주요 작물이지만 작은 규모로 논농사도 병행되고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저수지가 있어서 논농사가 가능하다 하여 67가구가 살고 있었다고 하지만 현재는 많이 줄어든 상태이다. 고무골은 본래 마을이 없던 곳에 화전민이 들어와 살았던 곳으로, 현재는 몇 안 되는 가옥들이 산재하여 분포한다. 석장골과 더불어 계단식 경작으로 고추, 콩과 같은 밭작물 재배와 사과 재배가 이루어지고 있다. 주요 도로에는 국도34호선이 부곡리 남단의 부곡교를 따라 지나가며, 진보면의 중심지인 진안리까지 이 길을 통해 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