슥 6: 11 면류관을 씌움( 2 ) - 슥 6: 12 여호와의 전
(3) 면류관
승리의 관은 경기의 승리자에게 주는 월계관을 말한다. 면류관으로 번역된 곳도 있다.
* 고전 9: 25 -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 딤후 2: 5 -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승리자의 관을 얻지 못할 것이며
예수님의 가시관은 죄를 담당하신 고난의 관이다.
* 마 27: 29 - 가시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 막 15: 17 - 예수에게 자색 옷을 입히고 가시관을 엮어 씌우고
* 요 19: 2, 5 – 2 군인들이 가시나무로 관을 엮어 그의 머리에 씌우고 자색 옷을 입히고 5 이에 예수께서 가시관을 쓰고 자색 옷을 입고 나오시니 빌라도가 그들에게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이로다. 하매
"면류관"은 히브리 원어로 "면류관들"이라는 복수 명사이다.
그 내용은 두 면류관을 의미하였을 것이다.
복수형의 면류관은 두 왕관으로 메시아로 오시는 초림의 그리스도와 세상을 심판하려 재림하시는 그리스도로써 이 명사를 받는 동사가 단수형을 취하고 있는 것이 이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2]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머리에 씌우고,
일행들은 요시아가 만든 면류관을 가지고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찾아가 그에게 면류관을 씌우는 대관식을 명령받았다.
모든 직분을 통합하는 대관식이다. 면류관을 씌운다는 것은 왕으로 세운다는 것을 말하는데, 제사장인 여호수아에게 왕의 직분까지 주겠다는 것은 장차 왕이며 대제사장인 메시야(그리스도)가 나리라는 것을 예언하는 것이다.
(1) 13절에 "평화의 의논이 있으리라"하였다.
평화의 의논이란 평화를 만들기 위한 의논을 말한다.
이것이 바로 멜기세덱의 반차를 말하는 영원한 제사장의 직무를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위에 또 하나의 제사장이 있다고 했는데, 그것이 바로 왕직을 겸하는 것이다.
(2) 제사장이 왕이며, 왕이 제사장이 될 때 평화가 오는데 그것이 예수그리스도의 탄생이다.
예수는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지성소로 들어가셨다.
(3)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또한 우리의 왕이 되신 분이다.
예수님의 이 두 가지 직분은 우리에게 영적인 평화를 주셨다.
(4) 죄와 벗된 사람에게는 평화가 없다.
그에게는 하나님과의 전쟁만이 있을 뿐이다. 그에게는 마귀가 주인이다. 마귀는 그를 마음대로 끌고 돌아다닐 뿐이다.
대관식 후에 그 면류관은 헬대와 도비야, 여디야, 요시아 등 네 사람을 기념하는 새 성전에 보관하도록 지시하였다. (14)
(5) 하나님의 복과 영광을 온 몸에 받은 대제사장 여호수아
①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가 된 대제사장 여호수아
여호수아는 대제사장으로 회복되기는 했으나 본문의 말씀대로 왕이 되지는 못했다. 하지만 여호수아가 비록 왕이 되지는 못했지만,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예표가 되는 자로 하나님께 지목을 받았으니 사람으로서 이보다 더 큰 영광은 없다.
그가 비록 이 땅에서는 포로 백성으로 살다가 죽었으나, 하나님 나라에서는 다윗만큼이나 큰 자로 인정받은 것이다.
② 그도 흉악한 죄인이었다.
스가랴가 본 네 번째 환상에서 본 바와 같이 여호수아도 죄로 더럽혀진 냄새나는 옷을 입고 있던 자였다.
* 슥 3: 3-4 – 3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서 있는지라. 4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령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악을 제거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기로
만일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시고 택하시지 않으셨다면 그 역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영원히 멸망을 받을 수밖에 없는 자였다.
③ 여호수아처럼 되십시오.
여호수아가 처음부터 영광을 받을 자로 있었던 것이 아닌 것처럼, 노아나 아브라함이나 모세도 처음부터 영광을 받을 자들이 아니었다. 그들 역시 그 시대 사람들과 별반 차이 없는 죄인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죄에 대한 갈등이 있었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에 있는 이 애통함을 보시고 그들에게 한 가지 명령을 내리셨다.
노아에게 배를 만들라 하셨고, 아브라함에게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 하셨고, 모세에게 애굽의 바로 왕에게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 하셨다.
이들은 이렇게 첫 명령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받았고, 그 후에 계속 그 은혜 가운데 머무르니 하나님께서 이들을 영광의 자리에까지 이끄셨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비록 이 세상 사람과 별 차이 없는 연약한 자라 할지라도 그저 한걸음씩 계속 주님께로 가까이 나아가는 자들이 된다면 우리도 언제 이렇게 우리의 믿음이 자랐나 싶을 때를 만나게 될 것이다. 그러면 주께서 당신을 영광의 자리로 인도하신다.
슥 6: 12 여호와의 전 - 말하여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싹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자기 곳에서 돋아나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리라. ( 고하여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보라. 순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자기 곳에서 돋아나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리라 )
그에게 말하여라. ‘나 만군의 여호와가 이렇게 말하노라.
여기에‘순(새싹)’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자기 있는 곳에서 돋아나서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리라.
1] 말하여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하나님께서는 순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장차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게 될 것임을 예언하셨다. 이는 스룹바벨이 바사 고레스 왕에게 유다 총독으로 임명을 받고 백성을 이끌고 가나안으로 귀환하여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함으로써 하나님의 예언은 성취되었다.
하나님께서 예언하신 순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역사적으로 스룹바벨로 나타났지만, 이는 스룹바벨이 그리스도를 예표한다는 점에서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임을 알 수 있다. 스룹바벨이 유다의 회복과 함께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 성전은 궁극적인 성전의 의미를 청취하지는 못했다.
성전이 하나님이 이스라엘 중에 함께하심을 상징하는 것이었다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죄인 가운데 거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성전의 의미를 성취하신 것이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영을 받아 성전이 되었다.
바울은 이를 근거로 하여 성도가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할 당위성을 역설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 역사를 예언하심에 있어서 성전이라는 상징을 사용하셨다.
(1) 주의 종 순
* 슥 3: 8 – 대제사장 여호수아야. 너와 네 앞에 앉은 네 동료들은 내 말을 들을 것이니라. 이들은 예표의 사람들이라. 내가 내 종 싹을 나게 하리라.
(2) 주의 오른손으로 심으신 줄기
* 시 80: 15 - 주의 오른손으로 심으신 줄기요 주를 위하여 힘있게 하신 가지니이다.
(3) 한 의로운 가지
* 렘 23: 5 -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다스리며 세상에서 정의와 공의를 행할 것이며
2] 보라. 싹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자기 곳에서 돋아나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리라
여호수아에게서 예표 된 사람은 "싹"(가지, Branch) 곧, 메시야라는 의미에서(3: 8 해석 참조), 선지자로 예언케 하신다.
* 사 11: 1 -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왕의 이름을 "싹(순)"이라고 불렀다.
(1) 성경은 장차 오실 메시야를 "싹"이라고 불렀다.
싹(순)은 어린 새싹이다. 힘이 없다. 초라하다. 마찬가지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별 볼 일 없는 천한 존재로 취급당하셨다.
(2) 예수님은 가장 작은 동네에서 나셨고 초라한 마굿간이라고 한다.
예수님은 초라하고 천박한 장소에서 환영하는 사람 없이 태어나셨다.
기독교는 이렇든 천박한데서부터 시작이 되었다. 가난하게 시작되었다.
(3) 교회는 비천하고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들어 이루어졌다.
사도들이 전도한 사람들도 비천한 사람, 노예들이 대다수였다. 지극히 작은 싹(순)이 자라나 지나가는 나그네가 쉬게 되었고 하늘의 새들이 깃들이는 보금자리를 만들었다.
"자기 곳에서"라는 것은 "자기의 아래로부터"라고 직역되나 실상 자기의 고향(메시야가 나시기로 약속된 곳이니 베들레헴)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것은 겸하여 아래로부터 (미천한 데서부터) 자라남을 암시하기도 한다(Keil and Delitzsch).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리라"는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시므로 교회를 세우실 것을 예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