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8년 나해 12월12일 [(자) 대림 제2주간 수요일]
제1독서 이사야서 40,25-31
복음 마태오 11,28-30
◈ [서울] 대림 제2주간 수요일
2018년 다해 12월12일 대림 제2주간 수요일
동창 신부의 배려로 안식년을 잘 지내고 있습니다. 추운 겨울을 잘
지낼 수 있는 방이 있습니다. 식사는 물론 청소와 빨래도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가장 감사한 것은 매일 새벽 미사를 함께하는 것입니다.
강론 없는 미사는 몇 번이라도 할 수 있는데 매일 그런 호사를 누리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힘들게 지고 가는 짐과 멍에가 있습니다. 성공과 권력
그리고 명예라는 짐과 멍에입니다. 자기가 원하는 것만을 이루려는
이기심입니다. 더 많은 것을 채우려는 욕망입니다. 지난날의 잘못과
허물을 가슴에 담는 열등감입니다. 힘들고 어려운 이웃을 무시하는
교만입니다. 자신은 지키지 않으면서 남에게 강요하는 허례와
허식입니다.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에 대한 걱정과 근심입니다. 문제
해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불평과 원망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짐과 멍에를 누가 맡기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지고 가려고 합니다.
남에게도 이런 짐과 멍에를 넘기려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짐과 멍에를 이야기하십니다. 어떤 짐과
멍에일까요? 강도 맞은 이웃을 돌보아 주었던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측은지심입니다.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고 아버지께 돌아가는 둘째
아들의 수오지심입니다. 이제는 그리스도가 내 삶의 전부라고
고백했던 바오로 사도의 사양지심입니다. 성령의 열매를 분별하는
시비지심입니다. 친구가 오리를 같이 가자고 하면 십리까지도 함께
가주는 따뜻한 마음입니다. 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기전에 먼저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바라는 열정입니다. 벗을 위해서 목숨까지
바치려는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해야 할 일들을 좋아하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십자가를 지는 일도, 복음을 전하는 일도, 힘들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을 좋아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짐과 멍에는
여러분을 행복하게 할 것입니다.’
우리가 대림시기를 지내는 것은, 우리의 능력과 우리의 업적 때문에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것이 아님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크신 사랑이, 우리의 허물과 잘못을 모두 용서하신다는 것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살면서,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우리에게
상처를 준 이들을 넓은 마음으로 보듬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2018년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지고 가려던 짐과
멍에는 무엇이었을까요?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믿음은 먼저 행동하게
만든다.
2018년 다해 12월12일 대림 제2주간 수요일
<믿음은 먼저 행동하게 만든다>
복음 : 마태오 11,28-30
구원의 기준은 행위일까요, 본성일까요? 바오로 사도는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된다고 합니다. 믿음은 행위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본성을 변화시킵니다. 예수님께서도 당신은 물과 성령으로
우리를 새로 태어나게 하시기 위해 오셨다고 하십니다. 새로 태어나면
얻게 되는 것이 바로 새로운 본성입니다. 우리는 인간이지만 하느님의
자녀라 믿어 하느님 자녀가 되고 비로소 하느님 자녀의 행동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 교리로 벗어날 수 있는 오류가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행동주의’입니다. 행위가 가치가 있다고 말하며 마치 주님의 은총이
아니라 자신의 행위 때문에 구원받는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나의 선한
행동 때문에 구원에 이를 수 있다면 주님은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당신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고 하실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나의 행위에 가치가 없다고 믿어야 주님의 은총 덕분으로
구원된 것에 감사하고 다른 사람을 심판하지 않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 공로가 아니라 주님의 자비로 구원받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라고 하시며 우리에게 ‘멍에’를
메어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멍에는 일을 시키기 위해 소에게 주인이
메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행위를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하도록
만들기 위한 장치인 것입니다.
행위로 구원 받는 것은 아니지만 행위를 변화시키기 위해 예수님께서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이렇게 행위를 바꿔주어야만 자신을
억누르는 무언가로부터 해방되어 ‘안식’을 누리게 될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참 안식은 나를 예수 그리스도처럼 행동하지 못하게
만들고 있었던 자아로부터 벗어나는 것입니다. 자아는 생각을 통해
나를 무기력하게 만들고 땅으로 끌어 잡아당겨 하늘을 바라볼 수조차
없게 만들어버립니다. 행위로만 구원받는 것은 물론 아니지만, 행위에
바탕을 둔 믿음이 아니면 본성이 변할 수 없어 구원에 이를 수 없는
것입니다.
멜 로빈스의 베스트셀러 ‘5초의 법칙’은 행동이 결국 나를 사로잡던
자아로부터 벗어나게 만드는 유일한 길임을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유튜브 채널, ‘책그림’이 이 책을 매우 잘 정리하여 놓았기에 저는
이것을 그대로 옮겨봅니다.
5초 안에 행동하지 않으면 ‘해야 한다는 알람’은 영영 꺼지게 됩니다.
알람이 울리면 우리는 일어나야 한다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조금
미루는 순간 영악한 뇌는 우리를 유혹해옵니다. ‘너무 피곤해.’
‘10분만 더 자도 될 거 같은데.’ ‘내일부터 해도 인생이 변하진
않아.’ 설득에 넘어가는 순간 하루의 시작이 엉켜버립니다.
여기 다른 방식이 있습니다. 일어나야 한다는 느낌이 든 순간, 바로
카운트다운을 시작합니다. ‘5-4-3-2-1’ 이불을 걷어 젖히고 몸을
일으켜 침대 밖으로 나옵니다. 그리고 하루를 시작합니다. 5초를 세고
바로 행동에 옮기는 것. 이는 자신에게 합리화하는 여지를 주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5초를 세는 이 단순한 법칙이 얼마나 강력한지
여러분께 소개해볼까 합니다.
책 ‘5초의 법칙’입니다. 저자 멜 로빈슨이 테드 강연에서 처음 소개한
이 법칙은 순식 간에 1,000만 명의 관심을 사로잡았습니다.
SNS에서는 그녀의 강연으로 삶이 바뀐 사람들의 사연으로 가득했죠.
이 법칙에 무엇이 숨어있기에 극적인 효과를 가져왔을까요? 저자가
이 법칙을 처음으로 발견했을 때로 돌아가 봅시다.
그녀의 삶은 엉망이었습니다. 그녀는 실직의 위기에 처해졌고 남편의
사업은 급속도로 나빠져 갔습니다. 빚을 냈고 남편은 멀어져갔으며
그녀는 무기력의 덫에 빠집니다. 분명 그녀는 해야 할 일을 알고
있었습니다. 생각보다 사소한 것들이었죠. 제 시간에 일어나기,
남편에게 다정하게 대하기, 술을 줄이기. 하지만 그녀는 그중 어떤
하나도 행동에 옮기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그녀는 TV에서
로켓 발사 광경을 봅니다. ‘4-3-2-1-0 발사!’ 그 순간 그녀는 내일
아침부터 저 로켓과 같이 5초를 카운트다운하고 바로 일어나보자고
다짐했습니다.
다음 날 알람이 울리는 순간, 그녀는 그동안 해본 적 없는 일을
합니다. 자신의 기분을 무시했습니다. 아무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숫자를 세기 시작했습니다. ‘5-4-3-2-1’ 그 다음 잠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단지 그걸로 그녀의 인생이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모든 결정에 5초의 법칙을 적용했습니다. 운동을 해야 하는데
피곤해서 하기 싫어지는 순간 5초를 센 다음 문 밖으로 나갔습니다.
남편에게 까칠한 모습을 보이고 있을 때 5초를 센 다음 다정하게 말을
건넸습니다.
가장 큰 변화는 자존감의 변화였습니다. 무기력에 빠져있던 그녀는
무언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지금 그녀는 가장
주목받는 CNN의 방송 진행자이자 라이프코치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는 이유는 주저한 순간 우리 뇌에게 설득당하기
때문입니다. 놀고 있다고 공부나 일을 해야 한다는 느낌이 드는 순간,
여러 가지 변명거리가 떠오릅니다. 조금만 더 놀아도 괜찮을 거라는...
5초의 법칙의 비밀은 그 변명거리를 차단하는데 있습니다. 행동해야
한다는 것에 집중하며 5초를 세는 순간 우리의 뇌는 변명을 찾는데서
관심을 끄게 됩니다. 그때 비로소 해야 할 일을 할 수 있게 되죠.
그리고 저자는 우리에게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일깨워줍니다. 우리는
우리가 무얼 해야 하는지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더 나은
삶을 위해 필요한 건 사소한 것들입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기.
꾸준히 운동하기. 집중해서 일하기. 주변 사람에게 다정하게 말하기.
삶이 변하는데 필요한 건 현자의 엄청난 조언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고,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변화하지 못하는 건 행동으로 바로 옮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뇌의 달콤한 유혹, 자기 합리화의 변명에
빠져 주저하고 미뤘기 때문입니다.
행위는 본성을 따릅니다. 사람은 사람의 행위를 하고 짐승은 짐승으로
태어날 때 받은 본성의 행위를 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자녀로서
살려면 먼저 하느님의 자녀임을 믿어야합니다. 믿는 대로 나의 본성이
바뀔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먼저 우리가 부모의 사랑을 받고
부모가 인간인 것처럼 우리도 인간이라고 믿었기에 인간이 되었고
인간으로서 당연히 해야 하는 행위를 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만이 우리 자신의 본성을 변화시키고 행동까지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믿는다면 행동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다가가 예수님처럼 하느님의 자녀라 믿게 된다면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행위를 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래서 행위에 바탕을 두지
않는 믿음은 마치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처럼 자신을 변화시킬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직 믿음만으로!’라는 루터의 생각과
다른 교리입니다.
믿음으로 본성이 변하는 것도 맞기는 하지만 그 과정에 행동이 따르지
않으면 그 믿음만으로는 본성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아기는 자신이
사람이라 믿으면 바로 말을 하려고 하고 일어서려고 합니다. 행동의
변화를 보이는 것입니다. 자신이 사람임을 알아서가 아니라 부모처럼
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행위가 부모처럼
자연스러워질 때 비로소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알게 됩니다.
우리도 아직 하느님의 자녀가 어떤 존재인지 잘 모릅니다. 행위를 해
봐서 하느님의 자녀로서 어렵지 않게 할 수 있게 될 때 비로소
하느님의 자녀가 누리는 안식을 누리게 됩니다. 우리는 변하기 위해,
그리고 내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알기 위해 그분께서 메어주신 우리
멍에가 시키는 대로 ‘먼저’ 행동해야합니다.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 [수원] 자유의 멍에 / 조욱현 토마스 신부|조욱현 신부 강론
2018년 다해 12월12일 대림 제2주간 수요일
복음: 마태 11,28-30: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28절) 하느님을 믿고 그분을 따르는 데, 힘이 들고,
허덕인다는 것은 참으로 알아듣기 힘든 모습이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평화와 기쁨을 주시는 분인데 그분 때문에 불편해진다든지
어려워진다면 그것은 올바른 신앙인의 삶을 벗어난 것임이 틀림없다.
이는 율법에 매여 그 참 뜻을 알지 못하고 허덕이는 사람들을 말한다.
주님께서는 율법의 멍에를 멜 힘조차 없는 지친 사람들에게 말씀하신
것이다. 악마에게 시달리며 무거운 짐을 지고 무수한 죄에 억눌린
우상 숭배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29절) 우리는 그분에게서 기적을 일으키거나 죽은 이를 되살리는
법을 배울 것이 아니라,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29절)한 것을
배우라고 하신다.
높이 올라가려면 밑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건물을 세우려면 터부터
닦아야 한다. 건물이 높으면 높을수록 터를 더 깊게 파야 한다. 건물을
세우려면 먼저 기초를 닦기 위해 아주 아래로 내려가야 한다. 그분의
겸손을 배울 때, 그 멍에는 편하고 짐은 가벼워진다. 그러면 왜
주님께서는 ‘그 길’을 ‘좁은 길’이라고 하셨을까? 게으른 사람들에게는
좁은 길이다. 그러나 잘 배운 이들에게는 그 계명이 가볍다.
설사 잠시 동안 육체적 고통이 따른다 해도, 지금 희망 안에 양육되고
있는 사람은 그 고통을 쉽게 견디어 내는 신심이 깊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어렵게 보이는 것을
요구하시는가? 이것이 어렵게 보이는 것은 그 멍에를 메고 그분의
말씀을 믿는다면 얼마나 편하고 가벼운 짐인지를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분의 짐은 관습과 규정이 아니라, 영혼의 결심이기
때문이다.
생명을 원하고 좋은 날들을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부정과
악의의 멍에를 벗어버려야 한다. 모든 악덕의 불쏘시개인 부정이라는
멍에를 벗어버리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편하고 가벼운 멍에를 멜 수
없다. 그리스도의 멍에를 힘들다고 여기는 것은 세상에 물든 마음으로
하늘의 것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마음은 아직
그리스도께로 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분의 멍에를 메고 그분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배울 수가 없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29절) 짐 진 이들에게 힘을 북돋아 주는 참으로
기분 좋은 무게임을 알려주시는 말씀이다. 세상의 주인들의 짐은 힘을
점점 더 빠지게 하지만, 그리스도의 짐은 그 짐을 진 이들을 오히려
도와준다. 우리가 은총을 지고 가는 것이 아니라, 은총이 우리를 지고
가며, 우리가 은총을 돕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도우라고 은총이
우리에게 주어졌다. 주님께 감사하며 살아가도록 하자.
- 수원 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 -
◈ [수도회] 고통 속에서도 품위있게!
2018년 다해 12월12일 대림 제2주간 수요일
고통 속에서도 품위있게!
환우들을 방문하면서 절실히 느끼는 바가 한 가지 있습니다. 우리네
삶에서 가장 기본적인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하는
깨달음입니다. 별 지장 없이 삼시새끼 맛있게 식사하는 것, 그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당당히 화장실에 다녀올 수 있는 것, 밤이 되면
자연스레 숙면을 취하는 것...
그런데 많은 환우들이 그 평범한 것, 지극히 기본적인 것, 정말이지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것들로부터 심각한 도전을 받습니다.
그 와중에 인간으로서의 가장 기본적인 삶의 질이 크게
곤두박질칩니다.
한때 난다긴다하던 사람들, 펄펄 날아다니던 사람들, 자존심 강한
사람일 경우, 인간으로서 1차적인 욕구들을, 누군가로부터 상시적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참담한 현실을 수용하지 못해 괴로워합니다.
그래서 분노하고 좌절하며, 주변 사람들을 힘겹게 만듭니다.
이렇게 많은 경우 우리는 고통이 다가올 때, 그간 잘 지켜왔던
인간으로서의 가장 기본적인 품위를, 쉽게 잃어버리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꼭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대자연의 순환 주기 속에,
한 인간으로서 어쩔 수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현실을 담담하게
수용합니다. 난데없이 다가온 큰 고통이지만 삶의 한 부분으로
너그러이 받아들입니다.
극심한 고통 가운데서도 인간으로서의 가장 기본적인 품위를 잃지
않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합니다. 내게 호의적이지 않은 현실을
호의적인 시각으로 바라봅니다. 그 제한된 조건 속에서도 할 수 있는
작은 일을 찾습니다. 고통 속에서도 삶의 소소한 행복한 찾습니다.
하직하고 떠나는 일이 몹시 힘겨울텐데도, 남아있는 사람들을 따뜻이
위로합니다. 이제 남아있는 삶의 에너지가 초생달처럼 작은 것이라
할지라도, 마지막까지 나누기 위해 노력합니다. 고통 속에서도
기품있는 마무리를 통해, 떠남이 결코 나쁜 것만이 아니라는 것을 온
삶으로 보여줍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우리에게 고통 속에서도 기뻐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고 있습니다. 바로 위로의 희망이신 예수님 때문입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마태오 복음 11장 28~30절)
해외 출장을 다녀오다가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이준익 감독의
‘변산’이라는 영화를 봤습니다. 영화에 등장하는 참 아름다운 대사가
두고 두고 기억납니다. “내 고향은 폐항. 내 고향은 가난해서 보여줄
건 노을 밖에 없네.” 돌아온 주인공은 아름다운 것도, 내세울 것도
없는 고향이라고 생각했지만,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님을 깨달아가는
괜찮은 영화였습니다.
많은 경우 우리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나는 너무 보잘 것
없는 존재입니다. 오늘 내 처지는 너무 남루하고 비참합니다. 우리
가족들 역시 내세울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 공동체 너무
실망스럽고 한심스럽습니다.”
그 모든 고통과 시련, 상처와 실망 속에서도 우리는 멈추지
말아야겠습니다. 내 안에 남아있는 긍정적인 에너지를 찾기 위한
노력을. 우리 안에 감춰져 있는 가능성과 희망적인 측면을. 그리고
목숨 다하는 순간까지 희망하고 기대해야겠습니다. 언젠가
주님께서는 우리가 짊어지고 있는 이 부담스런 삶의 멍에와
짐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실 것이라는 것을. (양승국 스테파노 SDB)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기타] 12월12일 (수) - 우리는 빚진 자
오늘은 “우리는 빚진 자”라는 내용으로 은혜의 시간이 되겠습니다.
로마서 8장 12절 말씀에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말씀을 하셨습니다.
왜 우리를 빚진 자라고 했을까요? 죄를 지은 현행범 죄인이라면
우리는 감옥에 가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하지만 우리가 현행범으로
감옥에 가있지 않는 것에 대해서 참 너무나도 감사를 많이 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마음으로 죄를 범하여도 죄인이라 하였기 때문에 우리는
정말 하루에도 엄청난 죄를 수없이 짓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감옥에
안가고 이렇게 멀쩡히 온갖 모양을 다 내고 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정말 수많은 빚을 진 빚진 자임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인이라고 고백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요? 이러한 수많은 죄를
예수님이 대신 짊어져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으므로 우리의 이 지은
죄를 순간순간 고백하며 예수이름으로 회개하고 하나님이 기뻐해야
할 일이라면 결코 망설이지 말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먼저 하지 말고
교회가 원하는 일에 앞장서고 목사님의 심부름에 앞장서는 성도!
오늘도 하나님은 찾고 계십니다. 할렐루야!
- 인천 부평 사랑밭 교회 권태일 목사 -
◈ [청주] 편한 멍에 가벼운 짐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8년 다해 12월12일 대림 제2주간 수요일(마태11,28-30)
편한 멍에와 가벼운 짐
몸은 고달프고 힘이 들지만 본연의 일을 하고 있으면 기쁩니다.
그러나 자기가 하는 일이 억지로 마지못해 하는 일이 되면 무거운
짐이요, 멍에가 될 것입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 꼭 해야 할 일을
즐기면서 기쁘게 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마태11,28)고 하셨습니다. 당시에는 사람들이
무거운 짐과 멍에를 메고 괴로워했습니다. 무엇보다 억눌리고 고된
가난의 생활이 짐이 되고 힘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율법의 수많은
규정을 지켜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누구나 지키기만 하면 살
수 있는 구원과 생명을 위해 주어졌던 율법(에제키엘 20,13)을
율법학자들은 수백 가지의 특수한 규정을 만들어 견딜 수 없는 짐이
되게 하였습니다. 법을 만든 그들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이제
율법을 위해 사람이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율법은 죄를 지은
사람에게 벌을 주는 도구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서 배워라”(마태11,28).
하시며 산상 설교를 통해 참된 행복과 율법(마태5장-7장)을 철저하게
가르치셨습니다. 율법학자들은 법에 사람을 맞추었지만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위한 법을 확인하셨습니다. 율법은 죄의 심판인 벌을
강조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벌이 아니라 죄의 용서를 통해 멍에를
거두어주고 짐을 내려주셨습니다. 율법을 폐기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랑으로 완성하러 오셨습니다. 이제 “하느님의 계명은 무거운
짐이 아닙니다”(1요한5,3).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이시면서도 인간의 모습으로 겸손하게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시며 스스로 모든
이의 종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십자가의 죽음까지도
받아들이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 주어진 짐이요, 멍에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뜻을 스스로 그리고 적극적으로 기꺼이
받아들이셨기에 편한 멍에요, 가벼운 짐이었습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주시는 멍에와 짐은 결코 넉넉한 삶의 편안함에서 오는
무사태평함이나 악과 공존하기 위해 놓여 진 안일한 평화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 삶의 여정도 고달픔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나의 삶을 봉헌하고 끊임없이 사랑을 실천하면 내적인 평화와 기쁨,
행복을 맛보게 됩니다. 사실 “사랑한다는 것은 율법을 완성하는
것입니다”(로마13,10). 주님의 계명을 준수하고 계명의 의미를 살려고
최선을 다하면 반드시 예수님의 멍에는 위로의 원천이 되고 인간적인
욕심을 포기하는 힘이 될 것입니다. 세속의 멍에를 벗고 예수님의
멍에를 선택해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가르침은 완전하여 생기를 돋게 하고 주님의 법은 참되어
어수룩한 이를 슬기롭게 하네. 주님의 규정은 올발라서 마음을 기쁘게
하고 주님의 계명은 맑아서 눈에 빛을 주네’(시편19,8-9). 고달픈 삶의
여정 안에서도 주님의 멍에를, 그리고 주님께서 주신 짐을 기꺼이 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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