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이면 가리봉역에 가고 싶다’
내가 혜란이를 처음 만난 것은 중학교 3학년 때다. 어느 봄날 토요일 급우 H를 따라 십 리 남짓 거리에 있는 친구 집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그날 밤 단발머리의 여중생이 우리가 있는 방으로 들어왔다. 순간 내가 당황해하자, 친구가 그녀를 불렀다고 했다.
보통 체구에 수수한 모습의 소녀, 그녀는 인근의 여자중학교 2년생으로 나이는 나보다 두 살 아래였다. 이후 나는 가끔 친구의 집으로 가서 그녀를 만났다. 어느새 그녀는 나를 오빠라고 불렀고, 방학 때는 서로가 편지를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다.
그해 가을 늘 만성 위염으로 고생하시던 아버지가 가을걷이를 끝내고 대구의 큰 병원에서 검사를 받았는데, 결과는 청천벽력 같은 위암 말기였다. 당시 42세의 아버지 자신은 물론이고 어머니와 우리 육 남매가 받은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집안에는 웃음이 사라졌고, 집안 형편을 잘 아는 담임 선생님의 권유로 나는 집을 떠나 학비가 저렴한 부산기계공고에 입학했다. 외로운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도 가끔 날아오는 혜란이의 편지는 내게 위안이 되었다.
아버지는 내가 입학하고 백일이 안 되어 짧은 생을 마감하셨다. 이후 슬픔을 딛고 실습에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데 어느 날 고향 동생으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아버지 수술비로 얼마 안 되는 문전옥답을 팔았지만, 사흘이 멀다고 찾아오는 빚쟁이들 때문에 어머니와 형이 맘고생이 심하다는 사연이었다.
괴로운 나날들! 불면의 밤을 뒤척이다가 나는 한 학기를 겨우 마치고 학교를 자퇴하고 낙향했다. 낮에는 들일을 하고 밤에는 무협지와 철 지난 잡지를 읽으며 무료한 나날을 보냈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혜란이는 누구보다도 가슴 아파했다.
이듬해 혜란이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이모가 있는 서울로 갔다. 친구 H의 말에 의하면 그녀는 공부를 잘하는 똑똑한 아이지만 장녀로 집안 형편이 어려워 고교에 진학하지 못했다고 했다. 6개월이 지난 뒤 나는 그녀로부터 한 통의 소포를 받았다. 그녀는 구로공단의 지퍼 회사에서 미싱공으로 일하고 있다는 소식과 함께 내게 보낸 것은 독학용 고졸검정고시 ‘서울 강의록’ 교재 다섯 권이었다. 강의록 교재는 총 1권부터 40권이며 내가 원하면 나머지 책들도 조금씩 나눠 사서 보내주겠다고 했고, 편지 끝에는 새 책을 못 보내주어 미안하다는 사연도 덧붙였다.
그날 이후 여러 날 고민을 하다가 나는 공부를 하기고 결심했다. 국어 영어 수학 등 9개 과목을 시골에서 무사독학(無師獨學)한다는 것이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힘든 농사일로 피곤함에 저려 책을 보기가 쉽지 않았고 때로는 공부가 어려워 슬럼프에 빠지곤 했지만, 그때마다 밤늦게까지 재봉틀 앞에서 고생하는 혜란이를 떠올리며 마음의 각오를 다지곤 했다.
그해 11월 초 혜란이는 휴가를 내어 고향으로 왔다. 나는 저녁을 먹고 그녀가 있는 마을 근처 제방에서 그녀를 만났다. 그녀의 모습은 하얀 얼굴에 지난날의 앳된 여중생이 아니고 어엿한 숙녀티가 났다. 우리는 환한 달빛을 받으며 남대천 제방을 지나 하천가를 거닐면서 많은 얘기를 주고받았다. 그녀는 나에게 힘든 공부지만 조금만 참으라고 했고, 내 일자리를 알아볼 테니 검정고시 합격하면 서울로 오라고 했다.
이윽고 우리는 달빛에 빛나는 조약돌을 들고 은빛 하천을 향해 힘껏 내던졌다. 풍덩! 풍덩! 하고 조약돌이 밤의 적막을 깨웠다. 나는 혜란이와 헤어지면서 우리 조금만 더 참고 노력하자면서 추위에 떨고 있는 그녀를 따뜻하게 감싸 안았다. 이 짧은 포옹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줄이야!
나는 공부 시작 1년 만에 검정고시에 합격하고 난생처음 서울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아버지 전우분의 주선으로 미아리에서 일과 공부를 병행하면서 바쁜 시간을 보냈다. 7월 어느 날 나는 약속을 하고 점심시간에 맞춰 혜란이가 있는 구로공단을 찾아갔다. 가리봉역에서 내려 조금 걷다 보니 삼립식품 금성사를 비롯해 대형 공장의 굴뚝이 우후죽순처럼 솟아 우리나라 산업단지의 메카를 실감케 했다.
내가 공장 정문으로 들어서자, 그녀가 벌써 작업장을 나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감색 바지에 하늘색 작업복 상의를 걸친 그녀의 모습! 짠한 기분이었지만 반갑게 서로 인사를 하고 나는 그녀를 따라 인근의 음식점으로 들어갔다. 혜란이는 내가 좋아하는 육개장을 시켰다. 남루한 모습에 수척한 내 얼굴이 안쓰러웠던지 그녀는 자신의 고기 대부분을 내 그릇에 옮겨 담았다. 식사 후 반가움에 정신없이 얘기를 나누다 보니 짧은 점심시간이 순식간에 끝나고 말았다.
우리는 아쉬운 만남을 뒤로하고 식당을 나왔다. 내가 가리봉역을 향해 걸어가는데 갑자기 소낙비가 막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혜란이에게 빗방울을 의식하며 공장으로 돌아가라고 채근했지만, 그녀는 괜찮다며 우산도 없이 나를 따라나섰다. 역사 계단을 오르자 때맞추어 전철이 역사 안으로 막 들어오기 시작했다. 내가 급히 전철을 타려고 하는데 혜란이가 순간 내 청바지 뒷주머니에 뭔가를 밀어 넣었다.
그러고는 이내 손을 흔들면서 우리는 헤어졌다. 뒷주머니 하얀 봉투에는 만 원짜리 지폐 두 장과 메모가 있었다. 열심히 공부하고 돈은 책을 사는데 보태쓰라고 했다. 하루 열 시간이 넘는 중노동에 시달리며 월급 2만 원을 받는 혜란이를 생각하니 순간 죄스러운 기분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이후에도 혜란이는 가끔 수험용 참고서를 사서 내게 보내주곤 했다. 얼마 후 혜란이는 아버지가 편찮아서 부모님이 계시는 부산으로 내려간다는 소식을 편지로 알려왔다. 그리고 한동안 연락이 없기에 이듬해 나는 궁금한 나머지 서울을 떠나 부산으로 갔다. 혜란이의 마지막 발신지인 사촌 언니를 찾아갔지만, 그녀의 소재를 모른다고 했다. 실망한 나는 서울로 돌아와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고 이듬해 3월에 입대했다.
입대하고 1년이 지난 뒤 혜란이의 편지를 받았다. 자신은 조만간 결혼하며 시집이 있는 A 시로 갈 계획이고, 나와 함께했던 지난 시간들은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며 내가 그녀의 첫사랑이라고 고백했다.
할 말은 많지만…
더 할 수 없는 지금의 자신을 이해해 달라는 여운을 남겼다. 그날 나는 전방부대의 금주(禁酒) 규정을 어기고 늦은 밤 몰래 소주병을 야전잠바에 품고 막사를 나왔다. 적막이 감도는 철원 평야 위로 우수에 젖은 조각달이 처량히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행복을 빌면서 쓴 소주잔을 연거푸 비웠다.
그리고 십 년의 세월이 흘렀다.
1992년 1월 나는 친구 H를 통해 혜란이를 만났다. 그 무렵 나는 결혼을 하고 두 딸의 아버지로 바쁜 나날을 보내던 시기였다. 결혼해서 행복한 줄 알았던 그녀가 딸을 낳고 이혼 후 굴곡진 지난 삶을 얘기하면서 울먹였다. 그녀가 당시 나를 계속해서 만날 수 없었던 사연과 결혼을 얘기할 때 순간 나는 분노와 흥분으로 두 주먹을 불끈 쥐고 개새끼! 죽일 놈들! 하고 소주잔을 힘껏 내리쳤다.
이윽고 순진한 혜란이를 향해 바보! 바보! 하고 소리라도 내지르고 싶었지만 이내 이성을 찾았다. 지난 과거를 얘기하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혜란이. 다 부질없는 지난 일이고, 그녀가 용기를 내 내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다는 그 자체가 지금도 나를 신뢰하고 한때나마 나를 사랑했기 때문이라고 애써 자위하며 그 슬픔과 분노를 참아냈다.
그리고 얼마 뒤 혜란이가 한 남자를 데리고 나를 찾아왔다. 그는 지방에서 공과대학을 나왔고 나보다 세 살이 많았다.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다 보니 그 역시 이혼의 아픔이 있었다. 나는 젊은 그녀가 창창히 남은 인생 혼자 살 수 없다며 재혼을 권했다.
그들은 결혼했고, 서울 근교에 살다가 10년 전 도시 생활을 청산하고 바다와 산이 있는 자연으로 돌아갔다. 그 사이 그녀의 딸도 결혼해 일가를 이루었다. 내가 혜란이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본 것은 10년 전이었지만 우리는 가끔 전화나 문자로 서로의 안부를 주고받곤 한다.
다가오는 10월 단풍이 절정을 이룰 때 그녀가 있는 곳으로 등산을 갈까하고, 망설이는 중이다. 학교를 중퇴하고 실의에 빠진 내게 용기와 희망의 씨앗을 심어준 혜란이. 어쩌다가 가끔 비가 내리는 날이면 나는 40여 년 전 내 첫사랑 혜란이를 떠올리며 그녀와 헤어졌던 가리봉역(현 가산디지털단지역)으로 가고 싶은 충동을 느끼곤 한다. (끝)
[심 사 평]
(황순원 문학촌 소나기 마을과 샘터사가 공동 주관한 제3회 ‘나의 첫사랑 이야기공모 전’ 수상작)
아련한 첫사랑 이야기는 혼자 간직하고 있기에는 너무 애달파 누군가에 슬며시 털어놓고 싶기 마련이다. 애잔하거나 아름다운 각자의 추억을 담아 굳게 닫혀 있던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젖히는 일은 그래서 더 흥미로웠다.
우리를 웃기고 울린 ‘첫사랑 이야기’ 공모전에 접수된 작품은 모두 765편이었다. 그중 예심을 거쳐 53편이 본심에 올려졌다. 아스라한 세월의 뒤안길, 빛바랜 흑백사진 속의 이야기를 끄집어낸 사연도 있었고, 풋풋하고 달콤한 현재 진행형의 스토리텔링도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 풋사랑 이야기에서부터 알츠하이머로 잊어버린 기억 속에서도 애달픈 첫사랑의 추억을 반추하는 가슴 먹먹한 사연도 있었다.
아련한 세월, 가난이라는 굴레 속에 힘들게 살면서도 가슴 설레게 하는 동화 같은 사연이 눈길을 끄는가 하면, 상큼 발랄한 유화이거나 제2의 ‘소나기’라 불러도 좋을 수채화 같은 글이 마음을 빼앗았다. 첫사랑 이야기는 청순하거나 어설프거나 미완의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진솔한 수기이기 때문에 더 마음을 사로잡는다. 그 때문에 글 이랑으로 쉽게 빠져들었고, 가독성 덕분에 원고를 읽는 일 자체가 즐거웠다.
수상작 모두가 하나같이 아슴하지만 절절하고, 정신줄을 놓아도 또렷해지는 진부하지 않은 이야기들이라 가슴에 오래 남았다. 한정된 지면 사정으로 일일이 장점을 이야기하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 가슴에 첫사랑이라는 별을 품고 살 수 있다는 것은 정말 큰 축복이다. 765편의 아름다웠던 추억은 그 싱그러웠던 첫사랑이 얼마나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지 생생한 목소리로 일깨워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