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임사화"의 교훈
············· 인명중시사상(人命重視思想), 애민사상(愛民思想)을 고양시켜 나가자
조선조의 사색당쟁(四色黨爭)을 말할 때 신임사화(辛壬士禍)를 빼놓을 수 없다. 이 사화야말로 당쟁이 낳은 정치적 사건 가운데에서도 가장 악명이 높기 때문이다. 조선의 당쟁은 이 신임사화에서 그 절정을 이루었던 느낌이다. 이 신임사화를 이야기할 때 김일경(金一鏡)을 빼놓을 수가 없는데 이 사화의 주역이 바로 그였기 때문이다. 김일경은 광산 김씨 출신이었는데, 그의 파계를 만성대동보에서 살펴보면 사계(沙溪) 감장생의 증조대에서 갈리었으므로 사계파의 인물은 아니었다. 그는 숙종 28년 문과에 장원(壯元)하고 동 33년 중시(重試)에 또한 장원을 한 바 있는 영재였다.
경종 초에 노론 정권이 왕의 병약을 이유로 왕세제(王世弟, 延仍君, 후에 英祖)의 대리청정(代理聽政)을 주장하여 실시케 되자 소론(少論)으로서 당시 이조참판이던 김일경(金一鏡)이 소론의 영수 조태구(趙泰耈) 등과 함께 왕세제의 대리청정을 철회케 하는 데 성공하고 뒤이어 노론사대신[老論四大臣 : 몽와 김창집(金昌集), 소재 이이명(李頤命), 한포재 이건명(李健命), 이우당 조태채(趙泰采)]을 탄핵하고 귀양 보냈다.
이에 조태구가 영의정이 되어 소론 정권이 성립되면서 대사헌을 거쳐 형조참판에 이른 김일경은 노론의 대거 숙청에 앞장을 섰다. 경종 2년(1722) 그는 노론 숙청의 구실을 만들기 위하여 노론파에 속한 목호룡(睦虎龍)을 매수하는 데 성공, 노론이 경종을 시해(弑害)하고 왕위를 빼앗으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무고(誣告)하게 했다. 경종은 즉시 목호룡이 지목한 혐의자 60여 명을 국문(鞠問)하니, 이들은 왕세제를 모함하기 위한 소론 및 남인들의 조작극임을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로써 노론사대신은 차례로 죽음을 당하고 200여 명이 화를 입는 참극이 벌어졌다. 이 옥사(獄事)는 경종 1년 신축년(辛丑年)에서 동 2년 임인년(壬寅年)에 걸쳐 일어났기 때문에 신임사화(辛壬士禍)라고 한다.
이 사화 뒤에 김일경은 우참찬에 승진했으나 경종이 불과 4년만에 죽고 영조가 즉위(1724년)하니 사태는 반전(反轉)되었다. 영조는 왕세제 시절부터 소론 측의 배척을 받아 온 데에다 목호룡의 무고(誣告)로 한때 생명마저 위협을 받았던 터이라 김일경, 목호룡은 즉각 체포되어 김일경은 일단 귀양을 갔다가 처형되었고, 목호룡은 참형을 받아 효수(梟首)되었다. 이 때 김일경의 아들들도 4자개교살(四子皆絞殺)이라 했으니 아마도 그의 자손은 절손이 되었으리라 짐작된다.
이것이 권력을 탐하여 선량한 이들을 무고함으로 수많은 생명들을 앗아간 참혹했던 "신임사화"의 개요라 할 수 있겠다.
오늘날에는 기독교 사상에 뿌리를 둔 자유민주주의가 널리 펴져나가고 있고 우리나라의 자유민주주의도 비록 지금 엄청난 시련을 격고는 있으나 성숙해가는 과정에 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아직도 죄 없는 인명을 파리 목숨처럼 멸하는 것이 현실이다.
오늘날 자유민주주의의 효시와 모범은 아무래도 영국과 미국의 정치제도에서 찾지 않을 수 없는데, 이들 나라에서는 정치적인 사유로 인하여 인명을 무고하게 빼앗는 일은 자행되지를 아니한다. 그 무엇보다도 생명과 인권을 중시하는 사상이 철저한데 이는 성경에 근거한 "천부인명사상(天賦人命思想)"에 기인한다고 보겠다.
앞으로 우리나라의 유학의 후학들과 여러 관련자들은 이러한 인명중시사상(人命重視思想), 나아가 애민사상(愛民思想)을 고양시켜나가는 연구와 실천에 더욱 진력하여, 세계 인류의 인간다운 삶의 회복에 앞서가는 역할을 하기를 바란다.
우리 선현들의 말씀과 행적을 찾아보면 이러한 전례는 많이 발견될 것으로 생각된다.
한 예로 조선시대 우리나라에서는 사형은 삼삼제(三審制)로 하고 최종심은 임금이 직접 주재하였다고 한다. 특별히 세종대왕은 애민사상(愛民思想)이 극진하였으니 이것이 급기야는 한글창제, 과학영농진흥, 세법개정을 위한 국민투표실시 등으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1653년(효종 4년) 7월2일 병자호란 이후의 재난극복을 위한 방책으로 백강 이경여 선생이 임금에게 상차(上箚)한 애민사상의 개요는 아래와 같다.
“임금이 백성을 대하는 것은 부모가 자식을 대하는 것과 같은데, 자식이 굶주리고 추우면 부모로서 예사로 여기는 자가 있겠습니까. 신은 아직도 경인년(1650 효종 원년)의 수교(手敎)를 기억합니다. 송(宋)나라 조후(曺后)가 ‘천하에 이롭다면 내가 어찌 머리털이나 피부를 아끼겠느냐’고 한 말을 인용하셨으니, 본말과 경중의 구분을 전하께서 이미 스스로 아셨다고 하겠습니다. 예전에 명(明)나라 인종황제(仁宗皇帝) 때 봉사(奉使)하고 강회(江淮)에서 돌아온 자가 기근을 말하니, 드디어 강관(江關)의 수백만 섬의 쌀을 내어 구제하였습니다. 그 사람이 사농(司農)과 의논하기를 청하였으나, 인종이 ‘유사(有司)가 걱정하는 것은 경비(經費)이니, 함께 의논하면 일이 시행되지 않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참으로 선인[宣仁, 송 조후(宋曺后)의 시호]의 마음으로 인종의 정치를 행한다면 어찌 아름답지 않겠습니까.”
2024. 2.17. 素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