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박약회 대구광역시지회
카페 가입하기
 
 
 
카페 게시글
박약회 대구광역시지회 스크랩 유의(儒醫) 이석간(李碩幹) - 김덕호
이장희 추천 0 조회 174 18.02.14 15:0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유의(儒醫) 이석간

 

 ▲ 제민루

 저자  김 덕 호 / 인애가한방병원 원장

       

                       

영천군(현 영주시)에 아흔 아홉 칸 집을 짓는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청빈한 의원이 저렇게 큰 집을 지을 리는 없고 사람들은 부잣집에 터를 팔았나 보다, 라고 수군거렸다.

“미친나? 땟거리가 없어 굶어 디지는데 무슨 고대광실이야.”대장장이 김 씨가 말을 하자

“그러게, 길이나 좀 넓히지.”하고 석수장이 김 씨가 말을 이어 받았다.

“왜놈들이 쳐들어 온다니더. 그런데 저런 집을 짓고 있으이. 임금이 미친 거 아이겨.”

한마디씩 내뱉는 소리에 백성들의 원성이 들어있었다.

조선 중기에 들어 당파싸움과 탐관오리의 횡행으로 국력이 약해진데다 수년째 흉년과 돌림병으로 생활고는 극에 달했다.

한편 공사장 일자리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이 의원이 혹시 무신 변괴가 생겼나?”

도목수 박종태가 말을 하자

“아이시더. 왕이 불러서 한양 갔다니더.”하고 포졸 정 씨가 아는 체하고 말했다

“왜 갔다니겨?”

“이석간 선생이 용하이 안불렀을리겨.”하고 목수와 공사현장을 지키는 포졸이 말을 주고받았다.

“이름은 들었소만 도대체 이석간이란 자가 누구요?”

광주에서 왔다는 지나가던 낯선 길손이 궁금해 하자 한 선비가 이석간에 대해 자랑스레 말을 받았다.

 

초당(草堂) 이석간(李碩幹 1509-1574)은 세조가 준 벼슬을 버리고 영천으로 입향을 한, 공주 이씨 이진의 증손으로 뒤새라고 하는 두서(杜西)에 살고 있었다. 그는 초근목피로 목숨을 연명 하지만 학문을 좋아하고 문재가 뛰어났다. 사서삼경뿐 아니라 의서에도 아주 밝았다. 가난한 선비인 그는, 병약한 자신을 위해 의서를 닥치는 대로 읽었다. 황제내경과 향약집성방을 비롯한 의서들을 모두 읽고 자신뿐 아니라 이웃 사람들의 병을 고치면서 명의가 되어갔다. 이석간은 선비로서 의학의 길로 들어선 이른바 유의(儒醫)였다.

하루는 한양 북촌에 반가 사람들이 희귀병을 앓는 중년 여인을 가마에 태우고 천릿길을 달려 석간을 찾아와 울며불며 애원을 했다. 여인의 병은 하초의 피부가 닭발의 껍질처럼 딱딱하게 굳어가는 병이었다. 전국에 용한 의원을 다 찾아보았으나 소용이 없고 원인조차 모른다는 것이었다. 석간은 측은히 여겼으나 의서에도 없는 병인지라 당장 처방을 내릴 수가 없었다. 며칠간 기도하는 마음으로 병력과 가족력을 세밀히 살피고 피부의 상태를 관찰했다. 발병 원인은 음욕을 억지로 참아서 생긴 청상의 과부 병이었다. 그는 경험으로 얻은 경혈에서 삼릉침과 미립대의 뜸으로 음독을 풀고, 독삼탕에 계족과 다른 약재를 가미한 처방으로 치료를 했더니 피부에 새살이 돋아나고 각질이 벗겨지면서 회복되었다. 그 결과 그는 신의(神醫)로 전국에 알려졌다.

 

▲ 삼판서고택

 

어느 날 영천 관아에 어인이 찍힌 방 하나가 나붙었다. 명나라 11대 황제인 가정제 세종 주후총(1521-1567)의 모후인 기황태후의 병을 고칠 의원을 찾아 멀리 조선까지 사신을 보냈다는 것이다. 방을 보고 있던 농부차림의 남자가 빈정거렸다.

“대국의 어의들도 포기했다는 병을 이런 촌구석에서 누가 고친다꼬 저런 방을 부치노, 맨자구같은 놈들!”

방을 보고 있던 구경꾼들이 같이 욕을 하며 빈정거리자 서책을 들고 있던 풍기 사람이 걱정스레 말했다.

“혹시 그 양반이라면.”

“누구 말이고?”

방을 보고 있던 친구가 묻자

“뒤새 이 의원 말이따, 그 양반 몬 고치는 병이 있나? 하지만 잘몬하면 그 양반 목 달아난데이. 그 양반 죽으면 우리가 아프면 누가 고쳐 주겠노.”하고 휑하니 가버렸다.

석간은 방에는 관심이 없었다. 관아에서 찾아와 방의 내용을 전했으나, 그는 마이동풍이었다. 평소 교분이 두터운 아전이 석간을 찾아왔다.

“이 의원, 어떡하겠노? 조정이 난처하다던데. 지들 나라 어의도 몬 고치면서 왜 우리 조선한테 쪼으는지. 조선의 어의와 전국 유명 의원들이 모두 손을 들었다네. 명의라는 유의태도 안된다고 카더라.”

“언제는 조선이 소국이라고 무시하더니만 이제 와서 급하니까 하는 짓둥머리 좀 봐. 직금 역병이 돌 징조가 보인다네, 제민루에 몰려드는 환자들을 좀 보게. 아무리 대국에서 뭐라캐도 우리 백성이 우선일세. 난 죽어도 갈 생각이 없다카이.”

석간이 단호하게 말했다.

“자네 생각이 백번 옳으이. 크게 생각해보게. 자네마저 안가면 조선 의술도 별 볼이 일 없다 할 것이고 조정이 곤경에 빠질걸. 유의인 자네가 조선의 기개와 실력으로 우리 자존심을 세워 주게나.”

김 이방이 우정으로 설득해도 석간의 마음을 돌리기가 쉽질 않았다.

그날 평소대로 석간은 뒤새에서 일과를 마치고 구성산성에 있는 제민루에 올라 가난한 병자들을 돌보았다. 그리고는 그 아래 정도전 생가인 삼판서댁을 내려다보며 나라가 몹쓸 병이 들어가고 있음을 개탄하였다. 며칠 전 소수서원에서 뜻있는 이들과 회합을 가진 이유도 그러했다. 그날 저녁 석간을 설득하려고 평소 호형호재로 지내던 이황이 향리에서 소식을 듣고 사람을 보내기까지 했다. 그러나 석간은 젊은 날 외숙부인 권벌로부터 배운 강직한 선비정신을 떠올리며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 석간은 요상한 꿈으로 밤새 뒤척였다. 새벽에 철탄산에 올랐다가 길섶에 이슬을 머금고 으름덤불속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는 잎이 여섯 장인 오가피가 보였다. 행운이 올려나 하고 기분 좋게 집으로 돌아왔다. 희귀질환에 쓸 처방 하나를 오랜 고민 끝에 마무리 할 때였다.

“이 의원, 안에 있소?”

하고 어명을 받으라는 말에 석간은 황망히 나와 머리를 조아렸다.

“이석간은 속히 어전으로 들라.”

어명을 받들고 온 군수에 의하면 천하명의가 조선 영천에 있다는 발 없는 소문이 날개를 타고 명나라까지 전해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황제가 조선 왕에게 이석간을 급히 보내달라고 했다. 작년 봄에 사례감 소속의 고려인 환관 엄호가 풍기인삼시장과 부석사를 방문하던 중, 복통으로 석간에게 응급진료를 받은 적이 있었다. 고려인 환관 엄호가 그 내용을 고하고 황제에게 천거했다는 것이다. 석간은 명나라로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아부지, 직금 가시면 언제 오시니겨?”

장남 정견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쳐다보며 물었다.

“황제가 불렀으니 기약은 몬하겠다만 빨리 올께, 어무이 잘 모시거라.”

아들과 굳은 약속을 한, 그는 왕의 호위병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 북경에 도착했다. 여러 날 걸쳐 힘들게 찾아간 천자의 황궁은 과연 천하를 호령할 만큼 웅장하고 화려했다.

편전에 들었으나 황제는 아는 체 하지도 않고 재주를 부리는 광대놀이에 빠져있었다. 궁녀가 천도 모양의 술잔을 가지고 오자 갑자기 황제가 잔을 광대에게 던지며 버럭 화를 냈다.

그리고 무엇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광대의 등줄기를 손에 들고 있던 가죽 채찍으로 사정없이 매질을 했다. 광대의 등은 금방 붉게 물들었다. 모두들 겁에 질려 벌벌 떨었다.

석간도 겁에 질려 황제를 쳐다보지도 못하고 엎드렸다.

환관이 조선 유의의 도착을 재차 고하자 황제는 염소수염에 원숭이 같은 얼굴로 석간을 요렇게 내려다보며 이렇게 말했다.

“조선에서 온 그대는 못 고치는 병이 없다 들었다. 짐의 모후가 난치병으로 수년 동안 여러 나라 명의란 자들에게 다 보였으나 고치지 못하였다. 그래서 소국의 그대를 불렀노라. 짐의 목숨보다 귀한 분이니 최선을 다하라. 고쳐주면 무슨 소원이든 다 들어줄 것이나 못 고치면 참형에 처할 것이다.”

하고 으름장을 놓았다.

황제의 말에 석간은 가슴이 조여 왔지만 주먹을 힘껏 쥐며 애써 태연자약했다. 황제는 재위 동안 도교에 심취할 뿐 통치에는 관심이 없는 무능한 폭군이었다.

석간이 황제를 따라 호화별궁으로 갔다. 여러 문을 거쳐 모후가 와병중인 곤령궁으로 안내되었다. 석간이 바라보니 그녀의 얼굴은 달덩이 같고 손이 부었는지 퉁퉁하고 백옥 같았다. 나이가 많은 데도 얼굴은 천하일색이었다. 다만 눈꼬리가 치켜 올라가고 눈가가 푸른색을 띤 채 눈만 멀뚱멀뚱하고 있을 뿐 말문이 닫혔고 몸을 움직이기는커녕 눈꺼풀을 내리는데도 힘이 드는 듯 했다.

성질 급한 황제가 진료에 도움이 될 수년간의 병세를 설명하였다. 이불을 걷어 하초를 보이는데 피부가 거북 등껍질 같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모후의 손목을 두른 가느다란 명주실을 건네준 황제는 진맥을 하라고 했다. 그리고는 다짜고짜 소견을 물었다. 면전에서 진찰하지 않았는데 석간은 기가 막혀 말문을 열지 못했다.

며칠 말미를 얻은 석간은 짊어지고 온 의서들을 죄다 훑었으나 그런 병은 없었다. 그는 문을 닫아 잠그고 이젠 죽었구나, 하고 자포자기했다. 영천에 있는 아내와 자식들이 생각났다. 미로 같은 낯선 황궁에서 도망칠 수도 없었다.

그런데 비몽사몽간에 한양 북촌이 보였다. 석간은 잠을 깬 후, 자신이 10년 전에 치료한 적이 있는 한양 북촌 환자를 기억해냈다. 증후가 비슷했다.

황제의 모후는 추존황제인 예종 주우원이 일찍 죽고 장기간 독수공방을 하는 동안 음기가 쌓여 독이 된 병으로 하초의 피부가 갈수록 무늬 돌처럼 굳어져 가고 있었던 것이다. 약 처방은 면전 진찰을 한 후에 내리자는 생각이 들었다. 환관 엄호가 편전에 들라 했다. 석간이 황제 앞에 섰다.

“석간은 들으라. 처방이 다 되었느냐?”황제가 석간을 노려보며 말했다.

“폐하, 제대로 진찰도 못했는데 어찌 처방이 나오겠나이까?”

“이놈이! 진맥을 하지 않았느냐?”황제가 대노하며 고함을 질렀다.

“그건 문전 예진일 뿐이고 면전 진찰이 의학 법도이옵니다.” 석간이 아뢰자,

“소국의 의원 놈이 감히 황실의 법도를 어기고 황태후의 몸에 손을 대겠다고?”

난쟁이 황제가 펄펄뛰며 가죽 채찍으로 옥좌를 내리치며 소리쳤다. 마치 수염원숭이가 우리 속에서 미쳐 날뛰는 것 같았다.

“실과 면포를 이용한 간접진찰로 어찌 정확한 처방을 바라겠나이까? 모후의 옥체가 귀하신 만큼 정확한 진단을 위해 밝은 데서 면전 진찰을 해야겠나이다.”

석간은 직언을 했다. 영천에서 수만리 길을 왔다. 그런데 황제가 하는 짓을 보니 제 어미 병을 고쳐 주고 싶은 생각이 없어졌다. 석간은 오기가 생겨 꼬장을 부렸다. 병을 고쳐줘도 살려 줄 것 같지도 않았다. 어차피 죽은 목숨이었다.

“황실을 능멸한 이놈!”

황제가 벌떡 일어서며 보검을 빼 들었다.

“내가 네놈 목을 직접 베리라.”하고 옥좌를 내려섰다. 석간은,

“그리 못하시면 죽이든지 살리든지 맘대로 하소서. 그리 아니 하신다면 소신은 이만 물러가옵니다.”

하고 벌떡 일어나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어 나갔다. 석간은 생각했다. 소국이라고 멸시하는 황제에게 조선 유의의 기개나 한번 보여주고 죽자는 생각이 들었다.

“폐하, 고정하시옵소서. 황태후를 살릴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이옵니다. 모후가 중요하나이까, 법도가 중요하나이까. 보아하니 저자가 자신이 있으니까 배포를 내미는게 아닐런지요?”

엄 환관이 다급히 황제에게 고하자 그는 잠시 생각을 했다. 그리고 석간에게 이렇게 말했다.

“네 놈이 석 달 안에 모후의 병을 고치라. 아니면 네놈의 몸뚱이를 산산 조각낼 것이다.”

하고 협박을 했다. 그리고 황제가 직접 석간을 이끌고 다시 모후에게 갔다.

먼저 몸의 형색을 관찰한 석간은 망진, 문진, 청진, 타진의 순서로 황태후의 몸을 자세히 진찰했다. 진단에 결정적인 단서를 찾아내려고 장시간 병력을 시시콜콜한 것 까지 묻고 답을 얻어냈다. 양해를 구한 후 태후의 몸에 직접 손을 대면서 진찰을 해 나갔다.

석간은 천금보다 더 귀한 황태후를 이리 눕혔다 저리 제쳤다 하며 직접 하초를 두드리고 당기고 눌러보며 떡 주무르듯 했다. 손발톱, 관절상태도 확인했다. 귀를 대고 심장과 호흡소리를 들어보고 젖가슴과 배를 누르고 두드려보았다. 치아와 혀, 침과 가래 그리고 소, 대변을 살폈다.

처방은 북촌 여인에게 썼던 경험방에다 추가했다. 우선 장침과 뜸과 도인법으로 경락을 소통시켰다. 최고로 치는 조선의 풍기인삼을 군(君)으로 하고 음독을 푸는 약재를 넣어 직접 달였다.

황태후는 석간의 침과 약을 복용 후 독기가 빠져 나가면서 기력을 차리고 피부가 회복되기 시작했다. 모후가 병이 나아지자 황제가 석간을 어전으로 불렀다. 유의 이석간의 선비정신과 조선의학이 국제적으로 진가를 발휘하는 순간이었다.

황제는 잠시나마 불신했던 점을 사과하고 그대는 화타, 편작과 겨룰 명의로다, 하며 극찬을 했다.

소원을 묻자 평소 청빈한 선비인, 석간은 거절을 하고 조선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하지만 폭군 황제는 억지로 강권하여 여러 달을 궁에서 있게 하면서 석간을 어의로 두고자 갖은 계책을 꾸몄다.

그는 석간을 국빈 의전으로 대우하도록 명을 내렸다. 석간은 꽉 짜인 일정을 끝내고 환궁하면 밤늦도록 연회로 일기를 쓸 수 없을 정도로 분주했다. 그러다 보니 자유롭지 못하고 불편하여 부담스럽기까지 했다. 하지만 석간은 조선의 훗날을 위해 우호세력이 될 친조선 관리들과 교분을 두터이 하는데 게을리 하지 않았다.

석간은 시간이 갈수록 고향에 두고 온 아들이 눈에 밟혔다. 뒤새 집을 떠날 때 아들 정견이

“아부지 언제 오시니겨.”하고 물으며 쳐다보던 까만 눈망울이 자꾸 떠올랐다. 그리고 뒤새에서 고생하고 있을 아내의 모습과 제민루에서 기다릴 환자들의 모습이 꿈속에 보이곤 하니 자책감마저 들었다. 북경에서 어렵게 구한 의서들과 진료에 필요한 도구들을 포장하고 귀국계획을 세우던 어느 날 아침이었다.

뜰에서 동쪽하늘을 바라보고 당파싸움과 외세의 틈바구니에서 풍전등화와 같은 고국을 걱정하고 있는데 뒤에서 온화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공, 참으로 좋은 아침이구려. 공 덕분에 이렇게 걷고, 아침햇살을 즐기며 상큼한 공기를 마실 수 있어 고맙소. 그런데 여기서 뭐하고 계시오?”

황태후가 등 뒤에서 말했다. 석간은 깜짝 놀라 허리를 굽히고 예를 올렸다.

“태후마마, 저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고 있던 참이옵니다. 폐하와 마마께서 지극정성을 드려 하늘이 감동하셨나이다.”

“조선의 해보다는 명나라 해가 훨씬 크지요?”

태후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어찌 그리 생각 하옵니까?”

“땅덩이가 크고 백성의 숫자가 많으니 커야하지 않겠소?”

“그도 그럴듯하옵니다. 하지만 해는 대국이나 소국이나 대인이나 소인이나 공평하게 비추는 줄 아옵니다.”

석간이 허리를 굽히며 공손하게 말했다. 모후를 부축하고 있던 황제와 공주가 한마디씩 거들었다.

“석간은 그 용기가 어디서 나오느냐?”황제의 말에 공주가 상냥하게 이어갔다.

“공이 황궁에 살면서 옆에 계신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니 그렇습니까, 폐하?”

개망나니라도 천문에 밝은 동생을 아끼는 가족애가 남다른 황제가 명을 내렸다.

“석간은 오늘 저녁 공주 생일잔치에 꼭 참석하라.” 공주가 석간을 짝사랑하고 있음을 안 모후는 그를 부마로 들이려고 갖은 방법을 다 써 왔으나 석간은 꿈쩍도 안했다.

이번이 좋은 기회였다. 큰 연못 가운데 공주의 별궁은 아름다웠다. 덕담을 나누고 황제와 가족들이 먼저 일어나면서 모후가 속삭이듯 황제에게 말을 꺼냈다.

황상, 저 철딱지가 석간에게 마음이 온통 빼앗겼구려.”

“결혼시켜 버립시다.”

황제가 쉽게 말을 뱉었다.

이윽고 석간과 공주만 남게 되었다.

“조선의 소백산 아래 선비 명의가 계신다는 걸 일찍이 들었소. 황제 앞에서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정도를 보이신 공의 기개에 반했소. 그리고 엄마를 고쳐주셔서 참으로 고맙소. 높은 벼슬을 주청할 터이니 조선에 가지마시고 여기서 같이 지냅시다. 호호호…”

공주가 자신의 모두를 주고 싶다는 의미로 끼고 있던 옥반지를 장난치듯 휙 빼어 석간의 중지에 끼워주었다. 왈가닥 공주이지만 석간은 이마져 뿌리칠 수는 없었다. 공주는 줄곧 안달이 나서 석간에게 목을 맸다. 숙소에 불쑥 나타난 왈가닥 공주가, 석가의 팔을 잡고 유혹의 몸을 밀착시켜 올 땐 석간도 남자인지라 야릇한 느낌이 들었지만 떼어 놓기가 여간 힘들지 않았다.

석간은 자신은 물론 아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밤새 고민하다가 야반도주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성문까지는 용케 발각되지 않았으나 통과가 불가능했다. 안면이 있는 문지기인데도 통행증이 없어 어쩔 도리가 없었다. 더욱이 황실 허락 없이는 한발자국도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결국 잡히는 신세가 되었다. 그는 땅바닥에 주저앉아 차라리 자신의 목을 치라고, 소리를 질렀다.

이른 아침 석간이 없어졌다고 영빈관과 수문장의 급보를 접한 황제는 노발대발 할 수도 없고 대쪽 선비를 더 이상 만류할 수도 없었다. 그제야 황제는 한양까지 가는데 필요한 용품과 선물을 가득 실어주고 어인이 찍힌 상시출입 호패를 만들어 주었다. 석간은 마병들이 호위한지라 귀국길이 훨씬 빠르고 안전했다.

석간이 귀국을 하자 조선 조정에서도 국위를 선양한 댓가로 극진한 대접을 했다. 유의 이석간이 뒤새에 도착해 보니 자신의 초가집은 간데없고 대궐 같은 아흔 아홉 칸 집이 있지 않은가? 제갈공명의 팔진도 비법으로 건축한 웅장한 집이었다.

석간은 놀라 부인에게 우리 집도 아닌데 어찌 여기 있소 하자, 명나라 황제가 하사한 집이라고 했다. 석간은 옛날 집이 더 편하다며 별채만 쓰고 본채는 공익 의료시설로 내놓았다.

훗날 그는 선비의 고장인 향리에 남아 선비정신을 몸소 보여 주면서 평생 중인 신분인 의원의 길을 갔다.

유의 이석간의 사후 20여년 뒤,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서둘러 파병을 한 것도 당시 보은의 의미가 있지 않았을까.

지방출신의 선비 의원이 조선 의술의 세계화를 위해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았지만 당대에 자신의 저술업적을 사양한 것 또한 겸양의 선비정신이었다.

인조 22년에 가서야 후학들이 석간의 방을 수집하여 사의경험방(四醫經驗方)으로 출간하였다.

황제의 면전에서도 곧은 행동을 보여준 선비정신! 이석간의 선비정신이 깃든 아름다운 삶의 현장이 바로 영주시 영주1동 두서길(19번 11)에 있던 아흔 아홉 칸 집이다.

집의 가치는 규모에 있지 않고 그 속에서 누가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하느냐에 달려있음을 일깨운다. 이집에서 길러진 정견, 정헌 두 아들은 선과 의, 효와 충을 실천한 아버지를 따라 임진왜란 전장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한편 정헌의 유품이 문수에 안장되고 석간의 딸이 문수 평해 황 씨에게 출가한 뒤로 그의 후손 일부가 이곳에 자리를 텄다.

허준보다 30여년 일찍 살다 간, 석간의 집은 대한제국 고종 황제의 전의였던 귀운 서병효가 사용한 까닭에 더욱 유서 깊다.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