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암리 3.1운동 순국기념관(경기도 화성시 향남읍 제암리 392-2)은 1919년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했다가 학살된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곳으로 역사적 의미가 깊은 곳이다. 일제 강점기 나라를 빼앗긴 식민지 국민들의 울분과 염원, 가슴 아픈 탄압의 현장을 목도할 수 있는 곳이다. 순국기념관은 조용하고 한적한 농촌 마을 속에 자리하고 있었다.
화성지역 3.1독립만세운동은 3월 26일~28일 송산지역 사강장터만세시위, 3월 30일 향남지역 발안장터 만세시위, 4월 3일 장안·우정지역 만세시위 등 3개 지역별 만세시위로 전개되었다.
향남읍 제암리 마을은 3·1운동 때 일제가 독립운동을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탄압했던 학살현장이었다. 과거 사람들이 억울하게 죽어간 비극적인 장소라는 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고요하고 평화로운 분위기의 마을이다. 제암리는 '두렁바위'라는 정다운 이름으로 불렸던 조선 후기 전형적인 씨족마을로, 순흥 안씨의 집성촌이기도 하다.
한가로운 논밭 길을 지나면 '3.1운동 순국 기념탑'이 여행자를 먼저 맞는다. 기념탑, 순국기념관 등이 자리한 이 일대(1만7455㎡) 주변은 제암리 3.1운동 순국 유적지로 사적 제 299호(1982.12.21 지정)라고 써 있다. 이 기념탑은 1953년 4월에 세워졌으며 탑에 새겨진 글씨는 이승만 대통령이 직접 썼다고 한다.
순국 기념탑 오른편에 왠 자전거와 카메라를 든 사람 형상의 청동 동상이 너럭 바위위에 앉아 있어 눈길을 끌었다. 캐나다에서 온 의료 선교사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 박사로 1919년 4월 17일 제암리 학살 사건을 목격한 박사가 엉클어진 유골들을 들것에 실어 2㎞ 정도 떨어진 향남읍 도이리 공동묘지 입구에 안장하기도 했다. 자전거를 타고 이동하면서 제암리 교회 학살사건의 처참한 현장을 사진으로 찍어 세상에 폭로한 사람이다.
이 일로 스코필드 박사는 1920년 일제에 의해 강제 출국되었고, 캐나다와 미국에서 일제 식민통치의 만행을 알려왔다. 1959년 한국으로 영구 귀국한 그는 사회봉사활동에 헌신하다가 1970년 82세로 삶을 마쳤으며, 34번째 민족대표로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됐다.
정부는 1968년 스코필드 박사의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고, '석호필(石虎弼)'이라는 한국 이름도 생겼다. '돌 같은 굳은 의지로, 강한 자에게는 호랑이의 강인함으로 저항하며, 어려운 사람에게는 비둘기 같은 자애를 베풀어라'라는 뜻이 이름에 담겨 있다고.
흰색의 3.1운동 교육관 건물을 지나면 순국 기념관이 나온다. 기념관 2층에 제암교회가 자리하고 있어 더욱 특별했다. 이 마을에 제암교회가 건립된 것은 무려 1905년 8월이란다. 기념관 입구 언덕배기에 오르면 당시 희생자들의 유골을 모신 공동묘지가 있다. 23인의 선열을 모신 순국 묘역을 무거운 마음으로 참배하고 돌아서면, 낮은 동산을 끼고 평화롭게 펼쳐져 있는 제암리 마을이 한 눈에 들어온다.
1982년 9월 문화공보부의 민족수난현장 정비사업의 일환으로, 이 사건의 목격자인 전동례 할머니의 증언과 최응식 할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인근 지역의 유해발굴조사가 실시되었고, 합동장례식을 치른 후 순국 기념관 가까이에 마련된 합동묘소에 안장한 것이다. 그리고 순국선열로 추서, 이 주변을 사적 제299호로 지정했다.
제암리 기념관은 제1, 제2 전시관과 시청각실로 이뤄져 있으며 제암리 학살사건의 증언 자료와 만행 발굴 현장 등을 목도할 수 있다. 국·내외 3.1독립운동에 대한 역사적 기록을 볼 수 있으며 시청각 실에서 다시 사건의 목격자 증언 등을 동영상으로 볼 수 있다.
순국 기념관을 돌아보며 3.1운동 당시에 대해 자세하게 알게 되어 큰 역사공부가 되었다. 기미년 3.1 만세운동의 불길은 화성시 여러 마을에까지 번졌다. 1919년 3월 10일경 안종린·안정옥 등이 서울에서 독립선언문과 격문을 입수하고, 3월 25일에 뒷산에 올라가 마을 사람들과 함께 봉화를 올리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3월 31일 제암리를 비롯한 인근 주민 천 여 명은 발안 장날에 모여 독립만세운동을 벌였다. 교회 청년들과 시장에 모인 주민들이 만세를 부르고 시가행진을 했다. 이에 일본 경찰이 무차별 총격과 칼을 휘둘러 시위군중 3명이 사망하는 등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격분한 군중들은 돌을 던지고 저항하며 일본인 소학교에 불을 지르기도 하고 주재소를 습격하면서 일본인 순사가 죽기도 했다. 만세운동이 벌어진 후 4월 초순부터 장안면 수촌리, 향남면 제암리와 팔탄면 고주리로 이어지며 일본 경찰의 보복과 검거가 시작되었다.
4월 15일 수원에 주둔하고 있던 보병 제78연대 소속 아리타 중위는 부하 십여 명과 제암리에 살았던 순사보 조희창, 발안에서 정미소를 운영하고 있는 일본인과 함께 제암리에 몰려왔다. 이들은 특별히 훈시할 말이 있다며 주민들을 예배당으로 모이게 했다.
기독교, 천도교(동학) 신자들이 섞인 23명의 남녀노소 주민들이 모이자 헌병들이 밖으로 나가 교회 출입문에 못질을 하고 총으로 사격했다. 사격이 끝난 후 짚더미와 석유를 끼얹고 불을 질렀다. 무참히 죽어가는 남편을 살려 달라고 교회 앞에서 애원하는 두 여성도 일본 헌병에게 살해당하고 말았다.
만행을 저지른 일본 헌병들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장안면 수촌리에서처럼 사람들이 사는 민가에 불을 질렀다. 외딴집 한 채만 남고 32가구의 초가가 모두 불탔다. 이어 이웃마을 팔탄면 고주리로 가서 천도교 전교실을 불태우고 천도교인 김성렬의 일가족 6명을 칼로 차례차례 목을 베고 난도질 하여 참혹하게 죽였다. 그러나 사건이 일어난 지 며칠이 지나도록 일본 헌병들의 감시가 심해 누구도 희생자의 유해를 찾아내어 장례를 치를 엄두도 내지 못하였다.
희생자들의 시신은 사건을 전해들은 캐나다 의료 선교사 스코필드 박사가 며칠 후 불탄 교회에서 유골을 수습하여 인근 공동묘지입구에 묻을 때까지 방치됐다. 이후 1953년 4월 사건 현장에는 3·1운동 순국기념탑이 세워졌고, 1970년 9월에는 일본의 기독교인과 사회 단체들이 속죄의 뜻을 담아 보내온 성금으로 새교회와 유족회관이 건립됐다. 1982년 9월 정부에 의해 대대적인 유해 발굴 작업으로 23인의 순국선열들은 교회 뒤동산에 마련된 묘소에 안장됐다.
"그들의 몸도 돌보지 않고 맨주먹으로 용감하게 완강한 제국주의의 권위에 항거하여 자유를 요구하며 일어선 많은 군중을 본 그때의 정경은 나에게는 참으로 잊을 수 없는 눈부신 광경이었다."
1919년 3월 한국인들의 독립만세운동 당시를 회상하며 쓴 외국인 선교사 스코필드 박사의 글이 그가 찍은 당시 사진들과 함께 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전시관을 나오는 출구에 "용서는 하되, 결코 잊지는 말자!"라는 문구가 눈길을 끌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한다. 가슴 아픈 역사를 목도하면서 후손들이 할 일은 이렇게 역사를 낱낱이 기록하고 기억해야 하는 일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