趙甲濟의 역사적 인터뷰/한국전 초기 육군 작전국장 姜文奉(1) 사단장으로서 抗命한 이야기 趙甲濟
姜文奉/그들은 문관 우위의 원칙에 절대 승복하였다
그들은 문관 우위의 원칙에 절대 승복하였다 - 박사가 된 장군, 강문봉의 지도자론 <1983년 9월 마당> 올해 나이 60인 강문봉씨는 열 살쯤은 젊어 보였다. 적당히 살이 찐 다부진 몸매를 가진 그는 의자에 앉아 꼿꼿하게 상체를 세우고 사인펜으로 탁자 위를 딱딱 두드리면서 깐깐한 목소리로 또박또박 말하였다. 지금이라도 군복을 입혀 놓으면 그대로 야전 사령관으로 변할 것 같은 당찬 자세였다. 그러나 그의 아파트(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현대 아파트)로는 할아버지를 찾는 손자의 전화가 걸려 오고 있었다. 그는 스스로 자기처럼 6·25의 전국(戰局)을 전체적으로 세세히 파악했고, 두루 경험했고, 그래서 자기 나름의 戰史를 쓸 수 있는 사람은 달리 없다고 은근히 자랑하기도 했다. 한국군 제일의 작전통이었던 그가 사회에 나와서는 행정학을 전공하여 자신의 옛 상관들을 대상으로 리더쉽 연구 논문을 쓴 데는 무엇인가 남기고, 또 말하고 싶은 뜻이 숨어 있는 듯했다. -채병덕, 정일권 이종찬, 백선엽 네 참모 총장은 모두 민주 국가의 군 통수 원칙인 문관 우위주의에 철저했던 사람으로 보십니까? 아무리 군인이지만 직위에 따라서 정치적 배려가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군 사령관까지는 그 업무 수행에 있어서 정치적 배려를 해서는 안되겠지만 참모 총장은 그 위로 상대하는 사람들이 모두 문관이고 그 아래로는 모두 제복 입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정치와 군대의 접점에 선 매개 자로서 항상 정치적 고려를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참모 총장은 '군인이 직접 정치에 간여해서는 안된다'는 대원칙을 잊어서는 안된다는 겁니다. 이것은 미국이 건국 이래 지켜온 원칙이며 미군의 제도를 본뜬 한국에서도 당연히 지켜야 할 원칙입니다. 문관이 꼭 군인보다 전지전능하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닙니다. 다만 정치에 군인이 나서는 것보다는 문관이 맡는 것이 낫기 때문입니다. 군인도 정치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군복을 벗은 다음에야 그럴 수 있는 것 입니다. 5·16뒤에 제가 정치를 할 군인과 군대로 돌아갈 군인을 빨리 구분하라고 주장한 것도 정치로부터 군을, 또 군으로부터 군을, 또 군으로부터 정치를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저는 네 분 참모총장 모두가 文官優位의 철학을 신봉한 민주국가의 군 지휘자였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가장 욕을 많이 먹고있는 채 병덕 장군이 철저한 문관우위주의자였습니다. 저의 논문에서는 그의 리더쉽 형태가 독재형으로 나타나 있지만 그런 그도 대통령이나 국방장관과 같은 문관들에 대한 충성심은 추호도 흐트린 적이 없었습니다. 문관우위의 원칙과 더불어 군인에게 절대적인 의무로 부과되는 것은 '명령복종'입니다. -그런데 강 선생님께서는 제2사단장으로 있을 때 삼각고지를 확보하라는 작전명령을 거부한 적이 있었습니다만…. 그렇습니다. 戰時의 명령 불복종은 물론 사형감입니다. 저도 그것을 잘 알았고 군법회의를 각오하고 抗命을 했습니다. 당시 삼각고지 옆에 있는 저격능선에서는 45일 동안 주인이 매일 뒤바뀌는 격전이 계속된 끝에 45일째부터 우리가 드디어 고지를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이 전투에서 한국군 2사단(사단장 정일권)은 병력 1만명 가운데서 7천명이 죽거나 다치는 피해를 보아야 했습니다. 대부분의 사상자는 보병이었죠. 당시 1개 사단의 보병은 약8천이었으니까 결국은 행정병 정도만 무사했다는 얘기지요. 삼각고지 전투는 미 제7사단이 맡고 있었는데 40여회의 뺏고 뺏기는 싸움을 계속했지만 고지확보엔 실패했어요. 그러자 미군 사령부(당시 작잔권은 미국이 쥐고 있었다)에선 휴식이 필요하다며 미7사단을 후방으로 빼고 한국군 2사단으로 하여금 삼각고지를 대신 점령하도록 명령했지요. 그 때 저는 미 제9군단 부군단장으로 전보된 정 일권 장군의 후임으로 2사단장직을 맡게 되었습니다. 제가 다른 사단장들과 같았다면 시키는대로 공격을 계속했을 겁니다. 하루에도 수백 명씩 죽겠지만 물품처럼 끊임없이 보충되는 것이 병력이고 그러다가 소강 상태가 되면 나는 훈장을 하나 받게 될 거고…. 기어 오르는 데만도 등반기술이 필요한 그 고지를 우리 사단은 3일간 공격했으나 큰 손해만 보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독단으로 공격중지 명령을 내렸지요. 미군 대신에 우리 장병들을 이렇게 희생시킬 순 없다. 더구나 그 고지가 戰局에 큰 영향을 줄 만한 중요성을 갖고 있지도 않다. 군법회의에 넘겨지겠지만 나 한 몸의 희생으로 수백, 수천 명의 인명을 구할 수 있으리라…, 그렇게 생각하고 처벌을 기다렸습니다. 당시 일부 일선 지휘관에게는 과도한 공명심이 있었어요. 무슨 고지를 점령하고 몇 미터를 전진했는가, 그래서 훈장을 탈 것인가 말 것인가에만 신경을 쓰고 그러는 사이 별 중요성도 없는 전투에서 수많은 장병이 죽고… 저는 언젠가 한국 전쟁을 다른 각도에서 쓸 생각입니다. 몇몇 장군들에 대해서는 국민들이 여태껏 알고있는 것과는 정반대의 평가가 나올지도 모르겠습니다. -강 선생님은 결국 어떻게 되었습니까? 미군들은 저의 항명을 묵인해 주더군요. 그 사람들이 그런 점에선 이성적이라 할까요. 자신들의 명령이 부당했음을 깨달은 뒤에는 말입니다. -삼각고지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결국 중공군이 가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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