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너그러운 사람에게는 구하는 자가 많고
잠 19:1-10
1 가난하여도 성실하게 행하는 자는 입술이 패역하고 미련한 자보다 나으니라
2 지식 없는 소원은 선하지 못하고 발이 급한 사람은 잘못 가느니라
3 사람이 미련하므로 자기 길을 굽게 하고 마음으로 여호와를 원망하느니라
4 재물은 많은 친구를 더하게 하나 가난한즉 친구가 끊어지느니라
5 거짓 증인은 벌을 면하지 못할 것이요 거짓말을 하는 자도 피하지 못하리라
6 너그러운 사람에게는 은혜를 구하는 자가 많고 선물 주기를 좋아하는 자에게는 사람마다 친구가 되느니라
7 가난한 자는 그의 형제들에게도 미움을 받거든 하물며 친구야 그를 멀리 하지 아니하겠느냐 따라가며 말하려 할지라도 그들이 없어졌으리라
8 지혜를 얻는 자는 자기 영혼을 사랑하고 명철을 지키는 자는 복을 얻느니라
9 거짓 증인은 벌을 면하지 못할 것이요 거짓말을 뱉는 자는 망할 것이니라
10 미련한 자가 사치하는 것이 적당하지 못하거든 하물며 종이 방백을 다스림이랴
잠 19:1-10 / [부모를 업신여기면] 참을 거짓이라고 쉽게 말하며 어리석게 사는 것보다는 차라리 가난해도 나무랄 데 없이 사는 것이 낫다. 2) 생각할 겨를도 없이 움직이는 것은 좋지 않으며 성급하게 서두르면 일을 그르칠 수도 있다. 3) 미련한 사람은 어리석게 일을 처리하여 망쳐 놓고는 여호와를 원망한다. 4) 재산이 많으면 친구도 많아지지만 빈털터리가 되고 나면 친구도 멀어진다. 5) 거짓 증언하는 자가 벌을 받고 거짓말을 하는 자도 화를 피해 가지 못할 것이다. 쉽게도 화를 피해 간다는 말이 뒬 성싶은 말이냐? 6) 높은 자리 앉아 있는 사람에게는 없던 친구도 수없이 몰려들어 아첨을 하고, 선물을 주기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모든 사람이 다정한 친구가 된다. 7) 사람이 궁하게 살면 한핏줄에게도 미움을 받는데, 하물며 그 친구들이야 말해서 무엇하랴? 제아무리 이 얘기 저 얘기하면서 뒤쫓아 다녀 봐도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이다. 8) 어떻게 살아가야 사람답게 사는 것인지 그것을 알려고 애쓰는 사람은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다. 깨달음을 지니지 않고 한평생을 어찌 살아가랴! 9) 법정에서 거짓 증언하는 자들이 천벌을 받지 않으랴! 거짓말을 식은죽 먹기보다 더 쉽게 하는 자들이 망하지 않는 경우는 없다. 10) 어리숙한 멍청이가 화려하게 사는 꼴은 도저히 봐줄 수가 없다. 더구나 종이 상전의 상투 위에 앉아 있는 꼴이란 생각할 수조차 없다.
믿음으로 살아도 가난하고 건강하지 못하게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왜 믿음으로 사는데 가난하냐고 정죄할 수 없으며, 삶의 환경에 대하여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재물과 친구의 관계(1-4) 가난하여도 성실하게 행하는 자가 입술이 패역하고 미련한 자보다 더 나은 것은 성실(진실)은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삶의 특징이기 때문입니다. 패역은 구부러진 것을 의미하는데 언사에 있어서 사실대로 말하지 않고 왜곡시키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런 자는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을 모르는 자입니다. 무슨 일이든지 성급하며 경솔하여 하나님의 뜻을 알아보거나 기도해 보는 일 없이 자기 심리의 충동대로만 행합니다. 미련한 사람이 일을 저질러 놓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은 범죄한 조상 아담에게서부터 내려온 것입니다. 재물을 보고 찾아온 친구들은 참된 친구가 아니며, 무슨 혜택을 받으려고 찾아와 붙는 아부자들입니다. 그럴지라도 그런 친구를 대하는 태도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과 같이 행해야 됩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재물은 새 친구들을 더하게 하지만, 가난은 가난한 이의 요구에 지쳐 기존의 친구들까지 떠나게 만들기도 합니다.
위증과 재물의 관계(5-10) 가난 때문에 법정에서 공정하게 대우 받지 못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위증자는 처벌을 받을 것이라고 합니다. 너그러운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아량을 베풀고, 선물은 진실한 마음이 담긴 것으로 사람마다 친구가 되게 합니다.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지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의 마음에 속한 것입니다. 명철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그리스도를 믿음과 같습니다. 가난은 미련한 자에게 어울립니다. 미련한 사람은 현명하게 관리할 수 있는 자신의 역량을 넘어서는 책임이나 재물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많은 재물을 올바르게 활용할 줄 모르고 육신의 욕망만을 채우기에 급급하기 때문입니다.
적용: 하나님께서 주신 물질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얼마나 사용하고 있습니까?
미국 남북전쟁 당시 군목이 죽어 가는 사람에게 찾아가 그 사람의 손을 잡고 “형제여, 제가 무엇을 해드릴까요?” 하고 물었습니다. 군목은 그 사람도 다른 보통 사람들처럼 극한 상황에 처한 자신을 위한 기도를 요청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목사님, 무릎을 꿇으시고 저 대신에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주세요”하고 말했습니다. “무엇을 감사하라는 것입니까?”라고 군목이 반문하자, 그 사람은 말했습니다. “제게 귀한 어머니를 주신 것입니다. 어머니의 교훈과 영향을 통해서 제가 그리스도인이 된 것을 감사해 주십시오. 그리고 영광의 집을 주신 것을 감사드려 주십시오. 저는 곧 그곳에 가서 앞으로 오실 어머님을 기다리고 오시면 환영하겠습니다.” 죽음 앞에서도 기뻐하고 감사하는 사람, 미래의 ‘영광의 집’에 대한 소망이 없다면 어떻게 이런 사람이 있을 수 있겠는가?
< 설 교 >
원망도 습관입니다!
잠 19:3 / 이연우 목사
* 이스라엘 백성들은 악한 말로 원망했습니다!
“여호와께서 들으시기에 백성이 악한 말로 원망하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진노하사 여호와의 불을 그들 중에 붙여서 진영 끝을 사르게 하시매.”(민11:1)
광야생활 도중, 이스라엘 백성들은 허구한 날 원망하고 또 원망했습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다베랴에서) 악한 말들로써 입니다. “여호와께서 들으시기에 백성이 악한 말로 원망하매...”(민11:1) 여기서 ‘악한 말’이란 무엇을 가리킵니까? 하나님의 뜻, 즉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 가운데서 건져내어 가나안 땅에 인도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섭리(攝理)를 거역(拒逆)하는 말 또는 못마땅해 하는 말인 것 같습니다.
사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되뇌곤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쓰러지게 하려는가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민14:2,3)
또한 (가데스 바네아에서)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민13:31)라는 열명의 정탐꾼들의 말만 듣고서 ‘불신앙적인 말들로’ 모세와 아론을 원망했습니다. 아니 그들을 세우신 하나님을 원망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민14:2 상)
출애굽의 의미 자체를 부정하면서, 곧 신앙생활의 의미 자체를 부정하면서까지 말입니다.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쓰러지게 하려는가...”(민14:2,3)
끝으로(홍해 길에서) 우회로(迂廻路)로 말미암아 광야 길로 인해 원망했습니다. 자신들의 상한 마음 전부를 고스란히 표출(表出)하면서, “백성이 호르 산에서 출발하여 홍해 길을 따라 에돔 땅을 우회하려 하였다가 길로 말미암아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항하여 원망하되...”(민21:4,5) 했던 말들을 다시금 반복하면서 말입니다.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로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 하매.”(민21:5 하)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혹 그들처럼, 악한 말들이나 불신앙적인 말로써 원망하고 있으며, 또한 무의미한 말들을 재차(再次) 삼차(三次) 반복하면서까지 그리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자신들의 상한 마음 전부를 고스란히 표출하면서...
명심하십시오. 불평과 원망은 분명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배반(背叛)이요 창조주에 대한 무모한 도전(挑戰)이며, 또한 불평과 원망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며 불평하지 말라 오히려 악을 만들 뿐이라.”(시37:8)
* 원망은 습관입니다!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욥1:22)
사실 원망도 습관(習慣)인 것 같습니다. 어째서입니까? 사람들은 흔히 습관적(習慣的)으로 원망하고 습관적으로 불평(不平)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청종(聽從)하지 아니 함이 습관이라고 지적(指摘)하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네가 평안할 때에 내가 네게 말하였으나 네 말이 나는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나니 네가 어려서부터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함이 네 습관이라.”(렘22:21)
잘 생각해보십시오! 혹 지금 우리는 습관적으로 울고 또한 습관적으로 원망하고 있지 않습니까? 명심하십시오. 원망도 자꾸 하다보면 습관이 되고 만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욥의 경우를 통해 교훈 받기를 원합니다. 욥은 왜 그토록 힘든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결코 원망하지 않으려고 했습니까? 하루아침에 모든 재산(財産)과 가솔(家率)을 잃고 자식들마저 모두 생이별(生離別)했는데도 말입니다. “...주의 자녀들이 그들의 맏아들의 집에서 음식을 먹으며 포도주를 마시는데 거친 들에서 큰 바람이 와서 집 네 모퉁이를 치매 그 청년들 위에 무너지므로 그들이 죽었나이다 나만 홀로 피하였으므로 주인께 아뢰러 왔나이다 한지라.”(욥1:18,19)
결론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습관이 될까봐서입니다.
욥이라고 해서 어찌 그 상황이 원망스럽지 않았겠습니까? 백번이고 천 번이라도 원망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하루아침에 자녀들을 모두 잃고, 재산마저 모두 잃었는데 어느 누가 원망을 하지 않을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욥1:22) 어째서입니까? 한번쯤 하나님을 원망할 수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이는 곧 습관이 되고 결국에는 습관적으로 하나님을 원망하게 될까봐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원망도 습관임을 알고 있습니까? 혹자는 하나님을 한번쯤 원망할 수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그의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욥2:9) 한번이 두 번이 되고 두 번이 세 번이 되는 등 이내 습관이 되어버린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느냔 말입니다.
* 원망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돌아보세요!
“사람이 미련하므로 자기 길을 굽게 하고 마음으로 여호와를 원망하느니라.”(잠19:3)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을 원망하기 전에 먼저 우리 자신을 돌아봐야 합니다. 어째서입니까? 십중팔구(十中八九) 자기 자신에게 그 원인이 있기 때문입니다.
즉 잠언 기자의 지적대로, 자기의 앞길을 스스로 망쳐놓고 도리어 하나님께로 그 원망의 화살을 돌릴 때가 다반사(茶飯事)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미련하므로 자기 길을 굽게 하고 마음으로 여호와를 원망하느니라.”(잠19:3) 참고로 여기서 ‘굽게 하고’는 히브리어로 ‘테살레프’이며, ‘뒤엎어버리다, 넘어뜨리다’라는 뜻입니다.
혹 우리에게는 이와 같은 일이 있지는 않았습니까? 스스로 일들을 망쳐놓고 오히려 하나님께 적반하장(賊反荷杖)인 적은 없었습니까? 자기 스스로 일들을 그르쳐놓고선 오히려 하나님 탓으로 돌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원컨대 하나님을 원망하기 전에 자기 자신을 먼저 돌아볼 수 있길 바랍니다. 원망의 원인이 정말 나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는가를 먼저 살필 수 있길 바랍니다.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고 또한 자신의 행위를 살피라는 주의 말씀처럼 말입니다.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보아라...”(전7:14 중) / “그러므로 이제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니 너희는 너희의 행위를 살필지니라 너희가 많이 뿌릴지라도 수확이 적으며 먹을지라도 배부르지 못하며 마실지라도 흡족하지 못하며 입어도 따뜻하지 못하며 일꾼이 삯을 받아도 그것을 구멍 꿇어진 전대에 넣음이 되느니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니 너희는 자기의 행위를 살필지니라.”(학1:5~7)
* 원망 대신 감사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고전10:10)
그러므로 이제부터라도 원망하는 말을 멈춰야 합니다. 온갖 불신앙적인 말들을 중단해야 합니다.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고전10:10 하)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원망하다가 겪은 일들을 다시금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말입니다.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고전10:10 상)
가령 우리가 길을 잘못 들면 무엇부터 해야 합니까? 멈춰야 합니다! 우선 멈춰야 방향을 바꾸거나 되돌아가는 것 등 그 다음 일이 가능해지기 때문입니다. 허니 우리는 원망과 불평, 불신앙적인 말들을 우선 멈춰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원망 대신 감사를 심어야 합니다. 원망이 있던 자리를 감사로 채워나가기 시작해야 합니다. 어째서입니까? 신앙생활은 결코 영적인 진공상태(眞空狀態)를 허용(許容)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가서 보니 그 집이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라고 들어가서 거하니...”(눅11:24~26)
즉 원망을 멈추는 데서 그치지 말고, 더 나아가 (원망이 있던 그 자리에) 감사를 심고 또 심어야 합니다. 원망 대신 감사를 심되, 일부러라도(의도적이라도) 꼭 그리해야 합니다. 곧 감사로 찬송하며 감사로 기도하며 감사로 예배하며 감사로 봉사함으로써 말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골3:16 하) /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골4:2) /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시50:23 상)
어째서입니까? 이 감사야말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당연한 반응(反應)이요, 그분의 역사에 동참하는 방식(方式)이기 때문입니다. 즉 감사함으로 그 역사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5:18)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원망은 금물(禁物)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원망은 백해무익(百害無益)이며 우리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습니까? 원컨대 이제부터라도 원망 대신에 감사로 차곡차곡 채워나갈 수 있기 바랍니다. 할렐루야!
거짓말 하지 말라
잠 19:1-9 / 박조준 목사
본문 5절과 9절을 다시 한번 읽습니다. 거짓 증인은 벌을 면치 못할 것이요 거짓말을 내는 자 도 피치 못하리라 (5절). 거짓 증인은 벌을 면치 못할 것이요 거짓말을 내는 자는 망할 것이니라 (9절) 잠언 25장 18절 그 이웃을 쳐서 거짓 증거하는 사람은 방망이요 칼이요 뾰족한 살이니라 잠언 24장 28절 너는 까닭없이 네 이웃을 쳐서 증인이 되지 말며 네 입술로 속이지 말지니라 잠언 12장 17절 진리를 말하는 자는 의를 나타내어도 거짓 증인은 궤휼을 말하느니라 이미 생각한 잠언 6장에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이 육 칠 가지가 있는데 6장 19절에 거짓을 말 하는 망령된 증인과 및 형제 사이를 이간하는 자 라고 하였습니다.
잠언 14장 5절 신실한 증인은 거짓말을 아니하여도 거짓 증인은 거짓말을 뱉느니라 같은 장 25절에 진실한 증인은 사람의 생명을 구하여도 거짓말을 뱉는 사람은 속이느니라 출애굽기 20장 16절 십계명 중 아홉 번째 계명이 네 이웃을 해 하려고 거짓 증거 하지 말지니 라 하였습니다. 거짓말하지 말라는 것은 계명 중의 하나입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의사를 통할 수 있는 언어가 있습니다. 이것인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언어가 없다면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언어가 없다면 오늘과 같은 문명의 발전도 기대할 수 없 습니다. 그런데 반면에 이 언어를 잘 못씀으로 인해서 입는 피해도 여간 많지 아니합니다. 그래서 성경 은 말하기를 조심하라고 경고합니다. 그 까닭은 우리가 흔히 말을 많이 하고 특히 말 중에는 남 의 말하기를 좋아하는 탓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런 말을 했어요. 큰 마음을 가진 사람은 흔히 사상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보통 마음을 가진 사람은 흔히 시사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작은 마음을 가진 사람은 흔히 남의 이야기 를 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큰 마음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흔히 남의 말하는 사람이 많다고 합니다. 더구나 이런 잘못을 범하면서도 죄책을 느끼는 사람이 적다고 합니다. 어느 경험 많으신 목사님 말씀을 들으니까 자기 일생 경험 중에 여러 가지 죄를 자복하는 가운 데 다른 죄는 자복하는 이가 많지마는 거짓말한 것, 남의 허물을 이야기한 것을 자복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만나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거짓말을 하는 것, 남의 흉을 보는 것은 죄 로 생각하지 못해서 그래요. 오늘 본문에 뭐랬어요? 거짓 증인은 벌을 면치 못한다고, 거짓말을 내는 자는 망할 것이라고 했어요. 더구나 거짓 증거 하는 것은 계명을 범하는 거예요.
열 가지 계명 중 어느 것은 중하고 어느 것은 경한 것이 없어요. 하나라도 범하면 계명을 범한 거예요.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 간음 하지 말라는 계명만 중요한 것이 아니고 거짓말하지 말라는 계명도 중요한 것입니다. 거짓 증거 하지 말아야 합니다. 증거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공적 증거요, 다른 하나는 사적 증거입니다. 공적 증거에서 우리는 거짓 증거 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국가의 법정에서 증거할 때 감 정이나 악의로 혹은 뇌물을 받고 거짓 증거 함으로 이웃을 해친 예가 예나 지금이나 얼마나 많은 지 모릅니다. 성경에 보면 애굽에 있는 시위대 장관 보디발의 아내가 거짓 증거로써 요셉을 고소해서 죄없는 청년이 감옥에서 고생하게 된 것입니다. 아합왕의 아내 이세벨이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기 위하여 거짓 증인 두 사람을 세워서 하나님과 왕을 저주했다 고하여 나봇을 돌로 쳐 죽이고 포도원을 빼앗은 예도 있습니다. 인간적인 견지에서 말하면 예수님도 거짓 증거에 의해서 정죄받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스데반도 거짓 증거에 의해서 순교한 것입니다. 이런 예를 들자면 시간이 부족할 것입니다. 법 정에서 거짓 증거 하는 것은 인간만 속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속이는 것이 됩니다. 법정이란 실상 하나님의 공의를 인간사회에서 대행하는 기관임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잘못되면 3권이 엄연히 분립되어 있는 나라에서도 사법 기관이 행정부의 시녀처럼 되어 버려 정 치적인 분풀이하는 곳으로 전락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국가적인 견지에서 큰 비극입니다. 거짓 증인은 벌을 면치 못합니다. 옛날 로마의 원시사회에서는 거짓 증인인 것이 판별되면 낭 떠러지에 데리고 가서 떨어져 죽게 하였다고 합니다. 애굽에서는 거짓 증인은 코와 귀를 잘랐다 고 합니다. 공적 증거가 진실해야 공정한 재판을 할 수가 있고 국가에서도 공정한 재판을 해야 국가의 질서와 기강이 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적 증거가 있습니다. 이것은 이웃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 내가 증인대 앞에 선다는 사 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민주 사회는 소위 여론의 법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누가 어떤 사람이 냐? 그 사람에 대한 여론이 국가 법정의 판결 못지 않게 그의 명예나 신분에 크게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너무 억울한 누명을 쓰고 분해서 심지어 자살까지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므 로 우리 믿는 사람은 사담 석상에서 남에 대해서 중상하거나 악선전하거나 시비하는 것은 계명을 범하는 것으로 기억하고 삼가야 할 것입니다. 어떤 때는 침묵이 거짓 증거가 될 수도 있습니다. 사실이 아닌 풍설이 돌아가는데 자기는 그것이 사실이 아닌 줄 알면서도 말하지 아니하고 침묵을 지키면 이것도 결국 공범죄에 속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명심할 몇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헬라 속담에 혀는 뼈 하나 없고 아주 약하 고 작지만 많은 사람을 찌르고 죽인다 는 말이 있습니다. 터어키 속담엔 혀는 검보다 더 많은 사람은 죽인다. 파사 속담엔 혀가 길어지면 생명이 짧아진 다. 아라비아 속담엔 네 혀가 네 목을 베지 못하게 하라. 칼은 쓸수록 더 무디어지나 혀는 쓸수 록 더 날카로워 진다 고 했습니다.
여러분! 병원에 가서 진찰 받을 때 의사들이 혀를 보자고 합니다. 아마 혀를 보고 여러 가지 병을 알아내는 모양입니다. 우리가 이따금 하나님 앞에 혀를 내밀고 진단을 받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우리의 혀는 어떠합니까? 병나지 않았습니까? 그 심령 상태를 혀를 보면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만드실 때 재미있는 점이 있어요. 귀는 두 개를 만드시고 입 은 하나를 만드셨어요. 무슨 뜻입니까? 성경이 말씀하시는 것처럼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 디 하라 는 뜻이에요.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듣는 것 보다는 말을 많이 하려고 애를 씁니다. 여러분! 말을 많이 하는 사람치고 실수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까? 할 수 있는 대로 말을 적게 하여야 실수가 적습니다. 더구나 떠돌아다니는 이야기, 자기도 확실히 모르는 풍설을 전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것이 사 실이 아닌데 거짓말인데 내가 하면 나는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까? 출애굽기 23 장 1절에 너는 허망한 풍설을 전파하지 말며 악인과 연합하여 모함하는 증인이 되지 말라 고 하 였습니다. 우리 나라 속담에도 무족언(無足言)이 천리행(千里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말없는 말이 천리를 갑니다. 풍설은 눈사람 같아서 굴러가면 굴러 갈수록 커집니다. 거짓 화제를 만드는 사람도 나쁘지만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도 나쁩니다. 허무맹랑한 풍설을 함 부로 돌리지 말아야 합니다. 유언비어를 함부로 전하지 말아야 합니다. 더구나 남의 허물을 말하 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예수님 말씀을 여러분 기억하시지요? 비판하지 말라고 경고하시면서 너희 눈에는 들보가 있는 데 어찌하여 형제의 눈의 티를 빼고자 하느냐? 먼저 네 눈의 들보를 빼어 놓고 밝히 보면서 다른 형제들의 티를 뽑아 주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은 흔히 자기 허물은 보지 못하면서 다른 이의 허물 은 보기 좋아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교회에 편지할 때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 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 워하라 (갈라디아서 6 : 1)고 하였습니다. 즉 어떤 사람의 잘못이 분명히 드러났다고 하더라도 이것을 다른 이에게 옮기지 말고 조용히 그 사람과 마주 앉아서 바로잡아 주고 자신도 시험에 들 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권면입니다. 남의 결점을 잘 말하는 사람의 배후에는 흔히 심리적으로 말 해서 열등감이 있는 사람, 시기심이 있는 사람, 교만한 마음이 잠재해 있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남의 허물을 말하는 것을 열심히 듣기 좋아하는 것도 이런 사람과 공범자입니다. 가만히 보세요. 다른 말 할 때는 졸다가도 어느 누구가 남의 추문을 말하면 정신을 가다듬고 듣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전에 성 어거스틴은 자기가 주재하는 수도원 식당에 이런 표어를 써 붙였었다고 합니다. 남의 허물을 이야기하는 자는 이 식탁이 환영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 식당에서는 식사하면서 절 대로 남의 이야기는 못하게 했다고 합니다. 저는 그런 말을 하고 싶습니다. 남의 허물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이 영락 교회에서는 환영하지 않는다. 우리가 흔히 친구와 같이 식탁에서 좋은 음식을 먹으면서 남의 허물을 말하기 쉽습니다. 허물을 들어내는 사람보다 허물을 덮어 주는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전에 노아는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만 말년에 한 번 크게 실수를 했습니다 포도주를 많이 먹고 취해서 벗은 몸으로 잠을 자고 있었는데 함이라는 아들이 그 광경을 보고 동생들에게 그 사실을 일렀습니다. 그때 셈과 야벳은 그 말을 듣고 홋 이불을 가지고 가서 뒷걸음으로 들어 가 벗은 아버지의 몸을 덮어 주었습니다. 누가 복을 받았습니까? 아버지의 허물을 이야기한 함은 저주를 받고 허물을 덮어 준 셈과 야벳은 축복을 받았습니다. 특별히 우리 믿는 사람은 언제나 진실하고 정직한 말을 하도록 힘써야 합니다. 에베소서 4장 25절에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고 권 면합니다. 에베소서 4장 15절에는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 리니 곧 그리스도라 고 하였습니다. 참된 것을 하기에 앞서 말부터 옳아야 할 것입니다. 잠언 12장 19절에 진실한 입술은 영원히 보존되거니와 거짓 혀는 눈 깜짝일 동안만 있을 뿐이 니라 하였습니다. 신명기 32장 4절에는 하나님은 진실 무방하시다 하였고 요한복음 8장 44절에는 마귀가 거짓말 쟁이요, 거짓의 아비라 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누구의 자녀입니까? 하나님의 자녀입니까? 마귀 자식입니까? 진실을 말하면 하나님의 자녀될 것이고요, 거짓을 말하면 마귀 자식될 것입니다.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망할 것이라 고 본문은 경고했습니다. 신약 시대에 가장 엄한 벌이 누구 에게 내렸는지 아십니까? 사도행전에 보면 아나니아, 삽비라 부부에게 내렸습니다. 그들이 무슨 죄를 지었습니까? 하나님의 사자 앞에서 거짓말을 했습니다. 가산을 팔아 절반을 가지고 와서는 판 값이 전부라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가산을 팔아 절반을 가지고 와서는 판 값이 전부라고 거짓 말을 했습니다. 그 죄로 말미암아 즉사하고 말았습니다. 얼른 생각할 때 너무 극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거짓말을 얼마나 미워하시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 해서입니다. 이 경고는 오고 오는 시대들에게 무서운 경고가 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1장 8절을 읽을 때 들어보세요.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살인자 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을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 여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니라 거짓말하는 것이 얼마나 큰 죄인 것을 보게 됩니다. 누구나 다 그렇지만 특별히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일수록 더욱 조심해야 합니다. 교회에서 목사, 전도사, 구역장, 권사, 권찰의 책임을 지신 여러분, 여러 집을 찾아 심방 하시는 분들 조심해야 합니다. 함부로 이집 저집 다니면서 말하면 큰 실수를 범합니다. 말을 조심하지 않아서 교회가 손해를 보는 경우들이 종종 있습니다. 직업 가운데는 신문기자, 언론인들 조심해야 합니다. 잘못된 언사로 말미암아 인격과 명예, 재 산에 손해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침소봉대(針小棒大)해서 남의 허물을 보도하기 쉽습니다. 특별 히 정치인들이 선거 때에 과장해서 선전하게 되면 더구나 다른 사람에 대한 인신공격을 과장되게 하면 그것은 자신을 손상시키는 것이고 국가적으로도 손해인 것입니다. 국민은 현명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방면에서 일하는 분은 특히 조심해야 합니다. 청년 이사야가 성전에 올라가서 기도할 때에 거룩하신 하나님의 환상을 보았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서 보좌에 앉으신 것 을 보았습니다. 사람들이 거룩하다 거룩하다 노래를 부릅니다. 이때 청년 이사야는 자신을 보았 습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보았습니다. 자신의 입술이 더러운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화 로다 나여! 나는 입술이 더러운 자라 고 소리쳤습니다. 그때 천사 하나가 제단에서 절절 붙는 숯 불을 가져다가 입술에 대어 주면서 네 죄가 씻음을 받았느니라 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입술이 성령의 불로 깨끗함을 받아야 합니다. 입술이 거듭나야 합니다. 입술 이 청결해야 합니다. 우리의 입술이 깨끗해지면 상한 마음을 고쳐 줄 수 있고, 약한 사람을 튼튼 하게 할 수 있고, 싸움이 있는 곳에 평화를 이룩할 수가 있습니다. 이 깨끗한 입술로 복음을 전 파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 저녁 우리의 거짓으로 가득한 이 입술을 성령의 불로 세례 받기 위해 서 기도합시다.
잠 19:1-7 / 오정호 목사
우리의 삶에 예수님의 흔적을 남기려면 세 가지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그 첫번째는 우리의 생각과 마음의 문을 여는 겁니다. 마음의 문이 닫혀있으면 말씀이 들어와도 그 말씀을 받지 못합니다. 생각과 마음의 문이 열리면 태도의 문이 열립니다. 주님께서 받음직하고 기뻐하시는 태도가 개발되어야합니다. 태도의 문이 열릴 때에 삶의 문이 온전히 열려 삶 속에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역사합니다.
따라서, 먼저 생각의 틀이 고쳐져야 합니다. 자신이 보고 경험하지 않았다고 해서 영적인 세계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받지 않았다고 해서 은사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한계상황을 초월해서 하나님의 역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마음의 평수, 영혼의 평수, 믿음의 평수를 넓히는 것만큼 하나님은 우리를 통하여 당신의 일을 지금도 이루기를 원하십니다.
잠언(箴言)에는 우리의 삶을 실제적으로 다루는 부분이 많습니다. “다윗의 아들 이스라엘 왕 솔로몬의 잠언이라 이는 지혜와 훈계를 알게 하며 명철의 말씀을 깨닫게 하며 지혜롭게 의롭게 공평하게 정직하게 행할 일에 대하여 훈계를 받게 하며“(잠언 1:1~3). 하나님의 말씀의 원리가 우리의 삶과 맞닿아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삶의 변화를 위해서 주의 말씀은 주어진 것입니다.
어떤 성도들은 대인관계만 잘하면 친구를 많이 얻는 줄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대인관계를 묻기 전에 나 자신이 먼저 바르게 변화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나 자신에 대해서 올바른 자아상(自我相)을 가지게 될 때 하나님은 우리를 은혜와 축복의 도구로 쓰실 것입니다.
1. 올바른 자아상을 정립시키기 위한 세 가지 질문(對我 & 對神關係)
① 당신은 성실한 성도입니까? (1절)
“성실히 행하는 가난한 자는 입술이 패려(悖戾)하고 미련한 자보다 나으니라”(1절). 여기서 성실(integrity)이라는 말은 마음이 떳떳하고 왜곡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마음이 왜곡되어 있으면 아무리 노력해도 다른 사람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먼저 다른 사람들에게 나아가기 전에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자신과의 관계에서 과거의 아픔과 사건으로 왜곡된 마음들이 복음과 은혜로 바르게 회복되어야 됩니다. 세상의 잘못된 이론들은 마음을 왜곡시키지만 성령의 은혜는 마음을 회복시킵니다. 마음이 회복될 때 주님 앞에 성실한 그리스도인으로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② 당신은 사려 깊은 성도입니까? (2절)
“지식 없는 소원은 선치 못하고 발이 급한 사람은 그릇 하느니라”(2절). 지식이 결여된 열정은 문제를 일으킵니다. 생각없이 살기에는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길이는 너무나 짧기에 사려 깊게 살아야 합니다. 교회 생활을 할 때에도 먼저 주님과 교회와 믿음의 동료들 앞에서 자신이 어떤 존재로 설 것인가를 끊임없이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몸만 훈련시키는 것이 아니라 마음도 훈련시켜야합니다. 열매맺는 성도의 삶은 사려 깊은 태도를 통한 순종의 결과입니다.
이 시대의 특징 중 하나는 피상성(皮相性) 즉, 겉꾸밈과 가벼움에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약간 가벼운 것이 부담이 없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가벼운 것이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선물 받은 인생을 깊이 있고 무게 있게 살아야 되며 그렇게 하려면 생각이 깊어야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도함을 받는다면 우리의 삶은 경거망동(輕擧妄動)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은 말씀과 성령님의 인도함을 따르는 특권을 누려야합니다. 사려 깊고 신중하게 생각해서 한번 결정하면 믿음으로 전진할 수 있어야 합니다.
③ 당신은 책임지는 성도입니까? (3절)
“사람이 미련하므로 자기 길을 굽게 하고 마음으로 여호와를 원망하느니라”(3절). 하나님을 원망하는 인간에게서 얻을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인생의 축복은 감사로부터, 주님을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원망의 특징은 그것이 재생산되는데 있습니다. 원망하는 사람을 만나 접촉한 사람은 원망하는 사람이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감사와 은혜를 확대 재생산할 것인가, 아니면 원망을 확대 재생산할 것인가를 선택해야 합니다.
육신적인 눈병만 유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원망을 하면 하나님을 보는 영혼의 눈이 흐려집니다. 불평은 영혼의 눈을 감기게 만들지만 찬양과 감사는 심령의 눈을 활짝열어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 알게 합니다. 원망은 원망을 낳고 불평은 불평을 낳지만 감사는 또 다른 감사를 낳습니다. 책임지는 사람은 어려운 과정을 지날때에도 희망의 깃발을 높이듭니다. 책임지는 성도는 하나님께 대한 열린 태도를 계속 유지합니다.
2. 축복된 대인관계를 만들기 위한 두 가지 질문
① 당신은 나누어 가지는 성도입니까? (4,6,7절)
“재물은 많은 친구를 더하게 하나 가난한 즉 친구가 끊어지느니라”(4절). 여기서는 마음의 상태와 태도를 이야기합니다. 재물이 많다고 항상 나누는 삶을 사는 것은 아닙니다. 큰 평수의 집에 산다고 마음이 항상 그 만큼 넓은 것은 아닙니다. 물리적인 공간이 심령의 공간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심령의 공간이 물리적인 공간을 다스리게 됩니다. 많이 있어도 나누지 않으면 그 마음에 하나님의 은혜가 깃들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나누는 자에게 기쁨을 주십니다. 나눌 때 하나님은 그 나누는 자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행복과 은혜를 담아주십니다. 은혜, 복음, 물질, 관심과 사랑을 나누는 교회를 하나님은 지금도 사용하십니다. 사도행전의 교회는 나눔의 전문가였습니다. 풍성한 나눔은 사람들의 칭송을 가져옵니다.
② 당신은 가족들을 복되게 하는 성도입니까? (잠언 19:13)
“미련한 아들은 그 아비의 재앙이요 다투는 아내는 이어 떨어지는 물방울이니라” (잠언 19:13). 관계가 깨어지는 곳에 행복이 깃들지 못하고 평안은 사라집니다. 미련한 자녀들은 부모의 고통이 됩니다.
“네가 네 아들에게 소망이 있은 즉 그를 징계하고 죽일 마음은 두지 말찌니라” (잠언 19:18). 여기에는 성격 급한 아버지의 모습이 등장합니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어느 순간에 자녀가 너무 마음에 안들어 속상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자녀를 선물로 주신 것만도 우리 스스로 감당치 못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선물로 받은 자녀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모습 때문에 화만 내는 부모가 있다면 그 부모의 마음이 먼저 부드러워져야 합니다. 가장 가까운 관계가 가장 아픔의 관계로 변질될 수 있습니다. 다른 곳에 서 인정받기 전에 먼저 가족에게 인정받고 가족을 복되게 해야 합니다.
“아비를 구박하고 어미를 쫓아내는 자는 부끄러움을 끼치며 능욕을 부르는 자식이니라”(잠언 19:26). 부모를 직접 육체적으로 쫓아내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마음에서 밀어내면 부모를 쫓아내는 겁니다. 우리가 이전보다 육체적인 힘이 세어지고 발언권이 높아지고 또한 사회적 지위가 높아졌다고 해서 부모를 하대한다면 그 가족은 비극의 소용돌이에 말려들 것입니다.
“내 아들아 지식의 말씀에서 떠나게 하는 교훈을 듣지 말찌니라”(잠언 19:27). 지상의 모든 부모의 심정은 대변하는 말씀입니다. 성도를 향한 영적인 지도자의 마음도 동일합니다.
가정에서 실천하여 열매맺은 원리는 우리의 사회에서도 동일하게 영향을 발휘할 것입니다. 교회생활 성공자는 반드시 가정생활 성공자이어야 합니다. 가정생활의 모습은 교회생활의 연장선상에 위치합니다.
사랑하는 믿음의 가족 여러분,
교회의 품격과 성도의 품격은 관계(關係)에서 결정이 됩니다. 대인관계를 묻기 전에 먼저 나 자신이 변화됨으로 바른 자아상을 확립합시다.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에서 성실하고, 자신의 마음을 훈련시켜 더욱 사려 깊고, 어려운 가운데서도 책임을 지므로 은혜와 감사를 확대 재생산하는 성도가 됩시다.
하나님과 자신에 대해서 올바른 자아상을 가진 성도로서 가족을 복되게 하고 이웃에게 은혜와 사랑을 나누는 복된 대인관계를 만듭시다.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 교회를 통해 우리의 생각과 태도와 삶이 달라졌다는 것을 자신에게 뿐 아니라 가족과 이웃들에게도 증거하는 복된 성도로 스스로를 세워갑시다. 우리교회는 복잡한 사회속의 성소일 뿐 아니라, 복음으로 이웃을 친구로 삼는 만남의 현장입니다.
명철을 지키는 자는 복을 얻느니라
잠언 19:1~14
비록 가난하지만 성실하고 정직하게 살아가는 자가 위선적이며 불의한 어리석은 부자보다 나으며 정당하지도 합리적이지도 않은 소원은 자신의 욕망만을 채우려하기 때문에 선한 결과를 가져오지 못하고 신중하지 못하고 성급하게 행동하는 사람은 잘못된 결과를 얻게 되고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 자신의 고집대로 행하는 자는 파멸에 이르게 되지만 그것이 마치 하나님께서 자신을 인도하지 않으셨다고 핑계하고 원망하는 자이며 사람들은 자신에게 도움과 유익이 되는 부자를 친구로 삼으려하는 대신 자신에게 부담이 되고 유익이 없는 가난한 자를 친구로 삼으려고 하지 않고 진리를 왜곡하여 거짓으로 증언하고 거짓말하는 자는 그 거짓이 탄로가 나 그에 따른 혹독한 댓가의 형벌을 치르게 될 것이라고 하는 것을 보며, 나의 욕심만을 채우기에 급급하며 세상의 거짓되고 위선적인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분노와 혈기와 성급함을 자제하지 못하고 행동했던 어리석음에 대해 회개하고 비록 부족할지라도 감사하며 신실하고 진실되며 어려운 자의 친구가 되기를 기뻐하며 살아가는 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권세가 있음에도 남에게 아량을 베푸는 사람에게는 도움을 청하는 자가 많고 진실된 마음으로 선물을 주기를 좋아하는 자에게는 많은 친구가 따르며 가난한 자는 그 형제들도 외면하는데 하물며 그 친구들이 그들을 관심을 갖고 돌볼리가 없고 그들에게 도움을 청하며 호소를 해도 그들은 급하게 그들을 떠날 것이며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지혜를 얻는 자는 자신의 영혼의 구원을 받게 되기에 진정으로 자기의 영혼을 사랑하는 자이며 그 명철과 지혜를 지켜 보존하는 자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자이며 진실을 왜곡하여 거짓말로 거짓 증언을 하는 자는 육체와 재물에 대한 형벌을 받을 뿐 아니라 그 영혼도 멸망하고 말것이며 많은 재물을 소유한 미련한 부자가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데만 급급하는 것도 부적절하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권세를 옳치 못하게 사용하는 종이 다른 사람을 다스리는 것은 파멸을 가져오기에 극도로 위험하므로 과다한 재물과 명예가 주어질 떄 자신의 능력과 분수에 맞는 절제된 처신을 하라고 하는 것을 보며, 세상 모든 사람들이 권세와 재물과 명예를 좇아간다 할지라도 결코 그들을 따라가지 않고 오직 우리에게 참된 지혜를 주시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우리에게 영육간에 주시는 참된 축복을 누리며 하나님의 축복된 자녀로서 부족함이 없고 합당하게 살아가는 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억울함으로 인해 끓어오르는 분노의 감정을 다스리는 자는 다른 사람과의 다툼과 논쟁을 피하는 지혜로은 자이며 자신에게 해를 끼친 사람을 용서하고 그 잘못을 용서해주는 사람은 그 사람으로부터 존경과 영광을 받게 되며 왕이 분노함은 마치 먹이를 향한 사자의 부르짖음과 같지만 백성들을 위해 그 분노를 억제하고 자비와 긍휼을 베푸는 것은 건기에 내리는 새벽 이슬과 가이 백성들의 삶을 풍요롭고 윤택하게 하며 어리석은 아들은 부모에게 근심만 안겨다주는 재앙과 같은 존재이며 미련하여 가정에서 다툼만 야기하는 어리석은 아내는 마치 장마철에 집안으로 쉬지 않고 떨어지는 빗방물과 같이 가정에 끊임없는 근심과 걱정을 안겨다 주며 집과 재산은 그 조상들로부터 유산으로 물려받을 수 있지만 지혜로운 아내는 오직 하나님께서는 주시는 선물이라고 하는 거을 보며,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언 4:23)는 말씀을 명심하여 우리를 죄악의 길로 가게 하는 혈기와 다툼을 피하고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하여 허다한 죄를 덮음으로"(벧전 4:8) 아름다운 가정과 교회와 공동체를 세워가는 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