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5주일(다해)
제1독서(이사 6,1-2ㄴ.3-8)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어떻게 응답했는지 말해줍니다.
이사야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남쪽 유다에서 예언자로 하느님의 부르심을 들었습니다(기원전 740년 우찌야 임금이 죽던 해: 2열왕 15장). 하느님의 부르심에 예언자들이 한결같이 부적합함으로 이의를 제기하면, 하느님께서는 기각하시고 표징과 더불어 파견하시면서 말씀을 선포하도록 떠나게 하십니다(탈출 3장; 예레 1장; 에제 2-3장). 이사야 예언자도 이런 형식에 바탕을 둔 자신의 소명체험을 아무런 꾸밈없이 묘사합니다. 이사야는 자기를 예언자로 부르신 하느님을 높이 솟아오른 어좌에 앉아계신 임금들의 임금으로 표현합니다. 이사야가 목격한 현시에서 하느님을 찬미하며 섬기는 천상적 존재들(사랍들: 타오르는 불 같은 존재들)이 성전을 날아다니면서 하느님의 영광을 환호하고, “거룩하시다!”를 세 번 외쳤다고 합니다. 만군의 주님이신 하느님께 최고의 존엄과 초월성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소리를 들은(뵌) 이사야는 “큰일 났구나. 나는 이제 망했다. 나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이다.” 하면서 이의제기를 합니다. 죄인이라면서 했던 이의제기가 기각되었다는 표징으로 천사가 제단에서 타는 숯을 이사야의 입술에 대고 죄의 용서(정화)를 선포합니다. 이사야는 “내가 누구를 보낼까?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가리오?”라는 주님의 소리를 들었다는데, 예언자로서 받은 주님의 파견명령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더 이상 이의제기를 못하고 주님의 소리에 순명하면서 “저를 보내십시오.”라고 말한 뒤에 말씀을 전하러 떠납니다. 거룩하신 하느님의 선택에 아무도 이의제기를 할 수 없으며, 이의제기를 한다 해도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펼치시기 위해 받아주시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복음(루카 5,1-11)은 시몬과 두 형제들이 예수님의 부르심을 듣고 즉시 따라나섭니다.
당신을 메시아로 드러내신 예수님께서는(4,14-30; 4,31-44) 즉시 제자들을 부르러 배가 두 척이 있는 호숫가로 가셨습니다. 군중이 몰려들어 예수님으로부터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있을 때에 어부들은 두 척의 배에서 내려 그물을 씻고(손질하고: 마르 1,19) 있었습니다. 시몬의 배에 오르신 예수님께서는 뭍에서 배를 조금 떨어지게 노를 저으라고 하신 뒤 군중을 가르치셨습니다. 물에 반사되는 예수님의 목소리를 언덕에서 잘 들을 수 있도록 음향학적으로 탁월한 선택을 하신 것입니다. 호숫가에 있던 두 척의 배들 가운데 시몬의 배에 오르신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가르치심으로써 당신 스스로 물고기가 아니라 사람을 낚으러 오신 분이심을 드러내십니다.
군중을 그대로 놔두신 예수님께서는 시몬(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부르심) 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에 시몬은 예수님을 “스승님”(διδάσκαλε)이 아니라 세속적인 의미로 “두목”(Ἐπιστάτα)이라고 부르면서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이의제기)고 합니다. 고기 잡는 방법을 가르쳐주시는 예수님의 눈빛을 보았는지(이의기각), 이의를 제기했던 시몬은 즉시 “당신의 말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다.”고 합니다. 그물을 내리자 그들은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매우 많은 물고기를 잡게 되었습니다. 동료들까지 와서 두 배에 잡은 고기를 가득 채웠다(표징)고 합니다. 이 표징을 본 시몬은 예수님의 무릎 앞에 엎드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라고 했는데, 이는 자신의 부족함을 들어 두 번째로 이의를 제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두목”이라 불렀던 시몬은 기적(표징)을 본 뒤에 “주님”(κΰριε)으로 부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하셨는데, 이것은 두 번째 이의기각이며, 동시에 예수님의 파견명령입니다. 물고기가 많이 잡힌 표징과 파견명령 때문에 시몬과 야고보와 요한은 모든 것을 버리고 즉시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께서 두 척(유다인과 이방인)의 배에 오르셨다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 하는 교회를, 밤새도록 자기들끼리 고기를 잡으려했던 것은 예수님이 없는 공동체를 말해줍니다. 밤새도록 애를 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했던 것은 아마도 자기들끼리 고기를 잡을 때에는 밤이었기 때문에 두려움이 앞서서인지 낮은 곳에만 그물을 던졌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지시대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렸더니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많이 잡혔다는 것은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1,37; 18,27)는 것입니다. 시몬 베드로는 날로 확산되는 공동체를 위해 혼자 그물을 건지지 않고 다른 동료들을 불러 함께 일을 합니다. 물고기는 물에서 건져내면 즉시 죽지만 물(악)에 빠진 사람은 빨리 건져내야만 살 수 있습니다. 사람을 낚는다는 의미는 바로 이렇게 영원한 생명의 길로, 사랑의 길로 이끌어주라는 것입니다.
제2독서(1코린 15,1-11)는 바오로의 소명체험이지만 조금은 가슴이 아픈 항변입니다.
코린토 공동체는 1년 반 동안 바오로 사도로부터 복음을 잘 전해 들었으면서도 바오로가 코린토를 떠난 뒤에 복음의 내용(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에 관해 의심하면서 바오로가 전해준 복음이 진리이냐고 물었습니다. 구약성경은 잘 알았지만 복음을 제대로 전해주지도 못하는 이(아폴로: 사도 18,24-28)는 물론 예루살렘 공동체의 어설픈 판단(추천서: 2코린 3장) 때문에, 그리고 자기가 받은 은사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이들 때문에(1코린 12장) 코린토 공동체가 심각한 분열의 아픔을 겪고 있었습니다. 또한 바오로에게 사도로서의 자격이 없다고, 외모도 못났고, 말주변도 없다면서 무시한 것 때문에 바오로는 마음고생을 엄청나게 했습니다. 바오로는 자신이 전해준 복음이 잘못된 것이거나, 헛되이 믿을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목격한 증인들이, 그리고 열두 사도들이 자기에게 직접 전해준 복음을 코린토 공동체에게 전해준 것이라고 합니다. “어머니 배 속에 있을 때부터” 하느님께서 불러주셨지만(갈라 1,15),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을 박해했던(이의제기) 자신에게도 부활하신 분이 나타나셔서(사도 9,1-22; 22,1-21: 이의기각) 직접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주셨다고 합니다. 또한 성령께서, 교회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해주라고 책임을 맡겨주었기 때문에 코린토에 하느님의 복음을 전해준 것이라고 합니다(1코린 1,17).
바오로는 비록 살아 계신 예수님을 직접 목격한 증인은 아닐지라도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자기에게도 나타나셨다고 목격증인으로서 말합니다. 특별히 복음에 나타나지 않는 갈릴래아에 있던 오백 명의 부활의 증인들에 대한 증언도 전해줍니다. 회개하기 전에 예수님을 믿는 이들을 박해했다는 이유로 열두 제자들과 코린토 공동체 사람들로부터 무시당하던 바오로는 실제로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명 때문에 예수님의 부활의 충실한 증인임을 강조합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으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게 되었고, 사도로서의 자격이 없음에도 성령과 교회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에 따라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도가 된 바오로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엄청난 사명을 주셨습니다. 사도가 된 것은 오로지 하느님의 은총에 의한 것입니다(로마 1,5). 그래서 바오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고”(1코린 1,17) 복음을 선포했다고 합니다.
뻘겋게 달아오른 숯 덩어리 같은 하느님의 말씀이 이사야의 더러운 입술에 닿았기 때문에 더 이상 예언직을 거부하려는 이의제기가 기각되었습니다. 예수님을 굴러들어온 패거리의 두목 정도로 알고 있던 시몬 역시 물고기가 많이 잡힌 표징을 본 뒤에는 꼼짝 못하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합니다. 바오로 사도 역시 자신에게 나타나신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뵙고 박해자에서 이방인들을 위한 사도로 돌아섰습니다. 모두 한없이 부족한 사람들이었음에도 하느님의 부르심에 순명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지금도 우리를 사람 낚는 어부로서, 교회 공동체를 성장시키는 봉사자로서 겸손하고 열정적으로 살라고 부르십니다. 때로는 전혀 느끼지 못할지라도, 하느님의 부르심에 우리가 이의를 제기한다면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기각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경우에 있어서 우리가 한 이의제기에 대해 우리를 꼼짝 못하게 만드시는 표징도 볼 수있게 해주실 것입니다.
성체를 축성하기에 앞서 “거룩하시다”를 세 번씩 노래하는 것은 인간을 불살라버리고도 남을 만큼 대단한 뜨거움으로, 강렬함으로 우리를 부르시고 계시는 하느님의 초월적인 거룩하심을 찬미하는 것입니다. 이 외침은 그분의 부르심에 응답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에게 운명을 말한다면, 하느님의 부르심을 느끼는 순간부터 제아무리 도망치려 애쓴다 할지라도, 결국 어떤 방식으로든지 응답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사람은 끊임없이 이의를 제기하고 도망친다 할지라도 하느님의 품을 벗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파견된 우리도 공동체의 성장을 위해 언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한 주간 동안 생각해봅시다.
- 방효익 바오로 신부 -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