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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하나비(花火) 축제l>
후끈한 더위를 보아도 도쿄의 여름을 대표하는 건 규모가 큰 하나비 축제, 도쿄의 스미다가와(隅田川) 축제였다. 그 외에도 일본 불꽃축제는 에도가와(江戶川)구 축제, 이타바시(板橋)구 축제, 도쿄만 축제 등이 있다. 보통은 여름에 열리지만 지역마다 축제를 개최하는 기간은 다소 다르기도 한다. 불꽃축제라 해서 모두 폭죽을 터트리는 것만이 아닌, 매해 다양한 축제를 열고 더위를 이기는 것이 바로 하나비 축제다.
아침부터 비가 올지 모른다는 기상청 예보는 허투루 돌아갔다. 다다미가 깔린 시원한 바닥에서 조용히 일어난 쇼리는 미닫이문이 활짝 열린 출구를 통해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을 바라보며 기분 좋게 웃었다.
“갈 때 우산 가지고 가렴. 혹시 모르잖니.”
할머니의 조목조목한 목소리가 그녀의 귓전을 은은하게 울렸다. 앉아있기도 힘에 부쳐 보이는 할머니는 열심히 소리 내어 쇼리에게 느지막이 읊조렸다. 주름이 자글자글한 얼굴과 단단한 살로 이뤄진 그녀의 손이 작은 협탁 위에 올려 진 우산을 가리켰다.
“괜찮아요. 하늘이 맑아서 비올 일은 없을 것 같아.”
“녀석도……. 네가 이 할미 말 들어서 피해본 거 있어?”
“그건 아니지만……. 암튼, 할머니. 정말 혼자 괜찮겠어? 나, 가는 거 싫으면 약속 취소할게.”
“됐어, 인석아! 길 잃어버리지 않게 친구 손 꼭 붙들고 다녀. 혹 모르는 사람이 뭐 사준다고 하거든…….”
“할머니, 나 이제 성인이다! 그런 걱정 하지 말라니까? 내가 뭐 사준다고 따라갈 애처럼 보여?”
부드러운 손녀 딸 머리를 쓰윽 쓰다듬어주던 그녀는 조용히 입가에 옅은 미소를 그렸다. 희끗희끗한 머리가 어느 덧 푸석푸석해지고 그녀를 더욱 힘없게 만드는 것 같았다. 쇼리는 할머니의 쓰다듬을 받으며 눈을 감고, 그녀의 손등 위로 자신의 손을 덮었다.
“걱정하지 말라니까요, 나 할머니 닮아서 야무지잖아.”
그래, 맞다, 맞아. 그녀는 인자하게 웃으며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축제에 가기 위한 준비가 모두 끝나고 쇼리는 마지막으로 할머니가 오후에 드실 저녁을 마련해 놓은 뒤 집을 떠났다. 자긴 괜찮다며 오히려 네 걱정이나 하라는 할머니의 말을 뒤로 한 채 쇼리는 다시 한 번 소박한 집을 힐끗 쳐다보곤 주저 없이 지하철에 올랐다.
스미다가와 축제를 보기 위해 도쿄 아사쿠사(浅草) 역에 도착한 쇼리는, 어마어마한 인파에 둘러싸여 만나기로 한 렌의 일행과 약속장소에 제 시간에 도착할 수 있을지 조금씩 걱정이 밀려왔다. 대략 축제에 오는 인원은 90만 명 정도라고 얼핏 본 것 같은데, 그걸 몸으로 실감하려니 감도 안 왔다. 게다가 비가 온다는 예보 때문인지 축제가 열릴지 의문이기도 했고. 아사쿠사 역에 내려 도보 20여분을 걸어가면 강이 나오는데, 그 강을 따라 가면 스미다가와 축제가 시작하는 제 1회장과 2회장으로 나눠진다. 불꽃은 그 두 곳에서 각각 만발정도씩 쏘아 올린다고 했다. 그녀가 렌과 만나기로 한 장소는 제 1회장이었다. 전통적으로 1회장 같은 경우는 신작이 많고, 2회장은 기본 하나비를 쏘아 올리는 곳이라 볼 수 있겠다.
6시가 남짓 한 시각, 이미 역 앞에 북적이는 대거 인파들로 인해 쇼리는 발 디딜 틈도 없이 인간파도를 따라 열심히 발돋움을 하고 있었다. 버스는 이미 만원이고, 거리는 온통 차와 사람들로 북적였다. 도쿄 전체의 시민들이 스미다가와 축제를 보기 위해 몰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미 시작되고 있는 행렬을 따라 눈을 돌리자, 이곳저곳에 형형색색의 예쁜 유카타를 입은 사람들이 즐비했다. 예쁘게 머리를 올리고 종종걸음으로 색색이 모여 있는 예쁜 옷가지들. 오비를 매는 것도 다양하고, 머리 장식, 오비 장식도 정말 신세대다운 차림새였다. 쇼리는 그들을 보고도 유카타를 입지 않은 것에 대한 후회는 없었다. 유카타가 비쌀 뿐만 아니라 자신의 모국은 한복이라는 전통 의상도 있기 때문이었다. 즐겁게 관람하기 위해 유카타 정돈 걸칠 수 있겠지만 집에 적적하게 계실 할머니를 생각하면 그건 또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눈부신 애국자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매국노도 아니었다.
많은 일렬 행진 속에 멀리서 보아도 유독 눈에 띄는 사내 하나가 쇼리의 이목을 끌었다. 키가 커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렌이었다.
“쇼리!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아? 네가 하나비 축제가 끝나기 전에 와서 다행이야.”
“축제는 이제 시작이야, 궁상떨지 마.”
아키의 닦달에 렌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그렇지, 참. 축제는 이제 막 시작이었어. 쇼리는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계속 미소를 연발했다.
“유카타 안 입었네.”
그가 묻자, 쇼리가 답했다.
“안 입는 게 더 튀잖아.”
하기야, 개나 소나 예쁘다고 입는 유카타, 그녀까지 입었으면 금세 질려버렸을 지도 모르지. 렌은 고개를 끄덕이고 그들은 축제의 묘미를 즐기기 위해 다시 사람들을 따라 열심히 행진했다. 날이 저물고, 금세 주위가 어둑어둑해지자 시부야처럼 붉은 네온 빛들이 저마다 이곳저곳에서 쉴새없이 반짝였다. 축제답게 여기저기 노점을 연 사람들이 참 많았다. 말로만 듣던 사과사탕이라든가 다코야끼를 실컷 먹을 수 있다니. 마치 어린아이가 되어 그 시절로 돌아간 듯 기뻤다.
“다코야끼 먹을래?”
“아, 응.”
“다코야끼 하나 주세요.”
“너는?”
“난 됐어.”
렌은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펼쳤다. 무심한 듯 절대 무심하지 않은 그의 말투는 언제 들어도 은은한 기분을 주곤 했다. 절대 싫지 않은 기분이었다. 주문한 다코야끼가 나오자, 쇼리가 받아들었다. 조그마한 다코야끼 위에 종이 같이 얇은, 톱밥 같은 것들이 뿌려져있나 했더니 다랑어 포란다. 달짝지근한 맛을 내며 쫄깃쫄깃한 야코야끼를 한 입 깨물자, 속에는 마요네즈가 잔뜩 들어 있었다. 쇼리는 미간을 살짝 구겼다.
“느끼한 거 별로 안 좋아하거든.”
진작 미리 말해 주지. 렌은 미리 알고 있었다는 어투로 쇼리의 구겨진 미간을 보며 말했다. 앞장 서 걷는 아키 무리들을 쫓기 위해 렌과 쇼리도 얼른 발걸음을 재촉했다. 치이고 체이는 사람들이 많아 도저히 앞으로 나갈 수 없게 되자, 렌이 그녀의 팔목을 낚아채듯 잡았다. 파도가 거세게 밀려왔다 빠져 나가듯, 인간 파도 앞에선 그녀 역시 속수무책이었던 것이다.
“미아 되지 않게 정신 똑바로 차려.”
꼭 그녀를 쳐다보고 한 말은 아니지만 그의 날렵한 턱 선을 올려보는 쇼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키가 이렇게 컸구나……. 사실 남들과 어울려 노는 걸 못 봐서인지 직접적으로 실감한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사람들 손에 먹을 것이 들리고 한껏 축제를 즐기는 외국인들과 많은 인파를 인솔하는 경찰관들. 정말 숨 한 번 제대로 쉴 수 없을 정도로 정신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유독 가는 길마다 가판대가 즐비하게 놓인 것을 보고, 쇼리는 괜스레 웃음이 새어나왔다. 즐겁다고 할까, 아니면 신기하다고 할까. 거리를 꽉 매운 이렇게 많은 일본인들과 외국인들을 보는 게 처음이었다.
“저건 뭐야?”
송골송골 땀이 맺히고 후덥지근한 몸의 열기 때문인지 쇼리는 간헐적으로 터져 나오는 거친 숨을 몰아내며 물었다. 가판대가 즐비한 곳곳에 눈으로 보아도 시원하게만 보이는 간식거리가 그녀의 바싹 마른입을 더 건조하게 만들었다.
“빙수잖아.”
“그러게. 빙수다.”
렌은 가자미눈을 뜬 채 저보다 조그만 쇼리를 흘겨봤다. 버젓이 빙수 노점이라고 쓰여 있는데 그걸 유독 자신에게 상기시켜 주는 그녀가 얄미웠다. 새침하게 웃으며 검지로 빙수 노점을 가리키는 쇼리 때문에, 렌은 아키 일행과 떨어진 거리를 메우지 못하고 그대로 그녀의 의견을 들어주었다. 빙수가 먹고 싶다고 말했다면 더 좋았을 텐데, 이럴 때보면 그녀는 참 아이 같은 구석이 없잖아 있다. 새로운 발견이라 생각하며 나란히 가판대 앞에 서서 빙수를 주문했다.
“선남선녀로구먼.”
수염이 까끌까끌하게 난 빙수 노점 아저씨가 말했다.
“빙수 하나 주세요.”
“시럽은 어떤 걸로 줄까?”
“음……. 뭐가 맛있죠?”
딸기시럽과 블루하와이 시럽 사이에서 심히 고뇌하는 쇼리를 보곤, 아저씨는 호탕하게 웃으며,
“예쁘니 서비스로 죄다 뿌려먹게 해주지. 먹고 싶은 만큼.”
이란다. 쇼리는 방긋 웃으며 고개를 연신 끄덕거렸다. 달기만 한 설탕시럽이 그렇게도 좋을까, 그녀는 빙수를 받고, 받은 빙수를 다시 렌에게 불쑥 내밀었다.
“먹어.”
“됐어, 너 먹어.”
“하지만 엔도 군을 위해 산거야.”
“…….”
“손에 땀이 찬 걸 보고 ‘덥구나.’ 생각했거든. 자아.”
바보냐……. 단연 날씨가 여름인지라 더워서 그랬을 수도 있지만 손에 잔뜩 땀이 찬 건 오로지 너 때문이었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는 수 없이 시원한 빙수를 받아든 렌은 마지못해 먹어주는 척하며 끝내는 찌그러진 얼굴을 풀지 않았다. 햇볕이 살 속을 파고드는 살인적인 더위가 계속 되고, 아직 더 남아있는 여름을 시원하게 보내기 위한 하나비 축제는 드디어 절정에 오르고 있는 상태였다.
곧 불꽃이 터지는 시간이 점차 가까워지자, 걸어 다니던 사람들은 저마다 하나 둘, 자신이 정한 자리를 찾아 떠나기 시작했다. 며칠 전부터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밤을 새는 사람이 있다고 하던데, 그 말이 사실인가 보다. 맡은 자리에 자신의 이름이 새긴 돗자리를 펴도 그들은 아무도 그 자리에 앉지 않는다고 했다. 쇼리는 그 말을 듣고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마치 가족들의 축제 같은 느낌이었다. 가족들이 모여모여 유카타를 예쁘게 차려 입고, 돗자리가 펴진 곳에 도란도란 모여 앉아 맛있는 것도 먹고 하나비도 같이 보고 즐기는 모습이 그저 부러울 수 없었다.
“쇼리, 뭐해? 안 가?”
흐리멍덩한 표정으로 길에 서 있는 쇼리를, 렌이 다그치며 물었다. 잃은 초점이 더욱 선명해지자 쇼리는 얼른 기운을 차리고 렌을 따랐다. 커다란 야구장이 불꽃놀이를 하는 행사장이었다. 물론 불꽃은 다른 곳에서 쏘아 올리고 있지만 말이다. 여럿이서 모여 있는 일행들을 힐끗 쳐다보자 그들은 술을 마시고 노래하는 분위기를 형성했다. 대학교 선후배끼리 모여서 놀고 있는 그룹들도 파다했다. 마치 애니메이션이나, 게임에서만 볼 수 있는 익숙한 광경이었다.
“전화기가 꺼졌어.”
“응? 아키 전화 말이야?”
“응. 어디다 자리 잡았는지 안 물어봤는데…….”
이럴 수가! 그럼 어떻게 되는 거야? 쇼리가 파랗게 질린 얼굴로 묻자, 렌은 한숨을 나직이 내쉬며 그녀의 머리 정수리에 큰 손을 올렸다.
“우리가 외국 관광객들도 아니고, 설마 길이라도 잃어버릴까봐 그래? 대충 자리 잡아 보던지 아니면 서서 봐도 상관은 없잖아.”
“그야 그렇지만.”
“아키가 보고 싶은 거라면 지금부터 찾아도 늦진 않아. 따라와, 찾으러 가자.”
렌은 앞장 서 걸었다. 꼭 아키와 보고 싶은 건 아니었지만 일방적인 그의 말에 쇼리는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다. 게다가 이렇게 많은 인파 속에서 아키 일행을 찾는 건 건초 더미 속에서 바늘을 찾는 것과도 같았다. 거리는 무척 덥고 어수선했지만 그가 있다는 것만으로 쇼리는 왠지 모르게 마음이 편해졌다.
그 때였다. 퍼엉! 하며 천하를 울릴 듯 커다란 불꽃이 하늘 가득히 반짝이기 시작했다. 날이 더 어두워지자 그제야 불꽃 축제가 시작될 모양이다.
“사람이 정말 많은 것 같아.”
“당연하지, 하나비 축제니까.”
판판한 대지 위에 돗자리를 펴고 앉은 사람들 속에 그들을 찾는 건 정말 무리였다. 꿋꿋이 아키 일행을 찾기로 한 렌보다 오히려 쇼리가 그들을 찾기를 포기했다. 불꽃 구경이 끝나기 전에 아키를 찾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는 수 없이 렌과 쇼리는 적당한 자리를 물색했다. 불꽃이 가깝게 보이는 곳은 아니지만 매우 한적하고 사람들의 웃음소리도 들리지 않는 초목이 가득한 서늘한 곳에서 불꽃을 보기로 결정했다. 저마다 ‘키레이!’를 외치며 손뼉을 맞대고 감탄사를 연발하는 일본인들은 그야말로 불꽃을 열렬히 관람하는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 같다. 쇼리는 아직 그런 낭만은 모르기 때문에 어색하게나마 미소로 얼버무리기도 하였다.
나무그늘 아래 낡은 벤치가 하나 있었다. 조그마한 동산 같이 낮은 경사가 있는 곳이었는데, 아무래도 공원이라기엔 너무 음습한 곳이었다. 나무와 흙냄새가 즐비하고 숨을 쉴 때마다 탁 트인 청명한 공기가 그녀의 후각을 수시로 관통했다. 오기 전, 다시 빙수 노점에 들려 블루하와이 시럽이 뿌려진 빙수를 샀다. 렌이 사주었는데 아삭아삭 씹히는 얼음이 무척이나 그녀의 입안과 몸을 시원하게 만들었다.
“어! 저거 봐! 꽃이야, 꽃!”
그녀는 얼음을 아작 씹어 물다 말고 발을 동동 굴리며 검지를 쭉 뻗었다. 그녀가 사는 신코이와엔 불꽃을 볼 수 없어 서글펐는데, 이런 곳에 나와서 신기하게 생긴 불꽃을 관람할 수 있다는 게 무척 신기하게 느껴진 모양이다.
“엔도 군은, 별로야?”
“아니.”
“근데 왜 표정이 그래?”
“내 표정이 어때서?”
“하나도 재미없는 눈치야.”
“그야 많이 봤던 거니까.”
“…….”
“일본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니, 이런 불꽃 축제나 다른 축제들 보는 건 이제 신물 날만 하지.”
“음, 그렇구나.”
그를 이해할 것 같다. 쇼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렌을 힐끗 쳐다봤다. 미소가 그려진 것도 아니고 언제나 같은 표정만 일삼는 렌의 웃는 얼굴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그래서 어느 틈엔가 그의 웃는 얼굴이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렌은 왜 안 웃어?”
영롱하게 빛나던 그녀의 눈동자가 일순 흐트러졌다.
“그런 너는 왜 웃어? 사는 게 재미있냐?”
“재미있는 건 아니지만 애들이랑 있으면 재미있고, 나까지 즐거우니까.”
“그래, 그럼 난 못 웃어.”
“어째서?”
“애들이랑 있어도 유쾌하지 않고, 재미없고, 즐겁지 않으니까. 굳이 억지로 웃을 필욘 없다고 생각해.”
“그럼…… 난? 나랑 있어도 즐겁지 않아?”
한참 뜸들이다 은근슬쩍 렌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무미건조한 시선으로 그녀를 흘기는 그의 시선처리가 몹시도 부드러웠다. 그런데도 그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오히려 그 재미없고 노골적인 시선으로 쇼리만 빤히 쳐다보길 반복했다.
정말 많은 양의 불꽃들이 밤하늘을 수놓으며 꽃을 피웠다. 그 모습이 그렇게 장관이 아닐 수 없다. 넋을 놓고 보다보면 저절로 즐거운 탄성이 흘러 나왔고, 이는 곧 삶이 즐겁거나 유쾌하지 않더라도 소소한 일상이 견딜 수 있을 만큼은 살 만하단 얘기였다. 설렘임을 안 건 정말 오래 전이 아니라 최근에서였다. 이깟 계집 하나에 목매달려 받자지, 라고 생각했던 게 바로 엊그제였다. 조금만 잘해주다가 넘어오는 기미가 보이면 요루이치의 첫사랑처럼 먹다 버릴 심산으로 다가간 건 맞았다. 그 자식, 자신처럼 누릴 거 다 누리고 가질 거 다 가진 새끼가 오만방자하게 그를 내리 까는 투의 말과 행동, 정말 역겨워서라도 그러고 싶었다.
침이 꼴깍꼴깍 넘어가고 보고 또 봐도 질리지 않는다. 오히려 보고 있을 때가 더 보고 싶은 여자였다. 닳을까봐 애지중지하면서 저도 모르게 자꾸만 시선이 가는……. 그녀 딴엔 열심히 한다고 하지만 어쩔 수 없게도 오물오물 대는 입술과 목소리, 살짝살짝 어색한 발음이 때때로는 그렇게 귀여울 수 없다. 그 오물거리는 체리 빛 입술도, 오로지 그만 쳐다봤으면 싶은 영롱한 눈빛도, 남자의 이성을 얕잡아 보는 그 옅은 미소도 눈부실 만큼 설렜다. 그래서 더 잘해주게 되고, 잘해주는 만큼의 보답으로 그녀의 미소를 보며 덩달아 마음이 들떠버리는 게 꼭, 그를 그가 아닌 것으로 만드는 그 모호함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좋아서…….
“즐거워. 너랑 있으면……. 그래서, 좋아.”
더는 지체하면 안 됐다. 그걸 느꼈고, 쇼리를 더 알고 싶은 진심은 분명한 녀석의 마음이었다.
“네가 나랑 같은 처지에 놓여서 그런 건지 잘 모르겠어. 부모를 일찍이 여의여서 그럴 수도 있고 아니면 네가 다른 애들보다 더 예쁘거나, 공부를 잘해서 일지도 몰라. 어쩌면 다른 놈들이 널 갖지 못해서 내가 더 너한테 목매는 건지도 모르겠어. 솔직히 말하면…… 내가 너한테 갖는 이 감정이 네가 좋다고 뛰는 그 설렘인지, 아니면 아무도 갖지 못한 인형을 내가 가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서 그게 흥분된 건지 나도 몰라. 널 좋아하는지, 좋아하지 않는 건지 잘 모르겠어.”
“…….”
“근데도 좋아. 좋아서…… 그냥 이유 없이 좋아. 그냥, 네 생각만 하면.”
“……렌.”
“좋아해.”
네 생각에 잠이 안 오는 건 물론이고, 안 보면 네 얼굴이 눈앞에 아른 거려서 귀신처럼 환영이 보여. 화가 나다가도 네 얼굴, 목소리만 들으면 마음이 편안하게 가라앉아 진정 돼. 머릿속으로 계속 곱씹던 말을 되 뇌이고 연습해 보아도 잘 안 돼. 응용하는 거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영화에서 나오는 그런 멋진 대사 따위나 나열하면서 될 수만 있다면, 네 마음을 사고 싶었어. 헌데, 그건 내가 아니잖아. 나는 그냥,
“쇼리, 네가 좋아.”
축제가 막바지에 다다랐다. 그 끝을 장식하는 스미다가와 피날레 축제의 묘미는 바로 거대한, 하늘을 가득 메운 큼직한 스마일 불꽃이었다. 도장으로 콕 찍은 듯 예쁜 미소의 불꽃 향연이 이어지는 가운데, 쇼리는 펑펑 터지는 화려한 불꽃들도 구경하지 못한 채 진심을 나열하는 렌의 건조한 얼굴을 말없이 쳐다보았다.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그 어떤 말로도 그의 진심을 대변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심장이 멎었다가도 다시 고르게 뛰었다. 그러다가 그의 눈동자와 맞닥뜨렸을 땐……. 렌은 사뭇 진지한 얼굴로 쇼리를 쳐다보았다. 그에게 장난이나 거짓 따윈 이미 증발해버리고 없는 뒤였다. 그는 천천히 쇼리에게 다가갔다. 이미 앉아있을 때부터 그들에겐 쓸데없는 거리감 따윈 지고 없었다.
그가 가까이 다가올수록 쇼리는 혼란하기 그지없었다. 또 다시 도서관에 있을 때처럼 머리에 혼란이 찾아왔다. 아른아른한 현기증이 핑핑 돌다 정신을 몽롱하게 만들었다. 쇼리는 더 가까이 다가온 렌을 느지막이 멈춰 세웠다.
“아, 저기…….”
가볍게 그를 밀칠 생각으로 가슴팍에 손을 올렸지만 렌은 그때보다 더 진지했다. 머리털이 쭈뼛쭈뼛 서, 온 몸에 짜릿짜릿한 전율이 울려 퍼졌다. 쇼리의 닿은 손길이 다시 그의 마음에 불일 지폈다. 고르게 뛰던 맥박이 어느 덧 요동을 쳐댔다. 더 이상, 지체하고 자신을 숨긴다는 건 무리였다. 렌은 그녀의 손 위로, 자신의 손을 덮고 정확히 왼 쪽, 그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는 가슴께로 그녀의 손을 다시 집어 주었다.
두근두근, 두근두근…….
“사랑은, 사람을 살게 해.”
모든 희망이 사라져도 사람은…… 그깟 사랑 하나에 살 수 있는 유일한 존재래. 너로 인해 그걸 느끼고 싶어. 그냥, 단지 그냥, 너였으면 좋겠어. 만약, 내게도 사랑이 있다면…….
스미다가와 축제는 그야말로 환상적이다. 만발이 넘는 불꽃들이 저마다 하늘을 그리며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사라지길 반복했다. 불꽃을 보는 사람들의 낭만은 아쉽게도 끝이 나며 탄식을 자아냈지만 그들의 낭만은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
렌은 쇼리의 목덜미를 끌고 단숨에 자신 앞으로 가져왔다. 그러기까지 얼마나 많은 생각들이 그를 괴롭혔는지 모른다. 그녀의 숨결이 곧 자신의 피부에 맞닿았을 때, 귀여운 입술이 곧 자신의 입술과 맞부딪혀 포개어졌을 때, 그는 비로소 실감할 수 있었다. 가슴이 우는 것처럼 정신없이 쿵쿵 뛰었다. 곧 심장이 터질 것 같아도, 그 느낌은 어떠한 말을 담아낼 수 없을 정도로 지극히 환상적이었다. 꿈을 씹고, 파라다이스를 삼키는 것 같다. 뽀송뽀송한 하늘을 마신 것처럼 마음이 편안해지고 절대 깨지 않을 것 같은 달큰한 꿈을 꾸는 것 같았다.
부드러운 입술을 더듬으며 렌은 그녀의 입에서 간헐적으로 터져 나오는 거친 숨을 연신 틀어막았다. 그 큰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지고, 흑요석처럼 빛나는 머리칼을 세게 움켜쥐기도 했다. 매 마른 입술 사이로 터져 나오는 렌과 쇼리의 뜨거운 열이 그들의 정신을 더 몽롱하게 일으켰다. 정말 환상적이었던 건 불꽃이 아니라 그녀였고, 그였다. 쇼리의 귀는 펑 터지는 불꽃 소리가 조금씩 멀게만 느껴졌다. 그러다가 더 이상, 불꽃이 터지는 소리는 들리지 않게 됐다. 축제가 끝난 것이 아니라, 오로지 그의 숨결이 그녀를 지배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선 확실히 맛이 났다. 잡아도, 잡아도, 영영 잡힐 것 같지 않은 신비한 신기루 맛이.
쏴아아. 추적추적 내리는 빗물이 더욱 거세졌다. 축축하게 젖은 서로의 몸을 이어주는 단 하나의 고리. 렌은 그녀의 손을 잡았고, 쇼리는 그런 그의 손을 마다하지 않았다.
“나랑 같이 있어. 걱정하지 말고, 먼저 가.”
일기 예보가 이런 식으로 뒤틀릴 지 상상도 못했지만 녀석들의 눈 속엔 ‘후회’ 란 자국은 이미 사라지고 없는 뒤였다. 아키에게 전화가 온 건 이제 막 깜깜한 밤을 타고 세차게 흘러내린 비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우산 없이 잰걸음으로 힘차게 뛰는 사람들 사이로 렌과 쇼리를 찾는 아키와 신지, 타쿠미는 아사쿠사 역에서 그들을 기다리겠다고 했지만 렌은 그것마저 거부해버렸다.
자주색 노렌이 걸려 있는 좁은 지붕 사이로 비를 피해 들어왔지만, 비가 그칠 때까지 좁은 지붕 아래 계속 있는 다는 것도 무리였다. 이미 렌과 쇼리도 여기저기 뛰어다니는 사람들처럼 비를 홀딱 맞은 상태였고, 무엇보다 그녀의 파리한 입술을 보는 렌의 마음이 몹시 다급해졌다.
“여기선 신코이와보다 지유가오카가 더 가까워. 지하철도 만석일 거고 버스도, 택시도 기다렸다 타려면 두세 시간은 거뜬히 기다려야 돼. 어떻게 할래? 지유가오카까지 뛰는데 30분이면 되는데.”
청바지와 셔츠가 물 한바가지 뒤집어 쓴 것 마냥 차갑게 느껴졌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뛸래…….”
오들오들 떠는 그녀의 파리한 입술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렌은 쇼리의 손을 꼭 잡은 채, 거리를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아스팔트 위에 고인 물이, 그들이 지나갈 때마다 세차게 흩어졌다. 그의 말대로 정류장은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택시 정류장도 마찬가지였다. 우글우글 대는 사람들 사이를 빗겨 뛴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됐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이런 몰골로 집에 가봤자, 크게 걱정하실 할머니 얼굴이 눈앞에 선했다. 차라리 그의 집으로 가서 전화를 넣자. 그게 더 나을 것이리라.
거친 숨이 터져 나오고 심장이 멎을 만큼 계속 해서 달렸다. 그러면서도 렌은 그녀의 차가운 손을 놓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작은 손을 자신이 감싸 준다 생각하며, 더 꽉 그러쥐었다. 골목골목으로 들어설 때마다 굵게 내리치는 빗줄기 사이를 뛰는 사람도, 걷는 사람도 모두 없었다. 우산을 쓰고 가까운 슈퍼 따위로 가는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오로지, 그 둘뿐이었다.
굳게 걸어 잠긴 문을 따고 엔도 가로 들어간 두 사람은, 빛이 꺼진 깜깜한 현관에 들어와 숨을 고르셨다. 헉헉, 머릿속이 하얗게 질린 것처럼 핑 현기증이 일었다. 차가운 빗물이 뼛속까지 깊게 파고드는 흔적이 역력했다.
“아무도 없나봐.”
쇼리가 나직이 속삭이듯 말했다.
“스미다가와 축제가 도쿄에서 제일 크게 열리니까, 아무래도 다들 거기 갔을 거야.”
“…….”
“들어와, 불 켜야 돼.”
그의 손을 따라 쇼리도 축축하게 젖은 신발을 벗고 들어갔다. 대지 위로, 물을 한껏 머금은 양말을 밟는 느낌이 썩 좋진 않았다. 찾았다, 렌이 거실을 비추는 스위치를 찾아 키자, 금세 어둠이 가시고 빛이 찾아왔다. 꼭 비에 부푼 강아지 같다. 쇼리는 히죽 웃다가 렌의 건조한 시선을 느끼고, 웃음을 멈췄다. 화를 내는 게 아니다. 그의 진지한 눈빛이 다시 그녀의 심장을 관통할 듯 뜨겁게 울렸기 때문이다. 쇼리는 마른 침이 꼴깍 삼켜졌다. 시선을 어디다 둬야 할 지 몰랐다.
“수건 줄게. 올라…….”
우르르 쾅쾅!
그 때였다. 잔잔히 내리던 세찬 빗줄기가 거대한 해일을 일으키듯 천둥번개를 동반하며 더 미친 듯이 퍼붓기 시작했다. 놀란 건 그 뿐만이 아니다. 쇼리는 긴장을 낮추다 천둥번개가 치는 소리를 듣고 어깨를 들썩이며 맞잡은 손을 움찔거렸다.
그러다가…… 파팟! 하며, 번개가 서너 번 내친 뒤 온전히 빛을 밝혀주던 거실 전등구가 한순간에 꺼져버렸다.
“렌, 전기 나갔나봐.”
우르릉 쾅쾅! 엔도 가의 지붕을 부셔버릴 듯 떨어지는 빗줄기는 더욱 그들을 고립시켰다. 렌은 두꺼비집을 찾아 다시 발돋움 했다. 손전등 대신 휴대폰 빛으로 두꺼비집 안을 비췄지만 안타깝게도 전기가 누전 돼 버린 것 같다.
“왜, 안 돼?”
“누전 된 것 같은데.”
렌의 말에 쇼리는 숨을 크게 들이쉬곤 그대로 멈춰버렸다. 머릿속에선 이미 갖가지 생각들이 오갔다. 이 넓은 집에 엔도 군이랑…… 그것도 불하나 들어오지 않은 깜깜한 어둠 속에서. 라는 대목이 말이다. 그러다 또 다시 불현듯 떠올랐다. 녀석의 부드러운 입술. 자신의 입술을 훑고, 입안을 파고들었던 그 달큰하고 몽롱한 맛.
“쇼리?”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렌의 팔이 그녀의 팔목을 잡아챘다. 우연찮게 잡은 것이었다. 분명. 그녀는 화들짝 놀라 더듬거리며 ‘응?’ 이라 말했다. 렌은 그녀의 목소리를 듣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비를 너무 많이 맞아서 기절이라도 한 줄 알았다.
“2층으로 가자. 내 방에 욕실 있어. 갈아입을 옷 줄게.”
“아니…… 아니, 난 괜찮아. 엔도 군 먼저…….”
“쇼리.”
또다시 렌의 사무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분명하게 말하지만 네가 싫어하는 짓 안 해. 그러니까 걱정할 거 없어.”
단단하고, 그러면서도 부드러운 그의 음성이 그녀의 귓가를 울리자, 쇼리는 그제야 안심이 됐는지 옅은 미소를 그렸다.
“……고마워, 렌.”
고마워, 이해해줘서. 나 같은 애를 좋아해줘서.
그가 이끄는 대로 순순히 따라 올랐다. 믿지 말라는 그의 오래 전 말이 새록새록 떠올랐지만, 남자여도 렌이라면 그녀는 믿어야 했고 또 믿고 싶어졌다. 그러면서도 긴장의 끈을 낮출 수가 없었다.
렌은 남자고, 쇼리는 여자라는 사실을.
뾰옹아리님, 세개의 시선님, 궁금한걸님, 캔디맨님, 하늘을 날다님, 천가령님, 아야님, 글래스님, 감사합니다.
9화는 이분들게 바칠게요.(*__)
10화에서 봅시다. 눈팅은 나빠요~
첫댓글 으허~~~드디어~~~ 드디어~~~ 저진짜 읽는내내 손에 땀이삐질삐질 났어요!!!!ㅋㅋㅋㅋㅋ 렌이랑쇼리 정말이뻐죽겠어옄ㅋㅋㅋㅋ
잘보고갑니다~~~
아아 콩닥콩닥 제가 다 행복하고 두근거려요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전에 도쿄를 갔다온적이 있는데 한겨울이고 딱히 축제도 없었고... 기회가 되서 다시 갈수 있다면 하나비 축제를 가보고싶네요!!! 으흐흐 여튼 오늘도 잘 읽고 갑니다 ㅠㅠ 항상 맘이 콩닥콩닥 훈훈해지네요~~~항상 건필하세요!! 빠이띵 *.*
베이비 페이스님 덕에 일본 가보고 싶어요! 나중에 가게되면 하나비 축제 구경 가고 싶네요 ㅋㅋㅋㅋ 근데 사람이 저렇게 많으면 포기할지도 ㅠㅠㅠㅠ 렌이랑 쇼리가 더 잘됐으면 좋겠어요♡ 8화에선 눈팅했는데 찔려서 댓글달아요.........*_*; 9화 잘 보고 가요!
너무 귀엽다 쇼리ㅋㅋ 작가님 하루하루 기다리면서 이 둘의 진전이 있기를 바란답니다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