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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에 이미 예표 되어 있는 새 창조의 경륜
- 창세기 1장 ; ‘바라’를 통해 7일 동안 창조한 옛 창조물의 연장선 상에 있는 인간 1: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bara)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bara)하시고"
- 창세기 2장 〔1 단계〕타 창조물보다 진전된 사람의 창조 → 자신의 형상을 주심 2:7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2 단계〕새 창조의 경륜 앞으로 인도된 사람 → 하나님 자신의 생명 앞에 두심 2:9 “ ~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2:16-17 “ ~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 ” |
나. 새 창조의 방식 ; 존재 방식의 혁명
이미 언급한 대로 사단의 개입으로 하나님은 새 창조를 진행하셨으며, 그런 하나님의 뜻은 이미 실패한 바로 그 첫 사람에게 계시되었고, 그들의 자식인 가인과 아벨을 통해 보다 분명하게 제시되었습니다. 그리고 새 창조의 실행은 시간 가운데서 많은 세월이 흐른 뒤 한 사람 아브라함을 부르심으로 그 출발을 알립니다.
그리고 또 많은 시간이 흐른 후 새 창조의 실체요 주체이신 그리스도가 예수라는 한 인간이(하나님-사람) 되시고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심으로서 한 면에선 영원 가운데서 또 다른 한 면에서 시공간 가운데서 새 창조가 종말적으로 완성된 것입니다.
예수라는 한 인간은 하나님이면서 동시에 인간이신 우리의 이해를 초월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분은 창세기 3장 15절에서 예언된 그대로 한 여자의 씨에서 났지 혈육의 남자에게서 나지 않았습니다.
-창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
대신 그 분은 성령으로 잉태되신 분이십니다.
- 눅1:34-35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이 성령으로 잉태되심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이를 옛 창조와 대조해보면 그것이 얼마나 혁명적이며 위대한지를(물론 옛 창조도 위대하지만) 알 수 있습니다.
1) 먼저 ‘관계성의 면’에서는, 옛 창조는 객체 곧 대상으로 창조되었지만, 예수님의 새 창조는 하나님 곧 주체의 연장입니다. 주객의 분리가 아닙니다. 이것이야말로 새 창조와 옛 창조를 구분하는 핵심적인 요소이며, 장차 우리도 본성에서 하나님과 같이 됨으로서 새 예루살렘 안에서 주님과 함께 우주의 주체가 될 것입니다.
2) 둘째 ‘기원의 면’에 있어서는, 옛 창조는 말씀하심 곧 ‘바라’의 방법으로 창조되었지만 새 창조는 하나님 그 분 자신 안에서 나오는 방법 곧 성령의 잉태하심으로 창조되었습니다.[발생(출생)] 그 분 자신의 낳으심 곧 생명을 나눠주는 방법으로 창조된 것입니다.
3) 셋째 ‘존속의 면’에서는, 옛 창조는 성령의 운행하심과 붙드심으로 유지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새 창조는 이런 붙드심은 물론 그것을 뛰어넘어 그 분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외적인 붙드심은 물론 내적인 생명의 교통 곧 에녹에게 예표된 ‘동행’의 방법을 취하고 있다하겠습니다. 주님은 이 땅에 사실 때 결코 그 분의 임의대로 하신 것이 없습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과 함께 하셨습니다.)
다. 예수님이 새 창조가 되는 이유
여기서 아벨이 첫 새끼를 드렸다는 것의 의미가 밝혀지는데, 그 첫 새끼는 이와 같이 전혀 새로운 방법으로 존재하게 된, 옛 창조물과 근원적으로 다른 새 창조로서의 첫 열매를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새 창조의 첫 열매가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의 외적 형상 면에서는 그 동안 있어온 옛 창조와 같으나 그 본질 면에서는 전혀 다른 새롭게 등장한 첫 존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분은 '첫 새끼', '첫 열매', '장자', '처음 난 것', '맏이', '맏물' 등으로 예표된 구약의 상징들의 실체시오, 총체이시며 주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레23:10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에 들어가서 너희의 곡물을 거둘 때에 위선 너희의 곡물의 첫 이삭 한 단을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초실절 곧 첫 열매의 예표)
- 고전 15: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그리스도가 초실절의 실체이심)
- 요한복음 8:42 “예수께서 가라사대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께로 나서 왔음이라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
- 고린도전서 1:30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위의 구절은 예수님의 존재의 본질에 관한 것을 말해주는 대표적인 구절입니다. 동시에 우리의 존재의 본질도 말해주고 있습니다.
물론 그 분이 삼일하나님이시고 또한 그 분 자신이 창조의 실행자이시기 때문에 당연히 새 창조라 할 수도 있겠지만, 창조란 개념 자체가 존재물을 상정하는 개념이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의 존재 곧 그 분의 출생이 왜 옛 창조와 다른지의 관점에서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복음서에서 그 분은 잉태하심으로 출생하였고, 말씀이 육신이 되어서 출생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덧붙여 그 분은 “내가 하나님께로서 나서 왔다”고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말씀해 주십니다.
위의 요8:42 본문에서 주님께서 새 창조에 속함을 존재방식의 면에서 말해주는 대표적인 구절은 “하나님께로서 나와서”란 부분입니다.
이 “하나님께로서 나와서”란 구절을 원어에서 확인해 보면 "εκ του θεου εξηλθον και ἥκω"(에크 투 데우 엑셀돈 카이 헤코/ from the God proceeded forth and came) 로서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왔다”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새 창조의 첫 열매임을 알 수 있는 중요한 단어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전치사 “εκ 에크”와
동사 “εξηλθον 엑셀돈”입니다.
전치사 ‘에크’는 [존재방식의 면]에서
1) 『주님의 존재의 관계성』을 말해줍니다.
원래 전치사 ‘에크’는 ‘~ 의 속에서 나오는’ 것을 표현할 때 사용됩니다. 따라서 주님은 창조의 방식이 아닌 출생의 방식 곧 하나님 안에서 나오신 분임을 나타내며, 이는 옛 창조에 있어서의 창조물과 같이 하나님을 향하여 대상이나 객체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 자체의 연장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동사 ‘엑셀돈’의 원형은 “ἐξέρχομαι 엑셀코마이(exerchomai) ”로서 “to go or come forth of” 곧 “~에서 나오다, 가다/ ~에서 나타나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2) 이는『주님의 존재의 기원』을 말해줍니다.
복음서에서 주님은 한 처녀인 마리아를 통해 성령으로 잉태되셨습니다. 그 분은 옛 창조에 속하는 한 남자의 씨로서 옛 창조의 영역 곧 하나님의 말씀하심인 ‘바라’의 연장선상에서 출생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신 분입니다.
이 문제는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주님의 본성이 “호모 우시오스 homoousious”(동일본성)인가, “호모이 우시오스”(유사본성)인가, “헤테로 우시오스”(이질본성)인가의 논쟁과 관련된 것으로 초대교회는 주님께서 “호모 우시오스” 곧 하나님과 동일 본질임을 선택하였는데, 이는 한 인간 예수가 하나님(하나님-사람)임을 교회가 공식적으로 고백한 것입니다. 이런 기독론의 전개에 있어서 주님을 하나님으로부터 “발생(출생)” 하신 분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이 ‘발생(출생)’이 바로 옛 창조의 ‘바라’와 근원적으로 차이가 나는 새 창조의 출현인 것입니다.
3) 그리고『주님의 존속의 면』에서는 이 본문에서는 표현되지 않았지만, 우리가 너무 잘 알듯이 그 분은 언제나 하나님과 함께(with) 성령 안에서, 성령으로(in, by) 행하셨습니다. 따라서 그 분의 존속은 옛 창조와 같이 “외적인 붙잡음”에 의해서가 아니라, “내적인 함께 함”으로서 사신 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모든 피조물들 특별히 죄인 된 인간을 대표하는 대표권(장자의 位 곧 장자권)을 가진 맏물로서 구속의 제물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성경에서 여러 방면으로 특별히 구속의 관점에서 그 의미를 확정할 수도 있겠지만 저는 지금까지 본 것처럼 오히려 그 분의 존재론적 관점에서 이 문제를 보는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4. 우리는 어떻게 새 창조가 되었는가?
- 이사야 48:7 “이 일들은 이제 창조된 것이요 옛적 것이 아니라 오늘 이전에는 네가 듣지 못하였느니라 그렇지 않았더면 네가 말하기를 내가 이미 알았노라 하였으리라”
- 고린도후서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 고린도전서 1:30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주님께서 새 창조의 첫 열매 곧 아벨이 제물로 드린 양의 첫 새끼의 표상의 실체임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존재방식의 관점에서 어떻게 옛 창조와 구분되는지도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나서 새 사람이 된 우리는 존재방식의 관점에서 주님과 동일한 새 창조에 속하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레위기 23장에 의하면 초실절에 곡물의 첫 이삭 한단으로 요제로 하나님께 드려진 주님이 있은 후 50일째 되는 날에 떡 두덩이로 역시 요제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이것이 오순절(칠칠절)입니다. 그리고 이것의 실체는 사도행전에서 오순절에 성령이 부어지고 교회가 산출됨으로써 성취되었습니다.
그리고 오순절에 이삭으로 드려지지 않고 떡 덩이로 드려진 것은 이 절기가 개인적인 차원이 아니고 단체적인 몸의 차원임을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계시입니다.(몸을 보고 하나님의 집을 본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날 기독교가 이런 중요한 계시를 보지 못한다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 구약 절기의 예표는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우리가 그 분과 동일한 새 창조의 연장선상에 있음을 보여주는 매우 분명한 그림입니다. 그리고 고후5:17은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분명한 메시지로 선언합니다.
여기서 새로운 피조물이란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존재방식의 면에서 곧 관계성과 기원과 존속의 면에서 주님과 똑 같은 특성과 본질을 가진 새 창조에 속한 것임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아멘!
우리는 주의 은혜로 그 분 안에서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사실 이 구절을 개역한글과 회복역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으로 번역하고 있지만, 헬라어 원문 그대로 번역하면 “그리스도 안에서”가 보다 정확한 표현입니다. 곧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입니다.
이 부분을 회복역의 고후5:17절 각주 2, 3번은 우리가 어떻게 새 창조물인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생명과 본성이 그분과 하나라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에게서 태어난 것이다. / 옛 창조물에는 신성한 생명과 본성이 없지만, 하나님에게서 거듭난 믿는 이들로 구성된 새 창조물에는 신성한 생명과 본성이 있다. 그러므로 믿는 이들은 육체의 옛 본성을 따르지 않고 신성한 생명의 새로운 본성을 따르는 새 창조물이다.”
그런데 이 구절에서 매우 흥미로운 사실은 ‘피조물’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인 “κτισις 크티시스”가 ‘건축의 개념’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곧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건축되어 가는 새로운 창조물 곧 장차 그리스도와 함께 새 예루살렘으로 완성될 그런 새 창조물임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고전1:30은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고 우리의 존재의 기원에 대해 분명히 말하며, 뒤이어 예수께서도 하나님께로서 나오셨다고 말함으로써 우리와 예수님이 그 존재의 기원이 동일함을 대비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부분을 원어로 보면, ‘하나님께로부터’란 구절에, 앞에서 주님의 출생 곧 ‘발생(출생)’과 관련된 전치사 “εκ 에크”가 똑 같이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근원적으로 우리의 거듭남이 하나님에게서 ‘발생(출생)’된 것 곧 옛 창조와 같은 ‘바라’의 창조가 아닌 주님과 동일한 새 창조에 속함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 분과 동일한 새 창조물입니다. 할렐루야!
5. 인간의 상황
우리는 존재방식의 면에서 그 분과 동일한 옛 창조에 속하지 않는 그런 사람 곧 ‘하나님-사람’으로서 이 땅위에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비록 옛 창조 안에 있지만 우리는 옛 창조와 본질이 다른 새 창조물로서 체류자로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 베드로전서 1:17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자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개역한글)
개역한글성경은 새 창조인 우리를 ‘나그네’란 단어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회복역은 ‘나그네’ 대신 ‘체류자’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체류자’라는 번역이 참으로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나그네’란 흔히 유행가 가사에 나오는 것과 같이 그저 발길 가는 데로 가는 목적이 분명하지 않은 사람을 말합니다. 하지만 ‘체류자’는 가야할 목적이 분명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이상이 분명한 체류자이지 결코 나그네가 아닙니다. 할렐루야!
세상에는 수십억에 달하는 인간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옛 창조와 새 창조의 존재방식의 관점에서 보면 크게 아래의 두 부류의 사람으로 오직 구분됩니다.
옛 창조의 영역에 속한 사람과 새 창조의 영역에 속한 사람
존재 양식 |
옛 창조에 속한 사람 |
새 창조에 속한 사람 |
관계성 면 |
- 기본적으로 기타 피조물과 같이 ‘바라’의 영역 곧 하나님에 대하여 대상과 객체로 존재 |
- ‘발생(출생)’ 곧 하나님에게서 남으로써 객체나 대상적인 존재가 아니고 그 분의 아들들이 됨, 장차 새 예루살렘 성으로 온전히 그 분과 연합함. |
기원 면 |
- 말씀하심으로 존재 |
- 하나님에게서 남으로서 존재 |
존속 면 |
- 성령의 외적 붙드심의 은혜로 존재 유지 |
- 외적으로는 성령의 붙드심과 내적으로는 성령과 함께 동행함으로써 존재 유지 |
6. 온 우주의 새 창조
지금 모든 피조물들은 구속의 날을 바라며 탄식하고 있습니다. 곧 새 창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 롬8:21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을 다스릴 권한을 가지고 있던 첫 사람 아담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모든 피조물은 다 지금 속박 가운데 있습니다. 약육강식과 환경의 제약 가운데 있습니다. 그들도 새 피조물이 된 우리와 같이 종노릇 하는데서 해방되기를 지금도 고대하고 있습니다. 오, 주 예수여!
이제 온 우주는 불에 탐으로서 전혀 새로운 새 창조로 거듭날 것입니다.
- 베드로후서 3:12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7. 나가는 말
“Cur Deus Homo" 왜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는가?
지금까지 존재방식의 면에서 옛 창조와 새 창조에 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옛 창조 곧 ‘바라’는 없는 것에서 창조한 것이고, ‘새 창조’는 그 분으로부터 직접 낳은 것입니다. 곧 하나님의 분신입니다. 근원적으로 생명적 관계입니다.
동일한 하늘 아래 우리가 새 창조의 비밀 가운데 사는 사람이라는 이것 보다 더 큰 비밀이, 이것보다 더 큰 축복이, 이것보다 더 큰 소망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하나님의 비밀한 사람, 곧 ‘하나님-사람’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존재의 사람이라면 우리의 실존도 이에 합당한 내용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 요한1서 4: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우리는 인격의 세계를 전제로 하기 때문에 창조의 전후 곧 영원까지를 보지만, 불신자들은 수를 전제로 하기 때문에 의심의 연속이고 창조되어진 세계 안에서 밖에는 보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같은 공기를 마시는 이 세상 안에 전연 존재의 방식이 다른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을 그들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격의 세계이기 때문에 도전한다고 그의 세계를 열어주시지 않습니다. 오직 우리가 겸손하게 인격적으로 그 분을 만날 때 그 분 자신의 세계를 보여주십니다.(주님께서 산 위에서 하신 말씀)
세상에는 많은 사람이 있지만 한 부류는 옛 창조에 속하고, 한 부류는 새 창조에 속합니다. 이 거리는 너무나 멀고도 멉니다. 하나는 객체요 대상이고, 하나는 그 분에 속한 것입니다. 종교는 대상이요, 생명의 노선은 그 분에 속한 것입니다. 할렐루야!
첫댓글 형제님의 글에서......이런 기독론의 전개에 있어서 주님을 하나님으로부터 “발출” 하신 분으로 표현하였습니다. 라는 글이 조금 이해가 되지 않아서요... 보통 개혁신학의 삼위일체론의 존재의 관계적 측면에서는 아버지-아들-성령의 관계를 [비출생,출생,출래(발출)]로 이해를 하고 있거든요..결국 주님(예수님)은 발출(processio)이 아니라.. 나으심(gennao,generatio)되신 분으로 알고 있거든요.. 즉 영어로 표현을 하자면.. 아버지(비출생-Unbegotten), 아들(출생-Begotten), 성령(출래-Procession)으로요 그런데 형제님의 글에서 발출은 주님에게 보다는 성령에게 적용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혹 제가 잘못 이해했나 싶기도 하고요...그래서 한면에서 개인적인 생각으로 요한복음 16:28절의 회복역 구절을 보면 {내가 아버지께서 나와서 세상에 왔다가, 다시....} 여기에서 [나와서]는 개인적으로는 [와서]라고 번역을 하면 더 이러한 위격들의 관계를 명확화 할 수 있을까 생각을 합니다. 저의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형제님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스크랩해 갑니다...
형제님 감사합니다! 옛 창조에 대비하여 새 창조를 강조하려고 교리적인 용어를 사용하였는데 역시 합당치 않았던 것 같습니다. ‘발생’과 ‘발출’을 혼용하여 사용하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형제님께서 지적하신 대로 성자에 대해서는 ‘발생’을, 성령에 대해서는 ‘발출’을 사용하고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그래서 본문 ‘발출’을 ‘발생(출생)’으로 수정토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나와서]보다 [와서]로 번역하는 것이 위격들의 관계에 더 명확할 것이라는 형제님의 생각이 제게 매우 영감있게 다가왔습니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생각나는 것이 서방교회와 동방교회의 분리입니다. 소위 ‘필라오케 논쟁’으로 불리는 것으로 로마 가톨릭은 니케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하면서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발출(proceeds)’한다”는 교리를 주장하는 데 반해, 동방정교회는 “성령은 성부로부터 발출한다”는 교리를 주장함으로써 결국 하나가 되지 못했습니다.
역시 인간은 조금만 방심하면 순수한 말씀에서 벗어나 결코 담을 수 없는 하나님의 신비를 인간의 틀에 맞추려고 하는 과정에서 서로 분리되고 반목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새 창조도 성경 말씀 그대로 ‘하나님에게서 나서’로 표현하는 것이 가장 합당한 것임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됩니다. 아직 현학적이고 교리적인 틀에서 온전히 놓임 받지 못한 저를 보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형제님! 늘 하나님의 부활생명으로 충만하시길 바랍니다.
아멘... 그 필리오크가 오늘날 동방과 서방을 분열하게 되는 계기가 된 것과 마찬가지로 그 필리오크(filioque-그리고 아들로부터)에 대한 획일적인 삼위일체 이해가 어쩌면 오늘 개혁신학이 넘지 못하는 커다란 산이 되어 버렸을 것입니다. 어쩌면 이에 대한 포기가 참된 하나님의 경륜에 대한 이해로 가는 핵심적인 요소가 아닐까 생각을 합니다.
형제님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우주도 담을 수 없는 하나님을 시공간의 선험적 틀 안에 있는 우리의 사고에 획일적으로 정리하려는 그것의 한계를 겸허하게 인정해야 함에도 오히려 그 도그마로 재단하려 함으로 인해 넘지 못하는 커다란 산이 되었습니다. 오, 주 예수여!
아멘.... 주 예수여.. 당신이 눈을 더 열어주시고, 참된 지식을 얻게 하시고 그분의 경륜이 내안에 더욱 세겨지고 역사하게 하소서..
적어도 동방신학은 사람이 신격에 있어서가 아닌 생명과 본성에 있어서 하나님이 되는(divinization, deification) 계시의 최고봉의 신학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은 참으로 서방신학이 결코 가질 수 없는 것일수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관심이 참으로 하나님의 경륜이기를 원합니다.
저는 교파교회에 있는 형제입니다. 언젠가 한번 박윤철님께 짤막한 답글을 올렸는데 깊은 인식에 감사드립니다. 신학을 준비하는 중인데 한번 뵙고 싶군요. 토론이 목적이 아니라 박윤철님에게서 많은 것을 배우고 싶기 때문입니다. 한번 빚지고 싶군요.
이렇게 글로 형제님을 만나게 되어 기쁨니다. 아직 생명이나 인식에 있어서 너무나 부족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주 안에서 형제간의 교통은 오히려 서로의 부족을 보고 보완하는 것이기 때문에 가르치고 배우는 차원이 아니고 그야말로 지체간의 교통으로서 얼마든지 기쁘게 받아들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다른 형제님 한분도 저와 글로 교통하는 가운데 올해 대전침례신학교에 들어간 분이 있습니다. 우연이지만 형제님과 비슷하군요! 오직 주의 인도하심이 형제님을 생명과 진리와 하나님의 경륜으로 인도하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새 창조’는 그 분으로부터 직접 낳은 것입니다. 곧 하나님의 분신입니다. 근원적으로 생명적 관계입니다."
전문용어들이 생소하니 다소 어려웁지만 영 안에서 많이 이해가 됩니다.. 박윤철형제님이 계시므로 회복의 진리가 견고해 지고 더 확대되리라 기대해 봅니다. 많은 체류자들의 길잡이 로서 모든 혼돈에서 명철한 판단을 할 수 있도록 계속 생명의 빛으로 도와 주시기 바랍니다..
형제님 의 글너무나감사합니다 계속해서 공급해주시고 수고해주세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