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생활성서 – 소금항아리]
누군가를 존경한다는 건 그를 있는 그대로 있게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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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7/7/연중 제14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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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코 복음 6장 1-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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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는 것에 관하여
예수님께서 고향에 가셨을 때, 사람들에게 큰 ‘존경’을 받지 못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하는데, 어째서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을 “못마땅하게”(마르 6,3) 여겼을까요? 성경에서 “존경받지 못한다”(마태 6,4)라는 뜻으로 사용된 말은 ‘아티모스ἄτιμος’입니다. 이 말의 뿌리는 어떤 것의 가치에 상응하는 ‘값어치’를 뜻하는 ‘티메τιμή’입니다. 제값을 치른다는 건, 사는 사람이 파는 사람 것의 가치를 인정해준다는 의미에서, 그 소유주에게 ‘예를 갖춘다’라는 뜻으로 이해되었고, 제값을 많이 치르면 치를수록 ‘존경한다’라는 의미로까지 확장되었을 것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존경’받지 못했다는 것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마을 사람들은 예수님의 집안 대대로 잘 알고 지내왔던 터라 너무나 가까웠던 것입니다. 타자와의 거리가 좁혀질수록 타자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도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타자와의 거리를 두는 것이 타자를 더 객관화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결과적으로 사람들은 예수님을 객관적으로 타자화하는 데 실패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주관적으로 판단한 채 그를 ‘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앎’이 아닙니다. 진정한 앎이란 나와 타자 사이의 적당한 ‘거리두기’를 통해 저 존재가 있는 그대로 있게 할 때 가능한, 존재 자체에 대한 인식입니다. ‘존경’이란 저 사람이 있는 그대로 있게 함으로써, 그의 존재 가치가 온전히 드러날 때 자연스레 일어나는 인간의 마음입니다. ‘존경’할 수 있는 힘은 나와 그와의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는 데에서 비롯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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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 안드레아 신부(의정부교구)
생활성서 2024년 7월호 '소금항아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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