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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하기를 더디 하는 것이 사람의 슬기요
잠 19:11-19
11 노하기를 더디 하는 것이 사람의 슬기요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 자기의 영광이니라
12 왕의 노함은 사자의 부르짖음 같고 그의 은택은 풀 위의 이슬 같으니라
13 미련한 아들은 그의 아비의 재앙이요 다투는 아내는 이어 떨어지는 물방울이니라
14 집과 재물은 조상에게서 상속하거니와 슬기로운 아내는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느니라
15 게으름이 사람으로 깊이 잠들게 하나니 태만한 사람은 주릴 것이니라
16 계명을 지키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지키거니와 자기의 행실을 삼가지 아니하는 자는 죽으리라
17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 주시리라
18 네가 네 아들에게 희망이 있은즉 그를 징계하되 죽일 마음은 두지 말지니라
19 노하기를 맹렬히 하는 자는 벌을 받을 것이라 네가 그를 건져 주면 다시 그런 일이 생기리라
잠 19:11-19 / 슬기로운 사람은 분통터지는 일이 일어나도 속으로 삭이고, 이웃이 잘못한 일 있다 해도 그 허물 덮어 주어 동네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는다. 12) 사자가 으르렁거리며 울부짖는 소리 간장을 서늘하게 하듯, 임금이 한번 분노하면 그러하다. 그러나 흐뭇해하는 임금의 얼굴은 푸른 들판에 내리는 이슬같다. 13) 미련한 자식은 그 아비의 근심거리요, 바가지 긁는 아내는 구멍 난 지붕에 쉬지 않고 떨어지는 빗물 같은 것. 14) 집과 재산은 부모에게 물려받으나 슬기로운 아내는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다. 15)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면 눈에서 잠 떨어질 날 없고, 목구멍에 거미줄 칠 수밖에 없으리라. 16) 하나님이 이르시는 명령을 지키는 이는 자기 목숨을 지키는 사람이요, 그분의 말씀을 하찮게 여기는 자는 죽임을 당하리라. 17) 여호와께서 빚을 지신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느냐? 가진 것 없어 가난하게 사는 이를 마음 아파하며 친동기간처럼 아끼는 것은 여호와께 빚을 주는 것이니, 반드시 갚아주실 것이다. 18) 자식이란 모름지기 희망 아니냐! 자식이 허튼 길로 나가다가 죽음의 길로 접어들지 않게 하려거든, 매로 다스려라. 19) 성질이 급해 벌컥벌컥 화 잘 내는 사람은 벌받기 십상이고, 그런 사람 편드는 사람도 똑같은 사람이다.
권력자인 왕으로 시작하여 가정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자녀로서 가져야 할 성품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권력자의 감정(11-14) 자기의 감정을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은 다른 사람과 다툼을 피하고 분쟁하지 않습니다. 노하지 말라 하지 않고 더디 하라고 합니다. 성급하게 하지 말고 인내할 때 나오는 슬기가 그 증거입니다. 인내로서(지혜) 나에게 잘못한 사람의 허물을 덮어주고 용서해 주는 것으로 내가 존경받을 수 있게 됩니다. 왕의 노함은 사자의 부르짖음 같아서 어떤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주기도 하지만, 또 다른 사람들에게는 은택을 베풀어 이슬이 생기로 농경생활에 큰 영향력을 주듯이 백성들의 삶을 풍요롭게 합니다. 미련한 아들은 재난과 같아서 그 아버지들을 불만과 낙심 속으로 가라앉히게 합니다. 다투는 아내 역시 떨어지는 물방울 같아서 한 두 방울은 별게 아니지만 계속 떨어지면 바위라도 뚫습니다. 역시 그 남편에게 치명적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내를 주신 목적은 돕는 베필로 도와야 합니다. 아버지가 부자라서 좋은 집과 재물을 물려받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슬기로운 아내는 하나님의 은혜로 얻습니다.
게으름으로 얻는 결과(15-19)게으름은 귀한 시간을 허비합니다. 태만함이란 열심히 하려는 마음이 없고 게으른 사람을 뜻하며 결과는 굶주리게 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잃어버리면 게으름과 태만함이 영적인 삶에서도 나타납니다. 게으름은 죽음과 같은 잠과 굶주림을 초래하며 지혜를 무시하는 것은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는 것입니다. 계명을 지킬 때에 자신의 영혼이 안전하게 보존됩니다. 그러나 행실을 삼가지 않으면 자기 영혼을 죽게 만듭니다. 계명을 지키는 태도가 중요합니다. 5~10계명은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으로 하나님께서 가난한 자를 돌아보기를 원하셨습니다. 우리가 말씀에 순종하여 꾸어주면 하나님께 꾸어 드린 것이 됩니다. 곧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의 모습을 드러내는 방법입니다. 징계가 없다면 버려진 자식이 되어 멸망으로 갑니다. 아이를 키울 때 아담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명심하고 키워야 합니다. 성내는 것은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고 폭발하는 것으로 벌을 받게 됩니다. 성령께서 붙잡아 주시지 않으면 완벽한 절제는 어렵습니다.
적용: 지혜는 하나님께서 하라는 것과 하지 말라는 것을 분별하는 것입니다. 지혜롭게 분별하기를 원할 때 말씀은 내 길의 빛이 됩니다.
조엘 오스틴이라는 목사님이 쓴 책 「긍정의 힘」에 나오는 ‘왕의 생각’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조엘 오스틴은 “왕의 생각은 우리와 차원이 다르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왕 중의 왕이시다. 우리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섬긴다. 그렇기에 우리 인생을 향하신 하나님의 꿈은 우리의 상상보다 훨씬 크고 넓다. 그런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큰 꿈을 그렇게 꾸지 말라는 법은 없다.”고 말합니다.(출처: 이영기 목사)
< 설 교 >
축복을 유통하는 성도입니까
잠 19:17 / 오정호 목사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을 독점(獨占)하는 자로 부름 받은 것이 아니라 ‘유통’(流通)하는 자로 부름 받았습니다. 장로교(長老敎)의 시조(始祖)인 존 칼빈(John Calvin, 1509~1564)은 교회의 정치적ㆍ 사회적 책임을 네 가지로 말했습니다. ①정치 지도자들의 구원을 위한 기도의 책임(제사장적 책임), ②경제 정의의 실현의 책임(시민적 책임), ③집권세력에 대한 권고의 책임(선지자적 책임), ④국가로 하여금 참된 종교를 보호하고 교회를 돕도록 요청할 책임(동반자적 책임)입니다.
책임(責任)을 진다는 것은 성숙한 자의 몫입니다. 책임을 질 때는 사랑과 애정이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감당하겠다는 마음으로 책임지는 자세를 가지게 될 때 주님께서는 교회를 향한 소망의 등불을 계속해서 켜 주실 것입니다.
본문말씀을 통해 가난한 자에 대한 교회의 책무(責務)를 살펴보고 축복의 유통자로서의 성도의 삶의 원리를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교회의 책무입니다(17절a).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주시리라”(17절).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가난한 자들에 대한 편견 없는 존중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가난한 자 역시 더불어 살아야 될 동반자로 인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잠언에서 가난한 자를 배려하는 주님의 말씀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요 궁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존경하는 자니라”(잠언 14:31, 참고 17:5). 예수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유통할 때 삭막한 사회에서 오아시스 같은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잠언 11:24~25).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자신도 윤택하게 될 것을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물질적인 부요뿐 아니라 심령의 부요함은 다른 사람을 윤택하게 하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입니다.
가진 자가 더 가지게 되고, 없는 자와 있는 자 사이의 갈등을 빚는 자본주의 논리와는 달리 하나님 나라의 논리는 신앙과 은총의 논리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교훈은 갖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너끈한 마음으로 용납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의미합니다.
교회가 실천해야 하는 것은 상대가 잘하면 우리도 잘해야 한다는 조건반사(條件反射)의 논리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대로 사랑의 마음으로 품어내는 용납의 논리, 나눔의 논리, 축복의 논리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속한 우리는 이 땅에서의 지배 논리가 아니라 나눔과 섬김의 천국 논리의 지배를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자를 인정하시고 제자된 우리들이 그 책무를 감당하여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요한복음 12:8).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나누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더하시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사도행전 20:35).
신약에서‘가난’의 의미는 경제적으로만 해석할 수 없습니다. 신약의 사상가운데서 가난한 자의 정의는 확대 해석됩니다.
① 육체적으로 가난한 자가 있습니다. 장애와 질병 때문에 선천적으로 어렵게 태어난 분들과 후천적으로 예기치 않은 사고로 장애를 만난 분들이 우리 주변에 많이 있습니다. 장애로 고생하는 분들을 교회와 사회는 따뜻한 마음과 손으로 어루만져야 합니다.
② 영혼이 가난한 자가 있습니다. 세상에서 많이 배웠지만 하나님의 진리와 하나님의 나라에 눈먼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현세 집착적인 사람은 부패합니다. 오는 세상에 대한 진리가 너무 부족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의 진리에 대해서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교회가 해야 할 일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의 진리를 담대하게 외치는 것입니다. 물질을 통해 육신적으로 살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영혼을 살리는 것이 더욱 시급한 교회의 책무입니다.
③ 관계에서 가난한 자들이 있습니다. 군중(群衆) 속에 있지만 고독으로 영혼이 병들어 있는 사람이 많습니다. 교회가 이러한 사람들을 끌어안지 않는다면 이 사람들은 영원한 이방인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고령화(高齡化) 사회를 맞아 나이가 장애가 되지 않도록 교회에서 주님을 배우고 봉사할 수 있도록 교회시스템을 만들어야 합니다.
둘째,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입니다(17b).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주시리라”(17절). 우리가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기에 주님께서 갚아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가난한 이웃을 배려하는 것은 곧 주님을 배려하는 것이며 주님은 이것을 결코 잊지 아니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마태복음 25:31~46).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마태복음 6:20a). 가난한 자를 돌보고 연약한 자에게 배려하는 것은 우리의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놓는 공동체가 바로 교회입니다. 그 축복의 당사자가 바로 성도입니다.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乞食)함을 보지 못하였도다 저는 종일토록 은혜를 베풀고 꾸어주니 그 자손이 복을 받는도다.”(시편 37:25~26). 선조가 베풀면서 구제할 때 주님께서는 그것을 기억하시고 후손의 축복을 약속해주셨습니다. 우리의 다음 세대가 ‘우리 믿음의 선조들은 우리에게 위대한 유산을 물려 주셨구나’라고 간증할 정도로 우리 모두가 나눔의 실천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다음세대를 주님이 책임지실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나누면서 살아야 합니다. 영적인 빈익빈 부익부(貧益貧富益富)의 고리를 끊고 우리 후대를 위해서 나눔의 축복을 공유해야 합니다.
나눔의 공동체로서의 교회를 하나님이 너무 기뻐하십니다. 섬김의 실천자로서 축복을 유통하는 교회가 되기 위한 세 가지 실천 원리를 살펴보겠습니다.
① 하나님께서 주신 것에 감사해야 합니다. 이미 받은 물질과 가족, 은사와 직분, 직장 동역자와 사명 모두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께로부터 왔다는 것을 마음에 깊이 생각하는 감사의 태도가 필요합니다. 불평하는 자는 결코 이웃과 나누지 못합니다. 이미 받은 것에 감사하는 자만이 나눌 수 있습니다.
② 하나님과의 관계를 개선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만큼 이웃을 사랑으로 품을 수 있습니다. 주님과 물질과의 관계에 있어서 거리낌이나 불순종이 없도록 우리의 삶을 재조정해야 합니다. 특별히 교회를 통하여 나눔을 실천한다면 전략적으로, 정기적으로 도울 수 있고, 검증된 대상에 대해 안전하게 도울 수 있고 평가할 수도 있는 이점(利點)이 있습니다. 건전한 구제를 실천할 때 자신도 살리고 남도 살리는 영적인 은혜를 맛보게 됩니다.
③ 나눔과 기부 문화의 첨병으로 자신을 세워야 합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고귀한 신분에 따르는 도덕적 의무, 책임감)를 실천해야 합니다. 랄프 왈도 에머슨(Ralph Waldo Emerson)은 이렇게 말했습니다.“성공(成功)이란 그대가 살았기에 한 영혼이라도 더 평안히 숨쉬게 되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사랑하는 믿음의 가족 여러분,
성령님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모든 것을 깨닫고 감사하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모든 것에 감사하면서, 육체적으로 영적으로 관계에 있어 가난한 우리의 이웃들을 도웁시다. 가난한 자를 배려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따라 용납과 나눔과 축복의 유통자로 자신을 세워 나갑시다.
인생의 아름다운 관
잠 19장 18절 / 이수영 목사
본문 중 8절 말씀에서는 자녀들이 부모의 훈계에 귀를 기울여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내 아들아 네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 한 것입니다. 부모를 공경하고 부모에게 순종하라는 이 말씀은 부드러운 권면이라기보다는 지엄한 명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같은 잠언 30:17에 보면 "아비를 조롱하며 어미 순종하기를 싫어하는 자의 눈은 골짜기의 까마귀에게 쪼이고 독수리 새끼에게 먹히리라" 했습니다. 눈이 골짜기의 까마귀에게 쪼이고 독수리 새끼에게 먹힌다는 것은 장사도 치러지지 않은 채 골짜기에 내다 버려짐을 뜻합니다. 다시 말하면 부모를 공경하지 않고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는 자는 사람으로 인정받을 수 없으며 따라서 장사를 치를 가치도 없는 자라는 말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를 나타내는 비유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아버지와 아들의 비유임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아버지에 비유하셨다는 사실만으로도 부모님의 존재는 우리 모두에게 하늘과 같은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종종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하시는 일을 아버지가 자녀들에게 하는 일과 나란히 놓거나 거기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잠3:11-12에 보면 "내 아들아 여호와의 징계를 경히 여기지 말라. 그 꾸지람을 싫어하지 말라. 대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 같이 하시느니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7:11) 하셨습니다. 따라서 부모님에 대한 공경과 순종은 하나님에게 하듯 해야 하는 것입니다. 십계명에서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제5계명이 우리가 사람들을 향해서 지켜야 할 계명들 중 첫 번째 자리에 오는 것은 그래서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할 때의 "공경하라"는 말은 "여호와를 경외하라", "여호와를 영화롭게 하라" 할 때의 "경외하라", "영화롭게 하라"는 말과 같은 단어입니다. 이것은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얼마나 밀접한 관계에 있는 것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엡6:1-3) 했습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부모의 말씀에는 절대적으로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첫째로 부모에게는 긴 세월이 남겨준 삶의 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잠16:31에서는 "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이라" 했고, 20:29에서는 "젊은 자의 영화는 그의 힘이요 늙은 자의 아름다움은 백발이니라" 했습니다. 백발은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노인의 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이요 아름다운 것입니다. 백발은 하나님으로부터 장수의 복을 받은 증거이고 지혜의 표시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서 긴 세월을 사는 동안 하나님께서 축적시켜주신 온갖 지혜를 갖고 있는 어른들에게 순종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부모님의 말씀에 절대적으로 순종해야 하는 두 번째 이유는 부모님은 자녀들을 무조건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부모님이 하시는 모든 말씀과 일은 다 자녀를 위한 사랑 때문에 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하시며 아무리 악한 자라도 제 자식에게는 좋은 것으로 줄 줄 아는 것이 부모라고 말씀하신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마7:9-11). 부모는 자녀를 징계할 때에도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잠3:12). 또 부모가 자녀를 징계할 때에는 자녀에게 희망을 두고 있기 때문에 하는 것이라 했습니다(잠19:18). 이렇게 어디까지나 사랑과 지혜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에 부모님의 훈계는 늘 감사함으로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인생길을 가장 안전하게 가는 방법입니다. 잠6:20-23의 말씀을 봅니다: "내 아들아 네 아비의 명령을 지키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고 그것을 항상 네 마음에 새기며 네 목에 매라. 그것이 네가 다닐 때에 너를 인도하며 네가 잘 때에 너를 보호하며 네가 깰 때에 너와 더불어 말하리니 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 부모님의 말씀을 항상 마음에 새기고 그대로 행하는 것은 우리를 지키는 인생의 등불이고 빛이며 생명의 길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마땅히 부모님을 공경하고 그 말씀을 잘 받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잠4:1에서는 "아들들아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명철을 얻기에 주의하라" 했고, 23:22에서는 "너를 낳은 아비에게 청종하고 네 늙은 어미를 경히 여기지 말지니라" 했으며, 23:25에서는 "네 부모를 즐겁게 하며 너를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 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사람의 도리입니다.
따라서 이 하나님의 명령을 잘 듣고 좇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며, 그렇지 않는 자는 어리석은 자입니다. 잠10:1에서는 "지혜로운 아들은 아비를 기쁘게 하거니와 미련한 아들은 어미의 근심이니라" 했고, 13:1에서는 "지혜로운 아들은 아비의 훈계를 들으나 거만한 자는 꾸지람을 즐겨 듣지 아니하느니라" 했습니다. 15:5에서도 "아비의 훈계를 업신여기는 자는 미련한 자요 경계를 받는 자는 슬기를 얻을 자니라" 했으며, 15:20에서는 "지혜로운 아들은 아비를 즐겁게 하여도 미련한 자는 어미를 업신여기느니라" 했습니다.
이렇게 자녀들은 마땅히 부모의 훈계를 들어야 한다는 것은 뒤집어 말하면 부모들에게 자녀들을 바로 가르칠 책임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잠22:6에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했습니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고 기뻐한다면 자녀를 징계하면서까지 가르쳐야 하는 것입니다(잠3:12). 잠13:24에서도 "매를 아끼는 자는 그의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 했습니다. 부모는 자녀들을 가르치고 필요할 때에는 징계하기도 하며, 자녀들은 부모의 그 가르침과 징계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따르는 것이 부모자식 간의 올바른 관계이며 온 가족이 기쁨과 평안과 영광을 누릴 수 있는 길입니다. 잠29:15에서는 "채찍과 꾸지람이 지혜를 주거늘 임의로 행하게 버려 둔 자식은 어미를 욕되게 하느니라" 했고, 29:17에서는 "네 자식을 징계하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평안하게 하겠고 또 네 마음에 기쁨을 주리라" 했습니다. 자녀를 바르게 훈계하는 것은 평안과 기쁨을 거두는 일입니다. 자녀를 바르게 훈계하지 않는 것은 불안과 슬픔과 치욕을 자초하는 일입니다.
이렇듯 성경은 일방적으로 자녀들에게만 부모의 가르침에 무조건 순종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부모에 대한 자녀들의 순종을 명할 때에는 언제나 부모가 자녀들에게 바르게 가르칠 것을 동시에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부모가 자녀들에게 가르쳐야 하는 것이 무엇이며 부모의 자녀훈계가 바로 서는 길은 어디에 있습니까? 오늘 본문 7절 말씀이 그 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8절에서 "내 아들아 네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 했거니와 부모의 모든 훈계와 법의 출발점이며 궁극적인 목표가 되는 것이 다름 아닌 하나님 경외입니다. 부모들은 그 무엇보다도, 또 그 무엇에 앞서 하나님 경외하기를 자녀들에게 가르쳐야 합니다. 하나님 경외하기를 가르치지 않고 하는 훈계나 명령은 다 헛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모의 자식교육이 바로 되기 위한 가장 확실한 길은 하나님 경외하기를 제대로 가르치며 그 본을 보이는 것입니다.
본문 9절 말씀이 무엇입니까? "이는 네 머리의 아름다운 관이요 네 목의 금사슬이니라" 한 것입니다. 머리에 쓰는 관과 목에 거는 금사슬은 아름다움과 권위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하나님 경외하는 것을 최고의 지식이요 지혜로 확실하게 가르치고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가 복된 삶의 근본원리임을 분명히 깨닫게 해주면 그것이 바로 우리의 인생에 관을 씌우고 금사슬을 걸어주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부모로부터 그런 교육을 받고 그 배운 바대로 행하는 사람에게는 "머리의 아름다운 관"이 씌워지고 "목의 금 사슬"이 걸릴 뿐 아니라, 같은 아름다움과 권위가 그 부모에게도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기를 가르치고 배우는 것은 우리 인생을 가장 아름답게 하고 가장 존귀하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부모들이 먼저 하나님 경외하기를 그 어떤 세상적 부귀영화에 우선시키고 인생의 최고의 가치요 본분으로 여기며 자녀들이 그 가르침을 잘 따르는 것이 그래서 중요합니다. 먼저 좋은 학교 가고 좋은 직장 얻고 좋은 배필을 얻고 좋은 집을 갖고 평생 먹고 즐길 것 넉넉히 장만해 놓은 후에 하나님 경외하겠다는 생각처럼 어리석은 것은 없습니다. 그것은 앞뒤가 잘못된 생각이며 이루어질 수도 없는 일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시편 128편의 기자가 뭐라고 했습니까?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 네 집 안방에 있는 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 네 식탁에 둘러앉은 자식들은 어린 감람나무 같으리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이같이 복을 얻으리로다" 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친히 일 복, 먹을 복, 아내 복, 자식 복 다 주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인생만사 중 첫 번째 일이며 가장 크고 중요한 일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만사에 참 의미를 부여하고 만사를 복되게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이 행하는 모든 일은 허사가 되고 말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하나님 경외하기를 그 무엇보다도 힘껏 가르치고 삶으로 그 본을 보여야 하며, 자녀들은 그 어떤 가르침보다도 이 가르침을 잘 받들어야 합니다. 잠17:6에 "손자는 노인의 면류관이요 아비는 자식의 영화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손자는 노인의 면류관"이라는 것은 손자들로 인해서 할아버지가 영예롭게 되는 것을 뜻합니다. "아비는 자식의 영화"라는 것은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자랑거리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3대가 다함께 존귀와 영광을 누리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그렇게 될 수 있는 길은 바로 하나님 경외하기를 대대로 잘 가르치고 배우는 데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의 말씀에 순종하기를 힘씀으로써 어른으로부터 젊은 세대에 이르기까지 다함께 행복한 공동체를 이루어가는 우리 교회와 각 가정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잠언 19장 & 성경주석
잠언 19장 흐름정리>본 장은 일상생활 가운데서 드러나는 의인과 악인 혹은 지혜로운 자와 어리석은 자의 차이점을 뚜렷이 대조한다. 그리하여 관용과 인자한 태도를 적극적으로 권장하고 있다. 또한, 여기서는 징계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사람은 누구나 잘못을 범할 수 있다. 인생의 성패는 그러한 잘못을 범했을 때 어떤 태도를 지니느냐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신의 허물을 겸손히 시인하고 훈계와 징책을 받아들이는 자는(20절) 새로운 출발을 기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아들의 장래를 위해서는 징계가 불가피하며(18절), 거만하고 어리석은 자도 징계를 통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25절).
19:1 성실히. “가난하나 정직하다”라는 표현은 이 잠언에서 유래된 것 같다. 이 잠언과 밀접한 평행구는 “미련한” 대신 “부자”를 쓴다(참조 28:6). 어떤 사람들은 효과적인 대조를 나타내기 위하여 여기서도 “부자”로 이해해야 한다고 여긴다. 그러나 이것을 그렇게까지 생각할 필요는 없다(참조 17:20).
19:2 그릇하느니라. 혹은 “표적을 맞추지 못한다.” 이 해석은 문맥과 똑같이 매우 적절하다. 무지와 성급함은 실수, 때로는 죄의 일반적인 원인이다. 좋지 않은 것으로 열거된 다른 행실들에 관해서는 17:26; 18:5; 20:23; 24:23을 참조하라.19:4 끊어지느니라. 참조 14:20
주석.19:5 벌을 면치 못할 것이요. 거짓 증인이 이 세상에서 벌을 면할지는 모르지만 장차 올 세상에서의 벌은 피하지 못한다. 그의 분깃은 성 밖이 될 것이다(계 21:8). 모든 무익한 말과 모든 악한 말이 생각날 것이고 회개하지 않은 자는 그가 받는 벌의 정당함을 깨달을 것이다(참조 출 20:16; 마 12:36). 이 절은 거의 똑같이 9절에서 반복된다.
19:6 너그러운 사람. (「제임스왕역」에는 “the prince”[왕자]로 되어 있음-역자 주). 왕자에게는 일반적으로 재물과 권세가 있기 때문에 왕자의 환심을 사기 위해 모든 기회를 구하지 않는 사람은 별로 없다.19:6 선물을 주기를. 참조 18:16 주석.
19:7 친구. 사람의 형제들까지도 그들에게 요구할 것들을 두려워하여 가난한 자를 미워할 진대 그를 버리는 친구들을 누가 비난할 수 있겠는가? 유일한 예외는 형제보다 더 가까운 그런 친구가 될 것이다(18:24). 이것은 세 부분으로 이루어진 몇 안 되는 잠언 중 하나이다. 어떤 사람들은 본래 정상적인 두 부분으로 이루어진 두 잠언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비록 우리가 그 정확성을 확인할 수는 없지만 더 긴 독법을 가진 「70인역」은 아마도 본래의 내용이 현재의 「마소라 본문」보다 더 길었을 것으로 암시한다. 7절에 대한 「70인역」의 해석은 다음과 같다. “그의 가난한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교우관계에서도 멀어질 것이다. 좋은 명철은 그것을 아는 자에게 다가오고, 지각 있는 자는 그것을 발견할 것이다. 많은 해를 입히는 자는 해악을 이루고, 화나게 하는 말을 쓰는 자는 피하지 못할 것이다.”
19:8 지혜. 문자적으로 “심장.” 고대에는 심장이 지성의 거소로 여겨졌다.
19:9 벌을 면치 못할 것이요. 참조 5절 주석.
19:10 사치하는 것. 히브리어 타아누그(ta‘anug), “우아함”, “사치함.” 미련한 자는 고매한 삶을 타락시키는 영향에 저항할 수 없고, 종은 오만을 발휘하지 않고는 다스릴 수 없다(참조 전 10:6, 7).19:11 더디하는 것. 참조 잠 14:29; 15:18; 16:32; 약 1:19.
19:11 용서하는 것. 어떤 사람들은 정의를 엄격하게 유의한다는 것을 실증함으로써 가장 큰 영광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은 용서가 범죄자를 개심시킬 길을 열 수 있을 때 용서하기에 민첩한 자들에게 나누어진다.
19:12 왕의 노함. 참조 16:14; 20:2.
19:13 재앙. 히브리어 하우오트(hawwot), “삼켜버리는 파멸”, “파괴.” 참조 10:1; 15:20; 17:21, 25.19:13 떨어지는 물방울. 물이 새는 지붕은 동방에서 흔히 있었다. 그리고 끊임없이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는 성가시게 잔소리하는 여자가 그런 것처럼, 집에 사는 사람들의 신경을 자극했다(참조 27:15).
19:14 조상에게서. 조상으로부터라는 의미이다. 대조적으로 슬기로운 아내는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특별한 선물이다(참조 18:22).
19:15 깊이 잠들게. 히브리어 타르데마(tardemah). 아담의 갈빗대로 하와를 창조할 때의 무의식 상태를 묘사하기 위하여 사용된 낱말이다(창 2:21). 타르데마는 창 15:12; 삼상 26:12; 욥 4:13; 33:15; 사 29:10에 나타난다. 게으름은 사람의 감각에 수면효과가 있으므로 사람을 멍하게 만든다. 배고픔이 그런 사람을 기다리는 운명이다(참조 잠 10:4; 12:24; 20:13; 23:21).19:16 자기의 영혼. 참조 16:17.
19:17 꾸이는 것이니. 아무런 가책 없이 가난한 자들을 저버린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이스라엘 백성이 가난한 자들을 돌본 것은 그들에게 하나님이 주신 계시의 증거이다. 이렇게 돌보는 것이 하나님을 우리의 빚을 무를 자로 삼게 된다는 사상은 주목할 만한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가난한 자들에게 한 봉사를 당신에게 직접 봉사한 것으로 여긴다는 주장과 일치한다(마 25:40; 참조 잠 11:24; 28:27).19:18 죽일 마음은 두지 말지니라. 이 구절은 문자적으로 “그를 죽이고자 네 마음을 고양시키지 말라”는 말이다. 「제임스왕역」은 아들이 징계를 받으면서 우는 것이 아버지가 그 후에 자녀를 영원히 잃어버리고 우는 것보다 낫다고 가르치는 중세의 유대인 해석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와 반대로 문자적인 번역은 이 구절을 그런 진노의 벌이 아들을 죽이지 않도록 하라는 경고가 되게 한다. 또한 그것은 아들이 멸망에 빠지지 않도록 징계를 등한히 하지 말라고 아버지에게 하는 경고가 될 수도 있다. 이스라엘에서 타락한 아들은 재판을 받기 위해 장로들 앞에 소환되었고, 불가피한 경우에는 처형되었다(신 21:18~21).
19:18 일찍 징계하는 것이 좋다. 나중에 젊은이가 되어 악한 길에 빠진다면 개전의 희망이 적어진다. 너무도 흔히 부모들은 자녀가 이치에 맞게 생각할 나이가 될 때까지 징계를 연장한다. 그러나 그때에는 거의 깨뜨릴 수 없는 행동의 습관에 사로잡혀 있는 것을 깨달을 뿐이다(참조 13:24; 23:13).
19:19 벌. 분노를 다스리지 못하는 자에게는 이전에 배운 교훈들이 효력이 없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격노의 열기 속에서 잊혀지기 때문이다. 만일 그대가 권세자들에게 사태를 파악했다면 잘못을 사과하라고 독촉했다면, 그대는 그 순간 실수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실로 그는 자기의 업무를 그대가 방해했다는 이유로 그대에게 노를 돌리기 십상일 것이다.
19:20 필경은. 변화시키는 성령의 능력이 없으면, 사람들은 대개 나이가 들어도 어렸을 때와 같은 상태에 머문다. 지혜의 교훈을 배워야 할 때는 생애의 초기이다. 매우 어릴 때는 때때로 칭찬거리도 되고 용서받기도 하는 어린애 같은 무지와 토라짐이 그 후에도 계속 가장된 형태로 나타나면 혐오스럽고 불쾌해진다.
19:21 여호와의 뜻. 죄악적인 사람들과 타락한 천사들은 여호와께서 그의 영원한 목적을 수행하시는 것을 막기 위해 갖은 수법을 고안해 낸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뜻은 성취될 것이고 우주는 마침내 죄와 죄인들로부터 깨끗해질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종들이 그들의 계획을 하나님의 통할하시는 섭리에 맡기기를 바라신다(잠 16:9; 사 46:10; 약 1:17).
19:22 사모함. 첫째 구절의 뜻은 분명하지 않다. 어떤 사람들은 그 의도가 박애의 중요성을 생각하는 의미에서 이 말을 한다고 해석한다. 비록 작은 것에 불과하지만 그가 도울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가난한 사람은, 많은 것을 약속하지만 그 말을 믿을 수 없는 사람보다 더 큰 영광을 받을 것이다(참조 3:27, 28). 「70인역」은 이 절을 “인자함은 사람의 열매이고 가난한 사람은 거짓말하는 부자보다 낫다”라고 번역했다.
19:23 족하게 지내고. 어떤 사람들은 후세의 약속된 기쁨을 위하여 지금의 쾌락을 희생하는 것으로 보고 종교가 건강과 행복을 막는 장애물이라고 생각해 왔다. 진정으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면 죄악적인 오락이나 짜증나게 하는 걱정들이 약화시키지 않는 육체적인 활력이 생긴다. 걱정하는 그리스도인은 절반만 그리스도인이다. 모든 염려를 주께 맡기고(벧전 5:7) 부여받은 능력으로 맡겨진 임무를 수행하는 여호와의 종은, 하늘의 모든 천사가 궁극적으로 선이 아닌 것은 그에게 생기지 않도록 지켜줄 것이라는 확신 속에 쉬게 된다(참조 롬 8:28).
19:24 그릇에. (「제임스왕역」에는 “in his bosom”[그의 품에]로 되어 있음-역자 주). 문자적으로 “그릇에.” “그의 품에”라는 번역은 「70인역」과 「수리아역」과 어떤 중세 유대인 주석자들에게서 비롯된다. 이 비유는 여럿이 그릇을 나눠 쓰는 고대의 풍습에서 유래된 것이다. 게으른 자는 손을 음식 속에 넣고 분명히 맛있는 음식을 고르고 있다. 솔로몬은 게으른 자가 음식을 입으로 올리기를 괴로워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풍자적으로 암시한다(참조 26:15).
19:25 거만한 자를 때리라. 거만한 자는 너무 완고해서 어떤 징계도 그에게 도움이 안 될 것으로 여겨지지만, 아직 개심에 이르지 못한 단순한 사람은 경고를 받아들이고 지혜를 배울 것이다. 명철한 사람은 벌을 받거나 남이 벌을 받는 것을 보지 않아도 된다. 그는 간단한 책망에도 빨리 귀를 기울인다(참조 딤전 5:20).
19:26 쫓아내는 자. 그는 그의 태도로 또는 부모를 궁핍하게 만들어 집을 잃게 함으로 어머니를 쫓아낸다(참조 10:5; 17:2).
19:28 공의를 업신여기고. 그는 정의가 실현되는 데 관심이 없기 때문에 친구를 돕기 위해서나 정직한 자에게 손해를 주기 위해서 즐겨 거짓 증언을 한다. 그는 그런 행동에 대하여 하나님의 율법이 주는 경고에는 관심이 없다(출 20:16; 레 5:1).19:28 죄악을 삼키느니라. 참조 욥 15:16; 20:12; 롬 1:32.
19:29 심판. 죄악에 대한 사랑과 정직한 자에게 입힌 피해는 벌을 받지 않은 채 간과되지 않을 것이다. 악인들을 위한 징벌은 준비되어 있다.
출처: https://bible-story.tistory.com/693 [BIBLE STORY:티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