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에는 5부족 집단체제의 성격이 강했으나, 중앙집권이 확립된 뒤에는 관료제가 형성되었습니다. 관료의 임명은 원칙적으로 왕이 했고, 관료는 어디까지나 왕의 정치를 실현하고 보필하는 업무만 하였으므로 특별히 왕권이 약화되거나 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왕권강화의 기반이자 상징이며, 왕의 통치를 실현하는 수단이였지요.
2. 귀족회의에서 선거로 선출된 현재의 수상과 비슷한 관직입니다. 왕권이 약화된 이후에는 임기도 불분명해지고 귀족 중 가장 강력한 자가 스스로 대대로를 칭하고 다니긴 했습니다만, 왕의 권위에 분명히 아래에 있었습니다.
3. 초기 고구려는 소노, 절노, 순노, 관노, 계루의 5개부족에 의한 연합국가의 성격이 강했습니다. 따라서 고구려의 영토라 함은 각 부족이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5개의 지역에 의한 것이었지요.
하지만 중앙집권이 실현되면서 '어디 부족이 다스리고 있으니까 어디 지역'의 차원에서 '여기에서 여기까지 나눠서 통치한다' 라는 식으로 단순히 통치의 효율성을 위한, 행정적인 편의에 의하여 나누어진것이 5부라고 보시면 이해가 빠를 것입니다.
사회구조 자체가 5개부족 중심으로 되어 있어서 실제로는 5개부족이 다스리는 지역이 대부분 그대로 나눠지긴 했지만, '부족중심'이 아니라 '중앙정부중심'으로 바뀌는 것과 같은 상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4. 내부(계루부), 서부(소노부), 북부(절노부), 동부(순노부), 남부(관노부) 로 나누었습니다.
첫댓글 5부족 중에 "노"짜는 중국의 한족들이 고구려 5부족을 깍아내리기 위해 바꿔놓은 글자라고 합니다.
고국천왕 이전에 고구려는 중앙집권이 아닌 5부족이 중심이 된 귀족연합체제였죠. 그리고 태조 이전 고구려 황실가는 계루부가 아닌 소노부였죠
인터넷 네이버지식인에서 습득한 내용을복사해서 올린건데요 제로니스 님의 말은 어디에서 근거를 둔것인지요?
원래 고구려에서는 연나, 환나, 관나, 계루, 등 이와 같고 또 하나는 기억이 않나서 모르겠고, 원래는 이렇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