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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7:13-14> 13 장로 중 하나가 응답하여 나에게 이르되 이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냐 14 내가 말하기를 내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하니 그가 나에게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13절 말씀을 다시 보지요. ‘장로 중 하나가 응답하여 나에게 이르되 이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냐?’ 천상에 있는 무리들에 대해서 천상의 존재인 24장로 중 하나가 아직 세상의 존재인 사도 요한에게 묻고 있는 겁니다. 그 장로는 요한이 그 답을 알고 있을 거라 예상하고 질문했을까요? TV나 유튜브에 보면 어떤 질문을 하더라도 그 즉석에 시원하게 대답해 주는 사람도 있고, 어떤 어려운 상황에 대해 상담을 의뢰하면 다 해결되게 해주는 프로그램도 있지요. 그렇게 해서 유명해지면 마치 그들이 하나님 같이 여겨지기도 하고, 그래서 수많은 추종자들이 생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세상 모든 지식과 기술을 알고 있어도 여전히 세상에는 아는 것보다는 모르는 게 많고, 그래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보다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더 많습니다. TV나 유투브에 방영되는 것은 해결된 것만 보여주는 것이고, 실제로해결될 수 없는 것은 아예 취급하지도 않지요. 물론 그 강사들이 능력이 많은 것도 사실이고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 탁월한 것도 사실이지만 여전히 해결될 수 없는 상황들이 훨씬 많습니다. 저 역시 벌써 목사 된 지가 35년이 되었고, 교육전도사 시절까지 합치면 40년이나 되었는데 솔직히 여전히 모르겠습니다. 성경책만 펼치면 설교가 저절로 나올 만도 한데 여전히 며칠씩 붙잡고 씨름해야 주일 설교 한편 간신히 작성하고, 때로는 새벽기도회 겨우 10-15분 설교하는 것 때문에 하루 내내가 걸리기도 하지요. 어떤 상황 앞에서 적절한 성경구절이 떠올려지기도 하지만 여전히 많은 경우 그 상황에서 어떤 성경말씀을 적용해야 할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세상에서는 이렇게 목사직을 계속하고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여전히 초등학교 1학년생 같이 아무 것도 모른다고 고백할 수 밖에 없지요. 우리 모두 다 그렇습니다. 세상에서야 내가 살아온 나이만큼 경험도 많아 세상 사는 것에 대해 좀 아는지 모르지만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인생에 대해 논쟁하겠습니까? 내가 내 전공분야에서는 다른 사람보다 지식도 경험도 많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 앞에서도 전문가 행세를 하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14절에서 사도요한처럼 말할 수 밖에 없습니다. 14절을 보면 ‘내가 말하기를 내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하니’ 그렇습니다. 아무리 요한이 예수님의 제자였고, 그래서 사도라는 가장 소중한 직책까지 가지고 있다 해도 하나님이나 예수님께서 묻는 질문도 아닌, 천상의 24장로 중 하나가 묻는 질문에 대해서도 요한은 대답하지 못하지요. 그래서 ‘내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당신이 아신다는 것은 나는 모른다는 고백이기도 하지요.
자주 말씀드리지만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의 은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깨닫는 신앙이고, 또 한가지는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사람을 향해서도 겸손할 수 있는 것을 깨닫는 신앙입니다. 은혜를 깨달으면서 하나님께서 높고 위대하신 분임을 고백하고, 그 하나님 앞에서 먼저 하나님을 늘 앞세우는 겸손함을 지니는 거죠. 그 겸손함으로 사람끼리 서로를 대할 때에도 겸손하게 대하는 겁니다. 지금 사도요한이 우리와는 차원이 다른 천상세계에 대한 환상을 보는 것은 요한이 능력과 지식이 많아서가 아니라 바로 이런 겸손이 바탕이 되면서 이 세상을 뛰어넘는 새로운 생명의 세계를 보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천국은 잘난 사람, 잘난체하는 사람이 가게 되는 곳이 아니라 예수님의 산상수훈의 말씀처럼 심령이 가난한 자, 그래서 진실하게 겸손할 수 있는 사람이 갈 수 있는 곳이지요.
흰 옷을 입은 무리들에 대해서 14절 후반부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두 가지를 말하고 있지요. 하나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지금 사도요한 시대에 예수를 믿는 믿음의 사람들은 누구나 박해의 고통을 받고 있지요. 본문의 표현처럼 큰 환난 가운데 있는 겁니다. 세상에서는 박해를 당하고 큰 환난을 당하면서 남들보다 고통스럽고, 힘들고, 무시와 멸시를 당하고, 불리한 조건들을 안고 살아가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인생에 실패한 자들은 아니라는 거죠. 예수님도 십자가에 못박혀 죽는 처참함을 겪으셨지만 그래서 예수님을 실패하신 분이라고 우리가 생각하나요? 인생의 성공과 실패를 세상적인 기준으로만 본다면 예수님도 그리고 지금 큰 환난을 겪고 있는 사도요한 시대 기독교인들도 다 실패자들이겠지요. 기독교 신앙은 그런 세상적인 기준으로만 판단하는 것을 거부합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시각, 특히 사랑과 진리와 정의와 진실하심의 시각으로 우리를 보시는 거죠. 그럴 때에 세상에서 먼저 된 자가 하나님 앞에서는 가장 나중 된 자가 되고, 세상에서 나중 된 자들이 하나님 앞에서는 가장 먼저 될 자가 많은 겁니다.
또 한가지 흰 옷 입을 사람들에 대해서 하신 말씀이 14절 마지막에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흰 옷을 입은 결정적인 요인은 큰 환난을 당해서가 아니라 바로 어린 양이신 예수님의 보혈의 피에 우리의 죄와 어두움과 삶의 그늘과 죽음의 권세까지 씻었기 때문이지요. ‘나의 죄를 씻기는 예수의 피밖에 없네’ ‘예수 십자가에 흘린 피로서 그대는 씻기어 있는가?’ ‘예수는 우리를 깨끗케 하시는 주시니, 그의 우리를 눈보다 더 희게 하셨네’ 많은 소위 보혈 찬송이라는 찬송들이 있습니다. 우리를 천국에 이르게 하시고, 천국에서 영원토록 흰 옷을 입고 하나님과 어린 양 예수께서 계신 보좌를 향해 기쁨과 감사와 영광의 찬송을 부르게 하시는 것은 오직 어린 양이신 예수님의 보혈의 은총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