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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역사(海東繹史)> 속집(續集) 제12권(第十二卷)
지리고(地理考) 12(十二)
조선(朝鮮)
<번역문(飜譯文)>
○ 조선(朝鮮)의 강역(疆域)은 삼면(三面)이 바다로 막혔고, 북쪽은 두만강(豆滿江)과 압록강(鴨綠江)을 경계(境界)로 하였는바, 지역(地域)이 전(前) 시대(時代)보다 훨씬 더 넓다.
《홍서(鴻書)》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요동은 옛날의 병주(幷州)와 영주(營州) 지역이다. 그 뒤쪽은 사막(沙漠)이고 앞쪽은 바다이다. 그 남은 기운이 조선국이 되었다.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조선국은 동쪽, 서쪽, 남쪽은 바다에 닿았고, 북쪽은 여직(女直)과 이웃하였으며, 서북쪽은 압록강에 닿았다. 동서 간의 거리는 2000리이고, 남북 간의 거리는 4000리이다. 국성(國城)에서 경사(京師)까지는 3500리이고, 남경(南京)까지는 4000리이다. -《화한삼재도회(和漢三才圖會)》에는 이르기를,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에 따르면 조선의 10리는 우리의 1리이다. 일본의 거리로 계산하면 조선국은 동서 간의 거리가 200리이고, 남북 간의 거리가 400리이다.” 하였다.
《대청일통지(大淸一統志)》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조선은 성경(盛京)에서 동쪽으로 1800리 되는 곳에 있다. 동쪽으로는 바다까지가 770리이고, 남쪽으로는 바다까지가 1300리이고, 서남쪽으로는 바다까지가 800리이고, 서북쪽으로는 압록강까지가 750리이고, 북쪽으로는 구련성(九連城)까지가 1115리이다. 조공하는 길은 봉황성(鳳凰城)에서 연경(燕京)까지가 3096리이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경성에서 동쪽으로 강릉부(江陵府)까지가 600리이고, 서쪽으로 풍천부(豐川府)까지가 560리이고, 남쪽으로 해남현(海南縣)까지가 1007리이고, 북쪽으로 온성부(穩城府)까지가 2101리이다. 동서 간의 거리는 합하여 1162리이고, 남북 간의 거리는 합하여 3108리이다.
○ 압록강(鴨綠江)과 두만강(豆滿江) 바깥쪽은 모두 성경(盛京)에서 관할(管轄)하는 변계(邊界)이다.
《조선부(朝鮮賦)》 주(注)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그 나라의 동남쪽은 모두 바다에 접해 있고 서북쪽은 건주(建州)이며, 정북쪽은 모련(毛憐)과 해서(海西)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건주는 지금의 흥경(興京) 지방이고, 모련과 해서는 지금의 영고탑(寧古塔) 등지이다.
《성경통지(盛京通志)》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성경(盛京)의 강역은, 동남쪽으로는 희객탑산(希喀塔山)까지가 2000여 리로, 조선과 경계이다. ○ 봉천장군(奉天將軍)이 관할하는 강역은 동남쪽으로는 진강성(鎭江城)까지가 540여 리로, 조선과 경계이다. ○ 봉황성(鳳凰城)의 성수(城守)는, 동쪽으로는 애강(靉江)까지 120리로 조선과 경계이고, 동남쪽으로는 의주강(義州江)까지 120리로, 조선과 경계이다. ○ 영고탑은 남쪽으로 토문강(土門江)까지가 600리로, 조선과 경계이다. ○ 오라(烏喇) 성수(城守)는 남쪽으로 장백산(長白山)까지 1300여 리이며, 그 남쪽은 조선과 경계이다. ○ 혼춘(渾春)은 서쪽으로 토문강까지가 20리로, 조선과 경계이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강희(康煕) 54년(1715)에 혼춘(渾春)의 고이객제(庫爾喀齊) 등지가 조선과 단지 토문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으므로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오가다가 일을 일으킬까 염려하여, 장수 안도립타(安都立他)로 하여금 목노(木弩), 방옥(房屋), 와포(窩舖)를 즉시 철거하여 영고탑에서 파견한 관병(官兵)의 둔장(屯莊)과 더불어 모두 강에서 조금 먼 곳으로 옮기게 하였으며, 이후로는 연강(沿江) 근처에서 집을 짓거나 농사를 짓는 것을 모두 엄하게 금지시키도록 하였다.
《대청회전(大淸會典)》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건륭(乾隆) 12년(1747)에 조선의 국왕이 봉황성의 성책(城柵)을 설치하는 것과 망우초(莽牛哨)에 군사를 설치하는 것 및 성책 밖에 개간하는 것을 정지해 준 일에 대하여 사은(謝恩)하였다.
○ 경내(境內)를 나누어서 팔도(八道)로 만들었다.
《잠확유서(潛確類書)》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조선국은 동쪽, 서쪽, 남쪽 삼면은 바다에 닿아 있고, 서북쪽은 압록강에 닿았으며, 북쪽은 여진과 닿았다. 팔도로 나누었는데, 가운데를 경기(京畿)라 한다. 동쪽을 강원도(江原道)라 하는데, 본디 예(濊), 맥(貊) 지역이다. 서쪽을 황해도(黃海道)라 하는데, 옛 조선(朝鮮), 마한(馬韓)의 옛 지역이다. 남쪽을 전라도(全羅道)라 하는데, 본디 변한(卞韓) 지역이다. 동남쪽을 경상도(慶尙道)라 하는데, 바로 진한(辰韓) 지역이다. 서남쪽을 충청도(忠淸道)라 하는데, 모두 옛 마한(馬韓) 지역이다. 동북쪽을 함경도(咸鏡道)라 하는데, 본디 고구려 지역이다. 서북쪽을 평안도(平安道)라 하는데, 본디 조선의 옛 지역이다. 나누어 통치하는 군(郡)이 40개, 부(府)가 36개, 현(縣)이 70개이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조선국은 팔도이며, 나누어 통치하는 군이 41개, 부가 33개, 주가 38개, 현이 70개이다.
○ 가운데는 경기(京畿)라고 한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조선 경기의 치소(治所)는 국성(國城)으로, 조선의 도읍지이다. 한성(漢城)이라고도 한다. 명(明)나라 초기에 고려 왕이 개주(開州)에서 이곳으로 옮겨 왔다. 7도의 가운데에 있으므로 사새(四塞)라고 칭한다. 관할하는 군이 3개로 양근군(楊根郡), 풍덕군(豐德郡), 수성군(水城郡)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수원부(水原府)의 옛 호칭이다.- 이고, 부가 3개로 한성부(漢城府), 개성부(開城府), 장단부(長湍府)이고, 주가 7개로 양주(楊州) -삼가 살펴보건대, 《무비지(武備志)》에는 상주(傷州)로 잘못 되어 있다-, 광주(廣州), 윤주(潤州) -삼가 살펴보건대, 윤주에 대해서는 상고할 수가 없다-, 여주(驪州), 과주(果州) -삼가 살펴보건대, 고려 때의 주 이름으로, 지금은 과천현(果川縣)으로 개칭하였다-, 곡주(谷州) -삼가 살펴보건대, 지금의 곡산부(谷山府)로 황해도에 속한다-, 파주(波州) -삼가 살펴보건대, 파주(坡州)의 오기(誤記)이다.- 이고, 현이 3개로 교하현(交河縣), 삼등현(三登縣), 토산현(土山縣)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토산(土山)은 지금의 상원군(祥原郡)이다. 삼등과 상원은 모두 평안도에 속한다.- ○ 지(志)에 이르기를, “조선에는 삼도(三都)가 있는데, 평양(平壤), 한성(漢城), 송악(松嶽)을 이른다.” 하였다. ○ 풍덕성(豐德城)은 국성의 남쪽에 있는데, 조선에서 이곳에 풍덕군을 설치하였다. 명나라 만력(萬曆) 20년(1592, 선조25)에 왜적이 부산(釜山)으로부터 몰래 임진(臨津)을 건넌 다음 군사를 나누어서 풍덕군을 함락하였는데, 그곳이 바로 이곳이다.
《조선부》 주(注)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홍무(洪武) 25년(1392, 태조1)에 조선이 지금의 한성부로 천도(遷都)하고서 개성(開城)을 유도(留都)로 삼았다.
《화한삼재도회》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조선의 경기는 바로 한양성으로, 가운데에 있다. ○ 그 성은 동쪽에는 여강(麗江), 남쪽에는 한강(漢江), 서쪽에는 서강(西江)의 물이 넘실대고 있고, 남산(南山), 북산(北山), 삼각산(三角山) 등의 산이 높이 솟아 있다. 서울은 사방이 40여 리인데 바위를 자르고 돌을 쌓아 담장을 만들었으며, 푸른 돌로 사방의 벽을 쌓았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경기는 본디 고려의 양광도(楊廣道) 지역이다. 태종조에 사방의 멀고 가까움을 참작하여 개성 동쪽 지역 및 양광도 소사(素沙) 북쪽 지역을 합하여 경기로 만들었다. 관할하는 부가 1개, 목(牧)이 3개, 도호부가 10개, 군이 9개, 현이 13개이다.
○ 경기(京畿)의 남(南)쪽은 충청도(忠淸道)라고 한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충청도의 치소는 충주(忠州)로, 국성의 서남쪽에 있다. 본디 마한의 옛 지역이다. 왕경이 팔도의 가운데에 있어서 동쪽으로 막은 것이 조령(鳥嶺)과 충주이고, 서쪽으로 막은 것이 남원(南原)과 전라(全羅)이다. 지(志)에 이르기를, “왕경은 조선의 도회(都會)이다. 함경도와 충청도가 기각(掎角)의 형세를 이루어서 아울러 천험이라고 칭해진다.” 하였다. 관할하는 군이 4개로 청풍군(淸風郡), 온양군(溫陽郡), 천안군(天安郡), 임천군(臨川郡) -삼가 살펴보건대, 《무비지》에는 임천(林川)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이 맞다.- 이고, 주가 9개로 충주(忠州), 청주(淸州), 금주(衿州)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서천(舒川)의 잘못된 표기이다. 이에 대한 내용은 산수고 금강조(山水考錦江條)에 상세하게 나온다-, 정주(靖州) -삼가 살펴보건대, 정주에 대해서는 상고할 수가 없다-, 행주(幸州) -삼가 살펴보건대, 고려 때의 주 이름으로, 지금은 경기 고양현(高陽縣)에 병합되었다-, 흥주(興州) -삼가 살펴보건대, 대흥현(大興縣)을 가리키는 듯하다-, 예주(禮州)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예산현(禮山縣)이다-, 홍주(洪州)이고, 현이 7개로 영춘현(永春縣), 보은현(報恩縣), 연산현(連山縣), 부여현(扶餘縣), 석성현(石城縣), 연기현(燕岐縣), 보령현(保寧縣)이다. ○ 공주성(公州城)이 충주의 서남쪽 경계에 있다. 그 동남쪽은 전라도의 남원부(南原府)와 가깝다. 명나라 만력 25년(1597)에 왜적이 남원에 들어왔는데, 마귀(麻貴)가 군사를 출동시켜 공주에 주둔해 있으면서 막은 곳이 바로 이곳이다. 또 청주성(淸州城)이 충주의 서쪽에 있는데, 그 동쪽은 천안군(天安郡)에 접하였으며, 천안군의 서남쪽은 공주와 경계를 접하였다. ○ 직산(稷山)은 충주의 서쪽에 있으며, 직산감(稷山監)을 두었다. 명나라 만력 25년에 왜적이 전라도를 함락시키고 북쪽으로 올라왔는데, 마귀가 군사를 출동시켜 직산을 지켜 왜적의 예봉을 막았다. 또 청산(靑山)이 있는데, 직산과 서로 가깝다. 지(志)에 이르기를, “직산의 남쪽은 바로 천안군성(天安郡城)으로, 남쪽으로 전주(全州)로 내려가는 요도(要道)이다.” 하였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충청도는 고려 초에 양광도(楊廣道)라고 칭하였고, 뒤에 충청도로 고쳤다. 조선에 들어와서는 그대로 따랐으며, 관찰사영(觀察使營)은 공주(公州)에 있다. 목 4개, 도호부 1개, 군 12개, 현 37개를 관할한다.
○ 경기(京畿)의 동(東)쪽은 강원도(江原道)라고 한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강원도의 치소는 강릉부(江陵府)로, 국성의 동쪽에 있다. 본디는 예(濊), 맥(貊) 지역이며, 한(漢)나라 때에는 임둔군(臨屯郡)의 경내였다. 관할하는 군이 7개로 오성군(忤城郡) -삼가 살펴보건대, 간성(杆城)의 잘못된 표기이다-, 평해군(平海郡), 통천군(通川郡), 영월군(寧越郡), 송악군(松岳郡)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경기 개성부의 옛 호칭이다-, 정선군(旌善郡), 고성군(高城郡)이고, 부가 5개로 강릉부(江陵府), 회양부(淮陽府), 산척부(山陟府)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삼척(三陟)의 잘못된 표기이다. 《무비지》에는 삼보(三步)로 되어 있는데, 역시 잘못된 것이다-, 양양부(襄陽府), 철원부(鐵原府)이고, 주가 4개로 원주(原州), 강주(江州) -삼가 살펴보건대, 강주에 대해서는 상고할 수가 없다-, 괴주(槐州) -삼가 살펴보건대, 지금의 괴산현(槐山縣)으로, 충청도에 속한다-, 명주(冥州) -삼가 살펴보건대, 《무비지》에는 명주(溟州)로 되어 있는데, 이는 바로 강릉의 옛 호칭으로, 잘못하여 겹쳐 기록되었다.- 이고, 현이 10개로 평강현(平康縣), 안창현(安昌縣) -삼가 살펴보건대, 고려 때의 현 이름으로 뒤에 고성군(高城郡)에 병합되었다-, 기린현(麒麟縣) -삼가 살펴보건대, 고려 때의 기린현(基麟縣)으로, 뒤에 춘천부에 병합되었다-, 주천현(酒泉縣) -삼가 살펴보건대, 고려 때의 현 이름으로, 뒤에 원주에 병합되었다-, 단성현(丹城縣) -삼가 살펴보건대, 경상도에 속한다-, 인제현(麟蹄縣), 울진현(蔚珍縣), 서화현(瑞和縣) -삼가 살펴보건대, 고려 때의 현 이름으로, 뒤에 춘천에 병합되었다-, 흡곡현(歙谷縣)이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강원도는 고려 때 대관령(大關嶺) 동쪽 지역은 동계(東界)에 예속되었고, 서쪽 지역은 교주도(交州道)에 예속되었다. 조선 초기에 이를 합하여 강원도라고 하였으며, 관찰사영(觀察使營)은 원주에 있다. 대도호부 1개, 목 1개, 도호부 7개, 군 5개, 현 12개를 관할한다.
○ 경기(京畿)의 서(西)쪽은 황해도(黃海道)라고 한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황해도의 치소는 황주(黃州)로, 국성의 서쪽에 있다. 옛 고구려와 마한의 옛 지역이다. 거느리는 군이 2개로 수안군(遂安郡), 평나군(平那郡) -삼가 살펴보건대, 《여지승람(輿地勝覽)》을 보면, “평산부(平山府)는 옛 한나라 때의 평나군(平那郡)이다.” 하였는데, 이는 대개 근거가 없는 설이다. 그런데 《대청일통지》에서는 이 잘못된 설을 그대로 따랐다.- 이고, 부가 3개로 평산부(平山府), 서흥부(瑞興府), 승천부(承天府)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승천(昇天)의 잘못된 표기로, 고려 때 지금의 경기 풍덕부(豐德府)를 승천부(昇天府)라고 칭하였다.- 이고, 주가 5개로 황주(黃州), 백주(白州), 해주(海州), 애주(愛州)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의주(義州)로, 평안도에 속한다-, 인주(仁州) -삼가 살펴보건대, 고려 때의 주 이름으로, 지금은 인천부(仁川府)로 개칭하였다. 경기에 속한다.- 이고, 현이 8개로 안악현(安岳縣), 삼화현(三和縣), 용강현(龍岡縣), 함종현(咸從縣), 강서현(江西縣), -삼가 살펴보건대, 삼화현 이하의 네 현은 지금은 평안도에 속한다.- 우봉현(牛峯縣) -삼가 살펴보건대, 고려 때의 현 이름으로, 지금은 평산부에 속한다-, 문화현(文化縣), 장연현(長淵縣)이다. ○ 평산성(平山城)은 황주에서 동북쪽으로 100리 되는 곳에 있으며, 혹은 옛 이름을 증산부(甑山府) -삼가 살펴보건대, 증산현(甑山縣)은 평안도에 속하는데, 잘못하여 평산의 옛 호칭이라고 하였다.- 라고도 한다. 서쪽으로는 황주와 접하였으며, 동쪽으로는 평양과 연결된다. 이곳과 가까운 곳으로는 경산(瓊山) -삼가 살펴보건대, 경산에 대해서는 상고할 수가 없다.- 이 있다. 지금은 평산부가 되었다.
《조선부》 주(注)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황해도는 그 북쪽은 모두 산이며, 그 남쪽은 바다에 닿았다.
《전목재시집(錢牧齋詩集)》 주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조선팔도도(朝鮮八道圖)를 보면, 토산(兎山)은 황해도에 속하였는데, 동쪽으로는 삭녕군(朔寧郡)까지 16리이고, 남쪽으로는 삭녕군과의 경계까지 24리이고, 서쪽으로는 우봉(牛峯)과의 경계까지 33리이고, 신계(新溪)와의 경계까지 69리이며, 북쪽으로는 안협(安峽)과의 경계까지 19리이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황해도는 고려 때에 서해도(西海道)였다. 조선 태조 초에 풍해도(豐海道)로 고쳤다가 태종조에 개성 서쪽 지역이 와서 속하여 황해도로 개칭하였다. 관찰사영은 해주에 있으며, 목 2개, 도호부 5개, 군 7개, 현 9개를 관할한다.
○ 충청도(忠淸道)의 남(南)쪽은 전라도(全羅道)라고 한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전라도의 치소는 전주(全州)로, 국성의 남쪽에 있다. 본디 변한(弁韓) 지역으로, 뒤에 백제국이 되었다. 당나라 현경(顯慶) 5년(660)에 소정방(蘇定方)이 백제를 정벌하고서 백제 왕을 사로잡은 다음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 등 5도독부를 두었다. 그 뒤에 신라에 합병되었다. 오대(五代) 시대 때 고려가 그 지역을 차지하였다. 《고려도경(高麗圖經)》을 보면, 조선의 지계(地界)는 정북쪽의 장백산(長白山)에서 산맥이 발원하여 남쪽으로 전라도의 경계를 지나 서남쪽으로 바다에 닿았으며, 일본의 대마도(對馬島) 등 여러 섬이 조선 바다의 동남쪽에 치우쳐 있으면서 경상도의 부산(釜山)과 서로 마주 보고 있다. 왜선(倭船)이 부산에 이르고서도 전라도를 넘어 서해(西海)에 이를 수 없다. 그러므로 팔도 가운데에서 오직 전라도 한 도만이 북쪽에서 볼 때 정남쪽에 있으며, 그 서쪽은 요동(遼東)과 대치하고 있다. 일본이 요계(遼薊) 지방과 동떨어져 있어서 해도(海道)를 통할 수 없는 것은 조선이 있는 데에 힘입어서이며, 조선이 변경을 굳게 지키면서 여러 섬들을 제압할 수 있는 것은 전라도가 있는 데 의지해서이다. 지(志)에 이르기를, “전라도 지역은 남쪽으로 큰 바다에 임해 있고, 동쪽으로 경상도에 접해 있어서 조선의 문호가 되는바, 왜적들이 조선을 침범함에 있어서는 반드시 이곳을 거쳐야 한다.” 하였다. 관할하는 군이 3개로 영암군(靈巖郡), 고부군(古阜郡), 진도군(珍島郡)이고, 부가 2개로 전주부(全州府), 남원부(南原府)이고, 주가 4개로 나주(羅州), 제주(濟州), 광주(光州), 앙주(昻州)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승주(昇州)의 잘못된 표기로, 고려 때 지금의 순천부(順天府)를 승주라고 칭하였다.- 이고, 현이 23개로 만경현(萬頃縣), 무장현(茂長縣), 진안현(鎭安縣), 부안현(扶安縣), 전거현(全渠縣)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금구(金溝)의 잘못된 표기이다-, 강진현(康津縣), 흥덕현(興德縣), 황성현(黃成縣) -삼가 살펴보건대, 황성은 어디인지 상고할 수가 없다-, 낙안현(樂安縣), 창평현(昌平縣), 제남현(濟南縣)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반남(潘南)의 잘못된 표기로, 고려 때의 현 이름인데, 지금은 나주(羅州)에 병합되었다-, 회령현(會寧縣) -삼가 살펴보건대, 고려 때의 현 이름으로, 지금은 장흥부(長興府)에 병합되었다-, 대강현(大江縣)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경상도 대구(大邱)의 잘못된 표기로, 이에 대한 내용은 다음에 상세하게 나온다-, 임파현(臨波縣)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임피(臨陂)의 잘못된 표기이다-, 고고현(古皐縣)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고부(古阜)인데 잘못하여 겹쳐 기록되었다-, 남양현(南陽縣) -삼가 살펴보건대, 고려 때의 현 이름으로, 뒤에 보성군(寶城郡)에 병합되었다. 《무비지》에 남양(南洋)으로 되어 있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부순현(富順縣) -삼가 살펴보건대, 지금은 어디인지 상고할 수가 없다-, 부령현(扶寧縣) -삼가 살펴보건대, 고려 때의 현 이름으로, 지금은 부안현(扶安縣)으로 고쳤다-, 마인현(麻仁縣)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비인(庇仁)의 잘못된 표기로, 지금은 충청도에 속한다-, 서성현(緖城縣) -삼가 살펴보건대, 《무비지》에는 저성(渚城)으로 되어 있다. 지금은 어디인지 상고할 수가 없다.-, 해남현(海南縣), 신령현(神靈縣) -삼가 살펴보건대, 경상도 신녕현(新寧縣)의 음이 변한 것인 듯하다-, 이안현(移安縣) -삼가 살펴보건대, 무안현(務安縣)의 잘못된 표기인 듯하다.- 이다. ○ 남원성(南原城)은 전주(全州)의 동남쪽에 있으면서 전주와 더불어 기각(掎角)의 형세를 이루고 있어서 국성의 요해처가 된다. 명나라 만력 연간에 왜적이 남원을 함락하고 마침내 전라도를 침범하여 국성으로 바짝 다가갔다. 그러자 이여송(李如松)이 이르기를, “전라도는 비옥한 지역인데, 남원이 전라도의 인후(咽喉)에 해당된다.” 하였는데, 바로 이곳을 두고 한 말이다. 남원성과 가까운 곳에 운봉성(雲峯城)이 있는데, 이 역시 요충지이다. ○ 제주성(濟州城)은 남원부의 남쪽 바다 섬 가운데에 있으며, 제주도(濟州島)라고도 하는데, 조선에서 이곳에 주를 설치하였다. 지(志)에 이르기를, “조선의 제주는 중국의 경주(瓊州)와 같다. 혹자는 바로 옛날의 탐라(耽羅)라고도 한다. 지금은 그대로 제주라고 한다.” 하였다. ○ 순천성(順天城)은 경주(慶州)의 서남쪽에 있다. 명나라 만력 26년(1598)에 왜추(倭酋)가 이곳에 웅거하고서는 서로(西路)라고 하였다. 《조선기사(朝鮮紀事)》를 보면, “왜추 평행장(平行長)이 율림(栗林)과 예교(曳橋)에 웅거해 있으면서 성채(城寨)를 몇 겹으로 세우고는 순천성에 의지하여 남해영(南海營)과 서로 바라보았는데, 산을 등지고 물을 끼고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새지의 성채가 되었다. 대수(大帥) 유정(劉綎)이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하였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전라도는 고려 때 전라도라고 칭하였으며, 조선에서 그대로 따랐다. 관찰사영은 전주에 있으며, 부 1개, 목 4개, 도호부 6개, 군 10개, 현 34개를 관할한다.
○ 전라도(全羅道)의 동(東)쪽은 경상도(慶尙道)라고 한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경상도의 치소는 경주로, 국성의 동남쪽에 있다. 본디 진한 지역으로, 뒤에 신라국이 되었다. 바다에 닿아 있어 일본과 서로 마주 보고 있는바, 조선의 병풍이 된다. 관할하는 군이 7개로 울산군(蔚山郡), 함양군(咸陽郡), 웅천군(熊川郡), 합천군(陜川郡), 영천군(永川郡), 양산군(梁山郡), 청도군(淸道郡)이고, 부가 6개로 김해부(金海府), 선산부(善山府), 영해부(寧海府), 밀양부(密陽府), 안동부(安東府), 창원부(昌原府)이고, 주가 5개로 경주(慶州), 사주(泗州) -삼가 살펴보건대, 고려 때의 주 이름으로 지금은 사천현(泗川縣)으로 고쳤다-, 상주(尙州), 진주(晉州), 울주(蔚州)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울산(蔚山)의 옛 이름으로, 잘못하여 겹쳐 기록하였다.- 이고, 현이 12개로 동래현(東萊縣), 청하현(淸河縣), 의흥현(義興縣), 문경현(聞慶縣), 거제현(巨濟縣), 창녕현(昌寧縣), 삼가현(三嘉縣), 안음현(安陰縣) -삼가 살펴보건대, 지금의 안의현(安義縣)이다-, 의성현(義城縣), 산음현(山陰縣) -삼가 살펴보건대, 지금의 산청현(山淸縣)이다-, 고령현(高靈縣), 수성현(守城縣) -삼가 살펴보건대, 수성(壽城)의 음이 변한 것인 듯하다. 수성은 고려 때의 현 이름으로, 지금은 대구(大邱)에 병합되었다.- 이다. ○ 안동성(安東城)이 경주 서쪽에 있는데, 조선의 안동부이다. 지(志)에 이르기를, “안동부는 마령(馬嶺)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조령(鳥嶺)의 잘못된 표기이다.- 의 남쪽에 있으면서 동쪽으로 경주로 나아가는 길이다.” 하였다. ○ 의성(義城)은 안동성의 서쪽에 있는데, 조선의 의성현이다. 또한 의성(宜城)이라고도 한다. 명나라 만력 25년(1597)에 독신(督臣) 형개(邢玠) 등이 왜추(倭酋) 가등청정(加藤淸正)을 경주(慶州)에서 공격할 적에 군사를 나누어서 의성에 주둔시켜 동쪽으로는 경상도에 접하고 서쪽으로는 전라도를 움켜쥐었다고 한다. ○ 진주성(晉州城)은 경주의 서남쪽에 있다. 만력 26년에 대수(大帥) 동일원(董一元)이 진격하여 진주를 탈취한 다음, 승세를 타고서 강을 건너 남쪽으로 영춘(永春)과 곤양(昆陽) 두 성채(城寨)를 불태웠다. 그러자 왜적들이 물러나서 사주(泗州)의 노영(老營)을 지켰다. 동일원이 그 성을 빼앗고는 진격해서 새 성채에 바짝 다가갔다. 새 성채는 삼면이 강에 임하여 있고, 한 방면이 육지에 닿아 있는데, 바닷물을 끌어 들여서 호(濠)를 만들었으며, 또 김해(金海)와 고성(固城) 두 성채를 만들어서 좌익과 우익으로 삼았고, 가운데로 해양창(海陽倉)과 통하였다. 동일원이 이를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패하여 진주로 돌아왔다. ○ 합천성(陜川城)은 경주의 동북쪽에 있는데, 조선의 합천군(陜川郡)이다. 명나라 만력 22년(1594)에 이여송(李如松)이 왕경(王京)을 수복하고는 군사를 나누어 이곳에 주둔해서 방어하였다. 또 그 동남쪽에 웅천군(熊川郡)이 있는데, 동쪽으로 큰 바다에 임해 있다. ○ 창녕성(昌寧城)은 진주의 동쪽에 있는데, 조선에서 현을 둔 곳이다. 남쪽으로 진강(晉江)에 임해 있으며, 진강의 남쪽은 고성현(固城縣)이다. 고성현의 남쪽에는 당포(唐浦)가 있는데, 바닷가 진의 요해처이다. ○ 울산성(蔚山城)은 경주의 서북쪽에 있는데, 바로 울산군(蔚山郡)이다. 남쪽에 도산(島山)이 있는데, 그다지 높지는 않으나 성이 험고한 산에 의지해 있으며, 가운데에 강이 있어서 부산(釜山)의 성채와 통하고, 육로로는 언양(彦陽)을 경유해서 부산과 통한다. 명나라 만력 25년에 왜적들이 울산에 주둔해 있었는데, 대수(大帥) 마귀(麻貴)가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얼마 뒤에 왜적들이 더욱더 성책(城柵)을 높이 쌓고는 이곳에서 웅거하여 지키면서 동로(東路)라고 하였다. 마귀가 마침내 군사를 진격해 다가가서는 험고한 데 의지하여 화곡(禾穀)을 거두어들였다. 그러자 왜적들이 거짓으로 퇴각하여 유인하였는데, 마귀가 패하였다. ○ 양산성(梁山城)은 울산성의 동남쪽에 있는데, 조선의 양산군(梁山郡)이다. 명나라 만력 연간에 마귀가 울산을 공격하면서 별장(別將)을 파견하여 이곳에 주둔해 있으면서 부산과 언양에서 구원하러 오는 길을 끊게 하였다. ○ 대강성(大江城)은 남원부의 동남쪽에 있는데, 조선에서 현을 설치한 곳이다. 동쪽으로는 경상도의 진주와 접하였다. 만력 연간에 왜적들이 부산포(釜山浦)에 주둔해 있었는데, 이여송이 여러 장수를 나누어 보내면서 대강(大江) -삼가 살펴보건대, 《명사(明史)》에는 대구(大丘)로 되어 있다. 이하도 같다.- 과 충주(忠州)에 주둔하게 해서 왜적들을 억눌렀다. 얼마 뒤에 왜적들이 부산에서 서생포(西生浦)로 옮겼다. 유정(劉綎)이 조선에 머물러서 진수(鎭守)할 적에 경상도와 대강에 나누어 주둔하였는데, 이곳이 요충지이기 때문이었다. -삼가 살펴보건대, 《무비지》를 보면, 전라도에 대강현(大江縣)이 잘못 예속되어 있다. 그러므로 《대청일통지》에서는 이로 인하여 《명사》에서 대구라고 칭한 것을 잘못 대강성(大江城)이라고 하였다.- ○ 함양성(咸陽城)은 진주의 서북쪽에 있는데, 조선의 함양현(咸陽縣)이다. 만력 연간에 왜적들이 함양과 진주를 침범하였는데, 바로 이곳이다. -또 이르기를, “남양성(南陽城)이 남원부의 서북쪽에 있는데, 조선의 남양현(南陽縣)이다. 명나라 만력 22년에 이여송이 장수에게 명하여 남원을 지키게 하면서 군사를 나누어 이곳에 주둔해 지키게 하였다.” 하였다. ○ 삼가 살펴보건대, 《명사》를 보면 함양(咸陽)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이 옳다. 《대청일통지》에서는 잘못 남양(南陽)이라고 하였다.- ○ 영천군(永川郡)은 양산(梁山)의 동남쪽에 있다. 동쪽으로는 경주와 경계를 접하였다. ○ 거제도(巨濟島)는 죽도(竹島)의 동쪽에 있는데, 바닷가이다. 조선에서 거제현(巨濟縣)을 설치하였으며, 겸하여 수군영(水軍營)을 이곳에 설치하였다. 험고한 요충지로는 부산 다음간다. ○ 부산은 동래현(東萊縣)에서 남쪽으로 21리 되는 곳에 있으며, 서북쪽으로 국성(國城)과의 거리가 1400리이다. 큰 바닷가에 있으면서 일본의 대마도(對馬島)와 서로 바라보고 있는바, 돛을 올리고 달리면 한나절이면 도달할 수 있다. 부산의 동쪽에는 동래(東萊), 기장(機張), 서생(西生), 임랑(林瑯), 옥포(玉浦)가 있어서 좌익이 되고, 서쪽에는 안골(安骨), 안굴(安窟), 가덕(嘉德), 웅천(熊川), 삼포(森浦), 거제(巨濟), 한산(閑山), 덕교(德橋), 김해(金海), 죽도(竹島), 용당(龍堂)이 있어서 우익이 되는데, 서로 연결되어 기각(掎角)의 형세를 이루고 있어서 공격할 수도 있고 지킬 수도 있다. 명나라 만력 20년(1592)에 왜추(倭酋) 평수길(平秀吉)이 그의 도당인 평행장(平行長) 등을 파견하여 수군을 거느리고 부산진(釜山鎭)으로 쳐들어가서 경상도를 함락하고, 삽시간에 왕경(王京)으로 들어갔다. 얼마 뒤에는 왕경을 버리고서 부산으로 돌아와 주둔해 있으면서 서생, 기장 등지에 성을 증축하고는 군사를 나누어 웅거해 지켰는데, 부산을 근본으로 삼았다. 관병(官兵)이 부산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오랜 뒤에야 비로소 왜적들이 군사를 철수해 돌아갔다. 《속문헌통고(續文獻通考)》에, “조선의 부산 지방은 일본 대마도에서의 거리가 겨우 하루 일정이다. 전해 오는 말에, ‘예전에는 이곳이 일본에 속하였는데, 큰 바다가 가로막고 있어서 조선에 떼어 주었다. 이보다 앞서 일본에 크게 흉년이 들어 조선에서 곡식 1만곡(斛)을 빌려 왔는데, 조선에서 사람을 보내어 이를 돌려 달라고 요구하였다. 그러자 일본에서 부산 지역을 돌려 달라고 말하였는데, 조선의 사신이 허락하지 않았다.’ 한다. 만력 신묘년(1591)에 일본의 관백(關白) 평수길이 소서행장(小西行長)과 가등청정(加藤淸正)을 파견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조선에 이르렀는데, 왜적들이 미처 왕경에 이르기도 전에 조선의 국왕이 사람을 보내어서 표문(表文)을 올려 구원해 주기를 요청하였다. 이에 황제가 중신(重臣)들에게 명해서 군사를 거느리고 가 조선을 구원하게 하였는데, 군병을 조발하고 군량을 늘리느라 날마다 백만금을 허비하면서 피차간에 서로 승부를 겨루었다. 왜적들은 모두 부산에 웅거하여 집을 짓고 농사를 지으면서 오랫동안 머물러 있을 계획을 하였다. 그러다가 무술년(1598) 7월에 평수길이 병으로 죽고서야 비로소 군사를 철수해 돌아갔다.” 하였다.
《화한삼재도회》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조선의 왕성에서 부산포까지는 126리이고, 개경(開京)에서 합포(合浦)까지는 140리이고, 부산포에서 일본 대마도 이기(伊崎)까지는 48리이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경상도는 본디 고려 때 칭한 바이며, 조선에서는 그대로 따랐다. 뒤에 낙동강(洛東江)을 동서쪽으로 나누어서 경상좌도(慶尙左道)와 경상우도(慶尙右道)로 삼았다가 얼마 뒤에 다시 합하여 한 도로 하였다. 관찰사영(觀察使營)은 대구(大邱)에 있으며, 부 1개, 대도호부 2개, 목 3개, 도호부 13개, 군 12개, 현 40개를 관할한다.
○ 강원도(江原道)의 북(北)쪽은 함경도(咸鏡道)라고 한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함경도의 치소는 함흥부(咸興府)로, 국성의 동북쪽에 있다. 본디 고구려 지역이다. 관할하는 군이 3개로 단천군(端川郡), 촉막군(蜀莫郡)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고려 때의 송악군(松岳郡)의 음이 와전된 것으로, 지금의 개성부이며, 경기에 속한다-, 영원군(寧遠郡) -삼가 살펴보건대, 평안도에 속한다.- 이고, 부가 5개로 함흥부, 경성부(鏡城府), 회령부(會寧府), 영흥부(永興府), 안변부(安邊府)이고, 주가 8개로 연주(延州) -삼가 살펴보건대, 고려 때의 주 이름으로 지금은 영변부(寧邊府)로 고쳤으며, 평안도에 속한다-, 덕주(德州) -삼가 살펴보건대, 고려 때의 주 이름으로, 지금은 덕천군(德川郡)으로 고쳤으며, 평안도에 속한다-, 개주(開州)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개성부이다. 고려 성읍조(高麗城邑條)에 상세하게 나온다-, 혜주(惠州) -삼가 살펴보건대, 《무비지》에는 속주(速州)로 되어 있는데, 지금의 어디인지 상고할 수가 없다-, 소주(蘇州) -삼가 살펴보건대, 지금의 어디인지 상고할 수가 없다-, 합주(合州) -삼가 살펴보건대, 길주(吉州)의 잘못된 표기인 듯하다-, 연주(燕州) -삼가 살펴보건대 지금의 어디인지 상고할 수가 없다-, 수주(隋州) -삼가 살펴보건대, 고려 때의 주 이름으로 지금은 정주(定州)로 고쳤으며, 평안도에 속한다.- 이고, 현이 1개로 이성현(利城縣)이다.
《성경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금(金)나라 상경 회령부(上京會寧府)는 장백산(長白山)의 북쪽, 안출호수(按出虎水)의 근처에 있다. 지금의 영고탑(寧古塔)에 옛 성이 있으며, 그 성안에는 궁전의 터가 있다. 조선의 경내에 또 회령부라는 이름이 있는데, 분명한 근거를 알 수가 없다. -삼가 살펴보건대, 우리나라의 회령부는 세종조에 처음으로 설치하였는바, 금나라의 회령부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함경도는 고려 때에는 동계(東界)라고 칭하였으며, 조선 초기에 국경을 개척해서 두만강(豆滿江)에 이르러 경계를 삼고는 영길도(永吉道)라고 하였다. 얼마 뒤에 함길도(咸吉道)로 개칭하였다가 뒤에 다시 함경도로 개칭하였다. 성종조에 영안도(永安道)라고 개칭하였다가 뒤에 다시 함경도로 고쳤다. 관찰사영은 함흥부에 있으며, 부 1개, 대도호부 16개, 군 2개, 현 2개를 관할한다.
또 살펴보건대, 고려 말기에 북쪽 경계는 갑산(甲山), 길주(吉州) 등지까지였다. 조선 태조 6년(1397)에 이지란(李之蘭)을 파견하여 여진을 불러 위무하고서 비로소 공주(孔州) -지금의 경흥부(慶興府)이다-, 경주(鏡州) 등의 주를 설치하였는데, 그 뒤에 경성(鏡城) 북쪽이 여진에게 함락되었다. 태종 10년(1410)에 비로소 부거참(富居站)에 경원부(慶源府)를 설치하였다. 세종 10년(1428)에 회가(會家) -지금의 경원부 지역이다.- 로 부를 옮겼고, 13년(1431)에 또 부령부(富寧府) -본디는 경성의 석막성(石幕城)으로, 처음에는 영북진(寧北鎭)을 설치하였다가 뒤에 지금의 종성(鍾城) 행영(行營)으로 진을 옮기고 이곳에 부령부를 설치하였다.- 를 설치하였다. 14년(1432)에 올량합(兀良哈)이 알목하(斡木河) -지금의 회령 지역이다.- 를 공격하여 맹가첩목아(孟哥帖木兒)를 살해하였다. 16년(1434)에 김종서(金宗瑞)를 함길도 관찰사(咸吉道觀察使)로 삼아서 경흥(慶興) -처음에는 공주 지역에 설치하였다-, 회령(會寧), 종성(鍾城) -본디 여진의 수주(愁州) 지역이다-, 온성(穩城) -본디는 여진의 다온평(多溫平) 지역이다.- 등 4개의 진(鎭)을 설치하고는 성을 쌓고 백성을 채운 다음 경원과 부령을 합하여 육진(六鎭)이라고 하였다. 그 당시에 번호(藩胡)로서 강 안쪽에 있던 자들이 그 지역을 떠나기를 싫어하여 강 안쪽에 살면서 영원토록 배반하지 않는 신하가 되게 해 달라고 청하였다. 조정에서는 부득이하여 강변에 장성(長城)을 수축하고는 장성 바깥에 있는 강 안쪽의 지역을 떼어서 그들에게 주었는데, 바로 차유령(車踰嶺) 바깥쪽의 지금의 무산(茂山) 지역으로, 이 지역은 오랫동안 번호인 노토마우롱(老吐亇亏籠)의 차지가 되었다. 선조 33년(1600)에 번호가 철수하여 북쪽으로 돌아갔다. 현종 15년(1674)에 무산진(茂山鎭)을 이곳으로 옮겨 설치하였다. 숙종 10년(1684)에 부(府)로 승격시켰다.
또 살펴보건대, 두만강 바깥쪽 지역은 본디 우리나라의 지역에 속한다. 국초에 영파보(寧波堡), 진지달보(榛遲達堡), 안정보(安定堡) 등의 진(鎭)을 설치하였다가 세종조 이후로 모두 폐지하였다.
○ 황해도(黃海道)의 서북(西北)쪽은 평안도(平安道)라고 한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평안도의 치소는 평양부로, 조선의 서쪽 경계이다. 동남쪽으로 국성(國城)과의 거리가 500여 리이다. 한나라 때에는 낙랑군(樂浪郡)이라고 하였으며, 뒤에 고구려 왕이 도읍하였다. 당나라 때에는 안동부를 설치하였고, 뒤에 발해에게 함락되었다. 오대(五代) 시대에는 고려가 다시 취하여 서경으로 삼았다. 원나라 지원(至元) 6년(1269)에 고려의 신하인 이연령(李延齡) 등이 서경의 주현(州縣) 60여 성을 들어서 와서 복속하였으므로 이를 인하여 서경을 고쳐서 동녕부(東寧府)라고 하였다. 원나라 말기에 다시 조선에 돌려주었다. 관할하는 군이 11개로 가산군(嘉山郡) -삼가 살펴보건대, 《무비지》에는 가산(加山)으로 되어 있는데, 잘못된 것이다-, 개천군(价川郡), 곽산군(郭山郡), 운흥군(雲興郡)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운산군(雲山郡)의 잘못된 표기이다. 《무비지》에는 운흥(云興)으로 되어 있는데, 역시 잘못된 것이다-, 희천군(煕川郡), 선천군(宣川郡), 강동군(江東郡), 자산군(慈山郡), 용천군(龍川郡), 순천군(順川郡), 박천군(博川郡)이고, 부가 9개로 평양부(平壤府), 성천부(成川府), 정원부(定遠府) -삼가 살펴보건대, 고려 때 칭한 바이며, 지금은 구성부(龜城府)로 고쳤다-, 창성부(昌城府), 합란부(合蘭府) -삼가 살펴보건대, 지금의 함경도 함흥부를 원나라 때 합란부라고 칭하였는바, 평안도의 부 이름이라고 하였으니, 잘못된 것이다-, 광리부(廣利府), 견인부(見仁府), -삼가 살펴보건대, 광리부와 견인부 두 부에 대해서는 상고할 수가 없다- 영변부(寧邊府), 강계부(江界府)이고, 주가 16개로 안주(安州), 정주(定州), 평주(平州) -삼가 살펴보건대, 고려 때의 주 이름으로 지금은 평산부(平山府)로 고쳤으며, 황해도에 속한다-, 의주(義州), 강주(鋼州)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선천부(宣川府)로, 고려 성읍조(高麗城邑條)에 상세하게 나온다-, 철주(鐵州) -삼가 살펴보건대, 고려 때의 주 이름으로, 지금은 철산부(鐵山府)로 고쳤다-, 영주(靈州) -삼가 살펴보건대, 고려 때의 주 이름으로, 지금은 의주에 병합되었다-, 삭주(朔州), 무주(撫州) -삼가 살펴보건대, 고려 때의 주 이름으로, 지금은 영변부(寧邊府)에 병합되었다-, 숙주(宿州)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숙주(肅州)의 잘못된 표기이다. 지금의 숙천부(肅川府)로, 고려 때에는 숙주(肅州)라고 칭하였다-, 위주(渭州) -삼가 살펴보건대, 고려 때의 주 이름으로, 지금은 영변부에 병합되었다-, 매주(買州) -삼가 살펴보건대, 어디인지 상고할 수가 없다. 고려 성읍조에도 나온다-, 청주(靑州) -삼가 살펴보건대, 고려 때의 주 이름으로, 지금은 북청부(北靑府)로 개칭하였으며, 함경도에 속한다-, 승주(昇州) -삼가 살펴보건대, 전라도 순천부(順天府)이다. 전라도조에 상세하게 나온다-, 상주(常州), 은주(銀州) -삼가 살펴보건대, 이 두 주에 대해서는 상고할 수가 없다.- 이고, 현이 6개로 맹산현(孟山縣), 덕천현(德川縣), 양덕현(陽德縣), 강동현(江東縣) -삼가 살펴보건대, 이미 강동군(江東郡)이 실려 있는데 또 강동현을 실었으니, 크게 잘못 대조하였다-, 중화현(中和縣), 태천현(泰川縣)이다. ○ 의주성(義州城)은 평양에서 서북쪽으로 420리 되는 곳에 있다. 그 서남쪽은 용천군(龍川郡)이다. 모두 압록강 가에 있다. 명나라 만력 20년(1592)에 조선의 왕이 일본 관백(關白)의 침입을 피하여 의주에 와서는 중국에 내속(內屬)하기를 청한 곳이 바로 이곳이다. 또 안가관(晏家關)이 의주의 서남쪽, 압록강의 동쪽 언덕에 있는데, 옛날의 요충지 역할을 하던 나루였다. ○ 운산(雲山)은 삭주(朔州)의 서남쪽에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대청일통지》에서는 운산을 산 이름으로 잘못 보아서 본국 산수조(本國山水條)에 실었는데, 잘못된 것이다.
《조선부》 주(注)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선천군(宣川郡)은 의주의 동쪽에 있다. ○ 곽산군(郭山郡)은 그 성이 산꼭대기에 있는데, 지리서에는 능한성(凌漢城)이라고 하였다.
《성경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봉황성(鳳凰城)에서 동남쪽으로 120여 리 되는 곳인 조선의 경계에 익주성(益州城)이 있는데, 세속에서는 애주(愛州)라고 잘못 부른다. -삼가 살펴보건대, 지금의 의주를 혹 익주(益州)라고 하고, 또 애주(愛州)라고도 하는데, 이는 모두 음이 변한 것이다.
《화한삼재도회》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평양에서 압록강까지가 506리이고, 왕성에서 평양까지가 68리이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평안도는 고려 때에는 서북계(西北界)라고 칭하였다. 고려가 끝날 때까지 북쪽으로는 강계부(江界府)를 넘어서지 못하였다. 조선 초기에 압록강 안쪽 지역을 모두 개척하여 압록강을 경계로 삼아 평안도라고 하였다. 관찰사영은 평양부에 있으며, 부 2개, 대도호부 1개, 목 2개, 도호부 13개, 군 12개, 현 12개를 관할한다.
또 살펴보건대, 《대청일통지》에 기록된 우리나라의 주현(州縣)이 이와 같이 잘못된 것은 대개 《무비지》의 잘못된 설을 그대로 따라 바로잡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소남(齊召南)의 《수도제강(水道提綱)》에 실려 있는 우리나라 지명은 자못 치밀하고도 상세하나, 역시 착오가 많다. 이것에 대해서는 산수조(山水條)에서 모두 따져 밝혔으므로 이곳에서는 중복해서 말하지 않았다.
[주D-001] 여강(麗江) : 여강(驪江)의 잘못된 표기이다.
[주D-002] 함종현(咸從縣) : 원문(原文)에는 ‘咸宗’으로 되어 있는데, 《가경중수일통지》 권550에 의거하여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3] 북쪽에서 …… 있으며 : 원문(原文)에는 ‘直北至南’으로 되어 있는데, 《가경중수일통지》 권550에 의거하여 ‘直北正南’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4] 기각(掎角) : 원문(原文)에는 ‘倚角’으로 되어 있는데, 잘못된 것이기에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5] 마귀가 …… 거두어들였다 : 원문(原文)에는 ‘麻貴後進師逼之據收其禾稼’로 되어 있는데, 《가경중수일통지》에 의거하여 ‘麻貴遂進師 逼之據險 收其禾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6] 예전에는 …… 속하였는데 : 원문(原文)에는 ‘舊俗日本’으로 되어 있는데, 《가경중수일통지》 권550에 의거하여 ‘舊屬日本’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출처=한국고전종합DB, http://db.itkc.or.kr/itkcdb/mainIndexIframe.j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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