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선의 시 명상] 내가 나의 감옥이다/유안진
두려움
나 자신을 가두는 것은 나 자신이다. /셔터스톡
내가 나의 감옥이다/유안진
한눈팔고 사는 줄은 진즉 알았지만
두 눈 다 팔고 살아온 줄은 까맣게 몰랐다
언제 어디에서 한눈을 팔았는지
무엇에다 두 눈 다 팔아먹었는지
나는 못 보고 타인들만 보였지
내 안은 안 보이고 내 바깥만 보였지
눈 없는 나를 바라보는 남의 눈들 피하느라
나를 내 속으로 가두곤 했지
가시껍데기로 가두고도
떫은 속껍질에 또 갇힌 밤송이
마음이 바라면 피곤체질이 거절하고
몸이 갈망하면 바늘편견이 시큰둥해져
겹겹으로 가두어져 여기까지 왔어라
누군가 제 글에 댓글을 남겼습니다. 말은 사라지지만 글은 남으므로 기록이라는 생각이 부끄럽다고요. 부끄러움이란 무엇일까요.
부끄러움이란 나는 완전하지 않다는 두려움에서 나옵니다. 부끄럽다는 생각, 나는 아름답지 않다는, 완전하지 않다는 생각은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느낌입니다.
이 부끄러움은 내가 나에게 부여한 틀입니다. 나는 부족한 사람이라는 틀이지요. 물론 그 틀은 어떤 준거를 가지고 있기에 형성된 틀입니다. 그 준거는 사회가 만든 기준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달리 말해 다른 이들을 바라보기에 형성된 틀입니다.
완전하지 않다는 이 생각은 부족하고 부끄럽다는 느낌을 가져오지만 달리 보면 나를 발전하게 만드는 원동력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 틀을 깨려 노력하지요.
댓글을 남긴 이에게 공감한 것은 내 삶에 늘 두려움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나를 거부하리라는 두려움, 일에서 우정에서 관계에서 밀려나리라는 두려움이지요. 돌아보니. 내가 부족하다고 여겼기에 필사적으로 나를 쌓아 올리려고 했습니다.
완벽해지려고 했고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실력을 쌓으려고 했습니다. 부족한 나는 남의 눈을 피했지요. 내 형편없는 모습이 드러날까 봐, 흠을 잡히고 흉이 드러날까 봐 부끄러워했기에 안으로만 수그러들었던 것입니다.
완벽해지려고 노력하는 동안 내게는 시선이 형성됩니다. 쌓아 올리는 동안 타인의 모습이, 행동이, 글이 완벽한지 혹은 부족한지 판단하는 시각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언제부터인지 나는 잊어버립니다. 어쩌면 나에 대해서 포기하는 것일까요. 혹은 스스로 가면을 씌우는 것일까요. 그것은 실제로 보이는 것은 많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어찌 그러지 않을 수 있을까요. 우리가 지닌 오감, 시각, 청각, 촉각, 후각. 미각 중 시각이 70프로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타인에게 시선이 향하면 향할수록 착각에 빠져듭니다. 많은 것을 겪고 읽었기에 나를 볼 의도를 내지 않기에 타인에게 향하는 시선은 더욱 엄격해지는 겁니다.
우리는 타인이 보여주는 것을 판단하고 또 평가합니다. 일상에서 나를 보는 것보다 타인을 보는 일이 훨씬 더 많이 일어나는 때문이지요.
눈은 두 개뿐입니다. 마음 쏠리는 상품에, 성공에, 업적에 한눈을 파느라 나를 볼 생각을 못 했다면 남을 보는 일에 두 눈을 다 사용해왔습니다.
거울 속 내 매무시에 한눈을 파느라 진짜 내 모습을 보지 못했다면 그 시선이 오롯이 남을 향하고 있음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한 눈은 나를 감추는데 사용하고 두 눈은 남을 보는데 사용해왔습니다.
나의 부족함에 대한 두려움은 그 일을 막았던 것이지요. 늘 부끄러운 자신이라는 생각이, 틀이 나를 아예 감추었던 것입니다. 그 세월이 오래되어 내가 누구인지도 잊었지요. 오직 비평만으로 나를 구성하게 되어버렸지요.
평은 때로 가시입니다. 타인을 상처 입히는 가시입니다. 그 가시로 나를 무장한 것이지요. 가시 껍데기로 무장하고 그 속은 또 떪은 속껍질로 가두었던 것이지요.
그러다보니 마음이 바라더라도 몸이 움직여지지 않습니다. 몸이 갈망하더라도 편견이 시큰둥하게 대응합니다. 몸과 마음, 뫔이 내가 원하는 일을 하지 못하도록 나를 가로막는 것이지요.
그 일은 대체 언제부터 시작되어 어떻게 지속되어 온 것일까요.
나의 진정한 적은 나입니다. 두려움이 수치심이 나의 적입니다. 나는 나를 격려하고 위로해야 할 가장 친근한 벗이어야 함에도 나는 감춘 적, 껍데기 속에 나를 웅크리게 만든 적인 것이지요.
시인이 이 시를 쓴 것은 2004년, 시인이 64에 이른 때입니다. 생의 후반기에 쓴 것이지요. 그 사실을 알게 되어 기뻤습니다.
저 역시 나이 먹어 그 사실을 알게 되면서, 나를 바라보기 시작하면서 나를 내놓기 시작하면서 스스로 바늘을 거두고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만든 껍질을 조금씩 벗어나면서 나의 해야 할 바를 알게 되었던 것이고 그 일은 현재도 진행중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두려움은 남아 있어 매번 나를 물러서게 하고 수그러들게 합니다.
오늘 지금까지도. 그러므로 나아가야 할 바, 배워야 할 바는 여전히 많습니다. 그러므로 발전하고 성장할 가능성은 무궁무진합니다. 이 나이에도.
글 | 이강선 교수
출처 : 마음건강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