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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황제’의 죽음과 ‘3·1운동’
3.1운동의 직접적 원인이 된 고종의 죽음
“오 슬프다, 우리 2천만 동포여.
대행태상이신 고종황제께서 돌아가신 원인을 아는가, 모르는가...
친일파 윤덕영과 한상학 두 적신으로 하여금 시녀에게 식혜에 독약을 넣어....”
1919년 1월, 기미독립 선언서와 3.1만세운동을 실질적으로 주도한
손병희 선생의 이름으로 발표된 국민대회 포고문이다.
포고문에서는 국권회복과 민족을 구하고
고종과 명성황후의 원수도 씻을 수 있으니 봉기하자고 촉구하고 있다.
1919년 1월 21일 고종 황제는 망국(亡國)의 한을 품고 숨을 거뒀다.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밀사 이준 등을 파견해
국권 회복을 기도했으나 일본의 방해로 실패한 후 아들 순종에게 양위한 지 12년 만이다.
덕수궁 함녕전에서 쓸쓸한 만년을 보내다가 죽어간 고종의 붕어(崩御·왕의 죽음)와 함께
일제의 독살설이 일파만파 퍼져나갔다. 친일파 윤덕용이 궁전 나인을 시켜
독이 든 식혜를 고종에게 올려 급서했다는 의혹이 흘러나왔다.
소문이 확산되자 일제는 '매일신보'에 고종이 뇌출혈로 사망했다고 보도했다.
고종의 나이 68세 때였다. 평소의 건강도 괜찮았다고 한다.
하지만 고종에게 식혜를 올렸던 나인 2명도 잇따라 사망하면서 항일 감정은 극에 달했다.
마침내 백성들이 고종의 인산일(발인)인 3월 3일에 맞춰 3·1운동을 봉기했다.
고종 연간의 역사적 배경
오늘이 3월3일로 105년 전 고종의 인산일(발인)이었다
그리고 그 이틀 전에 3.1만세운동이 일어났던 것이다
고종이 누군가? 흥선대원군의 아들이다
헌종이 후사없이 죽자 강화도에 유배되었던
사도세자의 아들의 후손인 강화도령 이원범을 데려다
호적을 꾸며서 허수아비 왕인 철종으로 세웠다
모두 안동김씨 들이 꾸민 일이다
안동김씨 집안의 딸이었던 순조비가 나서서
안동김씨 들의 세도정치를 이어갔던 것이다
그런데 철종도 후사없이 일찍 죽었다
다시 이리저리 후손들을 뒤져 찾아낸 것이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아들인 12세의 고종이었다
흥선대원군이 어린 고종 대신 나서서 정치를 좌지우지하였고
민비의 친정인 민씨 세력과 티격태격 다투기도 하고
나중에 고종이 친정을 하지만 혼돈과 격동의 세월이었다
고종의 정비인 민비는 경복궁 침전에서 암살당했다
장례도 제대로 치르지 않고 시체를 불태웠다고 한다
도대체 이런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나?
한 나라의 왕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망가서 살기도 하고
1907년에는 헤이그에 밀사를 보내기도 하지만 모두 실패하고
억지로 순종에게 양위를 하고 임금자리에서 쫓겨났다
그리고 12년 만인 1919년 1월21일 덕수궁에서 사망한다
이로 말미암아 3.1만세운동이 터지게 된 것이다
일제가 조선을 합병한지 채 9년도 지나지 않은 싯점이었다
한달 쯤 후인 4월11일에는 상해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3.1운동 이후의 세계정세
애석한 일은 독립선언서에 연명했던 민족대표 33인이
약속장소인 탑골공원에 나타나지 않았으며
태화관이라는 음식점에 모여 선언서만 낭독하였다
기독교 16명, 천도교 15명 그리고 불교 2명 등이었다
대원군에게 박해를 받았던 천주교는 참가하지 않았다
당시는 유럽에서 제1차 세계대전이 막 끝난 직후로
전후처리문제로 정신이 없었을 때이고 국력도 피폐해졌다
반면에 태평양연안 국가인 미국과 일본이 욱일승천의 기세로
국력을 키우고 세력을 확장하고 있던 시기였다
일본은 이미 1894년 청일전쟁의 승리로 대만을 합병했으며
1904년에는 러일전쟁에서도 승리하여 사할린의 남쪽 반과
중국의 러시아 관할지를 물려받아 떵떵거리고 있을 때였다
1910년에는 미국과 짜고 조선을 합병하였다
일본은 이후에 커진 국력을 바탕으로 중국의 만주지방과
연안지역 일대를 점령하고 마침내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킨다
4년 후인 1941년 12월7일 미국 진주만에 있던 7함대를 기습공격하여
태평양전쟁의 서막이 열린다
파죽지세로 동남아시아를 쳐내려간 일본에 의해
중국 내륙지방까지 일본의 차지가 되었으며
동남아시아는 물론, 남태평양 일대를 장악하게 된다
해방정국의 상황
1945년 8월6일과 9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연이어 투하된
두 발의 원자폭탄으로 일본이 두 손을 들었고
그 덕분에 우리 조선은 일제로부터 해방되는 듯 했지만
남조선에는 미군이 그리고 북조선에는 소련이 들어와
각각 3년간 군정을 실시했다
3년 간의 군정기간을 거치면서 남한과 북한에는
각각 서로 다른 권력구조를 가진 두 정부가 들어서게 된다
남한에는 미국에서 귀국한 이승만이 미국의 비호를 받았고
북한에는 소련이 내세운 김일성이 권력을 잡게 된다
조선총독부 건물에는 일장기 대신 성조기가 올라갔고
3년간 태극기가 아닌 성조기가 펄럭였다
그리고 용산기지가 아닌 바로 그 미군정청에서 미군이 남한을 다스렸다
곳곳에서 공산당을 때려잡는 각종 사건 들이 일어났으며
민족주의자라고 지목받은 사람들은 대부분 자객 들에 의해 암살되었다
일단 1945년 8월15일, 일본이 미국에 무조건 항복을 하고나서
9월2일, 도쿄 앞바다의 미주리호 함상에서 항복문서 조인식을 한다
미주리호 위를 날며 무력시위를 하고있는 미군 폭격기들. 그 규모가 어마어마하다
미주리호 함상에 모여있는 취재진과 관계자들. 바로 앞에 중국 군인들도 보인다
미국의 맥아더 장군이 일본과의 항복문서에 서명하고 있다
맥아더 장군은 남한 미군정청의 수장이었던 하지중장의 상관으로서 일본과 남한을 다스렸다
천황을 앞세운 일본 군국주의 체제를 평화체제로 바꾸는 대대적인 개혁을 진두지휘했다
그리고 9월7일, 오키나와로 부터 미군이 인천항으로 들어온다
9월8일, 서울에서 미군을 맞이하는 대대적인 환영식이 있었고
9월9일, 조선총독부 건물에서 항복문서 조인식이 열렸다
1945년 9월7일, 인천항을 통해 점령군으로 진주하는 미군들
가운데 파이프를 든 키 작은 이가 이후 3년간 군정청장을 지낸 하지중장이다
미군 수뇌부와 일본 총독부 사이에서 항복문서 조인식이 열렸고 업무 인수인계가 이뤄졌다
이로써 남한의 통치권이 일본 조선총독부로부터 미군정청으로 넘어갔다
1945년 9월9일. 조선총독부 앞 뜰에서 거행된 일장기 하기식과 성조기 게양식
이후 3년간 미군 들이 남한을 다스렸다
시내 길거리에 연합군을 환영한다는 플래카드가 내걸렸다
미군정청장인 하지중장에게 두 소녀가 꽃다발을 주고 있다
미군들이 주축이 된 기념식. 현관 위 천장에도 미군 들이 거총을 하고 서 있다.
이승만이 연설하고 있다. 왼쪽에 하지중장이 보인다
8월15일 일본이 항복하지마자 플래카드와 태극기를 들고
거리로 뛰쳐나와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는 사진은 사실이 아니다
9월9일 이후의 일이다
9월8일 점령군으로 서울에 들어온 미군을 환영하기 위해
거리에 나왔다가 일본 군경의 질서유지를 위반한 조선인 들이
총에 맞아 죽거나 부상을 당했다고 한다
그 때까지도 일본이 우리 조선을 꼼짝 못하게 통제하고 있었고
이에 대해 미군 점령군 들이 감사와 치하의 말을 전했다고 한다
이후 미군의 보호아래 부산으로 집결한 일본인 들은
의기양양하게 귀국선을 타고 일본으로 무사히 귀환하였다
이 세상에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른 사실 들이 아주 많다
남북한 정부수립과 국호
마침내 1948년 8월15일 남조선에는 대한민국 정부가 들어섰고
한 달쯤 후인 9월9일에는 북조선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세워졌다
편의상 국제적으로는 남한과 북한으로 불리운다
대한민국이라는 남한의 새로운 국호는
고종이 세웠던 대한제국이라는 국호에서 임금 제자를 떼어 버리고
백성 민자로 대체하여 만들어진 국호인 듯하다
왕이 혹은 황제가 다스리는 제국이 아닌 백성이 다스리는 나라라는
다시말해 공화국이라는 뜻일 것이다
따라서 영어로 우리 국명을 표기할 때는 Republic of Korea라고 한다
줄여서 ROK라고 하기도 한다. 한국해병대는 ROKMC다
MC는 Marine Corps의 약자다
마찬가지로 북한도 DPRK라고 표기한다
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다
북한이나 남한이나 모두 공화국을 표방한다
왕이나 황제가 다스리는 나라가 아니라
백성이 다스리는 나라라는 말이다. 프랑스도 그렇다.
영국, 덴마크, 네델란드, 일본 같은 나라는 입헌군주국이다
맺는 말
구태여 여기서 3.1운동의 의미를 축소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다만 그 계기가 고종의 죽음과 관련한 장례일에 맞춰
8년 남짓 일제의 통치를 받았던 울분을 토해낸 만세운동이었다는 것
그리고 당시 일본의 국력이 날로 커져가던 시절이었고
이후 일본의 중국침략이 점차 노골화되었으며
이후 동남아는 물론 남태평양까지 지배하며 미국과 전쟁을 벌였다
태평양전쟁을 비롯한 제2차 세계대전의 전후 처리과정에서
우리 조선인의 자리는 전혀 없었다. 그나마 다행스러웠던 것은
연합국 들의 모임에서 조선의 독립을 논의했다는 사실이다
불행하게도 남북한의 분할점령이라는 비극이 잉태됐지만...
우리가 일제로부터 해방된 것은 3.1운동 덕분이 아니다
미국의 원폭투하로 일본이 항복했기 때문이다
3.1운동과 일본패망 사이에는 26년이라는 시간차이가 있다
그리고 강대국 들에 의해 우리 한반도는 둘로 갈라졌다
첫댓글 우라 나라가 갈라진 것도 일본 때문이고 일본은 제대로된 사과도 없었는데
일본과 잘 지내자는 높은 분에 말씀 이해가 안됩니다
인정하고 사과한 후에
친선도 있고
선린우호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복잡한 현재의 정치상황과 국제정세를
여기서 논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3.1운동의 역사적 배경에 관해
제가 그동안 알고 있었던
역사적 사실을 적었을 뿐입니다
105년 전 오늘은 고종의 발인날이었습니다
정치적인 논쟁은 사양합니다
그 높은 분에게 직접 물어 보십시오
주도자 33인은 변절자가 되었고 민초들만 처참한 죽음을 당했죠,.
슬프고도 한스럽던 당시를 회고하며
앞으로나 이런일이 없도록 해야하겠죠,
맞습니다
선동에 부화뇌동했던 민초들만
호되게 당했습니다
학생운동도 마찬가지입니다
희생당한 학생들 아주 많습니다
주동자들은 정치인으로 변신해서
잘 먹고 잘 살았습니다
절대로 부화뇌동하면 안됩니다
낭만님의 고견에 공감합니다
감사합니다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네요
낭만 선배 님의 댓글과 청솔 님의 댓글에 공감을 합니다
더 적으면 정치 이야기가 될 것 같아 ,,,,,,,,,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새로운 사실이 아닌데
의외로 모르시는 분들이 많드라구요
그래서 올렸습니다
유관순열사의 거사일도 4월1일입니다
3.1운동 후 한 달 뒤의 일입니다
유관순의 노래 가사도 바꿔야 합니다
3월하늘 가만히 우러러 보며가 아니라
4월하늘 가만히 우러러 보며가 맞습니다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저희 친할머니도 명성황후의 후손이지만 제가 책이나 드라마에서 보기로는 고종은 독살당한걸로 아는데 모르겟네요 영화 덕혜옹주에서도 독살당한걸로 나오고요 영화 항거에서도 보면 유관순열사를 고문하는데 우리나라 사람도 있었다고 하던데요
네 독살됐다는 설이 많구요
3.1운동의 단초가 됐지요
고종의 발인날
조선인 순사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일본인 순사보다 더 악랄한...
원래 앞잡이들이 더 그런 법이지요
그래야 살아 남을 수 있으니까요
지주보다는 마름들이 더 악독하구요
잘리면 안 되니까 악질이 되는거지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