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금 대한민국의 여름을 뜨겁게 달구는 김희선의원의 독립투사후손 사칭의혹에 대해서 제 나름의 추리를 해 보겠습니다. 사건의 발단은 김희선의 주장대로 김희선의 증조부인 김순옥이 죽고 증조모 선우순이 김성범과 김학규를 데리고 3남 2녀가 있는 안동김씨 홀아비에게 재가한 게 아닙니다.
소설적인 추리를 해 보겠습니다. 평남 평원군에서 진짜 의성김씨인 김학규장군의 집안을 돌보던 안동김씨인지 김해김씨인지 모르는 김희선의 증조부 김순옥은 김학규장군 집안의 머슴정도 였을지도 모릅니다. 또한 김순옥에게는 김성범이라는 김학규장군보다는 나이가 조금 많은 아이가 있어 형제처럼 지냈을 것입니다.
1904년 김학규장군의 아버지 의성김씨 김기섭이 죽은 후 과부인 김학규의 모친을 비롯한 4남 2녀 다섯식구는 1911년 만주 통화현(通化縣) 이밀(二密)로 이사가 열심히 일해서 천석지기 부자로 일어납니다. 머슴인 김순옥집안도 만주로 이사를 가서 주인집의 재산을 일구는데 같이 노력을 했거나 같이 살지 않고 근처에 있다가(김희선의 출생지가 만주 봉천이 되는 이유입니다) 나중에 주인집이 다시 부자가 되자 합쳤을 수도 있습니다.
혹시 김순옥의 처이자 김희선의 증조모인 선우순이 죽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자 5명의 남자아이와 2명의 여자아이가 남겨진 머슴인 홀아비와 명문 의성김씨 집안의 주인인 과부가 부부도 아니면서 부부처럼 살아가는 묘한 관계가 지속됩니다. 어떤 이유인지 모르지만 의성김씨인 김학규장군은 나중에 안동김씨로 기록되게 됩니다. 같이 살던 김성범은 김학규가 안동김씨로 기록되게 된 사실은 전혀 모른 채 일제치하의 혼란기의 와중에서 의성김씨로 행세하게 됩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한머루의 추리입니다.
김순옥과 김학규의 모친도 죽고 아이들은 장성하여 각자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 아직도 완전히 주종관계에서 벗어나지 못한 김성범은 김학규의 독립운동을 도와주게 되고, 그러다가 1938년경에 일본헌병대에 잡혀 고문후유증으로 죽게 됩니다. 또한 김성범의 아들 김일련은 아버지의 대를 이어 김학규장군의 독립운동을 돕게 되고, 김희선의 주장대로라면 김학규장군의 지시를 받고 대련으로 갔다가 베르호얀스크 감옥에서 죽게 됩니다. 당연히 김희선의 어머니 조인숙은 김학규장군에게 좋은 감정을 가질 수가 없고 책임감을 느낀 김학규장군은 김성범, 김일련의 자손을 도와주게 됩니다.
이런 이유로 김학규장군과 김일련의 딸인 김희선은 1953년 김학규의 평택 피난시절에도 같이 있게 되고 자식이 없던 김학규장군은 김희선을 손녀처럼 귀여워하게 됩니다. 그래서 광복군동지인 한전사장 박영준장군에게 부탁해 한국전력에 취직시켜 주게 됩니다. 한전에서 김희선은 재주있는 청년인 지금의 남편 방국진씨를 만나게 되고 박영준장군은 어떤 식으로든 김학규장군이 친손녀처럼 사랑하는 김희선을 도와주게 됩니다. 김희선이 유학을 가고 사회활동을 하는 여러 과정에서 김학규장군의 음덕은 여러모로 작용하여 오늘의 김희선의원에 이르게 됩니다.
그렇다면 김희선과 독립투사후손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조부와 부친이 김학규장군의 독립운동을 도와 주었으니까요. 다만 김희선의 주장대로 증빙을 할 수 없을 뿐이죠. 이렇게 되자 김희선의 부친의 죽음에 책임을 느낀 김학규장군이 자신의 손녀처럼 행세하는 것을 어느 정도 묵인하게 됩니다. 이제 모든 것이 명확해 집니다. 가짜 의성김씨 김희선이 진짜 의성김씨인 김학규장군의 손녀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김희선의 주장대로 "한 독립운동가의 불행한 가족사"가 아니라 "한 독립운동가의 후손을 자처하는 가족의 불행"이 되고 맙니다.
이쯤되면 김희선이 정말로 감추고 싶어하던 것이 결코 증조모의 재가가 아니라는 것을 아시겠지요? 바로 가짜 의성김씨가 되어야만 했던 슬픈 가족사였습니다. 김희선의 의혹해명 기자회견장에 데리고 나온 김학규장군의 아들임을 주장했던 김일진이 ´백파자서전´에서 누락시킨 가족사부분은 바로 이런 주종관계의 슬픈 기록이 아닐까요? 진짜 의성김씨 김학규장군이 의성김씨로 기록이 남았다면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뿔싸! 국가보훈처기록엔 김학규장군이 안동김씨로 되어 있군요. 소동이 일어나지 않는것이 오히려 이상하지 않습니까?
김희선의원, 결코 노여워 하지 마십시요. 지금까지 오로지 저 혼자 추리해 본 것에 불과할 뿐 이니까요. 그래도 김희선의원, 김학규장군의 손녀라고 주장하시는 것은 지나치지 않습니까? 당신이 김학규장군의 손녀라고 주장하면 그건 사칭이 됩니다. 증명이 되든 않되든 무슨 상관입니까? 훈장이 없어도 이름없이 스러져 갔어도 귀하는 독립운동을 한 김성범과 김일련의 자손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제 추리 어떻습니까? 네티즌 여러분의 의견제시 바랍니다.
첫댓글 듣고 보니 그럴듯 합니다. 그런데 그렇다면 그동안 왜 김희선의 본관이 오락가락 했을까요? 족보가 없는 머슴이라는 설정은 충분히 타당성 있습니다.
이해가 갑니다.
대단하십니다.
김희선의 본관이 오락가락한 것은 아마도 김성범과 김일련이 하인신분을 숨기려고 정확한 성씨를 가르쳐 주지 않았거나, 가르쳐 주었더라도 김해김씨 등으로 가르쳐 주었기 때문에 김학규장군에게 귀여움을 받으며 장군의 손녀로 알고 자라던 김희선이 자신이 의성김씨인지 김해김씨인지 혼란을 일으켰기 때문일 겁니다.
김희선의 주장을 미루어 짐작하건대 주인인 김학규장군의 모친과 머슴인 김희선의 증조부사이의 부부처럼 지낸 묘한 관계가 명문 의성김씨 김학규장군의 약점이 되어 정확한 가족사를 감추게 되고 의성김씨 족보에도 오르지 못한 원인이 되었을 겁니다. 안동의 명문 의성김씨 학봉집안의 분위기를 아시면 이해될 겁니다.
그보다는 백파의 족보 기재 누락은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중시해얄 할것 같습니다. 백파는 48년이라는 세월을 고국과 단절된 삶을 살았습니다. 일신의 문제보다는 독립군으로의 대의를 가지고 사셨으므로 누락 되었다고 보는 것이 합당할 것 같습니다. 제 사견입니다. 저는 그쪽에 무게를 두고 싶군요.
얄리모님의 의견을 존중합니다. 백파의 독립투쟁때문에 호적이나 족보같은 개인사를 소홀히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에 무게를 두는 것이 훨씬 타당합니다. 다만 장군에게 가정적 약점이 있었더라도 그걸 문제삼은 쪽은 문중이라는 뜻입니다.
아하 그렇군요. 아마도 문중에서 심각하게 검토하게 될겁니다. 이대로 놔둔다고 자연히 사그러 글지는 않은다는 것을 보여줘야 됩니다. 아마도 백파의 항렬을 따지면..
한머루님므이 의견도 일리가 없는것은 아닙니다. 백파 부치 타계시 모친의 나이 40이었으니... 그러나 의성 뼈대 있는 가문의 안주인으로 조금 무리가 있지 않을까 싶네요.또한 백파의 성품을 보더라도 ... 자식의 성정을 보면 가풍이 보이는 법이지요. 그런 연유로 본다면 사견으로는 어려운 가운데도 대단히 훌륭한 가정
교육을 시킨 분일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