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제 2차 세계대전은 전 세계에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진 전쟁의 총합이다.
2차 대전은 크게 영국(+미국)vs독일의 서부 전선과 미국vs일본의 태평양 전선 또한 영국vs일본의 인도-버마 전선
일본vs중국의 중국전선..그리고 독일vs소련의 동부전선,독소전쟁이 있다.
이 많은 전선들중 2차 대전에 결정적인 영향을 느낀 전선은 무엇이엿을까? 모든 전선이 다 중요했지만
독일과 소련이 싸운 독소전쟁,즉 동부전선은 2차대전의 90%를 차지할 만큼 제2차 대전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전선이다.
모든 사람들은 말한다.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해서 2차대전에서 패배했다고..그렇다면 히틀러는 왜 소련을 친 것일까?
단지 유럽재패라는 야망때문에?? 사실 나치의 소련 침공은 어쩔 수 없는 예고된 전쟁이였다.
이것은 유럽 역사를 돌이켜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유럽대륙에서 최강으로 떠오른 나라들은 항상 유럽의 양 쪽 끝 때문에 고민한다.
바로 서쪽의 영국과 동쪽의 러시아다. 애초에 유럽은 자원과 시장이 부족한 대륙이다.
따라서 유럽을 재패한 국가라도 세계와의 무역을 해야 제국을 유지할 수 있다.
이 제국 유지를 가장 힘들게 하는게 유럽의 주 무역루트인 대서양을 장악한 서쪽의 해군강국 영국이다.
히틀러의 롤모델 나폴레옹
나폴레옹은 영국과 러시아를 제외한 전 유럽을 재패했다. 하지만 프랑스와 견줄 만한 강국인 영국과 러시아는 건재하였으며 이는 프랑스에게도 큰 위협이였다. 나폴레옹은 먼저 가까운 영국부터 상대하고 영국을 무너뜨린 후 러시아까지 재패하고자 하였다
영국은 프랑스와 가까우나 섬이고 전통적으로 영국은 세계 최고의 해군국이다.
러시아는 프랑스와는 머나
너무 넓고 너무 추우며 매우 많은 병력이 있었다.
유럽을 거의 통일했던 나폴레옹은 영국을 무찌르기 위해 해군을 키웠지만 결국 트라팔가 해전에서 그 꿈을 강제로 포기할 수 밖에 없게 되고 어쩔 수 없이 영국을 유럽으로 부터 봉쇄하는 대륙봉쇄령을 내린다.
하지만 실상은 강력한 영국 해군에 의해 대서양이 막히면서 유럽대륙이 세계로 부터 봉쇄된 것이다.
자원과 시장이 부족한 유럽대륙을 영국이 봉쇄하자 전 유럽 국가들의 재정은 파탄에 이르렀다. 이것은 프랑스도 마찬가지
하지만 해군의 열세로 인해 영국에 손을 쓸 수가 없었고 더불어 대륙봉쇄령의 경제적 손실을 참지 못한 러시아가 대륙봉쇄령을 무시하자 결국 자원과 시장 그리고 프랑스의 위엄을 지키기위해 나폴레옹은 러시아를 침공했고 결국 패배했다.
러시아는 프랑스가 지배하기에는 너무 멀고,넓었으며,병력이 너무 많았다
나치 역시 나폴레옹과 상황이 비슷하다. 강력한 영국 해군에 의해 대서양 무역을 못하게 된 나치는 어쩔 수 없이 동쪽을 공격할 수 밖에 없었다.
흔히들 독일해군의 유보트가 그렇게 활약을 했다고 하는데 왜 독일이 대서양으로 무역을 못한거냐는 생각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독일 유보트의 주요 공격대상은 상선과 자원수송선이였지 영국 해군 본대를 재대로 공격하진 못햇다
기껏해야 작은 규모의 따로 떨어진 영국 해군을 공격한게 전부다.
(1940년까지 영국은 해군력 1위를 자랑했으며 독일은 강력한 육군을 가진 소련 때문에 주요 전력자체가 육군이였다.)
2차대전 때 히틀러가 해군 역시 강화를 했지만 주로 유보트만 해전에 보내고 강화한 해군을 본토에 거의 그냥 쳐 박아둔 이유가
바로 절대 영국해군을 이길 수 없기 때문이다.
애초에 거의 유보트 위주로 해전에 보낸 것만 봐도 독일해군의 약함을 알 수 있다.
잠수함은 일종의 테러 무기다. 테러가 뭘까? 갑작스럽게 공격을 한 뒤 숨는 것이 바로 테러다.
테러라는 건 바로 약자가 하는 거다. 미국 러시아가 소위 말하는 자폭 테러같은것을 하는가?
약한 이슬람 무장 조직들이 주로 하는 것이 바로 테러다.
냉전시기 소련이 잠수함 전력을 강화시킨 것도 해군력이 미국에 비해 약했기 때문이고
나치 독일 역시 단순 수상함 전력으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영국을 이길 수 없기 때문에
잠수함이라는 일종의 테러 무기를 선택한 것이다.
히틀러는 자신은 나폴레옹 같은 실수를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고 독소전 초기에 지휘관이 없는 소련의 300만의 최정예 붉은 군대를 각개격파하면서 독소전쟁은 자신의 승리라고 장담했다.
초기에 파죽지세로 소련을 몰아붙이던 독일군은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기세가 꺾이
고 쿠르스크 전투에서 독일이 자랑하던 모든 기갑전력과 항공전력이 전멸하면서
결국 히틀러는 나폴레옹의 전철을 밟게 됬다.
하지만 많은 밀리터리 매니아들은
"만약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지 않았다면?" "만약 영국 미국 없이 독일과 소련의 1:1전쟁이였다면?"
와 같은 논쟁을 던진다.
첫번째 논쟁은 의미가 없는 논쟁이다. 유럽의 양쪽 끝을 앞에서 언급했듯이 독소전쟁은 일어날 수 밖에 없는 전쟁이다.
영국을 무너뜨리지 못했기 때문에..자원과 시장을 확보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러시아 침공을 해야한다.
즉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지 않을려면 독일이 영국을 정복해서 영국의 대서양 봉쇄를 해제시켜야 가능한 상상이다.
(그러나 앞서 말햇듯이 그것은 절대 불가능 독일해군은 절대 영국해군을 이길 수 없다)
그럼 두번째 논쟁은 어떨까? 독일vs소련의 1:1 전쟁이라는 논쟁에 대해선 많은 의견들이 있으나
전문가들 사이에선 결국 한가지 결론으로 수렴한다.
"독일은 결코 소련과의 전쟁에서 결코 승리할 수 없었다"
즉 제가 이번에 쓰고자 하는 주제는"왜 독일은 소련에게 패배할 수 밖에 없었나?" 입니다.
독소전 전개상황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독소전이 어떤 상황이였는지를 알아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독소전은 크게 4기로 나눌 수 있습니다.
1기:1941년 독소전 발발(바로바로사 작전=독일의 소련 기습 계획)
2기:1942년 스탈린 그라드 전투(독일의 기세가 꺾임)
3기:1943년 쿠르스크 대전투(사실 상 독일의 제2차 세계대전 패배)
4기:1944년 독일 중앙집단군 전멸과 독일 패망(바그라티온 작전=소련의 독일군 괴멸 계획)
1기:1941년 독소전 발발(바로바로사 작전=독일의 소련 침공 계획)
말 그대로 1941년 독일의 소련침공 기간을 의미합니다..
당시 독일은 북쪽으로는 레닌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
중앙으로는 모스크바,남쪽으로는 로스토프를 향해 물밀듯이 진격을 합니다.
그 진격 속도는 파죽지세
독일의 소련 침공 이유
표면적으로는 다름 아닌 생활권 이론 때문입니다.
히틀러의 나의 투쟁을 보면 게르만 민족의 생활권으로
슬라브인들이 장악한 유럽 러시아를 지목했고
이곳에 거주하는 슬라브족을 쫒아내고 게르만인을 정착시켜야 한다고주장했습니다
하지만 더 실질적인 이유는
영국의 대서양 봉쇄로 인한 자원과 시장의 부족과 소련에 대한 잠재적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즉 독일은 소련이라는 강력하고 음흉한 강대국을 자신 근처에 놔 두는 것이 무서웟던 것 입니다.
해군의 부족으로 결코 영국을 정복할 수 없었던 히틀러는 독일이 영국과 싸우는 사이에 자신이 커버할수 없을정도로 소련이 강해지는 것을 무서워했고
결국 미리 싹을 자르기위해 소련을 공격합니다.
즉 소련을 이길 수 있을 때 이겨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침공합니다.
뭐 그 이외에도 공산주의 같은 복잡한 이유가 있지만 여기서는 생략 합니다
독일의 준비
강력하고 광대한 러시아를 점령하는 것이 목표였기 때문에 그 준비 또한 장대했습니다..
우선 소련 침공을 위해서 군단급 단위(보통 2-3개의 기갑사단 + 1-2의 차량화 보병 사단)의 기갑전력을 3-4개 단위로 묶어서 운용하는 기갑집단의 개념을 선보입니다..
그리고 이런 기갑집단을 무려 4개나 창설합니다. 그래서 이런 4개의 기갑집단에 속한 기갑사단이 무려 16-20여개 사단에 이릅니다
그리고 이러한 기갑집단을 주축으로 10여개의 보병사단을 포함하는 군을 조합해서 집단군을 구성합니다.
그리고 이런 집단군을 3개 방면으로 전개 시킵니다.
즉 발트 3국을 통해서 레닌그라드 까지 진격하는 북부 집단군
민스크와 스몰렌스크를 중간보스 느낌으로 모스크바를 최종보스 느낌으로 하는 중부 집단군
그리고 키예프와 로스토프를 거처 스탈린그라드까지 진격목표를 삼은 남부 집단군을 준비하고
각 집단군에 1-2개 정도의 기갑집단군과 2-3개 정도의 군을 할당합니다
즉, 독일군은 3개의 집단군을 전개하면서 20여개의 기갑사단을 포함한 150여개의 사단을 소련 침공에 동원합니다
인원수로는 약 370만, 전차만 4000대가 넘어갑니다.
독일군 주력 전차인 3호전차
독소전이 주도권이 소련으로 넘어간뒤 강력한 소련 전차에 대응하기 위해
3호전차를 대신해 주력 전차가된 4호전차
하지만 소련의 주력전차인 IS-2와 T-34/85 그리고 KV-2를 상대하기엔 성능이 부족했다.
소련의 상황
당시 소련의 군사력은 어마어마 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무장상태가 좋은 군대였을 정도로(사람들이 무장의 질하면 독일을 떠올리는데 사실 소련군이 더 좋았습니다.(물론 독소전 초기에 지휘관의 부재로 다잃음...)
어느정도냐면 소련군은 1930년대에 이미 전 군을 기계화 합니다.(80년 지난 지금도 전 군을 기계화한 국가는 미국과 러시아 뿐)
전차만 거의 3만대이상을 운용했죠..물론 구형 전차도 있었지만
그 구형 전차들도 당시 독일의 하위급 전차와 비슷했으며
당시의 독일의 주력 전차인 3호 전차의 성능을 능가하는
전차들이 더 많았습니다.
한데 왜 독소전 초기에 소련이 그렇게 밀렷느냐?
문제는 장비같은 하드웨어적 요소가 아닌 소프트웨어적 요소였습니다.
우선 우수한 독일 지휘관에 비해서 소련의 지휘관들은 너무 형편없었습니다.
당시 스탈린은 정권에 잠재적인 위험이 될 수 있는 우수한 백계 러시아 제국군 출신 장교들을 전부 숙청하고
이들의 자리에 경험이 전무하고 어린 장교들을 승진시킵니다.
대부분이 20대 였고 심지어 10대후반도 상당했습니다.
당연히 이들의 지휘능력은 형편없었습니다....20대 정도인 애들이 무슨 지휘를 합니까?
즉, 소련군은 무장 상태도,장비의 숫자도 병력의 양도 독일을 압도했으나 아무리 무장 상태가 좋고, 장비의 수가 많고 병력도 많아도 숙련된 지휘관이 다루는 것과 아무것도 모르는 지휘관이 다루는 것은 숙련된 조교와 갓 들어온 신병의 차이만큼 큰 차이가 있엇습니다.
소련의 주력 경전차였던 T-34
티거전차를 제외하고 독일의 그 어느 전차보다도 우수한 전차며
경사장갑이라는 당시 모든 전차보다 한단계 진보된 개념이 적용된 전차다.
(이러한 기술덕분에 T-34는 중전차가 아니라 경전차임에도 그당시 왠만한 국가의 중전차급의 성능을 지녔다)
티거 전차는 중전차임으로 소련의 IS-2와 비교를 티거2는 IS-3랑 비교를 해야된다
T-34와 동급인 전차는 독일의 4호전차다. 물론 T-34와 4호전차의 대결은 T-34의 압승
소련의 중전차인 KV 전차
전쟁초기 독일은 88mm 대공포를 지상에 쏘는 것 외에는
이 전차를 파괴할 방법이 전혀 없었다.
이 전차로 독일군은 소련군의 전차 개념이 자신들보다 더 발전되어 있음을 깨닫고
이 전차를 노획하여 연구한다. 티거 전차 개발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 전차이다.
1기의 결과
위에서 언급한대로 독일의 승리입니다.
즉 독일군은 프랑스나 폴란드 전투에서 해봤던 몇만명 단위의 포위 섬멸이 아닌
몇십만명~몇백만명 단위의 포위 섬멸전을 훌룡하게 합니다.
특히 키예프 포위전에서 무려 100만명에 달하는 소련군을 포로로 잡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성공적인 포위 섬멸전으로 인해 위로는 레닌그라드,중앙으로는 스몰렌스크,남쪽으로는 로스토프까지 진출합니다
독일군보다도 훨씬 장비가 우수했고 수도 많았던 소련군이 지휘관의 부재로 독일군에게 각개격파
세계에서 가장 무장상태가 좋은 세계 최고의 장비를 지닌 300만의 정예 소련군을 모두 잃은 소련은 말그대로 엄청난 위기였고,
히틀러는 그 무서웠던 정예 소련군을 격파 이 전쟁은 승리했다는 확신을 합니다.
바르바로사 작전 당시 독일군 진격 방향
북으로는 레닌그라드 중앙으론 모스크바 남으로는 스탈린그라드로 진격했다.
1기의 양상
하지만 독일군에게도 문제가 있었습니다..소련은 너무나도 넓었고..뛰어난 작전으로 엄청난 승리를 했지만
아무리 지휘관이 없는 토끼가 지휘하는 사자 소련군이라지만 사자는 사자였기 때문에 섬멸하는데 걸린 시간이 계획된 시간의 2배였습니다.
당연히 진격속도는 느려지고, 독일의 장비는 고장나고, 병력수는 줄어들고, 결국 10월 이 후 소련의 가을 장마가 시작되어
도로는 진흙탕이되고 겨울이되어 무서운 동장군이 오게됩니다
그 결과 독일군은 진격을 멈춰야 했고 다음년도 해빙기까지 전선은 소강상태가 됩니다.
즉 독일군은 세계 최강 소련 육군을 상대로 기적적인 대승을 거뒀고 많은 소련 영토를 점령했지만
결국 궁극적 목표인 모스크바 공격 전에 동장군을 만나 많은 장비와 인력이 손실된채 소강상태가 됩니다.
즉 독일군은 수많은 전투에는 승리했지만 결국 겨울전까지 모스크바를 점령,전쟁을 끝낸다는 전략적 목표를 달성하는데 실패합니다.
그리고 이 것은 독소전이 히틀러가 생각하던 단기전이 아닌 장기전이 된다는 의미고
이 것은 총 국력이 소련의 상대가 되지 않는 독일에겐 결정적인 약점이 됩니다.
반면 소련은 최정예 소련군을 전부 잃고 무수히 많은 전투에서 패했지만 소련의 국력은 아직도 강했습니다.
특히 모스크바 공방전에서 독일군을 격퇴한 건 큰 전략적 승리였습니다.
그래서 혹자는 이 당시 소련이 공간을 팔아서 시간을 벌어
군대 지휘계급을 복구하였다고 합니다.
각설하고 1941년은 1기 독소전은 어찌됫건 독일이 기적적으로 최정예 소련군을 괴멸,일방적인 독일군의 소련 두드리기 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1941년 동장군이 온 이후 독일군의 진격은 멈췄고
상대적으로 소련군의 반격은 거세어 졌습니다.
거기다 시베리아에 있던 주코프와 다른 훌룡한 지휘관들이 모스크바로 돌아옵니다.
그 결과 독일은 모스크바 함락에 실패
중부전선에서 상당거리를 후퇴합니다.
2기:1942년 스탈린 그라드 전투
1941년이 지나고 1942년이 해빙기가 되자..독일 소련 모두 공격 계획을 가집니다.
특히 소련이 경우 영토회복을 위해
여러차례 반격 작전을 펼치지만 아직 정신을 덜 차리고 전략 전술에 대해 조또 모르면서 군에 이래라 저래라하는 스탈린 때문에 모두 독일군에 저지 당합니다.
그리고 독일군에 경우 청색작전(블라우 작전)을 통해서 소련의 경제 요충지를 점령할 계획을 세웁니다.
당시 소련의 경제 요충지는 우크라이나의 곡창지대와 보다 동쪽에 있는 석탄과 철광산지인 도네츠크지역과 우랄의 공업지역 그리고 마지막으로 코카서스 산맥 이남 지역의 유전지대였습니다.
동부전선 전 지역에서 공격을 하는 것은 독일의 국력에 힘들었기 때문에 석유라는 가장 중요한 경제적 요충지가 있는 남부전선에 독일군 최정예 제6군을 보내고 병력을 남으로 집중시킵니다
그리고 독일은 1941년 이루었던 장쾌한 진격전을 남부전선에서 다시 실현할려 합니다.
블라우 작전 당시 독일의 목표
남쪽으로 갑니다.
그래서 독일군 1기갑군과 A집단군은 코카서스 산맥을 넘어 소련의 유전지대인 카프카스로 접근합니다.
헌데 독일군 최정예이자 주전력이였던 독일 제6군이 스탈린그라드에서 주춤 소련군에게 역포위 당합니다.
그리고 스탈린 그라드는 독소 양군의 지옥같은 전쟁터가 됩니다.
그렇게 1942년 겨울이 되고 스탈린 그라드를 침공한 독일의 최정예 제6군 과 4기갑군 전체가 소련의 역 포위망에 갇히고 결국 전멸합니다
이 전투로 인해 독일은 우크라이나와 도네츠크 지역,코카서스 유전지대를 점령해서 소련을 경제적으로 붕괴시키겟다는 계획이 무너지게 됩니다.
반면에 소련군은 독일의 최정예 부대를 전멸시켰다는 점에서 매우 큰 소득을 가져갑니다.
즉 계속된 패배로 사기가 떨어진 소련군에게 엄청난 자신감을 주게된겁니다.
독소전 초기에 잃었던 많은 장비가 복구되고 시베리아에 있던 지휘관들이 돌아옴으로써 강력한 소련군이 다시 조직되고
2차대전 당시 스탈린이 한 짓 중 유일하게 잘한 짓인 소련 서부지역에 있던 군수품 생산시설을 우랄 지역으로 전부 옴기는 소련의 작전이 1943년에 마무리되고 그 공장들이 가동되기 시작하면서
소련의 군수품 생산은 독일을 압도적으로 능가하기 시작합니다.
소련군의 스탈린 그라드 포위
자신들이 소련군에게 써왓던 섬멸포위전에 독일 최정에 제6군은 전멸한다.
3기:1943년 쿠르스크 대전투(사실상 독일의 제2차 세계대전 패배)
스탈린그라드 전투 이후 독일의 남부 집단군은 붕괴됩니다.
비록 붕괴됫지만 독일의 천재 전략가인 만슈타인 장군이 독일을 구합니다.
어차피 남부집단군의 후퇴로는 소련군에 막혀 후퇴할 수 없는 상황이 였고 따라서 만슈타인 장군은 하르코프 전투에서 남부집단군과 소련군을 상잔시켜 소련군에게 엄청난 피해를 입힙니다.
독일의 천재 전략가 만슈타인
이 장군이 후퇴로가 막힌 독일의 남부집단군을 소련군 남부방어군과 상잔시켜
남부전선은 소강상태가 됩니다.
이 전투로 인해서 독일은 그나마 안정을 찾게 되고 독일 소련 양군은 숨고르기에 들어 갑니다.
하지만 전쟁의 주도권은 점점 소련으로 넘어 가고 있었습니다.
즉 , 총 국력에서 독일을 압도하는 소련의 경우..
독일보다 더 많은 병력,장비,물자를 생산하고 있었고
(미군의 재대로된 랜드리스지원은 본토에 짱박혀 있던 영국 해군이 북해로 나오기 시작한 1944년부터 시작, 랜드리스 지원이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독일은 모든 주력병력을 소련에게 잃어서 패배는 확정)
결국 독일은 전쟁에서 패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따라서 독일의 목표는 독소전에서의 승리가 아닌 독소전에서의 정전으로 바뀌게 됩니다..
즉 현 전선에서 독소전을 끝낸다는 것이 최선의 전략으로 바뀐 것 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독일 수뇌부가 설정해 놓은 전략적 방어선으로 독일군을 후퇴시켜서 철옹성의 방어막을 형성 하는 것이 필수였습니다.
하지만 소련군이 기존의 T-34에 더 강한 주포를 단 신형 T-34/85의 양산 계획과 티거의 라이벌이자 티거 등장 전까지 전세계 압도적 원탑 전차였던 IS-2의 후속작 IS-3 전차의 양산 계획을 독일은 알게 되었고 신형 T-34/85와 IS-3가 양산되면 전선 고착화가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린 독일은 전선을 고착화 시키기위해
현 소련군 최정예 부대를 무력화 시킬 필요가 있엇고 무력화 시킬 전장으로 쿠르스크라는 지역을 지목합니다.
즉 쿠르스크로 소련군 기갑부대를 유인해서 우수한(?) 독일 기갑군으로 대 타격을 입혀..시간을 벌고
점차적으로 독일의 전략적 방어선인 팬터-보탄라인으로 국경을 고착화시켜 소련과의 정전협정을 한다는 전략이었습니다.
즉, 독일군 입장에서 이 쿠르스크에서 신형 T-34/85 전차가 합류하기전에 소련 기갑전력을 약화 시키는 것이 최우선의 목표였습니다..
소련도 이 점을 알고 있엇고 그래서 소련이 독일의 의도를 역 이용 합니다.
소련 기갑군을 미끼로 독일군을 끌어드려서 오히려 독일 기갑군을 소진시키는 전략,일종의 소모전을 하는 겁니다.
결국 계속 되는 소모전을 참지못한 독일이 티거전차가 배치된 후 바로 공격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독소 양군의 엄청난 기갑전이 었습니다..
독일의 경우 경전차를 포함해 총 3000대가 넘는 전차..독일이 보유한 거의 모든 전차를 쿠르스크 전투에 투입했고 소련 역시 6000대가 넘는 전차를 투입했습니다..공중전도 치열했는데 독소 양군 총 6000대에 달하는 전투기들이 공중전을 벌였으며 6만문의 대포가 불을 뿜었습니다.
쿠르스크 전투는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전투였습니다..
역사상 최대 규모인 엄청난 수의 장비가 투입되었고
독일은 이 전투에서 패배하면 제2차 세계대전 패전이 확정이였기 때문에 소련은 이 전투만 이기면 제2차 세계대전 승전이 확정이였기 때문에
두 육군 강국들은 엄청나게 싸워됬고 그 싸움에 결과로
겨우 11일만에 100만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했습니다
쿠르스크 전투상황입니다
독일군은 쿠르스크라는 지역에서 소련군과 역사상 최대규모의 전투를 벌이고
나치 독일은 결과적으로 자신들의 모든 기갑전력과 항공전력을 잃는 대 참사를 겪게 됩니다.
소련군이 묘사한 쿠르스크 전투..
그야 말로 지옥이다..
전차가 너무 많아서 전차 백병전이 엄청나게 발생했다.
이 전투에서 사실상 제2차세계대전의 승패가 결정되었다.
쿠르스크 전투의 결과로 독일은 자신의 모든 기갑전력과 항공전력을 잃었고 소련 역시 엄청난 숫자의 기갑과 항공을 잃었습니다.
하지만 소련은 소모된 기갑전력과 항공전력을 복구할 능력이 충분히 있었습니다.
그러나 독일은 그럴만한 능력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쿠르스크 전투 이후에 독일군에겐 자신들이 자랑하던 기갑전력 항공전력이 아닌
오직 보병전력과 포병전력만 그나마 남게 됩니다..
따라서 동부전선을 팬터-보탄라인에서 고착화시킨다는 독일의 계획은 실패하고
나치 독일은 아직도 수 만대의 전차와 장갑차 항공기를 운용하는 소련을 오직 보병만으로 막아야되는 상황에 이릅니다.
결국 나치 독일은 소련의 공세에 대한 재대로된 방어전 한번 해보지 못하고
동부전선 전체가 붕괴되는 사태가 발생합니다.
쿠르스크 전투의 결과로 독일의 3 집단군 북부 집단군 중앙 집단군 남부 집단군은 모두 해체되고 다 합쳐서 다시 중앙집단군을 만듭니다.
이 마지막 중앙집단군이 바로 독일 최후의 집단군으로 독일군 최후의 전력입니다..
문제라면 명색이 집단군이면서 보병 위주라는 것......
쿠르스크 전투 이후 소련의 진격로
독소전 초기와 달리 독일군이 소련군보다 훨씬 많이 죽게된다
보병 뿐인 나치독일은 기갑전력 위주의 소련군에게 치열하게 대항하지만
온니 보병이 전군이 기계화 전력인 소련군을 막을 수 있을리가 없다
4기:1944년 독일 중앙집단군 전멸과 독일 패망(바그라티온 작전=소련의 독일 침공 계획)
쿠르스크 전투 이후 모든 동부 전선이 붕괴됬지만 우크라이나 곡창지대 회복이 목표인 소련으로 인해 중앙과 북부전선을 남부보다 평온을 유지합니다.
거기다 독일은 보병만 남아서 승전이 확정된 소련에게 중요한 것은 '앞으로 얼만큼 자신들의 피해를 줄이냐? ' 라 동부전선은 생각보다 고요했습니다.
독일의 수뇌부들은 소련의 주공이 계속 이런 남부전선을 파고 들어서 동부유럽으로 진출할 것이라고 생각해 기존 3개 집단군에서 남아있는 병력을 모두 합쳐 만든 새로운 마지막 중앙집단군을 남부 쪽으로 보냅니다.
하지만 소련은 우크라이나 곡창지대 회복이 예상보다 훨씬 빨리 수복되자 중부전선인 벨로루시 지역에 눈독을 들이고 이곳을 수복할 거대한 공격 계획을 세웁니다.
이게 바로 그 유명한 바그라티온 작전입니다
이 작전을 위해서 소련은 남부전선에 집중해 있던 각종 기갑전력을 중부전선으로 집중합니다. 그러면서 부대의 이동을 숨기기 위해 각종 교란 작전을 펼칩니다.
쿠르스크 전투 이후 거의 모든 항공전력을 잃은 독일은 정찰기가 없어 소련군의 부대이동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을 정도 였고
따라서 중부전선에 소련군이 집결하는 것을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소련군의 공격에 제대로 대비할 수 없었죠.
그 결과는 3개 집단군의 잔존 전력을 전부 모아 만든 독일의 마지막 병력인 중부 집단군의 파멸이 었습니다.
30여사단이 넘는 독일 중앙 집단군이 소련의 기갑,항공전력에 그냥 녹아내렸습니다.. 그나마 독일군 포병들이 분전하였지만 압도적인 소련의 기갑전력과 항공전력을 오로지 보병으로만 막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치기 였으며 독일의 마지막 병력이자 마지막 집단군도 역시 해체됩니다.
이제 독일에는 소련군에 대항할만한 전력이 아무 것도 남지 않았고 소련군은 독소전 초기의 독일군의 진격속도 만큼 빠른 속도로 베를린을 향해 진격합니다.
1944년도 소련군은 바그라티온 작전을 통해서 모든 독일군을 몰아내 버립니다.
이 전투로 모든 독일 잔존 전력을 모아 만든 독일 중앙 집단군은 괴멸 합니다.
쿠르스크 전투 이후 독일군은 제대로 된 방어전 하나 치루지 못하고
폴란드및 독일 본토를 소련군에게 넘기게 됩니다.
독일이 패배 할 수 밖에 없는 이유
애초에 총 국력이 독일은 소련에 상대가 되지 않았습니다.
물론 스탈린의 지휘관 숙청과 독일의 기습 공격으로
독소전 초반에 그렇게 소련을 이겼지만 말그대로 그건 기적이였을 뿐,
독일의 국력으로 소련을 이기는 건 명백한 무리였습니다.
레닌그라드,모스크바,스탈린그라드까지 가지 말고 3개의 집단군을
그대로 유지시키면서 차라리 팬더-보탄라인의 전선을 고착화시키는 것이
가장 현명한 선택이였지만
독소전 초기에 너무나도 기적적인 승리를 거둔 독일은 정말 자신들이 소련을 이길 수 있다고 여겼고 이길 수 있다는 생각에 무리하게 3개의 집단군을 소련과의 전투에 계속 투입하다.
결국 3개의 집단군이 붕괴하면서 패배하게 됩니다.
독일의 전략적 실수들
위에서 언급한 것이 바로 독소전의 대략적 전개 상황 입니다..
즉 독소전 초기에 독일이 기적적인 승리를 거두며 소련 영토 깊숙히 침공했지만,
결국 공간을 팔아서
시간을 번 소련이 군 지휘 체계를 회복하자고 우랄 산맥에서 군수품이 쏟아지자마자
독일군이 패배하게 됩니다.
한데 이러한 독소전에서 정말로 독일은 승리할 수 없었을까?
그러면 이러한 전략적 포인트를 언급해 보겠습니다
1기:1941년 독소전 발발의 포인트
위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스탈린의 지휘관 숙청으로 인해 독일군의 기적적인 승리가 있던 시기였습니다.
한데 여기서 독일의 국력 한계가 드러납니다
키예프 포위전
소련 남부전선은 독일 남부집단군이 담당하고 있었고,소련은 남서 전선군이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남서전선군은
비록 제대로된 지휘관이 없었지만 무장상태가 좋았고 수 도 백만단위의 대군이였습니다.
우수한 독일의 작전으로 180만에 가까운 소련 남서 전선군을 키예프에 가두게 됩니다.
문제는 이 키예프에 포위된 180만의 소련군 입니다.
즉 전쟁을 단기간에 끝내기 위해서 독일군은 빨리 진격해야했는데,
키예프에 가두어둔 소련군을 무시하고 그냥 지나치기에는 너무나도 불안했습니다.
즉,독일군은 키예프에 포위된 소련군을 놔두고 계속 진격을 하느냐 아니면 섬멸을 하느냐 란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독일은 만약 180만의 소련군을 무시하고 계속 진격하는 것은 배후가 너무 위험하다라는 판단에 어쩔 수 없이 키예프 소련군을 포위 섬멸하기로 결정을 내립니다.
하지만 소련 남서 전선군은 비록 지휘관이 없다지만 무장상태가 좋은 180만의 대군이였습니다.
결국 이 소련군을 섬멸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모스크바로 전진하던 중앙집단군의 제 2,3 기갑집단을 남부 키예프로 돌립니다.
결과는 키예프 포위전의 대 성공이였습니다. 하지만 중앙 집단군은 제 2,3 기갑집단의 부재로 거의 한달동안 진격을 멈추어야 했고 제 2,3 기갑집단이 다시 중앙집단군으로 돌아와서 진격하게 된 시점은 10월 중순...소련의 가을 장마가 시작되는 시점이었습니다.
따라서 독일군의 진격속도는 늦어지고..결국 독일 중앙집단군은 모스크바 공방전에서 패배, 후퇴합니다.
물론 제 2,3기갑집단을 남부 키예프로 돌리지 않고 그대로 모스크바를 공격했어도 별 다를 건 없습니다. 모스크바를 점령했어도 결국 키예프에 있는 180만의 소련군이 그대로 남아있다면 그것은 나폴레옹처럼 패배를 의미합니다.
실제로 나폴레옹은 나치독일과는 달리 그냥 모스크바를 가는 길목의 러시아군을 다른 쪽으로 몰아넣은 후 쭉 모스크바를 공격,결국 모스크바를 점령했지만 자신들이 섬멸시키지 않고 몰아넣은 러시아군의 방해로 보급선에 차질이 생기고 결국 광대한 러시아에 홀로 있는 섬이 된 나폴레옹 군은 전멸합니다.
히틀러는 이러한 나폴레옹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모스크바로 가는 길에 있는 소련군을 섬멸하기로 하지만 결국 섬멸하는데 많은 시간이 걸려서 전쟁에서 패배하게 됩니다. 즉 독일은 키예프 소련군을 섬멸을 해도 패배,섬멸을 하지 않아도 패배할 수 밖에 없었고 이 이유는 바로 국력의 차이 때문 입니다.
2기:1942년 스탈린 그라드 전투의 포인트
이 시기는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독일군이 전략적 자원을 획득하고 소련의 경제를 무너뜨리기 위해서 소련 남부에 전력을 집중했던 시기 입니다.
하지만 여기서도 독일의 한계가 드러납니다. 바로 스탈린 그라드를 공격했다는 점 입니다.
스탈린그라드는 돈강과 볼가강에 가장 근접하게 접근한 도시입니다..당연히 수운이 발달한 지역이고 철도까지 놓여져 있으며 교통의 요충지였습니다.
스탈린그라드는 많은 전차와 전투기를 생산하는 공업도시였으며 특히 코카서스의 유전이 스탈린그라드를 통과하기 때문에 소련과 독일 양측모두 꼭 차지해야할 도시 였습니다.
독일은 가는 길목의 모든 소련군을 섬멸하여 진격속도가 늦어져 결국 모스크바 점령에 실패했습니다.
따라서 독일은 이번에는 모스크바때와는 다르게 그냥 스탈린그라드로 가는 길목의 소련군을 몰아 놓고 바로 스탈린그라드로 가서 점령할려는 계획을 세웁니다. 물론 나폴레옹 처럼 광활한 러시아에 고립이 되지 않기위해 한 곳의 소련 포위망을 뚫을 수 있는 강력한 군단
독일 최정예 제6군을 스탈린그라드로 보냅니다.하지만 소련군의 저항은 거셌습니다. 거기다 지옥같은 시가전으로 독일군중 가장 강한 최정예였던 제6군도 스탈린그라드를 도저히 완전히 점령할 수 없었고 독일군들이 스탈린그라드에서 발이 묶인 사이에 독일군이 몰아 너었던 소련군들이 다시 나와서 오히려 스탈린 그라드를 역포위합니다.
결국 독일 최정예 제6군은 나폴레옹군의 전철을 그대로 밟아 전멸합니다.
3기:1943년 쿠르스크 대전투의 포인트
이 전투가 벌어진 1943년 소련이 군대 지휘관 계급은 많은 회복을 합니다..숙청되지 않고 남아있었던 훌룡한 장교들이 다시 장교직에 올랐습니다.
또한 독일 최정예 제6군을 전멸시켰다는 사실로 소련군의 사기가 많이 올라갔습니다.
사실상 제2차 세계대전의 승패가 결정된 시기는 바로 1943년 7월이였습니다.
이 당시 독일은 사실상 독소전쟁 승리를 포기하고 독소전쟁을 휴전시키기위해서 어느정도 자기들이 한번더 기세를 잡아야할 필요가 있었고 신형T-34/85와 새로운 전투기들이 양산되기 전에 어떻게든 소련군 주력군에 타격을 주어야지 자신들이 정한 팬더-보탄라인을 고착화 시킬 수 있습니다..
그래서 독일은 성채작전을 준비하고 이 것이 바로 쿠르스크 대전투 입니다.
여기서도 독일의 한계가 드러납니다.
시간은 소련군의 편이 였기 때문이죠. 시간이 자신의 편이라는 것을 잘아는 소련은 계속해서 '소수의' 기갑전력과 항공전력으로 국지전을 벌였습니다.
문제는 소련의 입장에서 '소수의' 기갑,항공전력이였지 독일의 입장에선 상당한 수의 기갑전력과 항공전력이였고 때문에 이러한 국지적 싸움에 상당한 시간이 소모됩니다.
계속된 국지적인 소모전 때문에 독일군 전력은 야금야금 약해져 갔고
어쩔 수 없이 독일은 신형 티거전차 투입까지 기다리게 됩니다. 물론 만슈타인은 계속되는 소련의 소모전에 응하지말고 차라리 한번 크게 싸운 후 어느정도 전력을 보존한다음 퇴각해 팬더-보탄 라인을 고착화 하자 라는 주장을 합니다만
소련의 강력한 포병전력 때문에 크게 싸운 후 어느정도 전력을 보존하면서 퇴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라는 생각을 독일 수뇌부는 가졌고 아예 이 쿠르스크 전투에서 이겨야 된다는 판단을 내립니다...
물론 쿠르스크 전투에서 독일군은 절대 이길 수 가 없었습니다. 차라리 실패할 확률이 매우 높긴 했지만 아예 실패 확률이 100%는 아니였던 만슈타인말처럼 어느정도 피해를 감수하고 소련군에게 피해를 줘야 휴전협정을 할 수 있는데. 쿠르스크 전투를 이길 생각으로 티거전차를 기다렸지만 앞서 말했듯이 시간은 소련 편이였고 티거전차가 배치될 때 까지 너무 많은 시간을 소련에게 줘서
결국 티거전차가 배치 됬음에도 그 기간 사이에 소련군은 말도 안되게 강해져서 결국 쿠르스크 전투에서 나치 독일은 자신들이 보유한 모든 기갑전력과 항공전력을 잃게 됩니다...
만슈타인 말대로 차라리 바로 싸워서 (물론 바로 싸웟어도 결국 독일이 패배할 확률이 높고 독일군 전력을 어느정도 보존하면서 후퇴할 가능성도 매우 낮긴 했지만) 독일군의 피해를 그나마 줄이고 소련군의 패를 그나마 늘려서 휴전협정을 했다면 하는게 더 현실성 있엇죠..
물론 만슈타인의 주장이 그대로 실현이 됬어도 이미 전력차가 압도적으로 벌어진 마당에 소련이 휴전할 이유는 없지만요
4기:1944년 독일 중앙집단군 전멸과 독일 패망의 포인트
여기서는 딱히 포인트가 없네요
앞서 말했듯이 1943년 쿠르스크 전투의 결과로 독일에게 남은 것은 오직 보병들 뿐
이에비해 소련은 수천대의 전차와 수만대의 장갑차, 전투기, 폭격기,수만대의 포,거기다 수백만의 보병을 보유했으니까요....
독소전은 어찌됫건 결국 소련이 승리할 전쟁입니다..
애초에 총 국력차이가 많이나요..
제2차대전 독일군 사망자가 약 550만명인데 그중 500만명 이상이 독소전쟁에서 죽었으며
소련은 독소전쟁에서 소련군만 1000만명이 죽고 민간인 포함 총 2400만이상이 사망..
암튼 독일의 결정적인 패배 요인은 초반에 너무 기적적으로 소련군을 이긴 것 같습니다..
독소전 초기의 기적적인 승리가 히틀러에게 소련을 정말로 이길 수 있다는 헛된 희망을 심어줫으니깐요..
3줄 요약
1.애초에 독일의 국력은 소련을 이길 수 없다
2.스탈린의 지휘관 숙청으로 독일은 기적적인 승리를 한 것
3.미국의 랜드리스(장비) 지원이 많은 도움이된 건 사실이나
미국의 랜드리스 지원이 재대로 시작된 건 영국 해군이 북해로 나온 44년도로 이미 43년에 쿠르스크 전투에서 독일의 주력병력과 대부분의 장비가 소련에 의해 괴멸됬다.
펌 - 디펜스클럽
출처: 도탁스 (DOTAX) 원문보기 글쓴이: 마루귀여웡
첫댓글 소련의 생산력이란 참;;; 희대의 뻘짓을 해서 1백개 사단 300만이 넘는 병력을 순식간에 잃었는데도 그걸 순식간에 상회하는 병력을 뽑아냈으니 참 생산력 하나는 어마어마 했습니다.
이런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에게 패배했죠
재밌네요...시간가는줄모르고읽었어요
딴걸 떠나 독일이 전쟁 초기 점령지에서 유화정책만 유지했어도 전쟁 상황은 훨씬 좋았겠죠, 스탈린의 강압 때문에 소련내 소수민족과 합병국가들은 독일이 자신들을 해방시킬 해방군으로 여겼는데 독일이 인간취급도 안하면서 깔끔하게 돌아서게 만든거 보면 되도 안되는 신념만 가지고 있는 놈들이 얼마나 비효율적이고 멍청한지 알수 있는 부분인것 같습니다.2차대전 독일이 뭔가 되게 효율적이고 기계처럼 딱딱 맞아들어간것 같은 분위기지만 실제 보면 군수품 생산이나 전시국가운용등을 보면 비효율과 불합리의 끝판왕 같은 느낌도 듭니다, 국지전도 아니고 민족의 명운을 건 절멸전을 펼친 국가가 전시에 그렇게 운영되다니 놀라울뿐이죠
독일은 소련을 이길 수가 없었습니다. 애초에 바로바르사 작전을 계획할때도 소련침공의 구체적인 목적과 계획조차도 제대로 수립되지 않은체로 빠르면 한달 아니면 반년이내로 작전을 완료한다는 어처구니 없고 애매한 일정으로 시작하게 됩니다. 이것 하나만 봐도 얼마나 대책없이 소련침공을 시작했는지 알 수가 있죠.
폴란드와 오스트리아가 사라진 상황에서 독일과 러시아의 전면전은 시간문제였을뿐...어찌보면 제국주의 자체의 한계죠. 중간에서 버퍼 역할을 할 중소국을 죄다 잡아먹어버리니까요.
is-3 되게 멋있다고 생각하는데요...실제 전투에는 투입된적이 없는건가요?
소련의 끝도 없는 물량은 신기할 정도입니다. 털리고 털려서 몇천만의 사상자를 냈는데도 끝도 없는 물량으로 독일에게 막타를 때려냈죠.. 현대국가가 작정하고 전쟁기계로 변신할 경우 미국과 다른 의미로 얼마나 무서워질수 있는지 보여주고 있죠.
애당초 곰과 늑대의 싸움이었죠. 소련은 인구도 압도적이고 땅덩이도 넓은데다가 석유,가스,철광등 필요한 자원이 모두 자국에서 풍부하게 나오는 점에서 애당초 기습으로 초단기전으로 승부를 보지 않는한 이기는 건 불가능한 국력의 차이가 있었다고 봅니다.
다른 야기지만 이 어마어마한 러시아를 일본은 어케 이겼을까요?
일본과 러시아의 차이는 여우와 곰의 차이였지만 러시아의 단점은 너무나 넓어서 병력이 분산되어 있었다는 점과 한반도쪽으로 통하는 철도와 교통로가 완전히 완성되지 않아서 이동과 물자수송 등에 어려움이 있다는 변수가 있었습니다. 게다가 영국과 협정을 맺고 수에즈 운하까지 끊겨버린 마당에 러시아 주력병력이 아시아로 오는데 상당히 시간이 걸렸는데 그점을 너무나 일본이 잘 이용했죠. 기습과 러시아의 약점, 그리고 외교의 승리였던 셈이죠. 하지만 포츠머스 조약에서 배상금을 받지도, 큰 영토를 받지도 못했는데 이유는 러시아와 다시 싸울 힘이 일본에게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대승을 거두긴 했지만 일본은 총력전으로 승리를 한거라 상당히 힘을 소진한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반면 러시아는 마음만 먹으면 다시 대규모로 편성해서 맞짱을 뜰수 있는 자원력과 인구가 받쳐주던 나라였습니다. 러시아는 한판 더 뜰 생각이었는데 내부의 사정으로 결국 조선에서 물러날수밖에 없었고 일본 역시 겉으로는 쌘 척 했지만 더 싸워봐야 얻을 것도 없고 오히려 러시아가 악쓰고 달려들까봐 조선으로 만족하고 적당히 빠진 것이죠.
@Jerry Sloan 와~~ 글쿤요 설명 감사합니나
첫댓글 소련의 생산력이란 참;;; 희대의 뻘짓을 해서 1백개 사단 300만이 넘는 병력을 순식간에 잃었는데도 그걸 순식간에 상회하는 병력을 뽑아냈으니 참 생산력 하나는 어마어마 했습니다.
이런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에게 패배했죠
재밌네요...시간가는줄모르고읽었어요
딴걸 떠나 독일이 전쟁 초기 점령지에서 유화정책만 유지했어도 전쟁 상황은 훨씬 좋았겠죠, 스탈린의 강압 때문에 소련내 소수민족과 합병국가들은 독일이 자신들을 해방시킬 해방군으로 여겼는데 독일이 인간취급도 안하면서 깔끔하게 돌아서게 만든거 보면 되도 안되는 신념만 가지고 있는 놈들이 얼마나 비효율적이고 멍청한지 알수 있는 부분인것 같습니다.
2차대전 독일이 뭔가 되게 효율적이고 기계처럼 딱딱 맞아들어간것 같은 분위기지만 실제 보면 군수품 생산이나 전시국가운용등을 보면 비효율과 불합리의 끝판왕 같은 느낌도 듭니다, 국지전도 아니고 민족의 명운을 건 절멸전을 펼친 국가가 전시에 그렇게 운영되다니 놀라울뿐이죠
독일은 소련을 이길 수가 없었습니다. 애초에 바로바르사 작전을 계획할때도 소련침공의 구체적인 목적과 계획조차도 제대로 수립되지 않은체로 빠르면 한달 아니면 반년이내로 작전을 완료한다는 어처구니 없고 애매한 일정으로 시작하게 됩니다. 이것 하나만 봐도 얼마나 대책없이 소련침공을 시작했는지 알 수가 있죠.
폴란드와 오스트리아가 사라진 상황에서 독일과 러시아의 전면전은 시간문제였을뿐...
어찌보면 제국주의 자체의 한계죠. 중간에서 버퍼 역할을 할 중소국을 죄다 잡아먹어버리니까요.
is-3 되게 멋있다고 생각하는데요...실제 전투에는 투입된적이 없는건가요?
소련의 끝도 없는 물량은 신기할 정도입니다. 털리고 털려서 몇천만의 사상자를 냈는데도 끝도 없는 물량으로 독일에게 막타를 때려냈죠.. 현대국가가 작정하고 전쟁기계로 변신할 경우 미국과 다른 의미로 얼마나 무서워질수 있는지 보여주고 있죠.
애당초 곰과 늑대의 싸움이었죠. 소련은 인구도 압도적이고 땅덩이도 넓은데다가 석유,가스,철광등 필요한 자원이 모두 자국에서 풍부하게 나오는 점에서 애당초 기습으로 초단기전으로 승부를 보지 않는한 이기는 건 불가능한 국력의 차이가 있었다고 봅니다.
다른 야기지만 이 어마어마한 러시아를 일본은 어케 이겼을까요?
일본과 러시아의 차이는 여우와 곰의 차이였지만 러시아의 단점은 너무나 넓어서 병력이 분산되어 있었다는 점과 한반도쪽으로 통하는 철도와 교통로가 완전히 완성되지 않아서 이동과 물자수송 등에 어려움이 있다는 변수가 있었습니다. 게다가 영국과 협정을 맺고 수에즈 운하까지 끊겨버린 마당에 러시아 주력병력이 아시아로 오는데 상당히 시간이 걸렸는데 그점을 너무나 일본이 잘 이용했죠. 기습과 러시아의 약점, 그리고 외교의 승리였던 셈이죠. 하지만 포츠머스 조약에서 배상금을 받지도, 큰 영토를 받지도 못했는데 이유는 러시아와 다시 싸울 힘이 일본에게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대승을 거두긴 했지만 일본은 총력전으로 승리를 한거라 상당히 힘을 소진한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반면 러시아는 마음만 먹으면 다시 대규모로 편성해서 맞짱을 뜰수 있는 자원력과 인구가 받쳐주던 나라였습니다. 러시아는 한판 더 뜰 생각이었는데 내부의 사정으로 결국 조선에서 물러날수밖에 없었고 일본 역시 겉으로는 쌘 척 했지만 더 싸워봐야 얻을 것도 없고 오히려 러시아가 악쓰고 달려들까봐 조선으로 만족하고 적당히 빠진 것이죠.
@Jerry Sloan 와~~ 글쿤요 설명 감사합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