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아름다워(961) - 스산한 날씨에 찾은 근교와 펜웨이 파크
10월 들어 흐린 가운데 비가 자주 내린다. 비가 오는 아침나절, 차 한 잔 마시고 흘러간 노래를 들으며 바라보는 창밖의 풍경이 평화롭다. 은은하게 퍼지는 운율, 심수봉의 ‘그 때 그 사람’이 정겹고 최희준의 ‘하숙생’이 애틋하다. ‘비가 오면 생각나는 그 사람’을 읊조리며 미국에 사는 오랜 지인들의 안부를 살피고 ‘인생은 나그네길’을 음미하며 황혼에 이른 지난날을 돌아본다. 곱게 물든 단풍처럼 남은 때가 품위 있고 아름답기를.
곱게 물들기 시작하는 보스턴 근교의 단풍
10월 4일(화), 오전에 휴식을 취한 후 오후에 가까운 교외를 찾았다. 버스와 전철을 갈아타고 이른 곳은 B전철노선의 종점인 보스턴 칼리지, 넓은 잔디밭에 자리한 고풍스런 건축양식이 격조 있고 곳곳에 세워진 성녀상이 청순하다. 한 시간여 고즈넉한 교외 풍광을 살피고 돌아오는 길에 약한 비가 내리누나.
고풍스런 건축물과 청순한 성녀상이 어울리는 보스턴 칼리지 교정
10월 5일(수), 인터넷을 살피니 펜웨이 파크에서 이번 시즌 마지막 야구경기가 열린다는 정보가 뜬다. 경기시간은 오후 4시 10분, 분위기를 살피러 가족과 함께 오후 2시 반에 집을 나서 버스에 올라 펜웨이 파크로 향하였다. 경기장에 도착하니 오후 3시, 여러 출입구에 펜들의 발걸음이 부산하다. 주변을 한 바퀴 돌아본 후 지난 번에 찾은 바(Bar)에 들러 경기장 내부가 보이는 철망을 통하여 스탠드와 그라운드를 살피니 관람석이 상당히 비어 있고 선수들은 그라운드에서 몸 풀기에 열심이다.(경기시간이 다가오니 셔터로 철망을 가린다.)
관람석이 많이 비어 있는 판에이 파크의 내부모습
이날의 경기는 홈팀 보스턴 레드삭스와 원정팀 템파베이의 대전, 보스턴 레드삭스의 금년도 성적이 하위권이라서 메이저 리그의 결선 진출이 무산되어서인지 경기장의 열기가 예상보다 덜하다. 불순한 일기에 장시간의 경기관람은 무리라 여겨 개막장면을 바에 설치한 TV화면으로 살피고 발걸음을 돌렸다. 경기결과는 6대 3으로 홈팀인 보스턴 레드삭스의 승리, 겨룸에는 승자와 패자가 나오기 마련이다. 승자에게 축하를, 패자에게 격려를. 승패가 갈린 후에도 격렬한 다툼에 몰두하는 정치권도 그러하시라.
TV화면으로 살핀 보스턴 레드삭스와 템파베이의 경기시작 모습
* 보스턴에 머무는 동안 26년 전(1996년 여름)에 미국여행하며 적은 기록을 노트북으로 정리하는 중, 틈나는 대로 작업하여 이번 기행록과 합본할 계획이다. 어제 정리한 내용의 일부를 소개한다.
‘뉴욕에서 워싱턴으로
미국여행 이틀째, 밤낮이 바뀐 이곳의 시차적응에 큰 어려움이 없어 단잠을 자고 일어났다. 뉴욕과 워싱턴, 세계의 경제와 정치를 좌우하는 심장부를 살펴보며 미국의 독립과 발전의 역사를 현장에서 보고 듣는 것이 교육적으로 큰 의미와 효과가 있다. 여행할 때마다 현지의 한국인가이드 등을 통하여 그 나라와 민족의 문화, 역사, 정치, 사회의 여러 면을 흥미 있게 보고 들으며 백문(百聞)이 불여일견(不如一見)이라는 말을 실감하게 된다. 큰아들과 둘째에게 이번 여행을 통하여 보고 느끼게 하려던 계획과 생각이 잘한 것이라고 여겨진다.
뉴욕~워싱턴의 고속도로는 보스턴에서 시작하여 마이아미에 이르는 미국 동부의 남북을 잇는 대동맥 중의 하나라고 하는데 허드슨 강, 델라웨어 강을 지나고 주변에 큰 도시와 공장들이 들어서 있어 미국의 힘을 길러주고 저장하는 지역을 관통하고 있다.
워싱턴에서는 국회의사당, 백악관, 링컨기념관, 한국전쟁참전기념관, 우주항공박물관, 지연사박물관 등을 잠깐씩 들렀는데 민주주의의 핵심부서들과 세계질서를 주관하는 권력의 중추기관을 살펴보며 여러 가지 감회에 젖었다. 워싱턴의 한국전쟁참전기념관의 전쟁피해자 기록에 의하면 미군의 사망자와 실종자가 수만 명, 부상자도 30여만 명에 이르는데 루레이 동굴 안에는 각종 전쟁에 참여하여 희생당한 주민의 숫자가 기념비에 새겨져 있고 그 중에 한국전에서 다섯 명이 희생당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남북전쟁이나 1‧2차 세계대전, 한국전, 월남전, 걸프전 등 크고 작은 전쟁에서 희생당한 국민들의 공적을 국가나 지역이 잊지 않고 기리는 국민적 결속과 동질성의 확보노력이 오늘의 미국을 있게 한 원동력의 일부가 아닐까 여겨진다. 도로주변에서 볼 수 있는 공원묘지에도 성조기들이 꽂혀 있는 것을 보면서 국가와 국민의 상호의존과 연대감이 형성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미국이 어떤 나라인지 단편적으로 평가하기 어렵지만 자유와 정의의 수호, 국민에 대한 국가의 보호 등 나라를 신뢰하고 충성할 수 있도록 국민통합을 이루고 전쟁의 상흔까지 철저히 관리하는 것을 지켜보며 오늘의 발전과 국력이 결코 우연의 산물이 아님을 깨친다.
상호의존과 연대감이 느껴지는 시민들의 입장 모습
지난 5월호 리더스다이제스트(한국어판)에 감동적인 기사가 실린 적이 있다. 40여 년 전에 실종된 미국해군장교의 유해를 다시 찾게 되는 과정을 아름답게 묘사한 글인데 인간의 선행, 부부의 사랑과 핏줄의 연결, 나라의 의미 등을 소중하게 깨닫게 하는 ‘41년 만에 돌아온 반지’라는 제목의 글인데 그 글의 요지와 이를 읽은 소감은 다음과 같다.
'1952년 세계의 관심이 한국전쟁에 집중돼 있을 때 일본과 소련 사이에 위치한 쿠릴열도인근에서 미국의 B- 29 폭격기가 소련의 공습으로 격추되었다. 이 사고로 미국 공군중위가 죽은 채로 바다에 떨어졌는데 그 시신을 수거하여 비밀리에 매장하였다. 이 때 그 장교의 손가락에 끼어있는 사관학교졸업기념 반지를 소련 수병이 빼내어 아무도 모르게 보관하였다. 반지를 보관한 수병은 퇴역한 후에도 그 반지의 주인을 찾아줄 기회를 찾지 못하다가 수십 년이 지나서 소련이 와해되고 미국과 소련 사이에 행방이 묘연한 군인들의 생사확인 작업이 진행될 때에 그 반지를 조사반원에게 제시하여 그 주인이 40여 년 전에 실종되었던 미국 공군장교의 것임을 입증하게 하였다. 수병과 그 아내는 이 반지의 주인공을 꼭 찾아내겠다고 다짐하면서 반지를 자동차와 바꾸자고 하는 친지의 제안도 거절하였다.
그 장교가 실종되었을 때 20대의 젊은 아내는 생후 3개월 된 딸과 함께 남편의 소식을 애타게 기다리다가 그의 행적을 더 이상 알 수 없게 된 십 수 년 후 다른 남자와 재혼을 하였다. 그 딸도 대학을 졸업한 후 결혼하여 40여세가 되었을 때에야 아버지의 반지를 통하여 마지막의 상황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미국 공군은 40여년 만에 의전절차를 갖추어 그 장교의 장례식을 엄숙하게 치렀고 60대 중반의 아내는 손자들과 함께 남편의 반지를 만져보면서 그의 사랑하는 남편이 이제 영원한 안식을 찾게 된 것을 자랑스러운 추억으로 간직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장교의 장례식에는 고상한 품위와 존엄한 인격을 갖춘 소련의 수병과 그 아내도 초청을 받아 참석하는 기쁨을 누렸고.
그 딸의 다음과 같은 조사가 마음에 와 닿는다.
'아버지는 43년 전 우리의 삶에서 사라지셨습니다. 아버지는 실종자였습니다. 실종자는 사망자와 다릅니다, 죽은 사람은 우리에게 돌아옵니다. 우리 모두 그 분에 대해 이야기하게 됩니다. 그러나 실종된 분에 대해서는 이야기하는 일이 없습니다. 그것은 일종의 배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는 그분의 짧은 생애에 숱한 사람들의 삶을 감동시키시며 우정과 추억의 그물을 엮어서 오늘저녁 여러분을 이 자리에 모이게 하셨습니다, 그 분은 깊이 사랑하였고 또 깊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이글을 읽으며 국민의 생명과 안전에 대한 국가의 책무, 인간의 품위를 일깨워주는 평범한 시민의 고상한 품격, 가족의 소중함과 사랑의 유대, 삶과 죽음의 본질에 대하여 깊이 성찰하였다. 숱한 전쟁과 재난 속에서 나라와 이웃을 위해 이름 없이 스러져 간 많은 영웅들에게 하늘에서 더 큰 상이 내리기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