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의 철기 문화는 청동기 문화가 광범위하게 번성하던 토양 위에서 자라났고 새로운 철기 문화가
출현해 전파되면서 튼튼하게 발전해 나갔다.
1988년 평양의 「조선유적유물편찬위원회」에서는 1만여 점의 유물을 전20권에 걸쳐서 <조선유적유물도감>
이라는 이름으로 출간했다. 그 가운데 고조선 시대의 유물에 대한 도감은 1995년 <한민족의 문화 유산>이라는 제목으로 한국신
문방송인클럽이 서울에서 출간했다. 이 자료에 나타난 고조선의 초기 철기 문화를 살펴본다.
범의 구석> 유적은 함경북도 무산군 무산읍 서쪽의 두만강가에 자리잡고 있다.
신석기시대부터 철기시대 초기에 이르기까지 수천 년간의 역사를 담고 있는 이 유적층 가운데 제5문화
층은 기원전 7세기에서 기원전 5세기에 해당하는 문화층이다.
범의 구석 유적(5문화층)에서 쇠도끼, 쇠창, 쇠대패날, 쇠끌 등 적지 않은 철기가 나왔다.
쇠창은 청동기시대의 버들잎 모양의 훅요석 창끝과 비슷하며 구두칼 모양의 쇠칼도 이전 시기의 점판암
으로 만든 칼과 비슷하다.< 청동기시대의 석기를 그대로 모방한 이와 같은 철기의 형태는 이곳의 유물이 철기시대
에 들어 선 초기의 것임을 말해 주고 있다.> 북한 학자들은 여기서 출토된 쇠도끼는 완전 용융상태에서 얻어진 선철
주물품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기원전 4세기에서 기원전 2세기에 해당하는 범의 구석 유적 제6문화층에서는 이전에
사용되던 석기가 자취를 감추고 그 대신 쇠도끼, 쇠낫, 쇠반달칼, 쇠자귀, 쇠낚시 등 여러가지 종류의 철제 생산도구
가 수없이 많이 나왔다. 이것은 이 시기에 이르면 이 지역에서 철기 사용이 보편화됐음을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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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기
범의구석유적(5문화층)(호곡동유적 제5문화층)
함경북도 무산군 무산읍
유적은 무산읍 서쪽의 두만강가에 자리잡고 있다. 신석기시대로부터 철기시대 초기까지에 이르는 수천 년간의 역사
를 담은 이 유적의 5문화층은 기원전 7세기-기원전 5세기에 해당하는 문화층이다.
5문화층에서 알려진 것은 5호 집자리를 비롯하여 모두 15개인데 그 평면윤곽은 대체로 방형 또는 장방형이다. 모든 집자리에는 화덕자리가 1개 또는 2개 이상 있으며, 3줄 또는 4줄로 된 주춧돌 이 정연하게 남아 있었다.
범의 구석유적에서 검정간그릇과 약간의 석기, 그리고 쇠도끼, 쇠창, 쇠대패날, 쇠끌 등 적지 않은 철기가 함께 나왔다. 쇠창은 청동기시대의 버들잎모양 흑요석창끝과 비슷하며, 구두칼모양의 쇠칼도 앞선 시기 점판암으로 만든 칼과 비슷하다. 청동기시대의 석기를 그대로 모방한 이와 같은 철기는 철기시대에 들어선 초기의 것이 분명하다. 이 시기 집자리에서 나온 쇠도끼는 완전용융상태에서 얻어진 선철주물품이었다. 기원전 6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질 좋은 선철제 도끼를 생산하였다는 것은 제철기술 발전사상 보기 드문 일이다. -
범의구석유적에서는 철기시대 초기층인 5문화층과 함께 기원전 4세기-기원전 2세기에 해당하는 6문화층이 알려졌
다. 6문화층의 집자리는 6개가 드러났는데 움의 깊이는 대체로 0.4m 정도로 5문화층 집자리의 움 깊이와 비슷하지만
그 넓이는 100평방m 안팎으로 5문화층의 것보다 거의 배나 된다. 집자리들의 바닥에는 1개 또는 2개 이상의 화덕자
리와 2줄의 주춧돌들이 놓여 있었다.
집자리들에서는 여러 가지 모양의 질그릇이 나왔는데 그것들은 대체로 검은 색 또는 회갈색의 것이었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석기가 자취를 감추고 그 대신 쇠도끼, 쇠낫, 쇠반달칼, 쇠자귀, 쇠낚시 등 여러 가지 종류의 철제 생산도구가 많이 나온 것이
다. 17호 집자리에서는 쇠도끼만하여도 5개가 드러났는데 모두 등과 날부분이 비슷한 너비로 된 좁고 긴 주머니도끼로서 주조
한 것이었다.
범의 구석유적 6문화층의 문화갖춤새는 당시로서는 매우 발전된 집 짜임새와 철기의 광범한 보급정형을 잘 보여 준다.
17호집자리실측도
쇠자귀(길이 6.5cm)
청동팔찌(왼쪽 길이 5.5cm)
단지(높이 16.5cm)
호곡동(범의구석) 유적(茂山 虎谷洞 遺蹟)
함경북도 무산군 무산읍 호곡동에 있는 선사시대 유적으로 ‘범의구석’이라고도 부른다. 1959년부터 1961년까지 5차례에 걸쳐 발굴하였다. 유적은 무산읍 서쪽에 두만강과 성천수가 합쳐지는 곳에 놓여 있다. 이곳에는 ‘말기’ 라고 부르는 언덕에서 시작하는 3단의 단구가 이루어져 있는데 유적은 3번째 단구 비탈에서 시작하여 서쪽으로 두만강가에까지 이르고 있다.
발굴 결과 4개 지점에서 50여 기의 집자리(住居址)가 드러났고 신석기시대로부터 철기시대에 이르는 6시기의 문화층이 나타났다. 제1기는 신석기시대 무늬그릇이 나오는 층이고 제2~4기는 청동기시대층, 제5~6기는 철기시대에 속한다. 청동기시대는 3시기로 구분되는데 제2기층에서 붉은간토기(紅陶), 제3기층에서 갈색간토기(褐陶), 제4기층에서는 검은간토기(黑陶)가 나오는 것을 기준으로 하였다. 유적의 층위는 여러 시기의 집자리들이 중복된 관계로 자연 퇴적층에 의한 구분이 매우 어렵게 되어 있으나 대체로 보면 겉흙층(두께 60~80㎝) 아래에 있는 문화층의 두께는 160~180㎝쯤 되며 시기구분의 기준은 집자리들이 중복된 상태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신석기시대 문화층에서는 모두 10기의 집자리가 확인되었다. 집자리의 긴축(長軸)은 대부분 동~서 방향이며, 평면은 방형(方形)으로, 한변의 길이가 3.5~4.5m의 규모로서 큰 차이는 없다. 움의 깊이는 0.5~1.0m 사이에 위치하며, 바닥은 7기가 원토층을 그대로 사용하였고, 나머지 3기는 진흙을 다짐 처리하였다. 내부시설로는 기둥구멍(柱孔)과 화덕자리(爐址)가 확인되었으며, 화덕은 강돌(川石)을 이용하여 타원형(타圓形)으로 돌려 만들었다. 범의 구석 1기층에서 나온 무늬그릇들은 완전히 복원된 2개체(點列文) 이외에는 출토량이 적으며 무늬의 짜임새도 매우 간략하다. 번개무늬(雷文), 퇴화된 생선뼈 무늬(魚骨文), 물결무늬(波狀文), 그리고 겹입술 계통의 공렬 + 빗금무늬가 있다. 민무늬그릇은 들린굽과 평편밑의 납작밑으로 만들어졌는데 보시기, 바리(鉢), 굽손잡이 그릇 등이 있다. 범의 구석에서 나온 흑요석기는 모두 1,000여 점이나 되며 이들 가운데 가장 많은 것은 길쭉한 버들잎형으로 눌러떼기한 격지(剝片)들과 피라미드 모양의 몸돌(石核)이다. 그밖에 반마반타(半磨半打)의 도끼류, 곰배괭이와 갈돌(石棒), 그물추(漁網錘) 등이 있다. 뼈 도구로는 송곳과 바늘 종류가 있으며, 새다리뼈를 잘라서 만든 대롱구슬(管玉), 주판알 모양에 무늬가 새겨진 가락바퀴(紡錘車) 등이 출토되었다. 연대는 B.C. 3000년기 후반기로 알려져 있다.
청동기시대 문화층에서 나온 집자리는 모두 16기이다. 장방형(長方形) 평면의 움집으로 집자리의 크기는 보통 40~70㎡이고 작은 것은 20㎡ 되는 것도 있다. 제2기의 집자리는 긴축이 남~북 방향으로 놓이고 움이 깊은 것이 특징이다. 유물은 화살촉(石鏃), 반달돌칼(半月形石刀), 돌도끼(石斧) 등이 나온다. 15호 집자리에서는 바닥에 나무판자를 깔았던 흔적이 남아 있고 2층의 집자리에서 기장과 수수 낱알이 나온 것을 보면 당시 주민들이 곡식을 저장할 수 있을 정도로 농사가 활발했던 것을 알 수 있다. 40호 집자리에서는 뼈로 만든 갑옷 조각(札甲)이 나와 방어용 무기에 관한 자료를 제공하였다.
제3기의 집자리는 긴축이 동~서 방향으로 놓이고 기둥구멍이 4줄로 나있고 주춧돌이 남아 있는 경우도 있다. 유물로는 버들잎모양 돌화살촉(柳葉形石鏃)이 있다. 제4기의 집자리는 긴축이 남~북 방향으로 놓이고 3~4줄로 주춧돌이 놓여 있는 것이 특징이다. 출토유물은 간석기(磨製石器)가 많아지고 앞 시기에 많이 쓰이던 흑요석뗀석기가 줄어든다. 3기의 19호 집자리와 4기의 33호 집자리에서는 흙단추가 나왔고 4기의 8호 집자리에서는 돼지 조각품과 흙을 빚어 만든 남자인형, 점뼈(卜骨) 등이 나와 신앙 생활에 관한 증거와 함께 남성인형은 청동기시대에 부계사회로 넘어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으로 풀이하는 경우도 보인다. 50호 집자리에서는 청동 덩어리가 나온 것이 있다. 청동기시대 문화층의 연대는 B.C. 2000년기 후반에서 1000년기 전반에 드는 것으로 보고 있다.
세죽리 유적 (철기 시대층)
연대 : 기원전 3세기 ~ 기원전 2세기
위치 : 평안북도 영변군 세죽리
세죽리 유적은 영변읍에서 동남쪽으로 약 10 km 떨어진 청천강가에 있다. 여기에는 신석기 시대부터 철기시대에 이르는 여러 가지 문화층이 있는데, 이 유적 맨 위층이 철기 시대층이다.
철기시대층에서는 5개의 집자리가 발굴되었다. 집자리 바닥 모양은 대체로 방형 또는 장방형이고 크기는 보통 30 ㎡ 안팎인데, 10 ㎡ 미만의 작은 것도 있다.
집자리 구조에서 주목되는 것은 구들 시설이다. 1호 집자리의 구들은 ㄱ모양으로 돌을 두 줄로 평행하게 세워서 만든 외곬구들이다. 이것은 한민족의 고유한 난방 시설인 온돌이 이미 고조선 시대에 있었다는 것을 뚜렷이 보여준다.
유물로는 쇠로 만든 호미, 괭이, 낫, 도끼, 끌, 과 등을 비롯하여 청동으로 된 검코, 활촉과 그밖에 돈, 거푸집, 질그릇, 치레거리 등이 나왔다. 질그릇 가운데에는 바탕흙이 활석가루나 모래를 섞은 것이 있다. 이러한 기술은 기원전 4세기의 좁은놋단검 관계 유적에서 나온 질그릇과 같다.
첫댓글기원전 280여년을 전후한 연나라 전성기 소왕말렵- 병사한 소왕 이후의 혜왕때는 바로 연나라의 국력이 크게 쇠하는 등 전성기적 체제 유지를 하지 못하고 있다-의 요서 정벌 이후의 3세기 경의 연나라의 영향은 정확히 말해서 연나라 유민이나 지배방식이 아니라 요서 조선 관련 동호나 조선으로 추정되는 세력이 밀려나면서 요서에서 연과 상호 작용하면서 생겨난 영향력으로 봐야 하며 진개의 침략과는 별개로 요동과 한반도 북부의 철기 발달이나 보급은 이 지역안에서의 자체적 발전과정에 의한 성숙과 영향력으로 볼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고 봅니다.
함경북도 무산의 범의 구석 유적에서 보이듯 같은 자리에서 청동기 시대를 기반으로하는 5문화층에서 발전한 철기문화는 이후 6문화층의 철기의 성숙한 발전과 점점 지상주거화 되는 부분과 상당한 실생활적 보편적 철기 사용은 세죽리 유적을 비롯한 연화보 문명권에서 완전한 지상가옥과 구들(온돌)과 철기적 발달상황에서 기타 진개의 사건으로 인한 요서 조선관련 세력들이 밀려 나면서 연의 교류 문화들이 함께 들어왔다는 부분으로 해석 할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좀 더 집중적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며 현재의 연해주나 한반도 북부와 남부의 고고학적 발굴 상황은 철기 시대가 단순히 연의 영향력이나 종속적 관계에 의해서 파생한
첫댓글 기원전 280여년을 전후한 연나라 전성기 소왕말렵- 병사한 소왕 이후의 혜왕때는 바로 연나라의 국력이 크게 쇠하는 등 전성기적 체제 유지를 하지 못하고 있다-의 요서 정벌 이후의 3세기 경의 연나라의 영향은 정확히 말해서 연나라 유민이나 지배방식이 아니라 요서 조선 관련 동호나 조선으로 추정되는 세력이 밀려나면서 요서에서 연과 상호 작용하면서 생겨난 영향력으로 봐야 하며 진개의 침략과는 별개로 요동과 한반도 북부의 철기 발달이나 보급은 이 지역안에서의 자체적 발전과정에 의한 성숙과 영향력으로 볼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고 봅니다.
함경북도 무산의 범의 구석 유적에서 보이듯 같은 자리에서 청동기 시대를 기반으로하는 5문화층에서 발전한 철기문화는 이후 6문화층의 철기의 성숙한 발전과 점점 지상주거화 되는 부분과 상당한 실생활적 보편적 철기 사용은 세죽리 유적을 비롯한 연화보 문명권에서 완전한 지상가옥과 구들(온돌)과 철기적 발달상황에서 기타 진개의 사건으로 인한 요서 조선관련 세력들이 밀려 나면서 연의 교류 문화들이 함께 들어왔다는 부분으로 해석 할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좀 더 집중적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며 현재의 연해주나 한반도 북부와 남부의 고고학적 발굴 상황은 철기 시대가 단순히 연의 영향력이나 종속적 관계에 의해서 파생한
철기 문화라는 일제 이후의 기본 사관은 분명 재고될 부분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