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Andrei Tarkovskij
(1932-1986)
그에 대한 헌사들은 끊길 줄을 모른다. 북구의 거장인 잉마르 베르히만을 비롯하여 페데리코 펠리니,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레오 까라 등은 입을 모아 타르코프스키의 천재성과 위대함을 말한다. 빔 벤더스는 <베를린 천사의 시> 첫부분에서 프랑스 와 트뤼포, 오즈 야스지로와 함께 타르코프스키를 인간이 아닌 천사로 평가했다.
24년 동안의 감독 생활 중 18년을 실업 상태로 지냈으면서도 영화적 영감에 있어서는 전혀 쉼이 없었던 타르코프스키는 8편이 라는 적은 수의 영화를 남겼지만 한 편의 졸작도 없었던, 영화사상 거의 전무후무한 예술가로 평가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그 의 영화를 난해하거나 지루한 영화로 치부해 버리지만 그것은 그의 영화적 언어가 우리에게 생소하기 때문이다. 미장센과 몽따쥬라는 영화 언어의 양대 산맥을 거부하며 비논리적이지만 정직하고 의식이 가장 근원적인 부분을 끌어올리려 하는 그의 안간힘은 때로는 안타깝게 때로는 힘겹게, 그러면서도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는 환희의 몸짓으로까지 읽혀진다.
20세기말 가장 위대한 영화 감독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어린 시절의 기억, 향수와 구원, 그리고 희망에 대한 끊임없는 사색이 그의 영화이다. 그는 전 생애에 걸쳐 단 8편의 영화를 바람과 물, 공기와 촛불의 영상으로 써 내려간 영상시인이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는 1932년 4월 4일 소련 볼가 강 유역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유명한 시인 아르세니 타르 코프스키인데 2차 대전 중 그와 어머니를 두고 떠나 버렸다. 아랍어와 지질학을 공부하다가 1956년 모스크바에 있는 국립 영화 학교인 VGIK에 입학하였고 1960년 졸업 작품으로 <롤러차와 바이올린 Katok i Skryoka>을 만들어 뉴욕 학생 영화제에서 1 등상을 수상했다. 장편 데뷔작인 <이반의 어린 시절 Ivanovo Detstvo>('62)은 베니스 영화제에서 대상을 받았다. <이반의 어린 시절>이 베를린 영화제에서 대상을 수상하자 소설가 알베르토 모라비아는 이 영화의 반리얼리즘적인 표현을 비난했다 . 그때 베니스 영화제의 심사위원장이었던 장-뽈 사르트르는 '사회주의적 초현실주의'라는 말로 이 영화를 평가하며 타르코프스키를 비호했다. 그는 이 영화를 통해 '인류가 어린이들을 위해 어떤 세상을 남겨 주어야 하는가?'라는 윤리적인 질문을 던지며 이때부터 소련당국으로부터 제재를 받기 시작한다.
두 번째 영화인 <안드레이 루블레프 Andrei Roublev>('66)는 15세기 성상 화가의 예술 수업을 그린 내용으로 1969년 뒤 늦게 깐느 영화제에 소개되어 심사위원 특별상을 받았다. 그러나 이 영화는 소련 내에서 엄청난 비난의 대상이 되었으며 이 사건은 타르코프스키로 하여금 한동안 영화 작업에 몰두할 수 없게 만들었다. 1972년에야 SF영화인 <솔라리스 Solaris>를 찍을 수 있게 되었다. <솔라리스>는 영상 매체와 테크놀로지 사이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접근(주로 카메라의 움직임을 통함)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솔라리스>를 기점으로, 타르코프스키 영화 내부로 아버지가 들어온다. 아버지와 화해를 이룬 것이다 . 이제 그의 영화에 등장하는 집들은 아버지의 집이며, 그의 집이 아니다. 그러나 그 복귀는 행복한 것이 아니다. 1975년 가장 그의 자서전적인 영화가 된 <거울 Zerkalo>을 통해서 타르코프스키는 아버지의 집을 자신의 출발점으로 설정한다. 하지만 그 집에 아버지는 끝내 부재하며, 그의 어머니와 그의 기억을 괴롭힌다. 이 작품은 16번을 재편집해서 감독 자신도 무슨 이야기 인지 모르겠다고 했으며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 영화에 대해서 불만을 표시했다. <솔라리스>가 지나치게 공상 과학의 요소에 사로잡혀 있고 그래서 스타니슬라프 렘의 소설 원작에 나오는 우주선과 우주 정거장 같은 소재들에 과도하게 흥미를 갖게 되었다고 자기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서구에는 영화 테크놀로지의 혁명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소련에서의 마지막 작업이 된 <밀렵자 Stalker>는 온갖 박해 속에서 1979년 완성되었고 1980년 깐느 영화제 특별 참가작으로 선정되어 '경이의 영화' 부문 대상을 받았다. 이 상을 수상하기 위해 깐느에 온 타르코프스키는 두 명의 씨네아스트를 만날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한 사람은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였고 또 한 사람은 페데리코 펠리니였다. 이 두 사람은 타르코프스키 에게 호의를 표명했으며, 이탈리아의 제작자 주세페 란치를 소개하였다. <거울> 이후 소련에서의 창작 활동이 봉쇄되거나 거의 금지된 상태의 타르코프스키는 <안내자>의 수상이 또한 본국에서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지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는 이탈리아에서 그의 다음 영화 <향수>를 준비하였다. 1984년 7월 10일 이탈리아의 밀라노에서 타르코프스키는 기자 회견 을 통하여 망명 선언을 했으며, 소련 당국은 입국 금지를 결정하였다.
타르코프스키는 이탈리아에서 <노스탤지어 Nostalghia>를 완성시켰고, 이 영화로 깐느 영화제에서 로베르 브레송의 <돈 L'Argent>과 함께 예술 창조대상을 수상했다. 이 영화 작업 도중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결국 유작이 된 <희생 Offret>의 개봉을 보지 못하고 86년 12월 28일에서 29일로 넘어가는 새벽에 숨을 거두었다. 87년 깐느 영화제는 <희생>에 4개 부문의 상을 수여했다.
타르코프스키의 영화 세계는 스스로 불행했던 어린 시절을 자신의 모든 창작의 원천이며 가장 아름다운 시기로 말했듯이 그 기억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다. 자신의 고향인 러시아에 대한 끊임없는 회귀와 향수도 이와 연관되어 있다. 구름과 바람, 교회, 시 골의 목조건물, 넓은 대하 그리고 그 설원의 펼쳐짐이 영원한 향수처럼 나타난다. 또한 <이반의 어린 시절>에 나타난 반전에 대한 관심은 <희생>에 이르러서는 종교적 구원과 희생을 통한 인류애적 휴머니즘으로 그려진다. 타르코프스키는 인간의 고독과 자유를 인간과 신, 선과 악, 현실의 세계와 희망의 세계를 넘나들며 끊임없이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예술은 하나의 기 도며 가장 귀중한 순간이 예술로, 그것은 믿음과 정열을 그대로 영화 속에 투영시킨 진정한 예술가로 기억될 것이다.
<Filmography>
1932년 : 4월 4일 자브라이예에서 태어남.
1956년 : VGIK 감독 코스에 입학.
1960년 : 졸업 작품 <롤러차와 바이올린 Kotok i Skrypka>
1961년 : <롤러차와 바이올린>으로 뉴욕 학생 영화제 1등상 수상.
1962년 : <이반의 어린 시절 Ivanovo Detstvo>
베니스 영화제 금사자상 수상.
1966년 : <안드레이 루블레프 Andrei Roublev>
1969년 : <안드레이 루블레프>로 깐느 영화제 국제 비평가상 수상.
1970년 : 6월에 [이스꾸스뜨보 끼노 Iskustvo Kino]에 단편 [하얗고 하얀 날 A white, white day]발표.
1971년 : <솔라리스 Solaris>로 깐느 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 수상.
1975년 : <거울 Zerkalo>
1979년 : <밀렵자 Stalker>
1980년 : <밀렵자>로 깐느 영화제 '경이의 영화(Cinema Surpris)' 대상 수상.
1983년 : <향수 Nostalghia><향수>로 깐느 영화제 창조대상 수상.
1984년 : 7월 10일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망명 선언.
1986년 : <희생 Offret>
1986년 : <희생>으로 깐느 영화제 국제 영화 심사위원 특별상, 국제 영화 비평가상, 기술대상, 예술 특별 공헌상 등 수상 .
1986년 : 12월 28일 빠리에서 간암으로 사망.
출처==> http://9977.zoa.to/MovieData/10nom/mo10.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