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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7:15-17> 15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16 그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도 아니하리니 17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
계속해서 하늘나라에 있는 허다한 무리들에 대한 내용이 이어집니다. 이 세상에서 진실한 그리스도인으로 살다가 하나님 나라에 이르게 되면 이들은 무엇을 하면서 살까요? 15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하나님 보좌 앞에는 천상의 존재들인 24장로들이나 네 생물이나 천사들만 있는 게 아닙니다. 일반 성도들도 역시 하나님 보좌 앞에 있지요.
하나님 계신 보좌 앞에 있는 게 과연 기쁜 일일까요? 아니면 부담스럽거나 무서운 일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강도나 진실함이 어느 정도인가, 그리고 서로간에 소통이 얼마나 잘되는 가에 달려 있을 겁니다. 사람도 진실하게 사랑하는 사람, 그리고 무슨 말을 해도 서로 소통이 잘되는 사람과는 항상 함께 있어도 아무 부담 없이 기쁘고 즐겁고 행복할 수 있지요. 하나님은 곧 사랑이시라고 요한일서에서 말씀하는데 우리도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진실하고 정직하고, 하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던 의심없이 받아드려지고 깨달아진다면 하나님 보좌 앞에 있는 것이 기쁘고 즐겁겠지요. 하지만 하나님이 부담스럽고, 하나님의 말씀이 무겁게만 느껴지고, 하나님 앞에 죄지은 것이 많은 사람은 하나님 가까이 있는 것이 힘들고 부담스럽고 두려울 겁니다.
그런데 지금 본문에서의 무리들은 천국에 있는 무리들 아닙니까? 이 지상에서의 모든 죄와 허물과 부족함과 연약함과 추하고 더러운 몸과 마음을 예수님의 보혈의 은총으로 깨끗함을 받았고, 그래서 흰 옷을 입고 있지요. 그러기에 이들은 하나님 보좌 앞에 있는 것이 부담스럽거나 힘들지 않고 오히려 최고의 기쁨과 환희와 감사와 감동적인 보람으로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겁니다. 그래서 15절 중간 부분의 말씀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이게 가능한 거죠. 하나님에 대한 기쁨과 감격이 없이 하나님을 밤낮으로 섬긴다면 그건 천국이 아니라 오히려 지옥이겠지요. 하지만 하나님을 진실하게 사랑한다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오히려 가만히 있는 것보다 더 큰 기쁨과 보람인 겁니다.
이들의 찬양과 섬김을 받으시는 하나님은 이들에게 무엇으로 응답하실까요? 15절 후반부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장막을 치시는데 이 장막은 보호의 장막이지요. 구약시대 이스라엘에 3대 절기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장막절 또는 초막절이라는 절기입니다. 모세 시대에 광야40년을 지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계속 이동 중에 있었기 때문에 건물로서의 집을 가지지 못했고 언제든 옮겨다닐 수 있도록 초막, 장막 또는 텐트라는 것으로 집을 삼았지요. 어찌보면 집으로서는 가장 초라하고 빈약했겠지만 이 초막으로 40년동안 황량하고 거친 광야생활을 통과했던 거죠. 초막으로 40년을 지낸 이스라엘 백성들이 대단한 게 아니라 그런 황량하고 거친 광야에서도 이런 초막으로 백성들을 보호하시고 지켜주시고 이끌어주신 하나님이 놀라우신 분이고 감사하신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이스라엘의 중요한 절기가 되었던 거죠.
우리가 기대하는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돌보심은 어려운 일도 당하지 않고, 모든 환경도 좋은 환경이고, 늘 풍족하고 아무 염려 없는 여건이 되는 것이지만 초막절의 유래는 그런 것이 아니라 오히려 환경은 광야라는 사막과 같이 메마르고 황량한 환경에서, 좋은 집 짓고 편안하게 산 게 아니라 가장 허술한 초막, 천막생활을 한 겁니다. 그런 열악하고 힘든 환경에서 많은 백성들이 애굽으로 다시 돌아가자고 불평도 많이 했지만 궁극적으로 그들은 광야생활을 극복하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수 있었지 않습니까?
우리의 지금의 현실은 광야와 같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그럼에도 풍요와 좋은 환경이 주어지기도 했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이 세상의 풍파와 거친 환경이 주어지기도 하지요.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떤 환경에 있느냐가 아니라 여전히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따라 하나님을 향해 살아가고 있느냐 하는 겁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을 향해 살아가고 있다면 어떤 환경과 처지에 있든 우리는 하나님의 장막 안에 거하고 있는 것이고, 아무리 좋은 환경 속에 있어도 하나님과 함께 사는 삶이 아니라면 하나님의 장막 안에 사는 것이 아닙니다.
이 지상에서의 우리의 집은 영원한 집도 아니고, 내가 영원히 소유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요. 그러나 하늘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장막은 영원합니다. 그 장막 안에서 우리는 무엇을 누리게 될까요? 16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데 상하지도 아니하리니’ 이 말씀처럼 어떤 외부적인 환경에 의해 공격받거나 영향받지 않는 하나님의 보호하심 속에 있음을 말하고 있지요. 그리고 17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 시편23편이 생각나는 말씀이지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시편 23편의 저자라고 알려진 다윗도 오랜 세월 도망다니는 불안하고 초조한 세월을 보냈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영원한 평화와 안식의 세계로 이끌어주실 것을 믿고 기대하면서 시편 23편을 노래했던 겁니다.
우리의 목자가 되셔서 생명수 샘으로 인도해 주신다고 말씀합니다. 완전한 생명, 구원이 완성된 생명이지요. 여전히 불완전한 생명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이 완전한 생명이 어떤 것인지 잘 알 수는 없지만 우리는 그런 완전한 생명으로 향해 지금도 예수님과 함께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눈물을 씻어주십니다. 이 땅에서 우리가 슬프고 원통하고 억울하고 답답하고 너무 고통스럽고 외로워서 울었던 모든 눈물을 주님은 씻어주십니다. 그러니 울 수 밖에 없는 힘든 환경이 주어졌다해도 너무 억울해 하지 않으셔도 되지요. 모든 억울함 원통함 고통과 아픔 그 어떤 상황이든 충분히 극복되고도 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늘도 이러한 참된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