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우는 여름방학을 했다지만, 자율학습이라는 이름으로 학교에 나갔다.
그것은 대부분의 다른 학생도 마찬가지였다.
학교 운동장 둘레에 커다란 히말라야시다 나무들은 찌는 더위에 지쳐 가지들을 축 늘어뜨리고 있었다.
석우가 공부하는 고3 교실에는 가끔 의자나 책상이 삐걱거리는 소리와 책장 넘기는 소리 외에는 들리지 않았다.
선풍기도 없는 교실은 푹푹 찌는 더위에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이마에 땀이 흐르고 엉덩이에 땀이 찼지만, 모두가 공부에만 열중했다. 창밖에는 매미 소리가 났지만 들리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석우는 며칠 전부터 계속되는 이 무거운 분위기가 무척 지겹고 따분했다.
책을 보다가 꾸벅꾸벅 졸던 석우는 책상에 엎드려 잠을 청했다.
'짜르릉... 짜르릉...' 점심시간을 알리는 스피커의 벨 소리에 석우는 눈을 떴다.
그제야 친구들도 웅성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도시락을 꺼냈다.
석우는 친한 친구인 성훈이와 현수가 있는 곳으로 자리를 옮겨 도시락을 펼쳤다.
선생님은 점심시간에 자리 이동을 하지 못하도록 여러 번 주의시켰지만, 누구나 옮겨 다니며 밥을 먹었다.
석우와 특히 죽이 잘 맞는 성훈이는 짱구 머리에 성격이 쾌활했다. 현수는 말수가 적었지만, 성격이 원만했고, 셋은 늘 어울렸다.
석우가 점심시간을 기다렸다는 듯,
"난 점심시간이 제일 좋더라!" 하며 즐거운 표정으로 말하자,
"당연하지. 야, 먹는 즐거움조차 없으면, 이 지겨운 고3을 어떻게 견디냐?" 하며 성훈이 젓가락을 흔들며 맞장구를 쳤다.
"그런데 말이야, 야, 방학인데, 우리 산에 놀러가야 하는 거 아니냐, 바다라면 더 좋고?" 석우가 분위기를 띄우려는 듯 말을 하자,
"너 미쳤냐? 낼모레가 시험인데, 무슨 놀러를 가?" 성훈이 당혹스런 표정으로 눈을 치켜뜨며 말했다.
현수도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아니라는 시늉을 했다.
석우는 낙심한 표정을 짓더니,
"그럼 나 혼자 가라고...?" 하며 다시 주장을 폈다.
친구들은 여전히 고개를 갸우뚱하며 아니라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석우는 버스에 붙어있던 광고 포스터가 아른거렸다. '올여름엔 동백리 해수욕장으로 오세요!'라는 문구와 함께 비키니 수영복을 입고 파도 위를 팔짝 뛰는 야시한 소녀의 모습이었다.
사실 석우는 매년 여름 방학 때마다 산으로 들로 등산과 야영을 다녔었다.
석우는 뭔가 결심했다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그럼, 나 혼자라도 가겠어. 혹시 맘 바뀌는 사람은 말해라!" 하고 말하며 결심을 굳혀다.
잠시 침묵이 흐르더니,
"언제 갈 거냐?" 성훈이 낮은 소리로 석우에게 물었다.
"음... 금요일이 좋겠지." 석우도 낮은 소리로 답했다.
금요일 새벽, 석우는 일찍 일어나 어젯밤에 미리 챙겨 놓은 야영에 쓸 텐트와 음식, 통조림, 버너, 연료로 쓸 석유, 코펠, 손전등... 여행에 필요한 것들을 점검한 후 배낭을 메고 길을 나섰다.
그는 중학교 때부터 방학이면 여행을 다녔기 때문에 이런 일은 익숙했는데, 여행 갈 때마다 부족할까 봐 음식을 너무 많이 챙겨가서 돌아올 때는 남아서 버리는 일이 잦았다.
그는 모기에 물리거나 나뭇가지에 다리가 긁히지 않도록 덥지만 긴 청바지를 입고, 위에는 진녹색의 반소매 티셔츠를 입었다.
그는 여행할 때마다 늘 오른쪽 허리춤에는 맥가이버 칼을, 왼쪽 허리춤에는 긴 줄을 짧게 접어 말아 매달고 다녔는데, 보이스카우트 클럽활동 시간에 쓰임새와 착용법을 배워서였다.
그가 열차역에 도착했을 땐 두 시가 조금 지난 새벽이었다.
역사 안은 전등이 훤히 켜져 있고, 매우 한산했다.
여기서 열차를 타고 가다가 회진역에 도착하면, 거기서는 걸어서 회진 장터를 거쳐 항구의 여객터미널까지 가면 되고, 다시 그곳에서 동백리 해수욕장이 있는 금일도로 가는 배를 타면 된다. 초행길이지만 지도를 보고 대충 파악해 놓은 여정이었다.
그가 표를 사려고 매표소 쪽으로 갔을 때,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배낭을 멘 청년 두 명이 표를 사고 있었다. 석우는 서너 걸음 물러서서 기다리다가 그들이 마치고 지나가자 회진역으로 가는 열차표를 끊었다. 간이역마다 모두 선다는 비둘기호 열차였다.
석우는 넓고 파란 바다와 파도, 시원한 바람,그리고 해변의 여인들을 생각하면 벌써 가슴이 설렜다.
그는 좌석표를 보고 배낭을 짐칸에 올려놓은 다음, 창가의 좌석에 앉았다. 그가 앉은 지 얼마 안 되어 열차는 출발했다.
철커덕 철커덕... 철커덕 철커덕... 끊임없이 반복 음이 들렸고 그 리듬에 금세 졸음이 찾아 왔다.
그는 잠깐 졸았다 싶었는데, 눈을 떴을 땐, 이미 날이 샜고, 열차 안은 꽤 시끄럽고 혼잡하게 변해 있었다.
앉을 자리가 없어서 좌석 옆에 기댄 채 서서 가는 입석 승객들이 여럿 보였다.
객석은 앞뒤 의자가 마주 보는 형태로 앉게 되어 있어서 앞사람 얼굴이 바로 보였다.
통로 쪽 바로 옆자리엔 50대로 보이는 파마를 뚱뚱한 아주머니가 입을 벌린 채 코를 골며 자고 있었고, 바로 앞좌석엔 아기를 안고 있는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아주머니와 그녀의 남편으로 보이는 아저씨가 앉아 있었다,
석우는 바로 앞 아주머니와 눈이 마주치자 겸연쩍어서 눈을 감고 다시 자는 척했다.
열차가 역에 정차했다가 출발할 때마다 승객들은 갈수록 늘어 점점 혼잡해졌다.
시골의 어느 간이역을 지나자 50대 후반으로 보이는 아저씨가 사람들을 밀치고 들어 오더니, 석우의 좌석 옆에 기대고 섰다.
그는 낡아 보이는 검은색 양복 바지에 흰색 와이셔츠를 입었는데, 단추 세 개는 푼 채 이마와 목에는 땀이 맺혀 있었다. 바쁘게 뛰어 왔는지 숨소리가 거칠었다. 그는 숨소리가 조금 잦아들자 짜증난 말투로,
"요즘 애들은 도대체 싸가지가 없어. 어른이 와도 비켜줄지를 모르네!" 하고 말했다.
석우는 설마 내게 하는 소리는 아니겠지, 난 좌석표를 샀으니까... 스스로 위로하며 못 들은 척 눈을 감고 있었다.
"아이고, 뭔 일이당가, 안 자는 것 다 아는디 자는 척하고 자빠졌당께!" 이번에는 꽤 큰 소리로 다그쳤다.
순간 열차 안이 조용해지더니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됐다. 석우는 죄 지은 사람처럼 머리를 긁적이며 일어나 좌석 옆에 섰다.
"워매 학생이 공부하느라 수고한디, 자리까지 양보하고... 배우는 사람이라 다르기는 다르구만" 하고 말하더니, 석우가 앉았던 자리에 냉큼 앉았다.
그 아저씨는 "어이 학생, 어디까지 가는가?" 하며 좌석 옆에 서서 창밖을 보는 석우를 쳐다보았다. 목소리가 전보다 조금 부드러웠다.
"저요? 저... 회진역이요."하고 석우는 조금 긴장하며 말했다.
"그래? 아따, 나도 회진역 가는디. 학생은 뭔 일 땜시 회진역을 간당가?"하고 또 물었다.
"예...동백리 해수욕장... 금일도에..." 하며 긴장이 덜 풀린 목소리로 말했다.
"응, 그래그래... 좋은 때구만. 근디 이 사람아, 놀러가는 것이믄 오늘은 회진항에서 놀아야제. 오늘이 회진항에서 홍어축제 하는 날인디 모른 갑네?" 하며 다시 목소리를 키웠다.
"... ..." 석우는 말 없이 들었다.
"좌우지간 회진장이 전국에서 제일 큰 홍어 장인디, 장날이면 홍어잡이 배들이 회진항에 어마어마하게 들어와 부러.
홍어축제는 해마다 요맘때 3일간 하는 풍어젠디, 오늘이 마지막 날이랑께.
섬이나 동리별로 씨름도 하고, 노래자랑도 하고, 여러 가지 하는디, 제일 재밌는 것이 뗏목경주랑 홍어 달리기제.
북 치고 꽹과리 치고 나발까지 불면서 응원들을 하는디, 굉장해 부러. 오늘이 결승하는 날이랑께." 그는 손짓, 몸짓을 하며 신바람이 나서 말했다.
듣고 있던 석우는
"그런데요, 아저씨! 홍어 달리기가 뭐래요?" 하고 입을 열었다.
"응... 그것이 일종의 물고기 방생인디, 홍어란 것이 놔주면 곧장 큰 바다로 달려가는 습성이 있는지라, 항구 바깥쪽에 길게 줄을 쳐놓고, 홍어 꼬리에 녹는 실로 풍선을 매달아. 이놈들을 놔주면 바다로 곧장 달려가거든. 제일 먼저 줄을 통과한 놈이 이기는 것이제. 일등 먹으믄 상금도 받고... 아이, 어부로서는 큰 영광이제." 그는 매우 흡족한 듯 말했다.
석우는 정확히 이해를 못 했지만 "예..."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아저씨는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말을 계속 걸어가며 홍어축제, 회진장의 볼거리, 회진항의 규모, 뗏목경주의 유래등을 계속 이야기했다. 석우와 다른 승객들은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가끔 깔깔 웃기도 하면서 열차는 점점 회진역으로 다가갔다.
언제부터인가 창문을 통해 갯내음이 조금씩 나더니, 마침내 열차는 회진역에 도착했다.
첫댓글 짝짝짝~~^*^~~ㅎㅎ
점점 재미 있어 지는데요.
글을 읽으며 옛 추억이 솔솔 영상으로 지나갑니다.
학창시절이요..주인공의 행동 하나하나가 눈에 그려져요.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다음편을 기다리며~~
감사합니다. 어설퍼도 하다보면 좋은 일이 있을지 누가 알아요? ㅎㅎㅎㅎ...
고운 말씀 감사합니다. 힘찬 하루 되세요~~
후속편을 기다렸는데......
드디여 이어지내요.....
회진항에서 어떤 상황이 벌어지려는지????
석우 학생의 생년월 이 궁금함니다(시대적 배경이 언제 인지?)
금비의 모험 후석편은 언제 볼수 있나요???
금비의 모험의 일부입니다.
석우가 젊은 시절이야기를 금비와 미녀들에게 해주는 중이죠.
나중에 이야기가 끝나면 그 이야기를 들은 금비가 다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길을 나서는 것이죠.
석우가 고3 ,1984년 8월.
석우가 임태준을 아직 못 만났네요.
만나기 전까지는 이야기가 그저 그래요. 석우의 여정이죠.ㅎㅎㅎ...
관심 주셔서 감사합니다. 복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