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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 개구리의 전설
나는 매년 오월이면 이 글을 끄집어낸다. 올해는 정월이 시작 되자마자 이 글을 끄집어냈다. 나는 노예선에서 해방되어 집으로 돌아온 쥬다 벤허를 기다리던 눈먼 집사의 심정이 되어 혼자서 먹걸리 한 병 사와서 기쁨의 축배를 들었다.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 위원장이 인천에서 국회의원 수를 250명으로 줄이겠다고 선언한 날이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는 아득한 날에 이숍이 예수가 나에게 들려준 이야기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그리고 우리 자식들이 살아갈 세상이 어떤 모습을 한 세상이면 좋겠다고 생각하는가? 우리는 우리가 머리속에 그리는 그런 세상을 만들고 그런 세상에서 살다 갈 뿐이다. "고 하면서-
- 묵은 “틀”
개구리 한 마리가 세상을 떠났다. 그는 개구리들이 뽑은 개구리나라의 왕이었다. 새들은 개구리가 왕이 된 것이 못마땅하였다.
‘개구리 주제에 왕이 되다니-’
개구리나라에 개구리가 왕이 되는 당연한 사실에 대해서 개구리들조차도 마뜩찮게 여겼다. 그런 개구리들은 새들의 깃털을 주어다가 몸에 붙이고는 날짐승인 양 행세하며 날짐승을 왕으로 섬겨야 자신들도 우아하게 날수 있다고 믿는 개구리들이었다. 아득한 조상 때부터 날짐승들에게 길들여진 개구리들은 깃털만 보아도 주눅이 들어 각종 모임마다 날개달린 짐승들을 상석에 앉히기에 바빴고 날짐승들이 부르는 박자도 맞지 않는 노랫말에까지 고개를 주억 거리고 어깨를 흔들며 박수를 쳐댔다. 심지어는 폴짝 뛰는 재주 밖에 없는 자신들에게 날개를 달아 준다면 개구리 몇 마리쯤은 그들의 밥상위에 반찬으로 진설되더라도 그건 아름다운 봉사이며, 그 정도의 희생은 개구리들이 치러야 할 당연한 섬김이라고 여겼다. 그리고는 간혹 개구리 중에서 누군가가 날짐승들의 똥 냄새가 지독하다고 비판하면 개구리의 입을 틀어막으며 ‘똥 안 누는 짐승이 있으면 나와 보라’며 거품을 물고 날짐승들을 옹호했다.
기실 세상의 개구리란 개구리들은 죄다 날짐승이 되고 싶어 했다. 그러나 그건 언감생심(焉敢生心)이고 희망사항일 뿐이었다. 개구리들이 날짐승 사회로 진입하려면 그들이 내는 시험을 통과하는 길 뿐이었다. 그 시험은 숙고(熟考)한 택함을 받는다고 고시(考試)라 불렀고, 합격하는 순간부터 무소불위의 권세를 얻는다고 고등계 순사 냄새가 나는 말까지 덧붙어져서 고등고시라고 했다. 물 흐르듯 흐르는 자연스러움이 곧 법(法)임에도 그 이름부터가 질식할 정도로 무시무시하였으니 독기를 품은 야심 찬 개구리가 아니고서는 꿈도 꿀 수가 없는 시험이었다. 간혹 어떤 야심찬 개구리가 있어 죽기 살기로 공부하여 그 시험에 합격하면 개구리 고을에서는 큰 잔치가 벌어졌다. 개구리를 위해 봉사하는 직(職)을 뽑는 시험이었지만 개구리들은 죄다 그걸 출세라고 불렀고, 고을 원님은 물론 사돈의 팔촌까지 몰려와서 “가문의 영광”이라며 추어주었다.
모든 개구리들의 소망은 물웅덩이를 벗어나서 날짐승 사회로 진입하는 것이었다. 넓은 들판이 내려다보이는 솔바람 부는 곳에다 날아가는 정자를 짓고 구름을 희롱하며 노닐다가 출출하면 훌쩍 날개를 펴고 웅덩이로 날아내려 올챙이나 개구리를 주워 먹는 두루미처럼 살아보는 것이 평생의 꿈이자 소원이었다. 고시에 합격한 개구리들은 대게가 두루미나 황새 가문의 데릴사위로 팔려갔다. 사랑하는 개구리를 헌신짝처럼 차버리고 열쇄를 몇 개씩이나 받고 날짐승들이 만들어 놓은 으리으리한 서옥(婿屋)으로 팔려간 개구리들도 있었다. 그 집은 아득한 삼국시대 때 지어진 집이었지만 해가지고 달이 뜨기를 수없이 되풀이 한 오늘까지 빛을 잃기는커녕 더욱더 창연히 빛나기만 하였다. 서옥에 든 개구리들은 가장먼저 뻔뻔함부터 배웠다. 개구리를 잡아다 놓고 “여봐라!” “이리 오너라!” “네 이놈!” “매우 쳐라!”하며 개구리들을 무시하고 학대하는 것부터 배웠다. 날짐승들의 족보를 사들여 올챙이 시절까지 지워버리고는 두루미들의 밥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얻어먹으면서도 두루미보다 더 완벽하게 두루미 행세를 했다. 날짐승들 앞에서는 손금이 닳도록 두 손을 비비는 것도 모자라 허리가 땅에 닿도록 굽실거리면서도 개구리들 앞에서는 자기의 참 모습을 감추고 아예 자비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짝짓기도 특이 했다. 최고급 연못 하나를 통째로 빌려서는 일생을 목에 힘만 주며 살아온 늙은 두루미를 주례로 세우고는 오다가다 만난 개구리들까지 빠트리지 않고 초청했다. 심 황후가 벌린 봉사잔치라면 칭송이라도 받겠지만 귀성열차 표 예매하듯이 하객들을 줄 세워 놓고 봉투를 챙겼다. 부끄러움을 모르니 미안함도 없었고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는 주막집 개 짖는 소리였다. 개구리들은 눈도장이라도 찍으려고 뙤약볕 아래서 줄을 지어 차례를 기다렸다. 축하의 봉투 속에는 빈정거림을 더 많이 담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수천의 개구리들을 불러 모아 “억” 소리가 나도록 챙기는 두루미의 능력이 부럽기도 하였다. 잘난 자가 못난 자를 우습게 여기는 것은 자기만족의 당도를 높이려는 것. 권세 있는 자는 권세 없는 자을 우습게보고, 부자는 가난한 자를 우습게보고, 공부 잘하는 자는 공부 못하는 자를 우습게보고, 대학 나온 놈은 대학도 못나온 놈을 우습게보고, 그러다 보니 다리 밑의 거지들조차도 자기 팔자가 상팔자라며 모두가 벌벌 기는 재벌들을 우습게보고. 삶이란 그렇게 서로를 우습게보면서 제 잘난 맛에 살아가는 것이니 기왕이면 거지 폼보다는 재벌 폼으로 한번 살아보고 싶기도 하였지만 보통의 개구리들에게는 그건 그저 언감생심 일장춘몽일 뿐이었다.
- 도전과 시련
그는 그 어렵다는 시험에 도전했다. 주판알을 잡았으면 둠벙에 들어가 물파리나 잡는 게 제격인데도, 대장부라면 대장인을 요하에 빗기 차고 동정서벌은 못하더라도 세상을 한번 깔아뭉개고 내려다보면서 살아보겠다고 대학도 못나온 주제에 머리를 싸매고 운명을 바꾸는 시험에 도전을 했다. 법(法) 법자도 모르면서 참으로 무모한 도전을 했다. 토굴 속으로 들어가서 육법전서는 물론이고 개구리 나라의 역사와 경제, 법철학까지 다 읽었다. 자신의 운명을 긍정하는 자는 지치지 않는 법. 한번 만 읽은 게 아니고, 열 번 스무 번, 줄줄 외울 정도로 읽고 또 읽었다. 대학문을 열어보지 못한 열등감 때문에 대학(大學)은 전문을 욀 수 있을 정도로 읽고 또 읽었다.
“大學之道는 在明明德하며 在親民하며-”
드디어 까막눈이던 그의 의식이 열렸다. 주판 알 속의 세상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경지를 보았다. 시험에도 합격했다. 그는 자기가 자신을 무시하지 않으면 아무도 자신을 무시하지 못한다는 것을 안 최초의 개구리가 되었다. 주위의 축하 속에서 그는 그를 가두고 있던 물웅덩이를 빠져나와 새로운 세상으로 들어갔다. 그가 공부한 법의 세계에서처럼 모든 개구리들의 생존권, 자유권, 평등권, 행복권이 보장 되는 세상이 열리고 날짐승들처럼 자유로워 질 줄 알았다. 대학은 못나왔지만 대학지도(大學之道)를 실천하며 보람 있는 생을 살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현실은 그게 아니었다. 그것은 책 속에서의 이야기였고 시험의, 시험에 의한, 시험을 위한 공부였을 뿐이었다. 날짐승들에게 무시당하지 않으려고 도전한 시험을 통과하고 나니 또 다른 보이지 않는 “틀”이 그에게 순종을 강요하고 있었다. 날짐승들이 만들어 놓은 학벌, 돈벌, 문벌, 권벌 같은 것이었다. 게다가 그를 더 고통스럽게 한 것은 그를 도와준 개구리들마다 그에게서 무언가를 바란다는 사실이었다. 어제의 그와 오늘의 그가 달라진 것이 전혀 없는데도 고시에 합격하면 부(富)가 따르는 게 당연하다는 생각들을 하고 있었다. 그에게는 자신의 뒷바라지를 위해 모든 희생을 감내해준 춥고 배고픈 형제개구리들에게 뭔가를 보상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같은 게 있었다. 그러나 그의 자리는 엿장수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세상 그 어느 곳보다도 공평무사해야 하는 자리였다. 그가 받는 월급으로는 그들의 기대를 충족시켜 줄 수가 없었다. 두루미 집으로 장가들 수 없는 처지라면 영혼이라도 팔아야만 했다. 그의 영혼을 비싼 값으로 사려는 날짐승들이 줄을 지어 기다리고 있었다.
지조란 가난할 때보다 성공한 후에 더 쉽게 무너지는 것. 소문만 나지 않는다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시험에 합격한 젊은 개구리들의 대부분이 그렇게 자신을 얽어매고 있는 틀과 타협해 가고 있었고 또 그걸 정당시하는 명분을 만들어 영혼까지 팔아치웠다. 그는 도무지 기(氣)를 펼 수가 없었다. 들로 산으로 뛰어다니던 개구리 시절이 더 좋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혼을 속이면서 살기가 싫었다. 배운 것과는 전혀 다른 세상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는 그토록 소망했던 법복을 벗어던져버리고 개구리사회로 돌아갔다. 가난한 형제들을 위하여 돈을 한번 왕창 벌어 보겠다는 심산이었지만 의식이 깨쳐진 그의 눈에는 돈벌이보다는 “틀” 속에 갇혀서 눈만 껌뻑이고 있는 더 많은 불쌍한 개구리들이 보였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틀”이 전부인줄 알고 그걸 깨고 나니 또 다른 “틀”이 그를 에워싸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때까지도 그게 “틀”이란 것을 알지 못했다. 개구리 된 처지로 개구리들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적당히 눈을 감고 성골(聖骨)과 짝짓기하면 진골(眞骨) 대접을 받을 수가 있었음에도 타협의 길을 버리고 “틀”을 부수는 길을 걸었다.
그가 싸운 상대들은 날짐승과 자신이 개구리이면서도 깃털을 붙이고는 날짐승인양 행세를 하며 개구리를 무시하는 자들이었다. 그들의 위선에 대항하여 오기를 부리며 춥고 배고픈 길을 걸었다. 날짐승들이 볼 때는 참으로 대책 없는 진상개구리였지만 그는 가진 자들의 과시 뒤에는 무시라는 진짜얼굴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잘 아는 개구리였다. 날짐승들의 위엄과 권위는 그들의 뒤를 수발해주는 개구리들이 없이는 한시도 유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개구리였다.
어느 날 개구리나라의 왕 자리를 놓고 황새와 두루미 사이에 목숨을 건 싸움이 벌어졌다. 힘이 약한 황새가 한 꾀를 내었다. 개구리 나라의 왕은 개구리가 되어야 한다면서 그를 데려갔다. 개구리들은 열광했다. 우여곡절 끝에 그가 왕이 되었다. 개구리로써 최초로 개구리나라의 왕이 되었지만 자기 힘으로 된 것이 아니었다. 황새들이 만들어 준 날개옷을 입고 두루미와 싸워서 왕이 된 것이었다. 왕이 되었지만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었다. 날개옷을 빌려준 황새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황새들이 시키는 대로 해야만 했다. 그것은 황새들이 바라는 세상이었을 뿐 왕 개구리가 꿈꾸는 세상은 아니었다. 껍데기뿐인 왕 노릇은 정말하기 싫었다. 왕 노릇을 못해먹겠다는 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그는 강화도령이 아니었다. 새로운 싸움이 시작 되었다. 그가 싸움을 벌인 진짜 상대는 날짐승들이 아니라 개구리들이 맹목적으로 섬기고 있는 지역과 계급과 권위라는 우상이었다. 개구리들의 정신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낡은 의식이었다. 그 의식은 개구리들을 옴짝달싹 못하게 가둬 놓는 보이지 않는 “틀”이었고, 그 “틀”은 가마득한 역사 이래로 줄기차게 세습되고 있었다.
작은 호수를 동서남북으로 나누고 북쪽호수에서는 왕권을 세습하였고 남쪽호수에서는 금권을 세습하였으며, 어떤 호수에선 신권, 교권까지도 세습되었다. 동서남북의 개구리들의 운명이 할아버지 두루미, 아들 두루미, 손자 두루미, 또 그 손자의 손자 두루미로 그렇게 피를 통해서 세습되고 있었다. 그들은 그것을 옛날에는 하늘의 뜻이라거나, 자신들을 선택한 거룩한 신(神)의 뜻이라 우겼다가 요즈음에는 그걸 안정(安定)이라 부르고 안정(安定) 속에서 번영(繁榮)이 온다고 하였다. 그런 번영을 누리려면 남들보다 더 특별한 노력을 해야 하고 혹독한 고생을 감내해야 하는데, 개구리들이 그 속에 들지 못하는 것은 각자의 노력과 정성이 부족한 탓이라고 하였다. 열심히 공부하여 셔블서원을 수학하고 동문끼리 결속하고 등과한 후에는 두루미 마을로 출가를 하여 그들이 일궈 놓은 “틀”을 수호하면서 죽을 때까지 무궁화 꽃밭에서 “틀”을 희롱하며 노니는 것이 시문을 깨친 개구리가 가야 할 당연한 길이라고 여겼다. 개구리란 개구리들 모두가 그걸 당연시 했고 또 부러워했다. 그리고는 그들도 그 “틀” 속에 들고자 뒷다리도 나오지 않은 올챙이들을 특수 훈련원으로 보냈다. 훈련비를 마련한다고 허리가 휠 정도였지만 골품(骨品)을 바꾸는 일인데 무슨 짓인들 할 수가 있었다. 엄마 개구리들은 훈련비 마련을 위해서 파출부도 하고 심야대리운전도하고 도우미 노릇까지 하였다. 훈련원이란 훈련원 마다 그 정문에는 셔불 서원 몇 명 합격, 알성시 대과 몇 명 합격이란 깃발이 높다랗게 경쟁적으로 내걸렸고 그런 깃발이 많이 달린 훈련원이 명문훈련원으로 통했다. 세상의 모든 개구리들은 구멍이 작은 문이 좁은 문이고 그 문만이 생명의 길로 통하는 길이라며 기를 쓰고 몰려들었다. 그 길이 참 길이라 할지라도 모두가 숭배하면 ‘틀’이 된다. ‘틀’에 갇히면 자유를 잃게 되고, 자유를 잃으면 노예가 되고, 노예가 되면 생명이 저당 잡히고, 생명이 저당되면 삶이 유린된다. 개구리세상은 개구리들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자진해서 “틀” 속으로 뛰어들며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 검을 들다
군력(軍力)시대가 종식되니 세상은 바야흐로 금력(金力)의 시대가 도래 했다. 개구리 나라의 입법, 사법, 행정에 금력(金力)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다. 정권(政權)은 단임이지만 금권(金權)만은 법권(法權), 언권(言權)을 시녀로 삼아 무소부재(無所不在), 무소불위(無所不爲), 영생불멸(永生不滅)의 창연(蒼然)한 깃발을 흔들고 있었다. 그는 다시 그 ‘틀’을 깨려고 달려들었다. 그는 이제 보통의 개구리가 아니라 왕이었다. 자신을 에워싼 “틀”을 깨려던 자유에의 의지(意志)가 개구리 사회를 덧씌운 모든 굴레를 깨부수려는 공동체적 자유에의 의지(意志)로 확산되었다. 보이지 않는 그 ‘틀’이 얼마나 큰지도 모른 체, 부분을 전체인양 적시(摘示)하며 무모한 공격을 감행 했다. 그런 싸움에는 세련된 전도자가 필요 함에도 그의 사도(使徒)들은 무지했고 서툴렀다.
왕 개구리는 젊고 예쁜 개구리를 법사(法事)들의 우두머리로 앉혔다. 기수별로 서열화 되어 ‘형님 먼저 아우님 다음’하던 빛나는 서열존중의 전통이 우롱 당했다며 전국의 법사(法事)들이 들고 일어났다. 아낙에게 우롱당한 자존심을 회복하자며 팔을 걷어붙이고 일어났다. 왕 개구리는 전국의 모든 개구리들이 보는 앞에서 법사(法事)개구리들과의 대화를 주도했다. 법사(法事) 개구리들은 왕 개구리를 우습게 알고 막말을 쏟아내고 있었지만 그의 기(氣)는 꺾이지 않았다.
그는 금권을 쥔 날짐승들과는 아예 상견례에서부터 전투를 벌였다. 삼복더위에 삼계탕 집으로 날짐승들을 초대했다. 높다란 정자, 시원한 그늘 아래서 커다란 부체를 흔들며 개구리 스프만 먹어온 그들에게 삼계탕을 먹였다. 자존심 높은 날짐승들이 삼계탕을 앞에다 두고 땀을 뻘뻘 흘렸다. 그들은 일상이 개구리들의 존재자체를 의식하지 않고 살아가는 족속들이라 자기에게 가해지는 모욕은 아무리 작을지라도 참지를 못하였다. 민주국가는 법치국가이니 법대로 하자며 개구리나라의 법을 주무른 내로라하는 법사들을 불러 모아 자신을 지켜주는 총잡이 노릇을 시켰다. 날짐승들은 “삼계탕 집의 모욕”을 결코 잊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그들끼리 뭉쳐서 왕 개구리를 끌어 내리려고 했다. 왕 개구리 곁에는 명문 서원 출신 동문하나 없었고 안동 김 씨나 풍양 조 씨 같이 힘 있는 처갓집도 없었지만, 날짐승들의 부패에 분노한 온 나라의 개구리들이 들고 일어나서 왕을 지켜 주었다. 거대한 역풍을 맞아 수도 없는 날짐승들의 날개가 꺾였다.
분노한 왕 개구리는 날짐승들을 버리고 개구리들과 직접 소통하는 방식을 택했다. 정보화 시대를 열어준 그의 고향선배 덕이었지만 그를 도와 줄 세력이라고는 오로지 개구리들 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왕 개구리의 생각이 온라인을 타고 여과 없이 표출 되었다. 역사 이래로 전무후무한 혁명적인 방법이었지만 개구리들의 겨드랑이에서는 날개가 솟아나질 않았다. 세련된 사도들의 도움을 받지 못한 그의 도전은 좌충우돌, 천방지축으로 비쳤다. 두루미나 금개구리들이 사는 곳이 따뜻한 강남이라고 거기다가 ‘세금폭탄’을 퍼부었다. 포탄의 파편은 늘 그렇듯이 힘없는 개구리들에게로 더 많이 날아갔다. 세금은 무거웠고 온 나라의 땅값이 치솟았다. 은행의 돈이란 돈은 모조리 땅 따먹기 하는 자들의 손으로 들어가 우후죽순처럼 개구리 아파트가 건설 되었지만 팔리지 않았다. 미국 한번 안간 것을 자랑으로 내세우다가 왕 조차도 어찌할 수 없는 거대한 “틀”을 자인하고는 멀리 아라비아까지 개구리 부대를 파병 하고야 말았다.
그는 비로소 세상은 수많은 “틀”로 되어 있고, “틀” 밖에는 또 다른 “틀”이, 그 “틀” 밖에는 또 더 큰 “틀”이 호수에 이는 파문처럼 동그랗게, 동그랗게 둘러져 있음을 깨달았다. 보이는 “틀”보다 보이지 않는 “틀”이 더 크고 더 많고, 더 두터움을 알았다. “틀”을 쥐는 자가 힘을 쥐고, 부(富)를 쥐고, 운명(運命)을 쥔다는 것을 알았다. 그 무한한 매력 때문에 모두들 “틀”을 향해 내달리고 한번 “틀”을 장악하면 죽기 전에는 절대로 놓지를 않고 자자손손 세습시킨다는 것을 알았다.
그를 따르며 개구리 세상을 만드는 데에다 일신을 바치겠다던 그의 사도들도 새로운 “틀”을 만들면서 날짐승들처럼 똑 같이 구린내 나는 똥을 싸기 시작했다. 사도라 자처하는 자들 중에는 쓰레기보다 못한 자들도 있었다. 선택받은 개구리라는 것을 과시하려고 큰 호수 하나를 몽땅 지 세끼 흘례식장으로 삼은 개구리도 있었고, 솜털 하나 없이 보드라운 피부를 가진 개구리들을 짜디짠 소금물에 집어넣은 자들도 있었다. 비행기가 이륙 중에는 의자를 바로 세워 달라는 스튜어디스를 향해 자신을 무시한다며 패악질을 부려 비행기를 뜨지 못하게 만든 자도 있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왕만 바뀌었을 뿐, 세상은 늘 왕을 신(神)의 자리에 올려놓고 땅으로 내려오지 못하게 만든 다음, 지 마음대로 해먹으려는 사도들의 세상이었지 개구리들이 바라는 세상은 아니었다. 권력에의 의지(意志)에는 새 세상을 열망하는 개벽(開闢)에의 의지와 자기를 과시하려는 욕망(慾望)에의 의지가 뒤엉켜 있음을 그는 몰랐다. 모순의 세상은 투쟁과 대립이 아니라 개구리들의 영혼에 대한 깊은 이해와 설득으로 변화시켜 나가야 한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목자가 양을 위하고, 스승이 제자를 위하고, 가진 자들이 가지지 못한 자를 위하고, 치자가 백성을 위한다는 구호 속에는 구호를 외치는 자신을 위하는 마음이 늘 앞서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왕이 개구리들의 마음을 읽고 사도들과 한 마음으로 개구리들을 위한 길을 걸어야 태평성대가 올 것인데 그의 사도들은 왕 개구리의 생각도 보통개구리들의 생각도 제대로 이해하질 못하고 왕 개구리가 물러난 이후의 자기신세만을 걱정하며 자기 욕망의 포로가 되어 갔다. 그것이 “믿어주세요!” 하는 왕을 결코 믿어주지 못한 이유란 것을 알지 못했다.
- 좌절과 한계
그는 곧 말썽꾸러기 개구리, 골치 아픈 개구리로 치부 되었다. 세상의 모든 잘못이 그의 탓으로 돌려졌다. 그를 원망하는 개구리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날짐승들은 때를 놓치지 않고 달려들었다. 날아보지 못한 개구리는 결코 개구리를 날게 해줄 수 없다며, 개구리를 왕으로 뽑으면 폴짝 뛰는 신세를 영원히 면할 수 없다며, 왕이 왕다우려면 품위가 있어야 한다고 선동했다. 드디어 모든 개구리들이 개구리를 왕으로 뽑은 것을 후회하기 시작했다. 오른손이나 왼손이나 한 몸을 이룬 지체임에도 그들은 편을 가르고 싸우길 좋아 했다. 세상의 잘못이란 잘못은 전부 왕 개구리 탓이었다. 장마가 와도 “이삼일 오던 비가 대중없이 오더니 노상 온다.”고 비꼬았다. 명덕친민(明德親民)의 뜻도 모르면서 두 번 다시는 서원을 졸업하지 못한 개구리를 왕으로 뽑아서는 아니 된다고 까지 했다. 왕이 되어서 그렇게 철저하게 개구리들에게 조롱당한 왕은 그가 처음이었다. 개구리들은 다시 두루미를 왕으로 뽑았다. 익숙한 것과 새로운 것이 충돌하면 익숙한 것이 더 안전하다고 믿는 어리석음 때문이었지만 사도들은 누가 자기들을 지켜주는 실세인가에만 관심이 있었고 제 살길 찾기에만 바빴다. 그들은 자기가문에서 중전마마를 간택하여 대대손손 제 핏줄이 왕이 되어 자기들이 만든 “틀”을 지켜주는 그런 세상을 꿈꾸는 자들이었다.
왕에서 물러난 개구리는 개구리 마을로 돌아갔다. 개구리처럼 살고자 개구리 마을로 돌아갔다. 한 바퀴 바람 같은 세월이 지나간 자리였지만 그래도 행복하다는 생각을 하였다. 이상하게도 그가 왕에서 내려오자 그를 그처럼 미워하던 수많은 개구리들이 왕 개구리를 보려고 개구리 마을 웅덩이로 몰려들었다. 그에게서 무엇을 바라서가 아니었다. 개구리가 왕이었다는 사실 자체가 신기하였던 것이다. 왕 개구리는 눈치도 없이 동네개구리들과 함께 무논에 들어가서 “왕왕” 거렸다. “한번 졸병은 영원한 졸병이 아니며 개구리도 왕이 될 수 있다”고 떠들었다. 스타들의 치마 밑을 거침없이 들추어내는 “무르팍 도사” 보다 더 높은 인기를 끌었다. 개구리 마을을 찾는 개구리들이 나날이 늘어갔다. 그게 화근이었다.
날짐승들은 또 다시 개구리가 왕이 되는 세상이 올까봐 두려웠다. 간신히 보수해 놓은 “틀”이 다시 부서질까봐 두려웠다. 미친 소가 미친 개구리로 변할 까봐 두려웠다. 긴 목에 잔뜩 힘을 주고는 좌익으로는 날수가 없고 우익으로 날아야 한다고 소리치기 시작했다. 개구리들이 촛불을 든 것은 큰 나라라고 끽 소리 한번 못하고 쉽게 소고기 시장을 내주고 온데 대해 자존심이 상한 개구리들의 반감임을 모르고서 미친 소에만 집착하여 촛불을 두들겨 패고 있었다. 왕 개구리를 따르던 많은 개구리들이 잡혀갔다. 어떤 개구리들은 두루미 곁에서 살게만 해준다면 무슨 짓이라도 하겠다며 애걸복걸 하고 다녔다. 앞질러서 그들의 사냥개가 되어버린 개구리도 있었다. 걸레는 세탁기에 넣어도 걸레 일 뿐이고, 주인을 배신한 개는 더욱 철저히 옛 주인을 물어뜯는 법이었다. 잡혀간 개구리들은 한때나마 자신들의 왕이었던 그의 비행을 낱낱이 일러바쳤다. 제 살자고 스스로가 섬긴 왕의 잘못을 마구 일러 바쳤다. 날개도 없는 왕은 이제 자신을 지킬 힘도 없는 한 마리의 평범한 개구리일 뿐이었다.
두루미들은 뱀을 앞세워 왕 개구리를 몰아갔다. 은퇴 후에 살아갈 먹을거리나 챙기며 파리 따위나 널름하는 추잡스런 개구리로 몰아세웠다. 한낱 천박한 개구리 주제에 민주니 자유니 평등이니 하는 고담준론을 입에 담는 것 자체가 위선으로 보였다. 그런 이야기는 두루미나 학 같이 고결한 날짐승들이 해야 격에 맞는 것이었다.
또 다시 모든 개구리들이 “개골개골” 거리며 왕 개구리를 헐뜯기 시작했다. 엄마 개구리, 아들 개구리, 형 개구리, 조카 개구리, 왕 개구리 가족들이 줄줄이 잡혀갔다. 두루미 마을의 한 채 집값도 못 되는 돈을 받은 죄로 잡혀갔다. 날짐승들이 바로 세우고자 한 것은 정의가 아니라 ‘개구리는 결코 왕이 되어서는 아니 된다’는 그들만을 위한 “틀”이란 것이 눈에 빤히 보였다.
왕 개구리는 뱀의 혀를 피할 수가 없었다. 뱀의 혀는 늘 두 가닥이었다. 하나는 법치주의의 성긴 그물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율법주의라는 잔인한 올가미였다. 그들은 그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지도 모른 체 “법 앞에 모든 개구리는 평등하다”며 왕 개구리를 잡지고 소리 쳤다. 왕 개구리목에다 올가미를 씌워놓고는 개구리끼리 맞대면시켜보자며 뒷다리를 쥐고 흔들었다. “이러면 막가자는 거지요” 가 아닌 그냥 막가고 말았다. 그들의 그런 행위는 맑은 세상을 만들려는 정의감의 발현이 아니라 왕 개구리가 꿈꾸었던 세상에 대한 빈정거림이었다. 그를 왕으로 뽑은 개구리들을 비웃으며 조롱하는 행위였고, 올가미를 씌워 놓으면 왕 개구리도 별수 없이 제 살기 위해서 멱살잡이나 하는 하등동물일 뿐이라는 자괴감에 빠지도록 하는 것이었다.
조직에서 쫓겨나면 단 한 순간도 버티지 못하는 자들이 조직의 위세를 등에 업고 힘없는 개구리들을 위협하는 꼬락서니라니-. 그런 모습은 꼭 기성 회장 애비 덕에 반장 감투 쓰고 으스대는 꼬마처럼 보였다. 선생님이 임명한 반장, 아니 교장이 담임선생에게 압력을 넣어 마지못해 임명된 반장, 왕 개구리는 어릴 때부터 그런 반장에게는 복종하기가 싫었다. 친구들의 잘못을 적어서 일러바치는 것을 스승에 대한 충성으로 알고 시키지도 않은 일을 자진해서 고해바치는, “완장”을 빗기 차고 설치는 그런 반장들이 싫었다.
- 고독 그리고 유언
뭘 모르는 개구리들은 자신들이 개구리인 것도 잊은 채 술자리마다 왕 개구리를 안주로 올리기 시작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간음한 여인에게 돌을 던지는 것은 여인의 정조를 보호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거짓을 숨기는 데는 간음한 여인이 가장 안성맞춤이었기 때문이다. 뱀의 머리를 쪼을 수 있는 것은 두루미뿐이었지만 두루미는 먼 산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아예 빌라도처럼 물을 떠와서는 “나는 이 일에 무죄하다”며 손을 씻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왕 개구리는 혼자서 고민을 했다. 두루미나 뱀이나 둘 다 개구리를 먹이로 살아가는 것 아닌가. 피할 수도 없고 피할 생각도 없었다. 천도(遷都)로서 개구리 사회의 주류(主流)를 바꿔보려고 했던 지난날을 돌아보았다. 만적이와 묘청스님 생각도 났다. 흠모했던 정조대왕도 떠올랐다. 제국에 반기를 든 노예검투사 스파르타쿠스도 떠올랐다. 도학정치를 꿈꾼 정암도 생각났다. 충을 찬양하다 효의 틀에 갇힌 신세가 되어 천하를 떠돌며 “틀”을 조롱하며 한 세상 살다간 김삿갓도 생각났다. 등극하자마자 그를 물려고 달려든 “법사(法事)들과의 대화”도 떠올랐다. “관습헌법”과 “포괄적 뇌물죄” 사이에 갇힌 자신의 운명을 생각했다. 성문헌법 바깥에 관습헌법이 있고 죄형 법정주의 바깥에 포괄적 뇌물죄가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가 갇힌 것은 그가 그토록 부수고자 했던 “틀”이었다. 검으로 일어난 자는 검 앞에 설 수 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검으로 세상을 바꾸지 못한다면 무엇으로 세상을 변화시킬 것인가? 파천(破天)은 “틀”의 문제가 아닌 개구리들의 의식(意識)의 문제였다.
“너희는 사랑의 빚 이외는 어느 누구에게도 아무 빚도 지지 말라”는 가르침이 생각났다. 빚이란 한 호리(毫釐)도 남김없이 갚지 않고서는 자유로워 질 수 없는 것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후회했다. 진실한 양심은 변명하지 않는 법. “우정의 빚”을 “자연채무”라 답한 왕답지 못한 말장난을 자책했다. 독학으로 법을 익힌 그의 실력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기막힌 법들 앞에서 그는 우는 소리를 멈추고 새로운 결심을 했다. 날게 해준다고 꼬드기는 날짐승들에게 속지 않도록 개구리들을 깨쳐 주고 싶었다. 날개도 없는 개구리들을 좌우익으로 몰고 가는 자들에게 속지 말라고 외치고 싶었다. 날짐승들조차도 한 쪽 날개로는 날지 못함을 알려주고 싶었다. 개구리들은 자신이 개구리임을 알 때 가장 행복해 진다는 것을 알게 해주고 싶었다.
『산다는 것이 곧 자기보다 약한 것들을 먹이로 하여 살아가는 일임에도 패거리들 속에 숨어서 패거리들의 힘만 믿고 저항 할 힘을 상실한 것을 향하여 용감하게 돌을 던지는 사악함이여! 그런 행위를 영웅시 하는 착각이여! 자신을 돋보이게 하려고 앞 시대가 지어 놓은 무대를 깡그리 허물어 버리는 무지여! “내가 화평을 주러 온 것이 아니라 검을 주러 왔노라.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듯이, 스승이 제자를 제자가 스승을 대적하듯이, 아비가 자식을 자식이 아비를 대적하듯이” 썩은 자들끼리 서로가 서로를 까발리라. 서로가 서로를 찔러야 모두가 참회하는 새로운 세상이 올 것이다.
조직의 힘에 의지하여 자신을 과시하는 자여! 진정으로 강한 자는 조직을 떠나서도 의연한 자란 사실을 아는가? 돈에 의지하여 살던 자가 돈을 잃고 나면 한 없이 비굴해 지듯이, 조직의 힘에 의지하여 권세를 휘두른 자 일수록 조직에서 밀려나면 견디지 못한다는 것을 아는가? 그것이 그대가 그대보다 약한 것들인 개구리들을 섬겨야 하는 이유다.
개구리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삶은 치열하고 경쟁은 늘 문 앞에 엎드려 있다. 긴장과 초조가 파도처럼 쉬지 않고 그대를 엄습해온다. 그것을 벗어나려나려 함은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의 바램이다. 그래서 재물을 가지되 더 많이 가지려하고, 권력을 가지되 더 높이 가지려 한다. 권력도 재물도 없는 자들은 위로라도 얻으려고 종교를 찾고 문학을 찾는다. 문학이라 해서 온화우미만 있고, 종교라고 해서 거룩함만 있는 곳이 아니다. 그 속에도 악어는 숨어 있다. 살아남아야 하는 자는 언제나 깨어있어야 한다. 남을 해치지는 아니하더라도 최소한 남의 밥이 되는 운명은 피해 가야 한다. 미소 속에 숨긴 칼은 생각지도 않은 때에 너를 찌르려 달려들 것이다.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고 가르치는 교회의 첨탑은 자기를 염려하는 세월로 나날이 높아만 가고 대자대비를 염송하는 사찰의 불상은 많이 모아야 많이 베풀수 있다며 더 웅장하여만 간다. 영적인 세계를 가르치는 그들도 먹고 살아야함으로 그들에게도 먹을 것을 허락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그것이 규모화 되고, 권위화 되고, 귀족화 되고, 세력화 되면 제어할 수 없는 힘을 가지게 되고, 그때부터는 그 힘을 쓰는 자들의 염결성에 따라서 그대들을 푸른 초장에 누이기도 하고 그들의 밥이나 도구로 만들기도 하는 것이다. 네 영혼을 구원한다는 종교라 할지라도 너를 가두는 “틀”이고 어항이고 울타리가 되는 것인데, 하물며 그 외의 것임에야 더 물을 필요가 없을 것이다.
“틀”에 갇히면 누구도 벗어나지 못한다. “틀”을 부정하면 곧 자신을 부정하는 꼴이 되니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더 적극적으로 “틀”의 신봉자가 되고 “틀”의 전도자가 된다. 그러하니 누가 너희들을 가두려고 하거든 달아나라. 할 수 있는 한 멀리 달아나라. 사육되는 사자의 삶보다 하루살이의 자유로운 삶이 더 고귀하지 않겠는가.
영적인 세상은 감추어진 세상이라 흰 옷만 입으면 누가 참 목자인지 구별이 안 된다. 거짓 선지자, 거짓목자들이 양들을 제 먹이로 취하려고 그곳으로 몰려든다. 그들에게는 고기 낚는 어부보다 사람 낚는 어부가 훨씬 더 그럴싸하고 좋다. 그들이 타고 다니는 차량의 문은 더욱 더 넓어지고 거룩한 복장에다 화려한 직함을 새기고는 내로라하는 인사들과 악수하는 사진들을 철십자훈장처럼 걸어 놓고서 온갖 참람한 망언들로 제 자랑을 일삼으며, 두루미의 위세를 빌려 개구리들을 겁주어서 울타리를 이탈하지 못하도록 만든다. “틀”을 수호한다는 명분으로 아름답게 회칠하여 단장한 무덤 속에다 섞은 시체를 숨기듯이 힘을 가진 자들과 야합한다. 그리고 그것을 “구원” 이라고 외친다. 힘을 사모하는 권력은 창부의 미소에 홀린 수캐마냥 그들과의 간통도 서슴지 않는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간통이 노리는 목적은 쾌락이지 환희를 얻기 위함이 아니다. 너희는 환희를 얻기 위해 애를 써라. 선한 목자와 도적의 겉모양은 늘 같다. 보통의 개구리들은 영적인 세계를 분별하는 능력이 없으니 그들에게 속을 수밖에 없다. 내가 답답하여 다시 말한다. “개구리들아! 우아하다고 따르지 말고 휘황찬란하다고 만세를 외치지 말라. 빛이 좋은 살구는 틀림없는 개살구고 소리가 요란하면 예외 없이 빈 깡통이다. 가슴에다 양철조각을 주렁주렁 달고 우쭐거리는 자들을 조심하라. 그들은 하찮은 훈장을 가슴에 달고 아부의 꿀물을 핥으며 칭찬에다 목숨을 거는 경비견들이다. 그들에게는 생명이 없다. 울타리를 넘어 오는 자는 전부 도적이고, 무화과에서 포도를 딴다고 말하는 자는 사기꾼이다. 나무는 열매를 보고 안다. 아직 열매가 달리지 않았거든 그 씨앗을 보고 장차 자란 후의 나무를 짐작하라!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이 난다. 이 말은 영원한 진리다. 너희가 그들에게 속는 것은 욕심이 눈을 가려 분별력을 잃은 때문이다. 겉으로 보이는 외모와 세력에 의존하지 말고, 허명을 쫒지 말라. 땀 흘린 대가만을 바라고 여기저기서 미륵이 나타났다 메시아가 나타났다고 하더라도 속지 말고 무엇에 임하든지 네가 싫으면 싫다하고 좋으면 좋다하라. 애매모호하고 뜨뜻미지근하면 너희들은 두루미의 밥이 될 것이다.
법의 이름으로 나서는 자여! 종교가 저지른 모든 악행이 전부 신(神)의 이름으로 행해졌듯이 권력이 저지른 모든 악행도 전부 법(法)의 이름으로 저질러졌음을 기억하라! 칭찬만 받고 자란 모범생 아이는 어떻게 해야 선생이 칭찬을 하는지를 잘 안다. 그래서 그들은 어른이 되어서도 진실 보다는 칭찬에 목말라하며 사냥개처럼 늘 주인을 앞질러서 토끼를 쫒는다. 진보란 결국 아득한 태고로부터 개구리 혼자서는 살아갈 수가 없어서 너와 내가 뭉쳐 사회를 만들고 지도자를 뽑아 그들에게 위임한 자유권을 되찾아오는 과정이 아니던가. 그것을 내어주지 않으려고 버티는 자들이여! 그런 조직을 위해 뭣도 모르고 순교하려는 자들이여! 문은 늘 안에서 잠그는 법이이니 그대의 마음 문이 어느 쪽에서 잠겨 있는지 살펴보라. 대문의 빗장이 뭔지도 모르면서 허리에 검(劍)을 차고 우쭐대는 자들이여! 종(鐘)이 누구를 위하여 울리는지 그 소리를 한번 들어 보라. 고래로부터 그대들의 잘못을 지적하는 개구리는 늘 불순세력이라 불렸음이다.
개구리들아 !
너희들은 조조군사가 되지 말라. 적벽대전을 읽으면 참 재미있다. 그건 네가 제갈공명이나 조조가 된 것으로 착각하는 때문이다. 너는 공명도 조조도 아니고 그냥 개구리 일 뿐이다. “죽어나는 것은 조조군사”란 말이 있지 않느냐. 삼국지를 읽을 때마다 대륙을 통일하여 제 관할로 두려는 자들로 인해 수도 없이 죽어나간 조조 군사들을 생각하라. 그들의 처자와 권속을 생각하라. 그리하면 네가 어떻게 처신해야 살아남을지 알게 될 것이다.
역사에서 영웅이라 칭하는 자들이 남긴 “틀”이 어떠했는가? 알렉산더, 시저, 진시황, 징기스칸, 나폴레옹, 히틀러, 레닌, 스탈인, 모택동, 김일성 같은 자, 그들이 옳다고 믿고 수천만의 목숨을 희생하며 만든 “틀”이 무엇이었는지 살펴보라. 역사란 기존의 “틀”을 깨고 새로운 “틀”을 만드는데 성공한 몇몇 소수가 남긴 기록물이다. 잠시 지나가는 세월에 그들이 만든 “틀”이 얼마나 남아 있는 지 돌아보라.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아있지 않고 다 무너져 버리고” 다만 몇 줄의 문장으로만 남았을 뿐이지 않는가. 오늘 날도 많은 영혼들이 “틀”을 만들고 있다. 작은 종지 에서부터 바다와 하늘을 담으려는 “틀”까지 있다. 그 많은 “틀”들이 도대체 누구를 위한 “틀”인가를 살펴보라.
이제 곧 유월이 오면 바람이 불리라. 태풍이 휘몰아오더라도 두려워하지 마라. 그 바람이 아니면 높은 산의 초목은 무엇으로 갈증을 면하며 얕은 연못의 고기들은 또 무엇으로 숨을 쉴 수가 있더란 말이냐. 지루한 장마가 오면 개미나 다람쥐 같은 연약한 것들이 먼저 몸을 숨긴다. 그들이 비겁해서가 아니라 태풍이 지나가고 나면 지금보다 더 맑은 하늘이 열린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얼굴이 두꺼운 자들은 대쪽으로 뇌수를 쑤셔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데 맑고 여린 마음들만이 작은 바람에도 가슴이 아파서 속울음을 운다.
슬퍼하지 마라!
외로움이란 더 많이 깨우친 자가 더 많이 괴로워해야 하는 업보 같은 것이다, 후흑(厚黑)한 자들의 멍에까지 지고가야 하는 굴레 같은 것이다. 그래서 그건 깨친 자가 더 따뜻해져야만 하는 의무인 것이다.
개구리들아! 내가 마지막으로 꼭 할 말이 있다. 할 수 있는 한 생각을 더 깊이 하라. 그리고 도달할 수 없는 곳 까지 그대의 생각이 다다랐다 하더라도 그보다 더 깊은 곳에 더 바른 생각이 있음을 알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라. 너는 전지전능한 신이 아니고 오류가 많은 개구리이기 때문이다. 어리석은 자들에게 충고하지 마라. 그들은 어리석기에 그대의 가르침을 자신을 무시하는 말로 듣는다. 무시당하며 살고 싶은 자들이 어디 있겠는가? 그들을 깨우치려 들면 너는 필시 그들과 죽을 때까지 원수가 되고 말 것이다. 그리고 자신을 과시하는 자, 곧 날개를 가졌다고 너희를 무시하는 자들을 부러워하지 말고 그들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라. 네가 그들의 과시를 부러워하지 않으면 날개는 한낱 바람에 날리는 깃털일 뿐이지만 네게 날개가 없다고 네가 날개를 질투하는 순간 너는 바로 그 자리에서 날개의 포로가 되고 만다.
날짐승들은 내가 저속한 말을 쓴다고 손가락질 한다. 내 입의 말이 탁한 것은 그들이 먹고 싸고 감춘 똥 냄새가 더 지독한 때문이다. 예로부터 약자가 강자에게 복종하면 순종이고, 빈정거리면 반항이고, 달려들면 항거라고 했다. 강한 자가 약자에게 반항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느냐? 두루미들이 개구리에게 사과하는 것을 본적이 있느냐? 그들은 내 말의 비속함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수호하는 “틀”을 향한 나의 반항이 괴로운 것이다. 내말에 귀가 더러워진다고들 하지만 코를 막고 살아야 하는 개구리들은 숨을 쉬지 못할 지경이다. 왕만 그대들의 손으로 뽑으면 뭘 하느냐. 그 힘으로 세상 곳곳에서 너희를 둘러싸고 있는 “틀”을 너희 손으로 결정하고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책임지는 세상을 만들고자 함이 아니더냐? 아직도 주인의 밥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챙기려 드느냐? 그걸 선택된 자들의 특권이라 여기느냐?
뒤를 돌아보라! 지금까지도 날짐승들이 너를 먹여준 것이 아니라 네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왔지 않았느냐. 원로들이란 한때의 작은 업적을 신화로 만들어 놓고 두고두고 그 단맛을 즐기려는 자들이다. 그들의 얼굴에서 가면이 벗겨지는 날, 숨을 곳을 찾지 못한 거짓 영혼들이 제풀에 괴로워 몸부림치다 밤하늘의 유성처럼 떨어지리라. 그들은 이 세상 어느 곳에서도 제 육신하나 뉘일 곳이 없을 것이다.
개구리들아 깨어서 일어나라!
그들이 만들어 놓은 틀로부터 벗어나라!
네 삶의 1/3은 잠을 자면서 살고 나머지 2/3도 날짐승들의 밥이 될까봐 가슴 졸이다 지나간다. 네게 주어진 시간의 무대는 TV연속극처럼 지나간다. 무엇을 더 욕심내느냐. 날개가 없다고 개구리들을 무시하지 말고 네 생각과 다른 생각에도 귀를 기울이고 들어주라. 그리고 모두가 제 할 일을 열심히 하여 세끼를 기르고 시냇가의 버드나무 아래서 쉬면서 기쁜 노래를 부르라. 그게 지금까지 내가 깨달은 개구리들의 행복이고 희망이고 자연이다.』
그는 그렇게 소리 높여 외치고 싶었다. 밤이 깊을수록 눈이 밝아지는 부엉이가 생각났다. 벌건 대낮에 내놓고 개구리를 잡아먹는 두루미들보다 따돌림 받는 부엉이가 더 양심적이란 생각이 들었다. ‘개구리는 날수가 없다는 것을 천하의 개구리들에게 보여주는 것’ 그것이 자신이 마지막으로 들어야 할 독배라는 생각이 들었다. 실증을 보여 주고 싶었다. “틀”을 깨는데는 죽음이 참으로 공평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모두에게 어김없이 찾아오는 죽음. 두루미든 뱀이든, 개구리든 피해 갈 수 없는 죽음. 신이 살아 있는 모든 것들에게 죽음을 예비 한 것이 지극히 공평하고 현명하신 처사로 생각되었다. 죽을 수밖에 없는 것들이 개구리들을 상대로 온갖 술수를 부리며 홀로 고고한 척 하는 것도 모자라, 개구리를 사육하는 “틀”을 수호하려고 핵무기까지 만드는 자들이 가련하게 보였다.
"그래!, 죽음의 신을 맞으러 가자. 그가 내 앞에 저울을 들고 나타나려니 그는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지극히 공평한 저울을 지녔음이다."
높은 바위로 올라갔다.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낮은 곳을 내려다보았다. 자신을 과시하고 싶어서 황소보다 더 큰 배를 가지려고 “틀”을 추앙하다 “틀”속에 갇혀버린 개구리들이 보였다. 물고기는 물에 갇혀서도 자유롭게 유영하고 새는 공중에 갇혀서도 거침없이 나는데 개구리는 물과 뭍을 오가면서도 “틀”에 갇혀서 “틀”을 숭배하며 살고 있었다. 자신도 그런 개구리 중 하나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삶이란 시간 위를 떠가는 개구리밥풀 같은 것. 욕심이 배가 불러 교만을 낳고 교만이 과시를 낳고 과시는 또 무시를 낳고 무시는 또 다른 욕심을 잉태하고-. 그런 “틀” 속에서 서로를 무시하며 한모금의 담배연기도 못되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개구리들이 참으로 측은하게 보였다.
“저기 개구리가 지나가네-”
그리고는 날아 내렸다. 숨졌다. 그게 전부였다.
- 부활 그리고 에필로그
그가 떠나자 그토록 그를 욕하던 개구리들이 슬퍼하기 시작했다. 개구리로 태어나 개구리들의 운명을 깨닫고 왕이 된, 최초이자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르는 왕 개구리의 죽음을 슬퍼하기 시작했다. ‘개구리들은 개구리 중에서 왕을 뽑아야 행복해 진다’는 그의 마지막 말은 이해하지 못한 채, 비로소 자신들이 울고 싶어도 함부로 울 수가 없는 개구리임을 깨닫고 개구리 팔자를 서러워하며 “개골개골” 울었다. 철조망이 쳐진 아크로폴리스 연못으로 모여들어 엄마 잃은 청개구리처럼 그렇게 울고 또 울었다.
애곡소리가 구슬픔은 망자를 위한 것이 아님에도 두루미들은 개구리 입에다 재갈을 물리고는 왕 개구리를 폄하하는 일에만 열심을 보였다. 나주의 이름 없는 졸병 개구리 한마리가 “왕 개구리가 벼랑 끝에 선 것은 두루미들에게 잘 보이려고 무리하게 나대다가 태평양을 건너 도망간 부패한 자기 조직의 수장 때문이었다.”는 비판을 했다가 파면도 모자라서 조직의 명예를 훼손한 죄로 고발까지 당했다. 누가 조직의 명예를 훼손한 자인가? 부패한 수장인가 그를 비판한 졸병인가? 시골마을의 개구리 한 마리가 “개골”하니 개구리나라의 재정을 조달하는 거대조직의 명예가 지진이 난 듯이 흔들거렸단다. 책상을 탁 하고 치니 앞에 앉은 멀쩡한 젊은 놈이 억하고 죽더란 소리와 하나 다르지 않다. 지나가던 소도 너무 기가 막히니 웃지를 않는다. 날카로운 이빨도, 사나운 발톱도, 두꺼운 가죽도 지니지 못한 개구리들의 입을 틀어막는 것도 힘자랑인가? 가히 군력(軍力)의 시대가 가고 법 만능 시대가 왔음을 실감나게 한다. “틀”에 갇히면 그 만큼 시야가 좁아지는 것이다.
올챙이 키우기가 힘이 든다고 개구리들이 알을 낳지 않고 있다. 여름이면 온 들을 울리던 개구리 소리가 점점 사라지고 있다. 옛날에는 아빠 개구리 혼자 벌어서 가족 개구리들이 다 먹고 살았는데 지금은 가족 개구리 모두가 나서서 벌어도 살기가 힘들다. 갈수록 몸도 마음도 여유가 없어지고 있다. ‘그게 누구 탓인가? 내 탓인가, 아니면 그대 탓인가?’ 세상이 돈이 왕 노릇하는 새로운 틀 속으로 들어갔는데도 우물 안의 개구리들에게는 그 “틀”이 보이지 않고 있는 것이다. 개구리 마을의 지세는 개구리를 쫓는 뱀을 황새가 노려보고 있는 형국이란다. 황새는 어디로 날아갔을까? 누가 날개도 없는 개구리들을 좌우익으로 나누었을까? 악화는 양화를 구축하고 보수는 혁신을 구축하고 “틀” 속에 갇힌 사회는 꼭 필요한 사람을 죽음으로 내몬다.
그래도 먼 훗날, 5월의 아침 햇살이 부엉이 바위에 비치면 그 바위 아래 하얀 찔레가 붉게 피어날 것이다. 그 날이 오면 개구리들은 돌 하나만 던져도 죽은 듯이 조용해지던 옛날의 개구리가 아닐 것이다. 그날이 오면 두루미나 뱀들도 그들이 그토록 지키고자 했던 “틀”을 깨고 나와, 자신이 바로 개구리였음을 알게 될 것이다. 깃털을 벗어던지고 나면 개구리가 가장 아름답고 물과 뭍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가장 우아한 동물임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날이 오면 나 같이 못난 악머구리조차도 무시당하지 않고 “깨르륵 꽈르륵” 목 놓아 울게 될 것이다. 그 날은 더디 오겠지만 도적같이 빠른 걸음으로 우리 앞에 올 것이다.
부엉이 바위를 떠나오는데 돼지 사료로 쓰려고 개구리를 잡으러 다니던 어린 시절이 생각났다. 개구리를 잡아서 땅에다 패대기를 치면 사지를 바르르 떨며 기지개를 켜듯이 쭉 뻗었다. 한 깡통 가득 잡아 우리에 넣어주면 돼지들이 오도독 오도독 씹어 먹었다. 그렇게 많은 개구리들을 죽이고서도 단 한 번도 거리낌이 없었다. 막대기를 만들어 더 많이 잡으려고 이리 저리 풀밭을 헤집고 다녔다. 어린마음 어디에 그런 냉혹함이 숨겨져 있었더란 말인가?
그건 당위(當爲)였다.
“돼지를 먹인다는 당위”
얼마나 일방적인 자기도취였던가! 당위가 일상이 되고 일상이 직분이 되면 그때부터 개구리의 생명은 생명이 아니라 사료일 뿐이었다. 잔인하다는 생각이 없으니 더 많은 사료를 얻기 위해서 경쟁적으로 논두렁길을 달리는 것이었다. 휘파람을 불고 깡통을 두드리며 장난삼아 개구리를 죽이는 것이었다. 아우슈비츠가 그러했고, 731 마루타 부대가 그러했고, 킬링필드가 그러했다. 아니 크고 작은 수많은 전쟁과 살인과 학살이 그러했다. 인간은 인간을 부리기 위해서 조직을 만들고 모두가 같은 행동을 하도록 당위(當爲)를 주입시킨다. 당위(當爲)가 힘을 가지면 이념이 된다. 이념은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을 적으로 몰아 증오하도록 만든다. 참으로 무서운 “틀”인 것이다. 삶은 살음이다. 살음은 살얼음 같고 늘 진행형이다. 누가 제 새끼를 키워서 날짐승들의 밥으로 주고 싶겠는가. 나의 삶은 너의 삶과 무관하지 않다. 내가 죽으면 너도 죽고 네가 살아나야 나도 살아난다. 모든 생명이 그러하다. 그게 “운명”이다. 살얼음 같은 생명을 보존하려면 서로가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무시하지 말아야 한다.
국화빵이 구워져 나오는 빵틀 앞에 쪼그리고 앉은 꾀죄죄한 아이의 모습이 보인다. 반들반들하게 윤기 나는 빵틀이 신기하여 배고픔도 잊어버린 동그란 눈이 보인다. 밀가루 반죽이 들어가면 맛있는 국화빵이 되어져 나오는 빵틀, 한 번에 수 십 개씩 같은 무늬의 빵이 구워져 나오는 빵틀. 빵보다 빵틀이 갖고 싶었던 아득한 옛날의 눈이 까만 그때 그 아이가 묻는다.
“ 그러면 틀을 깨자는 말씀입니까?”
“ 아니다 틀은 너를 보호하기도 하고 가두기도 한다. 틀을 운용하는 자, 그대의 마음이 좀 더 순리를 따르도록 매일매일 그 틀의 외연을 넓혀가라는 말이다.”
“틀”은 조금씩 자주 바꾸지 않으면 나중에는 전쟁이나 혁명이 아니고서는 바꾸지 못한다. 나의 몸을 그대의 떡으로 나의 피를 그대의 포도주로 나눠주는 것 말고는 세상 어디에도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계속 글을 쓰고 노래하는 이는 끊임없이 노래를 불러야 하는 것이다.
“틀에다 목을 매지 말라고!”
“틀은 언제든지 바꿀 수 있는, 언제든지 바꾸어도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우리가 지금 입고 있는 의복과 같은 것이라고!”
그는 누가 뭐래도 개구리를 가두고 있는 “틀”을 깨려고 제 가진 힘을 다한 전설의 왕으로 기록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