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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신춘문예 당선 시 분류 1.
금년도 신춘문예 당선 시들을 몇 가지 유형별로 나누어 봅니다.
무슨 시론상의 기준을 적용한 것은 아니고 내용이나 형태상 비슷한 것끼리 임의로 묶어본 것이지요.
신춘문예 당선 시들을 개관하는 것으로 최근 우리 시의 경향과 전망을 짐작해 보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1. 서사적 내용의 시들
리얼리즘 계열의 시라고 할까요, 전통 서정시의 범주에 드는 시들을 골라 보았습니다.
일반 독자들에게 친숙한, 삶의 이야기를 내용으로 하는 시들이지요.
즐거운 장례식 / 강지희
생전에 준비해둔 묫자리 속으로
편안히 눕는 작은 아버지
길게 사각으로 파 놓은 땅이
관의 네모서리를 앉혀줄 때
긴 잠이 잠시 덜컹거린다
관을 들어 올려
새소릴 보료처럼 깔고서야
비로소 제자리를 찾는 죽음
새벽이슬이 말갛게 씻어 놓은 흙들
그 사이로 들어가고 수의(壽衣) 위에
한 겹 더 나무그늘 옷을 걸치고
그 위에 햇살이불 끌어당겨 눕는 당신
이제 막 새 세상의 유쾌한 명찰을 달고
암(癌) 같은 건 하나도 안 무섭다며
둘러선 사람들 어깨를 토닥거린다
향 같은 생전이 다시 주검을 덮을 때
조카들의 두런대는 추억 사이로
국화꽃 향기 환하게 건너온다
- <문화일보>
( ....‘즐거운 장례식’ 또한 단순한 면이 없지 않다는 점이 지적됐으나 그러한 단점보다는 죽음을 보는 눈이 새롭다는 장점을 더 높이 샀다. 누구의 죽음이든 죽음은 슬프고 고통스럽다는 기존의 생각을 즐겁게 뒤집는 역설적 묘미가 공감대를 형성함으로써 나름대로 높은 시적 성취도를 이루고 있다. ...... 작은아버지의 죽음은 죽음에 대한 긍정성과 순응성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즐거움이자 기쁨의 축제다. - 황동규, 정호승 )
- 참 쉽게 읽히는 이 시를 신선하게 하는 것은, 하관 할 때 시신뿐만 아니라‘새소리’‘새벽이슬이 말갛게 씻어놓은 흙’‘나무 그늘 옷’ ‘햇살이불’을 함께 매장한다는 발상이지요. 망자가 오히려 산 사람들을 위로한다는 역설적 사고와 함께 죽음까지도 긍정적으로 수용하는 삶의 자세가 공감과 신뢰를 갖게 하는 것이지요. 죽음을 그저 어둡고 무겁고 슬프게만 바라보는 상투적인 인식으로는 선자들의 시선을 끌지 못했겠지요?
*
입춘 / 안성덕
골판지는 골판지대로 깡통은 깡통대로
끼리끼리 모여야 밥이 된다고
삼천변 요요(要要)자원* 파지 같은 생들이
마대자루에 빈 페트병 고봉으로 눌러 담는다
오락가락하던 진눈깨비가 물러간다
유모차에 생활정보지 걷어오는 할머니
치마꼬리 따라온 손주 볼이 발그레하다
어슬렁거리던 누렁이가 꼬리친다
쥐불 놓는 아이들의 함성 오종종 모여 있는 갈밭
풀린 연기 사이로 북녘을 가늠하는
오리떼 몸통이 통통하다
버들개지 은대궁도 제법 토실하다
모두 요요(夭夭)하니
풀려나간 요요(yoyo)가 제 목줄 감아올리듯
스르르 계절조차 되돌아온다
쥐불 놓은 갈밭에도 펜촉 같은 새순이 돋아
돌아올 개개비떼 노래 낱낱이 기록하겠다
코흘리개 맡겨놓고 감감 소식 없는 며느리도
한 소식 보내오겠다
* 전주 삼천변에 자원재활용센터 요요자원이 있다
- <전북일보>
*
( 당선작 '입춘'은 구조의 일관된 응집력과 나무랄 데 없는 언어표상, 그리고 선명한 주제와 함께 시의 내면을 가득 채운 따뜻한 훈김이 삶을 지탱하게 하는 역동성으로 작용하여 당선작 선택에 두 사람의 의견이 일치했다. ... 더할 수 없이 살기 힘든 현실의 가난과 외로움을 따뜻이 끌어안고 삶의 밑바닥을 뒤지면서도 절망하지 않는 이웃의 아름다움이 측은지심을 넘어 감동을 이끌어낸 수작이다.... 재활용품 수집이 생계수단인 할머니와 어린 손주, 이들 가족사의 진정성을 뒷받침해줄 끝 부분의 희망의 불씨 또한 시의 완성도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 이운룡 정양 )
- 이 시 역시 상식을 뒤집는 전복적 인식을 보여줍니다. 비록 더없이 궁핍하고 옹색한 삶이지만, 그 모습에서 삶의 온기와 희망의 불씨를 읽어내는 화자의 시선이 독자의 마음까지 녹여줍니다. 시의 감동이 어디서 오는지, 그리고 독자에게 감동을 주는 시를 선자(選者)도 외면하지 않는다는 걸 알게 합니다.
*
정글에서 온 풍경 / 유병만
베트남 며느리가 순산했다는 읍내 전화에
논두렁이 파랗게 깨어나고 있다
노인의 호흡이 불규칙해지고 완만하게 달라붙어 있던 들판이 뚝 떼어진다
잠시 주춤하던 족보의 한 갈래가 생기를 되찾고
상속되어져야 할 땅의 분량이 새로운 식량을 서두른다
그 압력을 견디지 못한 혼잣말이 논두렁을 가로지르던 바람에 베어 물리고
들녘 한 켠이 툭 닫힌 핸드폰 밖에서 곰곰이 쭈그려 앉는다
지난 시절은 불임의 푸르름이었다
지난날들은 불안한 가계였다
일찍 여문 씨알 몇 훑으려다가 부주의한 손가락이 주춤 열리고
갈길 바쁜 소나기가 허릴 낮게 구부려 담배내음 짙은 안쪽까지 적신다
문득, 월남전에서 아뿔싸
그 옛날 그 땅에 고엽제를 뿌렸던 기억을 하자
노인의 숨결이 노랗게 말라버린다
의족을 짚지 않으면 일어서지 못하는 기억들을 챙기려는 듯
낮게 기어 다니던 소나기가 더운 열기의 정수리 위로 떠밀리고
웅크려 있던 호흡을 힘껏 곧추세운다
며느리가 온 후
집안의 날씨가 더 따뜻해진 것도 태양을 혼수품으로 가져온 때문임을,
논두렁에 묻어 두었던 걱정을 가로질러 읍내로 빠르게 달려간다
- <경인일보>
*
( '정글에서 온 풍경'은 베트남 며느리가 순산했다는 전화에 "논두렁이 파랗게 깨어나고 있다"는 신선한 충격으로부터 시가 시작된다. 서사가 있는 이 시편의 주인공은 월남전에 참전했던 퇴역의 군인이며 농사를 짓는 노인이다. 노인에게 "지난 시절은 불임의 푸르름이었"으며 "지난 날은 불안한 가계였"다. 이제 며느리의 순산으로 "잠시 주춤했던 족보의 한 갈래가 생기를 되찾"았을 뿐 아니라 "집안의 날씨가 더 따뜻해진 것도" 며느리가 태양을 혼수감으로 가져온 때문이라고 안도하는 것이다...... 유병만은 삶의 곡진한 무게를 드러낸다. '정글에서 온 풍경'은 월남참전의 역사적 부채의식과 다문화가정으로 대변되는 인류애를 드러내면서 손자로 상징되는 생명과 노인으로 상징되는 죽음의 의미를 통해서 영속하는 생명력을 보여준다. 시는 기본적으로 리얼리티이다. 그러나 리얼리티만으로 시가 되지는 않는다. 상상력이라는 창조적 에너지가 필요한 것이다. 유병만의 작품은 이와 같은 시의 준거를 모두 확보하고 있다고 생각되어 심사위원 두 사람은 쉽게 '정글에서 온 풍경'을 당선작으로 뽑는데 합의했다. - 김윤배, ·홍신선 )
- 며느리가 순산했다는 사실이 결코 평범할 수 없는 역사와 시대적 배경을 갖는다는 것에 이 시의 무게가 실린다고 할까요. 역사의 상처가 봉합되고 아무는 기미를 읽을 수 있는 것도 이 시의 미덕입니다.
골목 안으로 열리는 봄날의 동화(童話) / 정원
봄은 아이들 시린 손끝에서 왔다
골목 안은,
어김없이 가위질 소리로 짤랑거리고
덩달아 온 세상 흰 밥풀꽃 가득한 뻥튀기 소리
와아, 골목 안 가득 풀려나오면
햇살처럼 환하게 웃음이 되는 아이들
달그락달그락 알사탕 같은 꿈들은 호주머니 속 숨겨둔
꽃망울처럼
시린 바람 끝에서도 붉었다
햇살에 투영되는 꽃무늬, 유리알 속엔
알록달록 봄을 틔우는 화원(花園)이 열리고
동네 골목골목 안은 그 화음에
구슬 같은 아이들의 눈빛으로 가득 채워지곤 했다
냄비, 헌 세숫대야, 그렇게 찌글찌글한 “찌글이” 아저씨는
아이들 입에서 동실동실 허연 엿가루의 봄날을 띄우고
봄바람에 갈라 터진 손등, 닳아빠진 소매 깃엔
이따금 춘삼월을 어루는 흰 조팝꽃 같은
이른 봄빛이 마구 피어오르곤 했다
골목 길,
아이들 하나 둘 길 위에 비워지고
전등불 스윽 노란 개나리꽃 한 다발 피워낼 즈음
봄날은 그렇게 장난기 많은 얼굴로
아이들의 긴 그림자 꼬리를 물고 서 있곤 했었다.
< 경상일보 >
- 추억의 골목이로군요. 요즘 젊은이들에겐 생소하겠지만 나이든 사람에게는 낯설지 않은 그림이지요. 뻥튀기 아저씨와 엿장수가 찾아오는 골목이, 지금 돌이켜 보니 한 편의 동화 속 같네요. 추억이란 오래된 필름 한 컷을 현실처럼 생생하게 인화해 놓은 시입니다.
2. 사회적 현실을 반영한 시들
세계적인 경제 불황의 여파로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 실직과 취업난이 이번 신춘문예 응모작에도 적잖이 반영된 것 같습니다.
삶의 기반을 송두리째 흔들리게 하는 실직의 문제에 대한 시적 대응을 살펴보는 의미로 당선 시들 중에서 실직과 구직, 노숙자를 소재로 한 시 몇 편을 묶어봅니다.
맆 피쉬 / 양 수 덕
땡볕더위에 잎맥만 남은 이파리 하나
지하도 계단 바닥에 누워 있던 청년은
양말까지 신고 노르스름한 병색이었다
젊음이 더 이상 수작 피우지 않아서 좋아? 싫어?
스스로 묻다가 무거운 짐 원없이 내려놓았다
맆 피쉬라는 물고기는 물 속 바위에 낙엽처럼 매달려 산다
콘크리트 계단에 몸을 붙인 청년의
물살을 떨다 만 지느러미
뢴트겐에서 춤추던 가시, 가물가물
동전 몇 개 등록상표처럼 찍혀 있는 손바닥과
염주 감은 손목의
그림자만이 화끈거린다
채 풀지 못한 과제 놓아버린 손아귀
청년이라는 이름만으로도 세상의 푸른 이마였던 그의
꿈이 요새에 갇혀서
해저로 달리는 환상열차
잎사귀인지 물고기인지를 한 땀 바느질한
지하도 계단으로 오르내리는 이들이
다리 하나 하늘에 걸칠 때
<경향신문>
( - 양수덕 씨는 다른 응모자들에 비해 개성 있는 언어를 활달하게 구사하고 있다. 언어에 개인적 표현이 많아 소통부재의 위험이 보이기도 하나, 당선작 ‘맆 피쉬’에서는 지하도의 걸인이라고 하는 익숙한 소재를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치밀한 묘사력과 참신한 비유로 대상을 섬세하게 구현해내었다. - 황지우, 최정례 )
- 실직의 문제를 극단적으로 드러낸 시라 하겠습니다. 직업이 없어 노숙자가 되어버린 청년이 지하도 계단 바닥에서 죽어가는 걸까요. 실로 충격적인 일이지만 그다지 낯선 장면은 아니지요. 그래서 그 모습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한 시적효과를 기대할 수 없을 것 같네요. 그래서 이 시에서는 ‘맆 피쉬’라는 은유적 등가물을 시적장치로 가져왔군요.
‘지하도 바닥에 누워있는 청년’에서 ‘잎맥만 남은 이파리’로, ‘물속 바위에 낙엽처럼 매달려 사는 맆 피쉬’로 연상이 이어진 것이지요. 이 시에서는 그 점을 충분히 살린 것 같지는 않지만, 맆 피쉬의 이미지가 극단적인 현실의 분위기를 돌연 바꾸어 놓는 역할을 한다는 것에 이 시의 묘미가 있다하겠습니다.
*
술빵 냄새의 시간 / 김 은 주
컹컹 우는 한낮의 햇빛,
달래며 실업수당 받으러 가는 길
을지로 한복판 장교빌딩은 높기만 하고
햇빛을 과식하며 방울나무 즐비한 방울나무,
추억은 방울방울 *
비오는 날과 흐린 날과 맑은 날 중에 어떤 걸 제일 좋아해? **
떼 지은 평일의 삼삼오오들이 피워 올린 하늘
비대한 구름떼
젖꽃판 같이 달아오른 맨홀 위를 미끄러지듯 건너
나는 보름 동안 아무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나도 후끈 달아오르고 싶었으나 바리케이드,
가로수는 세상에서 가장 인간적인 바리케이드
곧게 편 허리며 잎겨드랑이며 빈틈이 없어
부러 해 놓은 설치처럼 신비로운 군락을 이룬
이 한통속들아
한낮의 햇빛을 모조리 토해내는
비릿하고 능란한 술빵 냄새의 시간
끄억 끄억 배고플 때 나는 입 냄새를 닮은
술빵의 내부
부풀어 오른 공기 주머니 속에서 한잠 실컷 자고 일어나
배부르지 않을 만큼만 둥실,
떠오르고 싶어
*1991년에 발표된 일본 애니메이션 제목.
** '추억은 방울방울' 에 나오는 대사.
< 동아일보 >
( - 김은주의 작품은 심각한 현실에 정공법으로 대응하기보단 가볍게 우회해서 대응하는 여유와 다채로운 화법이 돋보였다. 비근한 현실에서 예기치 않은 놀라움을 끌어낼 줄 아는 이 응모자의 시는 친숙한 어조로 삶의 다양한 양태를 포착하고 있다. - 이시영, 남진우 )
- 이 시의 화자는 실직자가 되어 평일 한낮에 실업수당을 받으러 가고 있네요. 그가 처한 상황과 기분이 어떨지 대충 짐작이 가는데, 화자는 엉뚱하게 햇빛이며 구름, 가로수 따위를 들먹이고 있지요. 그러다가 문득, 자신이 지금 처해있는 이 시공이 ‘비릿하고 능란한 술빵 냄새의 시간’이라는 기상천외한 후각적 이미지를 떠올리게 되는군요. 도시의 거리가 ‘배고플 때 나는 입 냄새를 닮은 / 술빵의 내부’ 같다는 생각이 들자, ‘부풀어 오른 공기 주머니 속에서 한잠 실컷 자고 일어나 / 배부르지 않을 만큼만 둥실, / 떠오르고 싶어’진다는 것이지요. 이렇듯 현실에 대한 시적 대응이란 현실의 팍팍함을 완화하는 상상력을 동원하는 것이지요.
*
증명사진 / 김재준
창문 밖의 풍향계는 한사코 바람이 불어오는 쪽으로 머리를 곧추 세우며 떨고 있다 매서운 날들이 나를 후려왔듯이 바람의 거친 속도가 철봉 위에 다만 놓여있을 뿐인 저 화살을 어디론가 날아가게 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요동을 치며 제 자리에서 한없이 날고 있는 화살을 바라보며 멈춰 있는 것이 때로는 무서운 전진이라는 생각이 들어 이력서에 붙일 추운 얼굴에 밀랍 미소를 만드는 순간
팟, 빛의 칼날이 내려치는 2.5× 3㎝의 단두(斷頭)
나는 잠시 시력을 잃고 보이지 않는 하얀 피를 흩뿌린다
자, 한 번 더 찍습니다
내일을 증명할 수 있다면 수십 번이라도 즐거이 목을 늘여놓을 것이다 절박한 시윗줄에서 날카로운 화살 한 대가 내 몸을 뚫고 날아오르자 망치를 맞는 젊은 쇳소리가 길게 울린다
나는 지을 수 있는 가장 온화한 얼굴로 빛의 칼날을 받는다
< 광주일보 >
( - 김재준의 ‘증명사진’을 흔쾌히 당선작으로 골랐다. 풍향계를 다룬 기성시인의 어떤 이미지가 연상되기도 했지만 취업이라는 현대사회의 다소 무거운 고민을 예리한 관찰과 안정된 문장으로 매우 잘 포착하고 있다. 대상과의 거리 조절에 의한 비유가 적절하고, 구조도 완결미를 갖추고 있다. - 이문재, 안도현 )
- 절묘한 순간의 포착이라고 할까요. 아마도 구직 이력서에 붙일 증명사진을 찍으러 간 것 같은데, ‘팟’ 하고 후레쉬가 터지면서 카메라 셔터가 열렸다 닫히는 순간 “빛의 칼날이 내려치는‘ 단두(斷頭)를 떠올렸군요. 그 이미지 하나를 밀고나가는 것으로, 취업난 속에서 구직을 해야 하는 절박한 상황을 구구절절 늘어놓지 않고도 일거에 대변하는 것이지요. 상상력을 가동한 순간의 포착이 산문적 사실을 시적 정황으로 바꾸어 놓는 좋은 예라 하겠습니다.
*
난쟁이행성 134340에 대한 보고서 / 도미솔
명왕성이 태양계에서 퇴출됐다
수금지화목토천해명의 끝별 명왕성은
난쟁이행성 134340번이란
우주실업자 등록번호를 받았다
그때부터 다리를 절기 시작한 남편은
지구에서부터 점점 어두워져 갔다
명왕성은 남편의 별
그가 꿈꾸던 밤하늘의 유토피아
빛나지 않는 것은 더 이상 별이 될 수 없어
수평선 같았던 한쪽 어깨가 기울어
그의 하늘과 별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는 꿈을 간직한 소년에서 마법이 풀린
꿈이 없는 중년이 되어버렸다
명왕성은 폐기된 인공위성처럼 떠돌고
남편의 관절은 17도 기울어진 채 고장이 났다
상처에 얼음주머니 대고 자는 불편한 잠은
불규칙한 삶의 공전궤도를 만들었다
이제 누구도 남편을 별이라 부르지 않는다
알비스럼 낙센에프정 니소론정
식사 후 늘 먹어야하는 남편의 알약들이
그를 따라 도는 작은 행성으로 남았다
남편을 기다리며 밝히는 가족의 불빛과
아랫목에 묻어둔 따뜻한 밥 한 그릇이
그의 태양계였으니, 늙은 아버지와
아내와 아들딸을 빛 밝은 곳에 앞세우고
그는 태양계에서 가장 먼 끝 추운 곳에서
밀려나지 않기 위해 노예처럼 일했을 뿐이다
절룩거리고 욱신거리는 관절로
남편은 점점 작아지며 낮아지기 시작했다
그도 난쟁이별로 변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가 돌아오는 길이 점점 멀어진다
그가 돌아오는 시간이 점점 길어진다
그 길을 작아진 그림자만이 따라오는데
남편은 그 그림자에 숨어 보이지 않는다
지구의 한 해가 명왕성에서는 248년
그 시간을 광속에 실어 보내고 나면
남편은 다시 별의 이름으로 돌아올 것이다
명왕성과 함께 돌아올 것이다
< 국제신문 >
( - '난쟁이행성 134340에 대한 보고서'는 시가 갖는 힘과 긴 시를 흔들리지 않고 장중하게 끌고 가는 저력이 돋보이는 시였습니다....... 명왕성이 태양계에서 퇴출된 것과 우리 사회의 구조조정이란 문제를 서정적인 문체로 제시하며 '희망'이란 메시지를 선물하고 있는 '난쟁이행성 134340에 대한 보고서'를 만장일치로 당선작으로 결정했습니다. - 천양희, 정일근, 문태준 )
- 실직상태의 남편과 태양계 행성에서 퇴출된 명왕성의 은유적 병치가 서사적 내용에 시적 부력을 갖게 합니다. 그런 장치가 없이 남편의 사정만을 나열해서는 시적효과를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지요. 명왕성이란 은유적 상관물을 대입함으로서 평면적 서술이 되기 쉬운 서사적 내용을 입체적인, 다양하고 웅숭깊은 시적 구성이 된 것이지요.
3. 사물과 자연현상을 성찰한 시들
옹색하게 분류를 한 것이지만, 예리한 관찰력과 직관적 상상력으로 사물이나 자연현상에서 시적 의미를 발견해낸 시들을 골라 봅니다. 객관적 묘사를 위주로 한 시들이 아니라, 화자가 개입해서 주관적 시각이나 사유를 드러내는 특징이 있습니다.
저녁의 황사 / 정영효
이 모래먼지는 타클라마칸의 깊은 내지에서 흘러왔을 것이다
황사가 자욱하게 내린 골목을 걷다 느낀 사막의 질감
나는 가파른 사구를 오른 낙타의 고단한 입술과
구름의 부피를 재는 순례자의 눈빛을 생각한다
사막에서 바깥은 오로지 인간의 내면뿐이다
지평선이 하늘과 맞닿은 경계로 방향을 다스리며
죽은 이의 영혼도 보내지 않는다는 타클라마칸
순례란 길을 찾는 것이 아니라 길을 잃는 것이므로
끝을 떠올리는 그들에게는 배경마저 짐이 되었으리라
순간, 잠들어가는 육신을 더듬으며
연기처럼 일어섰을 먼지들은
초원이 펼쳐져 있는 그들의 꿈에 제(祭)를 올리고 이곳으로 왔나
피부에 적막하게 닿는 황사는
사막의 영혼이 타고 남은 재인지
태양이 지나간 하늘에 무덤처럼 달이 떠오르고 있다
어스름에 부식하는 지붕을 쓰고 잠든 내 창에도
그들의 꿈이 뿌려졌을 텐데
집으로 들어서는 골목에서 늘
나는 앞을 쫓지만 뒤를 버리지 못했다
멀리 낙타의 종소리가 들리고
황사를 입은 저녁이 내게는 무겁다
<서울신문>
( -‘저녁의 황사’는 사막으로부터 발 딛고 있는 현실로 상상력을 끌어오는 상상력이 자연스러웠으며 ‘사막에서 바깥은 오로지 인간의 내면뿐이다’나 ‘연기처럼 일어섰을 먼지들’과 같은 구절들을 통해 자신의 표현 능력을 보여주었다. 다른 응모작 ‘마방’이나 ‘바람과의 여행’이 영상물을 통한 간접 체험을 다룬 것이라면 ‘저녁의 황사’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에서의 이야기를 유려하게 형상화했다는 점에 우리들은 주목하였다. - 황동규· 최동호 )
- 황사가 타클라마칸에서 왔을 거라는 설정을 하고, 타클라마칸 사막에 대한 사전지식을 근거로 상상력을 펼쳐 보이는 시입니다. 사막을 대표하는 이미지로 낙타와 순례자를 떠올리고, 사막을 건너가다 죽은 순례자들의 육신과 영혼까지 황사에 섞여있을 거라는 상상을 해 본 것이지요. ‘사막에서 바깥은 오로지 인간의 내면뿐이다’ ‘순례란 길을 찾는 것이 아니라 길을 잃는 것’과 같은 수일한 성찰에 이르기까지는 상당한 내공을 필요로 하겠지요?
*
오늘은 달이 다 닳고 / 민구
나무 그늘에도 뼈가 있다
그늘에 셀 수 없이 많은 구멍이 나있다 바람만 불어도 쉽게 벌어지는 구멍을 피해 앉아본다
수족이 시린 저 앞산 느티나무의 머리를 감기는 건 오랫동안 곤줄박이의 몫이었다
곤줄박이는 나무의 가는 모근을 모아서 집을 짓는다
눈이 선한 저 새들에게도 바람을 가르는 날카로운 연장이 있다 얼마 전 죽은 곤줄박이에
떼 지어 모인 개미들이 그것을 수거해가는 걸 본 적이 있다
일과를 마친 새들은 둥지로 돌아와서 달이 떠오를 무렵 다시 하늘로 솟구치는데,
이때 달은 비누다
뿌리가 단단히 박혀서 번뇌만으로는 달에 못 미치는 나무의 머리통을 곤줄박이가 대신,
벅벅 긁어주는지, 나무 아래 하얀 달 거품이 흥건하다
오늘은 달이 다 닳고 잡히는 족족 손에서 빠져나가 저만치 걸렸나
우물에 가서 밤새 몸을 불리는 달을 봐라
여간 해서 불어나지 않는 욕망의 칼,
부릅뜨고 나를 노린다
<조선일보>
( - 민씨의 작품들은 시가 일상언어 사용의 중력으로부터 벗어나서 시 아닌 것들과 스스로를 변별케 하는, 고유한 층위를 갖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 층위란 산문의 평지에서 좀 떠 있는 부력, 흔히들 말하는 시적 상상력에 의해 '새롭게 발견된' 영역을 지칭하는 것인데, 민씨에게는 그러한 발견이 있다는 말이다. 이를테면 "새들은 (…) 달이 떠오를 무렵 다시 (…) 솟구치는데, / 이때 달은 비누다"라든가, 그의 다른 시 〈배가 산으로 간다〉에서의 "물속에 매달아 놓은 조등" 같은 대목은 범상치 않은 발견이다. 그것이 있을 때 시가 스스로 뜬다. 이런 좋은 부력이 있음에도 그것을 방해하는 좋지 않은 버릇이 민씨에게도 있다. 다분히 서술적인 말투라든가, 시라고 하는 대단히 인색한 지면에서 동어반복하면서 낱말들을 낭비하는 것, 시적 상념이 더 깊은 데로 들어가지 못하고 제자리걸음하고 있는 것 등등이다. 이런 악습은 대부분의 응모작들에게 더 해당된다 하겠다. 특히 근래 판타지에의 경향성 속에서 스스로도 감당 못할, 실패한 은유들의 범람은 참 견디기 힘들다. - 문정희, 황지우 )
- 달밤에 나무 그늘에 앉아 나뭇잎 사이로 달빛이 비쳐드는 걸 보면서 상상의 날개를 펼치는데, 달과 느티나무와 곤줄박이가 어우러져 빚어내는 몽환적인 분위기가 선자의 말처럼 독자로 하여금 ‘새로운 영역’을 경험하게 합니다.
*
비 온 뒤 / 구민숙
빨랫줄에 매달린 빗방울들
열일곱 가슴처럼 탱탱하다
또르르! 굴러
자기네들끼리 몸 섞으며 노는
싱싱하고 탐스런 가슴이 일렬횡대, 환하니 눈부시다
그것 훔쳐보려 숫총각 강낭콩 줄기는 목이 한 뼘 반이나 늘어나고
처마 밑에 들여 놓은 자전거 바퀴는 달리지 않아도 신이 났다
빗방울의 허물어지지 않은 둥근 선 안에는
주저앉지 않은 꿈들이
명랑한 송사리 떼처럼 오글거리고
서른여섯 나는, 물컹해진 나의 그것과 비교하며
녀석들을 살짝 만져보고도 싶다
그래, 내게도 저런 가슴이 있었지
열일곱, 연분홍 유두가 장식처럼 화사하던,
주눅 들지 않은 노래로 충전되어
금방이라도 둥실 날아오를 수도 있을 것만 같던
나는 바구니에 담아 내 온
일곱 살 아이의 반바지와 말 안 듣길 소문 난 신랑의 양말과
목욕 수건들과 75 A컵 내 분홍 브래지어를 널지 못한다.
<대전일보>
<비 온 뒤>는 우선 깨끗하게 정돈된 작품이며 메시지가 분명하고 시적 논리가 합당하다는 점에서 앞의 작품들의 결점을 충분히 뛰어넘고도 남는 작품이었다. “빨랫줄에 매달린 빗방울들 / 열일곱 가슴처럼 탱탱하다 / 또르르! 굴러 / 자기네들끼리 몸 섞으며 노는 / 싱싱하고 탐스런 가슴이 일렬횡대, 환하니 눈부시다”라는 첫 부분의 표현들에서 보듯 이 시는 어느 날 우연히 목격된 ‘빗방울들’에서 시적 사념을 출발시켜 그것을 약동하는 언어의 충전으로 끌고 나가다가 마침내 그것을 ‘시로써’ 터트릴 줄 아는 기량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선자들의 이목을 집중시켰으며, 괜스리 어렵거나 추상적이거나 한 표현 한 구절 없이 자기 소리를 하나의 작품 안에 오롯이 담아낼 줄 아는 그 시적 절제 또한 믿음직스러웠다. 한마디로 싱싱하고 단정하며 마지막 연에서 보듯 장난기 어린 웃음이 배시시 행간 밖으로 삐어져나올 듯한 작품이다. 선자들은 이 작품을 당선작으로 밀면서 그의 감각이, 그의 언어가 사념과 철학을 동반하며서, 오늘의 유행에 주눅들지 않으면서 더욱 깊은 세계로 이어지기를 바란다. (오세영, 이시영)
- 비 온 뒤 빨랫줄에 매달린 빗방울이 열일곱 살 소녀의 젖가슴처럼 탱탱하다는 것인데, 그 때문에 강낭콩 줄기가 목을 길게 늘이고 자전거 바퀴까지 신이 났다는군요. 그 빗방울 안에는 ‘주저앉지 않은 꿈들이 / 명랑한 송사리 떼처럼 오글거리고’있어서 ‘서른여섯의’ ‘물컹해진’ 젖가슴을 가진 나는 ‘일곱 살 아이의 반바지와 말 안 듣길 소문 난 신랑의 양말과 / 목욕 수건들과 75 A컵 내 분홍 브래지어를 널지 못한다’는 것. 비유가 좀 유치하다 싶기도 한데, 선자들은 그것을 오히려 풋풋한 이미지로 본 것 같네요.
*
내압 / 이병승
한여름 땡볕에 달궈진 옥상 바닥
시원한 물을 뿌려주려고
잠가 둔 수도꼭지를 틀었더니
거침없이 몸을 흔드는 고무호스
긴 잠에서 깨어난 뱀처럼
시뻘건 각혈과 마른기침이 노래로 변하고
늘어졌던 마음의 통로에 생수의 강이 콸콸 흐른다
사방에 뿌려대는 열정의 땀방울들
더 이상 짓눌린 눈물이 아니다
무지개를 띄워라 거침없이 신나는 춤사위
꼼짝 말라고 두 발로 밟아보지만
그럴수록 더욱 딴딴해지는 오기의 몸짓
그 정도 힘으론 날 못 누르지
흐물흐물 늘어진 생은 끝났다는 저 팽창의 힘
자기를 채워 흘러넘치는 나눔의 통로
채워라, 터질 듯이 채워라
내압이 강하면 강할수록 외려 솟구쳐
신명나게 춤추는 고무호스
건너 집 옥상 화단, 벽에 매달린 넝쿨까지 살리고
스스로 뜨거워 목마른 해도 적신다.
<경남신문>
( -‘내압’은 우선 생의 의미와 사물의 본질에 대한 탐색이 상당한 깊이를 가지고 있고, 이것이 또 당시대적 삶의 의미로 환기되도록 하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 시적 표현과 구성 면에서 상당한 수련을 느끼게 하는 완성도를 보여주고 있는 점이 심사위원들의 호평을 이끌어내게 하였다. - 신달자, ·김경복 )
- 수도꼭지에 연결된 호수에서 물줄기가 뿜어져 나오는 이미지는 낯선 것이 아닌데, ‘내압’즉 내적인 힘의 분출에 초점을 맞추어 역동적이고 호쾌한 이미지로 형상화 한 것이 생명력의 분출에까지 가 닿습니다.
*
기와 이야기 / 이영순
육차선 도로가 생기고
청과물 도매시장이 부쩍 몸피를 키워
산 밑의 각화동 마을은 몸을 더 엎드린다
예쁜 눈썹으로 웃는 기와는
알고 보면 지나온 이야기가 무거워
한평생 돌아눕지도 못한 거였다
아팠던, 그리고 달던 들숨과 날숨의 흔적에
풀꽃을 피우며 결리는 어깨뼈를 겯고
너나들이를 한다
그러다 문득
세월은 생각을 돌려놓는 큰손이라며
기와는 가끔씩 스스로를 돌아본다
된장 꽃으로 핀 푸른곰팡이도 밉지만은 않은 객
선선히 걷어내면 풋고추가 달다는 어머니는
먼데 소식에 귀를 세우는 능소화
하늘을 능멸하고 조소하는 그것을 왜 심으셨나
기와는 말없이 다 알고 있다
어머니의 젊음, 비릿한 날개를 단
붉은 꽃잎이 기와의 머릿속에 별처럼 누벼질 때
어머니는 오이냉국에 찬 밥 한 그릇의
밥상을 받기 위해 칠십 평생 달려온
밭고랑을 또 달린다
모서리가 닳아서 어머니 같은 기와 속엔
시간의 붉은 피가 이야기로 갇혀 있다
<전남일보>
- 이명순의 '기와 이야기'는 우리 일상 주위에서 찾을 수 있는 평범한 삶의 풍경을 노래한 것이다. 따스한 힘이 핏줄로 스며드는 우직한 느낌이 있다. ... 우직하게 다가오는 따뜻한 삶의 꿈을 선자가 새로움으로 해석한 결과... - 곽재구 (시인ㆍ순천대 교수)
- 청과물 시장의 확장에 눌려 산 밑에 납작 엎드린 ‘각화동 마을’의 기와지붕이 화자의눈길을 끌었군요. 그 오래된 ‘기와’에서 화자는 ‘어머니’를 봅니다. 능소화가 피어있는 오래 된 기와집에 칠십 평생 밭고랑을 달려온 어머니가 있지요. 이미지들의 조합에 그리 능숙하지는 않은 것 같은데, 그 서툰 것을 ‘우직함’으로 보는 것은 선자들의 재량이겠지요.
4. 사물을 의인화한 상상력의 시들
나무와 꽃, 새, 집 등 사물을 의인화(擬人化)해서 동화적이거나 우화적인 세계를 펼쳐 보이는 것으로 인간 현실의 일면을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시들을 묶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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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게 세 줍니다 / 유금옥
나뭇가지에 빈 가게 하나 있었어요 참새 두 마리가 날아와 화원을 차렸죠 (햇살 꽃방) 정말 그날부터 햇빛들이 자전거 페달을 쌩쌩 밟았다니까요
가게에 봄이 한창일 때는 산들바람도 아르바이트를 했죠 사랑에 빠진 벌 나비가 주 고객 이였는데요 창업에 성공한 사례였어요
참새들은 날개 달린 유니폼을 입고 있었고요 가위로 꽃대를 자르다 서로 눈이 부딪치면 재재거리며 웃었어요 앗! 그때 여름이 오토바이를 타고 지나갔어요
가을이 이삿짐 트럭을 타고 지나간 다음 날 나는 보았죠 양은냄비 브래지어 구두 숟가락들이 낙엽이 되다니 아스팔트 바닥에 나 뒹굴다니
비 내리던 가을 밤 무슨 일이 있었나요? 꽃방은 다시 문을 닫았어요 가랑잎 한 장만한 쪽지를 붙여 놓았지만 겨울 내내 가게는 나가질 않았어요 가게 세 줍니다 (연락처; 살구나무)
- < 불교신문 >
( - ‘가게 세 줍니다’는 스케일이 크거나 문제성을 지닌 작품은 아니다. 그러나 평범 속에서 진리를, 일상 속에서 깨달음을 발견한 시적 통찰이 돋보였다. 그리고 그것을 미학적 차원에서 신선하게 형상화시킬 수 있는 언어적 감수성도 탁월하였다. 자연과 하나 된 인생의 참 모습이 나무의 사계절을 통해 잘 표현되어 있다. 모든 훌륭한 시는 쉽게 읽히면서도 감동을 주는 법이다. 굳이 어렵게 쓸 필요가 없다. 당선작은 이 같은 시의 원리를 잘 터득한 듯하다. - 오세영 )
- 한 편의 동화 같네요. 주인공은 참새 부부이고 사람은 보이지 않네요. 사람이 등장하지 않지만 결국 사람 사는 이야기지요. 사람 사는 이야기를 이렇게 자연물을 캐릭터로 연출을 하니 한결 분위기가 싱그럽네요. 그래서 상상력이 필요한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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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의 공양 / 이경례
졸참나무가 제 몸통을 의탁해왔네
지난 태풍에 겨우 건진 살림살이지만
기와 불사를 생각하며 제 몸 선뜻 내 놓았다네
오래도록 산문의 입구를 지켜 온 졸참나무와
딱따구리, 한참을 골몰한 붉고 노란 머릴 조아리며
하피첩서(霞帖書)를 떠올리다, 마침내
졸참나무, 거친 한 생의 피륙에다
제가 살아온 산야의 사적비를 짜기로 했네
구족(口足) 화가가
붓을 입에 물고 넝쿨처럼 뻗어 오르는
푸른 영혼을 펼쳐내듯
한 땀 한 땀이 딱따구리 혼신의 필사
졸참나무 나이테에 누가 바늘을 올렸나
아득한 시간의 엘피판에서 흘러나오는
여든 아홉 암자의 일천성인 득도의 날들과
어느 날 산사의 소신공양(燒身供養)
졸참나무의 한 생이 받드는 허공 속으로
무거운 산 울대 오래 공명하는 딱따구리의 필력
노을치마인 듯 소슬히
산야가 제 온 몸 펼쳐 품안에 보듬는 저녁이라네
- < 영남일보 >
( - '나무의 공양'은 오래 묵힌 소재를 활달하고 투명한 상상력으로 맑은 샘물처럼 산뜻하게 변주한 작품이다. 대상을 새롭게 부조하여 오롯이 완결된 한편의 서정으로 빚어내고 있어서 이 응모자의 숙련된 공력을 느끼게 한다. 시가 직선도 곡선도 아닌 얼개를 갖고 있다는 것을 어느 정도 깨우친 결과이리라. - 이하석, 김명인 )
- 오래도록 산문을 지켜온 졸참나무가 몸을 내놓자, 딱따구리가 그것으로 제가 살아온 산야(山野)의 사적비를 ‘짜기로’했다는 것. 구족화가처럼 혼신으로 ‘필사(筆寫)’를 한다는 것인데, 졸참나무 나이테에는 ‘여든 아홉 암자의 일천성인 득도의 날들과 / 어느 날 산사의 소신공양(燒身供養)’의 내력도 들어있다는 것. 졸참나무 몸통을 쪼는 딱따구리 소리가 이 시의 모티브인 것 같은데 상상력의 스케일이 인간과 자연을 아우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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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쟁이 넝쿨 / 조원
두 손이 바들거려요 그렇다고 허공을 잡을 수 없잖아요
누치를 끌어올리는 그물처럼 우리도 서로를 엮어 보아요
뼈가 없는 것들은 무엇이든 잡아야 일어선다는데
사흘 밤낮 찬바람에 찧어낸 풀실로 맨 몸을 친친 감아요
그나마 담벼락이, 그나마 나무가, 그나마 바위가, 그나마 꽃이
그나마 비빌 언덕이니 얼마나 좋아요 당신과 내가 맞잡은 풀실이
나무의 움막을 짜고 벽의 이불을 짜고 꽃의 치마를 짜다
먼저랄 것 없이 바늘 코를 놓을 수도 있겠지요
올실 풀려나간 구멍으로 쫓아 들던 날실이 숯덩이만한 매듭을 짓거나
이리저리 흔들리며 벌레 먹힌 이력을 서로에게 남기거나
바람이 먼지를 엎질러 숭숭 뜯기고 얼룩지기도 하겠지만
그래요, 혼자서는 팽팽할 수 없어 엉켜 사는 거예요
찢긴 구멍으로 달빛이 빠져나가도 우리 신경 쓰지 말아요
반듯하게 깎아놓은 계단도, 숨 고를 의자도 없는
매일 한 타래씩 올을 풀어 벽을 타고 오르는 일이
쉽지만은 않겠지요 오르다 보면 담벼락 어딘가에
평지 하나 있을지 모르잖아요. 혹여, 허공을 붙잡고 사는
마법이 생길지 누가 알겠어요
따박따박 날갯짓하는 나비 한 마리 등에 앉았네요
자, 손을 잡고 조심조심 올라가요
한참을 휘감다 돌아설 그때도 곁에 있을 당신.
- < 부산일보 >
( - 당선작 '담쟁이 넝쿨'은 담쟁이 넝쿨이라는 시적 대상에다 건강하고 격조 높은 사
랑의 고백을 매우 탁월한 기법을 이용해 얹어놓았다. 이 시가 발산하는 그윽한 울림을 우리 모두의 것으로 받아들여도 좋을 것이다. - 김종해, 강은교, 안도현 )
- 담쟁이는 시나 사진의 소재로 많이 쓰이지요. 초상권이나 저작권(?) 시비에 말릴 염려가 없으니 얼마든지 이용해도 무방하겠지요. 하지만 남들이 자주 쓰는 소재일수록 개성적인 시각과 표현이 필수지요. 이 시에서는 담쟁이 넝쿨이 담벼락, 나무, 바위를 뒤덮는 것을 베를 짜는 것으로 보았네요. 그리고 슬쩍 ‘당신과 나’를 대입시켜 은유적 장치를 해 놓았고요. 시의 본문에는 ‘담쟁이 넝쿨’은 등장하지 않고 ‘당신과 내’가 대신한 것이지요. 제목의 ‘담쟁이 넝쿨’과 본문의 ‘우리들(너와 내)’은 그러니까 은유적 관계인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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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롱나무꽃 / 정성수
오백 살 배롱나무가 선국사 앞마당에
가부좌를 틀고 있다.
염화시중의 미소를 띠고서
여름밤 폭죽처럼 피워 낸
저 붉은 꽃들.
깡마른 탁발승이 설법을 뿜어내는지
인연의 끈을 놓는 아픔이었는지
이승에서 속절없이 사리(舍利)들을 토해내고 있다.
배롱나무꽃
붉은 배롱꽃은 열꽃이다.
온 몸으로 뜨겁게 펄펄 끓다가 떨어진 꽃잎 자국은
헛발자국이다.
피기는 어려워도 지는 것은 금방인 꽃들은
저마다 열병을 앓다가 진다
저물어가는 여름 끝자락에
신열을 앓다가 가는 사람이 있다.
배롱꽃처럼 황홀하게
무욕의 알몸으로 저 화엄 세상을 향해서
쉬엄쉬엄
* 선국사 : 전북 남원시 교룡 산성 내에 있는 사찰.
- < 전북도민일보 >
( - 정성수의 ‘배롱나무꽃’을 당선작으로 내어밀기로 하였다. 요설적 산문적인 시행 처리보다도 응축적인 시의 결정과 그 여운을 사기로 한 것이다. - 최승범 )
- 배롱나무와 탁발승, 붉은 배롱꽃과 열꽃, 떨어진 꽃잎과 헛발자국의 비유가 어딘가 겉도는 느낌이어서 그다지 웅숭깊은 맛을 우려내지는 못하는 것 같네요.
*
오래된 잠 / 이민화
다섯 송이의 메꽃이 피었다.
아버지의 부재를 알리는 검은 적막을 깨고,
돌담을 딛고 야금야금 기어올라
초가지붕 위에 흘림체로 풀어놓는다.
무게를 견디지 못한 바람벽이
움찔 다리를 절면,
마당가에 선 감나무도 키를 낮춘다.
아버지의 귀가에서 나던 솔가지 타는 냄새
너덜너덜해진 문틈으로 새어나오고,
가쁜 숨을 몰아쉬던 수도꼭지
끄윽끄윽 울음을 뱉어낸다.
산 그림자 마당으로 내려서면,
거미줄에 걸린 붉은 노을
점점 시력을 잃어가고,
먼지 쌓인 잠을 쓱쓱 문질러 닦아내면
아버지의 오래된 시간이 푸석한 얼굴로 깨어난다.
늙은 집이 메꽃을 피우고 있다.
- < 한라일보 >
( - 당선작으로 '오래된 잠'을 뽑기로 했다. 시의 구조가 견고하지 못한 점도 없지 않지만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하는데 아기자기한 사물들의 이미지를 통해 절제된 감정을 언어로 수채화 그리듯이 잘 그려내었다. 시간 구조도 과거를 현재로 잘 풀어냈다. 아버지가 살았던 집이 폐가인 데도 '낡은 집'이 아니고 '늙은 집'으로 의인화시키는 놀라운 표현을 간단히 해내고 있다. - 문충성 )
- 아버지가 ‘부재’한 ‘늙은’ 초가집에 메꽃이 피었네요. 아버지가 살던 그 초가집은 아버지의 삶의 외피라고 할까요. 아니 그 초가집이 화자에게는 ‘오래된 잠’에 빠져있는 아버지라고 할 수 있겠네요. 그래서 그 ‘늙은’ 집이 피운 ‘다섯 송이 메꽃’은 집 떠난 다섯 자식을 향한 애틋한 부정(父情)이 아닐까요?
5. 그 밖의 시들
금년도 신춘문예 당선 시들을 몇 가지 유형으로 분류하고 남은 시들입니다. 또 하나의 유형으로 묶을 수도 있겠지만 동질성이 적은 시도 있고 해서 그냥 예외로 합니다. 일반적인 유형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새롭고 패기가 있다는 것일 수도 있고, 시로서의 함량을 가진 것인가 의구심을 갖게 할 수도 있지요. 아무튼 당선이 되기까지 선자들의 기호와 관점이 작용했으리라는 짐작을 하게 됩니다.
구름모자를 빼앗아 쓰다 / 최정아
한 떼의 구름이 내게로 왔다. 한쪽 끝을 잡아당기자 수백 개의 모자들이 쏟아졌다.
백 년 전에 죽은 할아버지의 모자도 나왔다. 그 속에서 꽹과리 소리와 피리 소리도 났다.
할아버지는 끝이 뾰족한 모자를 쓰고 어깨 흔들며 춤을 추고 있었다.
할아버지의 아버지는 삼십년 전에 죽은 아버지의 모자를 긴 손에 들고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나는 그 모자 속에서 망사 모자를 집어 들었다.
망사 모자를 쓰자 세상도 온통 모자로 가득했다.
빌딩이 모자를 쓰고 있었고,
꽃들은 모자를 벗겨달라고 고개를 흔들고 있었고,
새떼들은 모자를 물고 날아갔다.
수세기에 걸쳐 죽은 친척들도 줄줄이 모자를 쓰고 따라오는 것이 보였다.
사람들은 소리를 지르고 할아버지는 꽹과리를 치고 새들은 노래를 부르고 나는 그들을 데리고 바다로 간다.
둥둥둥 북을 친다.
풍랑에 빠져죽은 영혼들이 줄지어 걸어 나온다.
파도에게 모자를 던져준다.
모자를 쓴 파도가 아버지처럼 걸어온다.
갈지자로 걸으며 손을 흔든다.
친척들은 환하게 웃으며 춤을 춘다.
아버지가 두루마기를 입고 넘어진다.
그러나 아버지는 영영 일어서지 못한다.
아버지 모자를 다시 구름이 빼앗아간다.
- < 매일신문 >
(- 시가 삶이나 자연의 단순한 재현이 아니라 그것을 새로운 시각으로 재창조하는 과정이라면 그 과정에는 날카로운 인식과 상상력이 요구된다.......최정아의 이 작품은 활달한 상상력에서 터져 나오는 내면세계가 제의적(祭儀的)으로 살을 채워나가면서도 상당한 예술적인 즐거움과 깊이를 주어, 당선작으로 선정하는 데는 긴 논의가 필요 없었다. - 박재열, 안도현 )
- 쉽고 간결한 문장이어서 술술 잘 읽히는 시입니다. 그런데 현실세계의 이야기는 아니군요. 상상의 세계라기보다 꿈이나 몽상에 가깝다고 할까요. 이야기의 줄거리는 분명한데 개연성이나 인과적 논리성이 없기 때문이지요. 독자로서는 당연히 화자가 ‘왜 이런 얘기를 하는 걸까?’ 라는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겠네요. 이 시를 분석하기 위해서는 ‘모자’가 그 열쇠가 될 것 같은데, 그러나 먼저 그‘모자’를 열 열쇠는 어디에도 없네요. 퍼즐게임 같은 걸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그 자리에 이것저것 가져다 맞춰보겠지만, 괜한 짓이라고 아예 던져버릴 사람도 있겠네요. 그도 저도 아니면, 심사위원의 심사평에서나 한 수 배울 수밖에요.
*
무럭무럭 구덩이 / 이우성
이곳은 내가 파 놓은 구덩이입니다
너 또 방 안에 무슨 짓이니
저녁밥을 먹다 말고 엄마가 꾸짖으러 옵니다
구덩이에 발이 걸려 넘어집니다
숟가락이 구덩이 옆에 꽂힙니다.
잘 뒤집으면 모자가 되겠습니다
오랜만에 집에 온 형이
내가 한 눈 파는 사이 구덩이를 들고 나갑니다
달리며 떨어지는 잎사귀를 구덩이에 담습니다
숟가락을 뽑아 들고 퍼 먹습니다
잘 마른 잎들이라 숟가락이 필요 없습니다
형은 벌써 싫증을 내고 구덩이를 던집니다
아버지가 설거지를 하러 옵니다
반짝반짝 구덩이
외출하기 위해 나는 부엌으로 갑니다
중력과 월요일의 외투가 걱정입니다
그릇 사이에서 구덩이를 꺼내 머리에 씁니다
나는 쏙 들어갑니다
강아지 눈에는 내가 안 보일 수도 있습니다
친구에게 전화가 옵니다
학교에서 나를 본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나는 구덩이를 다시 땅에 묻습니다
저 구덩이가 빨리 자라야 새들이 집을 지을 텐데
엄마는 숟가락이 없어져서 큰일이라고 한숨을 쉽니다
< 한국일보 >
( - 최근 수년 동안 신춘문예나 문예지 응모에서는 젊은 시인들을 중심으로 전개된 포스트모던하고 전위적인 실험시를 흉내 내는 시들이 많았다.
실험정신과 발랄한 어법을 특징적으로 보여주는 젊은 시가 문단에 활력을 준 것은 긍정적이지만, 삶의 현장과 역동적으로 맞물리지 못하고 헛바퀴를 돌리는 듯한 아쉬움을 준 것도 사실이다. .....이우성의 시는 감각과 상상력이 희귀하고 개성적이며 생기있고 활력이 있다. 목소리도 힘있고 거침없고 속도감과 리듬감이 있어 신인다운 신선함이 돋보였다. - 신경림, 김사인, 김기택 )
- 이 시에서는 ‘구덩이’가 열쇠로군요. 그런데 그 열쇠만으로는 쉽게 시의 내부로 들어갈 수가 없을 것 같네요. 화자가 제시하는 길(문맥)이 토막토막 끊어져 있기 때문이지요. 시와 독자 사이에도 넘지 못할 구덩이가 있다고 할 수밖에요. 문제가 어려우니 해답부터 볼까요. ‘감각과 상상력이 희귀하고 개성적이며 생기있고 활력이 있다. 목소리도 힘있고 거침없고 속도감과 리듬감이 있어 신인다운 신선함이 돋보였다’가 정답이라는군요, 그러나 ‘그래서 어쨌다는 거냐?’는 의문은 여전히 남네요. 그래서 ‘실험정신과 발랄한 어법을 특징적으로 보여주는 젊은 시가 문단에 활력을 준 것은 긍정적이지만, 삶의 현장과 역동적으로 맞물리지 못하고 헛바퀴를 돌리는 듯한 아쉬움을 준 것도 사실이다’는 평자의 말을 되돌려주고 싶네요.
*
아르정탱 안을 습관적으로 엿보다 / 윤은희
1
골목의 연탄 냄새 부풀어 전생의 어스름 빛으로 울적한 저녁
길바닥의 검푸른 이끼들 엄지손톱 半의 半 크기 달빛에 물들었다
아르정탱(Argentan) * 에 맨발로 들어가 자주 꾸는 꿈 벗어두고 나왔다
2
예전에 방앗간이었다는 전설 알고 있다
아,르,정,탱, 하고 불러보는데 안쪽 벽 타고 ‘돌돌돌’ 물소리 흘러내린다
남자들의 이야기 소리, 쉼 없는 흐름에 세월 함께 묻혀졌다
무대 뒤쪽 갤러리 프리다 칼로는 디에고 리베라의 The Flower Vendor를
힐끔, 끌어당기고 있었다
사계절의 호흡이 울다가 지쳤나보다
3
나무로 된 제단(祭壇)은 사라지고 없었지만
높지 않은 천장과 벽을 지나 기억字 다락방에 들어갔다
먼지 깔린 마루 위, '다락방의 미친 여자'가 눈꺼풀 깜빡인다
습기 묻어 닳은 웃음 나무 계단을 미친 듯 닦고 있다
안타깝게도 그곳에는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는 없었다
4
하루 종일 굶었다
마티니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소리에 은그릇 반짝거림이 딸꾹질 한다
이슬 맺힌 잎사귀 후려치는 듯, 벽난로의 기둥이 꽃화분 훔쳐보고 있다
5
미친 여자의 하이힐처럼 똑딱대는 子正무렵
오늘은 '도둑맞은 시간에 걸어오는 연인에 대해 이야기 해 볼까 합니다
연인을 능욕한 천박한 권태는 그녀의 머리카락 끝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손도 닿기 전에 시들기 시작하는 마른 허브잎
그날은 불안을 잠식하는 비를 맞고 집으로 돌아 왔다
의심은 달착지근한 냄새로 붙어 있었다
6
詩를 생각하다 그만,
생선 눈알처럼 벌겋게 달구어진 子音들, 꼭꼭 밀어 넣어 반죽한다
슬픔 뚝뚝 떠내어 ‘대리만족’ 이라는 수제비를 굽는다
기호를 품지 않은 낱말 대리만족을 모른다
세상의 조롱거리 내 몫이 아니지
7
물안개 추파(秋波)처럼 미끄러지다 까무러치는 호수 주변을 손잡고 뛰었다
파르테논 신전 앞에서, “그대에게 사랑을” 고백하겠다던 맹세는 황사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갑자기 입술의 냄새는 서걱거리는 먼지처럼 까칠해졌다
사나흘 내린 비 끝에 다시 아르정탱에 갔습니다
본능의 능숙함이 당신의 입술을 더듬거렸습니다. 당신의 입술은 나의 미각만을 기억할 뿐
두 시 방향으로 기운 햇살의 온화함이 묻어 있어요
8
주인장
오늘은 Leonard Cohen의 Famous Blue Raincoat를 들을 수 있겠소
내 인생이 파편으로 취급당하고 싶지 않아서 그렇지요
약하게 슬어지는 音調, 불구가 된 기억에는 없다
건너 편 테이블의 핑크재킷과 홍차 사이에는
말해야 하는 것이 있음에도 말할 수 없는 어색함 감돌았다
다만 성스런 스푼이 빛바랜 비단옷 차림으로 춤추고 있다
9
그날은
교리의 꽃봉오리에 충실한 교회 사람들
마음씨 좋지만 우둔한 젊은 청춘들 빈틈없이 가득 차 있었다
매끈하게 빠진 조약돌 하나 주머니에 넣고 땀이 나도록 문질러도
손이 헤지 않을 그런 신부와 결혼식이 있을 예정입니다
각별한 의식(儀式)
주인장이 누구에게나 봄소식 하나 던져 준 날이다
10
오늘은
여자들 불편하게 하는 소박한 음악 연주회가 있어요
콘트라베이스를 든 남자의 팔뚝이 검게 그을다만 남성성을 과시하고 있어요
첼로의 숨결소리, 매일 밤 떠오르는 해가 되었다
그렇다고 카스트라토를 죽이지는 마세요
수족관의 주홍빛 물고기들
살아, 살아 외침을 거듭하고 있다
함께 살고 싶어 안달하는 소년 소녀를 위로하는
무조건적인 달, 높이 떠올라
호수는 물안개의 소름으로 노닥거리고 있었다
(손끝 적셔주는 빗방울 떨어져 분열증 낚아챌 때, 정신과적 치료가 필요해요)
11
한 사람이 두 사람을 기다린다
서로 같은 나라 말을 쓰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한 사람은 표준말에 서투르고, 다른 한 사람은 사투리에 서투르다
그런데 표준말을 잘하고 또한 사투리도 잘하는 사람이 죽는다
무슨 뜻, 어떤 의도였는지 아무도 모른다
관객들은 짐작만 할 뿐
12
남자 둘 여자 하나
쭈그린 술친구들입니다
한 사람의 맹세가 나뭇가지 위 잔설(殘雪)에 반짝이고 있어요
술 그리고 여름날의 여자만 저울질하겠다 말했지요
맥주의 쓴맛을 혀 위에 굴리며 곁눈짓으로 농담을 엿들었다
혼자 잠드는 침대처럼 사는 게 아쉽다고 느껴질 때면
Bevinda의 “다시 스무살이 된다면”이 떠올랐어요
13
'장미빛 인생'을 닮지 않은
장미 입술에 입맞춤 한다고 장미가 웃겠어요
오히려 우리가 울었지요
그대 떠났을 때 나는 온통 그림자로 드리워질 거예요건너 보이는 트라이엄프 아파트의 커튼 찢겨져 방향 없이 나부낀다
不在의 냄새, 비온 후의 버섯이 되었다
14
서리 내리는 차가운 11월
골목길 빠져나오는데
검은 상복 벗어던지지 못한 숙녀의 얼굴 빤히 쳐다보는 여름날의 구름은 못내 불편하다
잘못 보낸 시간의 보복을 염려하고 있는가
구름의 맥박은 거의 고동치지 않았다
15
밤이면 내 꿈을 흔들어 놓던 그대는
홀린 듯 둥글게 닫힌 가방을 열고 몰래 감추어둔 햇빛을 쏟아 부었다
- 숨쉬기 운동에는 적당한 햇빛이 필요해
16
큐피드의 화살을 맞고서,
미처 빠져 나오지 못한 경절형 심장이
베네딕트 여자 봉쇄 수도원 55m 종루에 사로잡혀 길게 하품하더니
졸음을 재촉하고 있다
다트의 화살은 한 방울의 피도 남기지 않고 쏟아내는구나
17
빵 굽는 냄새 속,
기억은 회초리 맞은 情에 사로잡혀
한낮의 깊은 그림자 소진해 버렸다
걸어 두어 목이 잘린 꿈 외투 걸치듯 입고 나왔다
* 대구 수성구 파동 664번지에 있는 카페
- < 무등일보 >
( - 당선작은 우선 시적 길이부터가 근년의 경향에서 조금 예외이다 싶게 장시적 모습을 띠고 하나의 이야기를 담아낸 작품이다....... 그리고 당선작이 지닌 장시가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지만 여기에는 갖가지 시적 여러 요건이나 장치들이 담겨 있어서 그야말로 시에 대한 총체적 기상도를 읽어낼 수 있다. 이같은 길이를 파탄 없이 끌고 가는 시인의 저력이 돋보였고 후일의 야심 또한 읽을 수 있었다. 적어도 손끝에 달린 몇 개의 감각과 재주로 세상에 덤비는 얄팍함도 덜어낼 수 있었다. - 김종 )
- 찾아보니 ‘아르정탱’은 프랑스에 있는 베네딕트 봉쇄수녀원의 이름이라는군요. 왜 하필 카페에 그런 이름을 붙인 걸까요. 모르는 어휘는 우선 확인하고 넘어가야겠지요. 일단 시가 너무 길군요. 시 한 편으로 자신의 밑천을 다 보여주고 싶은 걸까요. 하지만(평자는 시에 대한 총채적인 기상도를 읽어낼 수 있다고 하지만), 그 밑천이라는 것이 용도불명의 상품을 잔뜩 진열해 놓은 가게 같다는 느낌이네요. 야심찬 패기라기보다 치기에 가깝다는 것이 솔직한 소감입니다.
- 그러고 보니 세 편의 시를 모두 부정적인 시각으로만 본 것 같네요. 쟁쟁한 심사위원들이 골라 뽑은 당선 시들인데, 아마도 무식의 소치겠지요. 하지만 읽히는 대로 읽는 것이 독자의 능력의 한계이자 권리인데 누가 시비할 일은 아니지요. 끝.
(시울문학 부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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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카페 시울문학의 부운 선생님께서 시를 공부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2009년도 신춘문예를 대상으로, 작품에 정해진 분류는 없지만 공부하기 쉽도록 도움을 주고자하는 마음에서 분류를 하여 올려주신 자료입니다. 회원들이 정독을 바라는 마음에서 일 것입니다.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펌)